민족사랑

한국인·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 故 이학래 동진회장 2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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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인·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 故 이학래 동진회장 2주기를 맞아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학래 어르신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고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아들로 태어난 잘못으로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사셨습니다. 이승을 떠나시는 순간까지 슬픔과 분노 속에 그 억울함을 어찌 감당하셨습니까. 저는 어르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 남기신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을 차마 읽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화가나고 속상한 마음이 숨통을 조여와 지금까지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르신을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12월입니다. 저는 1989년부터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일본을 오가며 일본한테 빼앗긴 아버지의 작은 흔적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힘쓰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 국회의원회관 도로변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진행하는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이 열리고 있었는데, 유족 대표로 제14회 증인심문을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간 변광수 씨가 이학래 어르신을 모시고 농성장소에 왔습니다. 우리를 응원을 하러 오신 것이죠. 대단히 반가웠지만 인사만 했을 뿐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후 이학래 어르신이 한국에 오셔도 바쁜일정에 따라 움직이시니까 별도로 만나서 따뜻한 식사 한 번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잠깐 잠깐 만난 것뿐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습니다. 언어의 장벽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쉬움이 뒤따르지만 서글픈 마음을 속으로 삼킬 뿐입니다. 이학래 어르신께도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여쭤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국에도 더 이상 못 오실 정도로 쇠약해지셔서 2019년 여름 병문안을 가려고 했지만 뵙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네요. 코로나 19 전염병으로 일본에 갈 수도 없는 이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너무 슬펐습니다. 저는 강제동원 피해자였던 분들을 만나면 얼굴도 모르는 제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렇게 함께 활동하시던 어르신들이 떠나고 나면 그 빈자리가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 남습니다. 역사의 생생한 증인이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은 일본 때문에 또 한 분의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것 같이 애통한 마음입니다.
제가 이학래 어르신을 생각하면 꼭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던 분이 연상됩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두 분의 만남을 성사시키지 못한 일이 아직도 아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오행석 어르신이었습니다. 오행석 어르신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추모사에서나마 두 분을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오행석 어르신은 이학래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되어 전범으로 처벌받을 위기를 겪은 피해자셨습니다. 오행석 어르신이 제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신 것은 2001년 2월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단체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한군인·군속재판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원고로 참여하고자 피해자 분들이 사무실에 오시면 상담을 하게 되는데, 그때는 사무국장 김은식과 저 둘만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적으로 바쁜 김은식 국장이 외부에 나가는 일이 많아 제가 주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상담이 끝나면 사무국장이 소송과 관계되는서류와 진술서를 받았습니다. 오행석 어르신과의 상담은 두 시간 정도 이어졌지만 이야기가 끝날 줄 몰랐습니다. 너무 기억이 생생한데다 평생 가슴 속에 갖고 있던 분노와 슬픔, 회한이 가득 담겨서 어르신의 말씀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제 손을 꼭 잡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편으로 2001년 6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제기하여 오행석 어르신등 BC급 전범 문제를 포함한 강제동원 미청산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투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와 입법부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나갔습니다. 그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수차례의 공청회, 학술토론회를 열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매일 국회를 출근하다시피 해서 입법 청원 운동을 벌였습니다. 몇개월 간의 힘든 과정을 거쳐 2001년 10월 21일 김원웅 의원 외 국회의원 68인의 서명을 받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습니다. 우리는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신구세대를 넘어 이 법안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감안하여 하루 빨
리 심의, 의결되어 역사의 진실이 규명되고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길 바란다”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는 수없이 반복되었고, 의원들의 동의 서명을 받기 위해 피해자들은 조를 짜서 매일 국회의원실을 방문했으며, 길거리에서 특별법 촉구 1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오로지 특별법 제정에 목숨을 건 심정으로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시위 현장에 직접 나오신 오행석 어르신은 그때마다 포로수용소 체험 그림을 들고 오셔서 조선 청년들이 일본 때문에 받은 고통과 수모에 대해 웅변하듯 말씀하셨습니다. “꼭 기억해 달라, 잊지 말아 달라, 우리후손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시면서 “특별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살아있을 때 우리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어르신의
그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오행석 어르신의 경험을 더 깊이 이해하게된 것은 우쓰미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우쓰미 선생님의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펴내신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 되지 못한 영혼>(이호경 번역, 한국어판, 2007)을 읽으면서 오행석 어르신의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이학래 어르신과 같은 BC급 전범의 문제를 이렇게 깊이 연구하시고 함께 연대운동을 펼치신 우쓰미 선생님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오행석 할아버지의 포로수용소 체험 그림. 현재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일월드컵으로 한껏 분위기가 들떠 있던 2002년 6월 21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한일협정 문서공개 촉구를 위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100인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정보공개법과 외교문서보존 및 공개에 관한 규칙이 정하고 있는 시한인 30년이 지났음에도 한일협정외교문서가 공개되지 않고 있음을 규탄하고,한국정부가 문서공개를 계속 회피할 경우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군인군속재판에서 일본 정부가 과거와 달리 ‘한일협정으로 해결 완료되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한일회담에서 과연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이자 절박한 호소
였습니다.
보추협에서 피해자 분들의 자료조사와 일본기업 재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군인군속재판, 특별법 추진, 한일협정문서공개 등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실현시켜야 할 일들은 산더미 같았지만, 도와줄 사무국 일꾼도 없고, 사무실 임대료도 충당하기 어려운 재정난도 겹쳤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이 없어 ‘여기서 포기할 것인가, 끌고 갈것인가’ 절망적인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한이 담긴 서류들을 들여다보며 궁리를 거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독립운동 하신 분들을 떠올리며 정신 차리고 기운 내자고 다짐하던 차에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씨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사무국장도 없는 사무실에서 뭐하고 계세요?” 그 전화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 가려고 짐 싸고 있습니다.”라고 얼른 말해버렸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며칠 후 연구소로 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연구소도 어려운 때여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2003년 2월, 피해자들의 한 맺힌 숙제 보따리를 싸들고 민족문제연구소 한켠에 보추협이 자리를 잡고 피해자분들과 계속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싸들고 온 보따리 속 일들을 풀어내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제일 먼저 특별법 본회 통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피해자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결의로 강제동원특별법을 이끌어내게 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온 지 1년 만의 쾌거였습니다. 드디어 광화문 세안빌딩에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업무가 시작되고 2005년 2월 1일부터 피해자 신고를 받았습니다.

한국인BC급전범자,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2005.11.9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앞). 왼쪽 앞줄 이희자, 이학래, 이병주(둘째 줄), 이재섭

 

피해자 신고가 시작되면서 김은식 사무국장은 강도원 BC급 유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도원 씨는 우리 사무실을 자주 오셔서 의논했고, 다른 유족 분들과 만나며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도 함께 참석하는 등 활동을 넓혀갔습니다.
한국에서 BC급 전범 피해 유족단체인 ‘한국 동진회’를 결성하기까지 김은식 사무국장이 성심껏 도움을 드렸습니다. 한국 동진회 연락처와 주소를 우리 단체 것으로 리플릿에 소개할 만큼 단체 결성에 도움을 드렸고, 이후에도 국회 청원이나 헌법소원 청구 등을 함께 진행했지만 점차 교류가 소원해졌는데, 알고 보니 지난 2019년 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유족들은 어떤 피해자의 유족인지 묻지도 않고, 단지 일본 때문에 아버지를 빼앗긴다 같은 피해자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BC급 유족들은 사회의 시선이나 여러 사정 때문에 공개된 자리에 잘 나서지 않으려고 했던 점도 이해합니다. 진상규명 특별법 활동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보추협에서 일본정부 상대로 한 소송의 원고로 참여하신 오행석 어르신은 당당히 참여하여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일본에서 외롭게 싸워 오셨던 이학래 어르신과 만나게 해드렸으면 서로 큰 위로와 힘이 되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많은 일들을 떠올립니다. 그 중 제일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 되어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오신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더 많이 듣지 못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지금 그나마 200시간 정도의 영상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살아 있는 역사를 잃은 것 같아 몹시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증언하시면서 현장에서 겪은 일들을 한 마디라도 더 남겨 놓으려 애쓰셨던 피해자 어르신들에게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상규명 특별법은 성사시켰지만 특별법을 토대로 더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우리들에게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풀고 갈 숙제가 너무너무 많이 남아있지만 가장 큰 일은 일본정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이겠지요.
이 모든 숙제를 우리들에게 남겨놓으시고 한 맺힌 슬픔과 고통을 안고 눈을 감으셨을 모든 피해자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근심 걱정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면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후배들을 응원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학래 어르신의 명복을 마음속 깊이 자식과 같은 마음으로 빕니다.
2021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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