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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책과 삶]어찌할까?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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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문학동네 | 284쪽 | 1만4500원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 옥인동에는 한때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서양식 대저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제는 기둥만 남은 이 호화 별장은 악명 높은 친일파이자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윤덕영이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지은 것이다. 매국으로 번 돈으로 옥인동 일대 땅을 절반 가까이 사들인 그는 자신의 아호를 따 이 건물을 ‘벽수산장’이라 이름 붙였고, 인왕산 중턱에서 경성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우뚝 솟은 이 프랑스식 건축물은 그 호화로움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1966년 4월5일 벽수산장(당시 언커크 건물) 화재 당시 진압 모습. 국가기록원

친일파 윤덕영이 남긴 ‘아방궁’
거기 빌붙어 부를 누리려는 후손과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하면서도
선택 고민하는 독립운동가 후예

심윤경의 장편소설 <영원한 유산>은 해방 이후 20여년이 흐른 1966년, 당시 ‘언커크 건물’이라 불린 벽수산장을 배경으로 한다. 해방 후 국유화된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미군 장교 숙소로 사용되다 전쟁이 끝난 뒤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본부가 됐다. 재건과 통일, 민주정부 수립 등을 목적으로 7개국 대표단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영문 약칭인 ‘언커크’란 이름으로 불렸다.

주인공 이해동은 언커크에서 호주 대표의 통역 비서로 일하는 27세 청년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미국인 선교사 손에 자라며 영어를 익힌 그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꽤 괜찮은 일자리’인 언커크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부모 세대의 비극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 괜찮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해온 그의 앞에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나타나며 안정적이었던 삶도 뒤흔들린다.

해방 후 가세가 기울고 사기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출소한 윤원섭은 언커크에 나타나 벽수산장의 옛 주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가문의 부끄러운 역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이 건물이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에 남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는 그를 보며 이해동은 속이 뒤틀리지만, 언커크의 외교관들은 그의 현란한 말에 점차 빠져든다. 두 개의 열쇠로 이 건물의 비밀 통로를 찾아낸 윤원섭은 급기야 ‘문화복원 디렉터’로 언커크에 합류해 예산까지 주무르게 된다.

이해동은 상사의 지시로 본연의 통역 업무가 아닌 윤원섭을 보좌하는 일을 맡게 된다. 윤덕영 가문의 친일 행적을 언급하며 윤원섭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그에게 상사인 호주 대표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답한다. 국제사회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한 그 외국인의 말처럼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해동은 대단한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온 아버지의 독립운동, 그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죽음을 떠올리지만 “혼란스러움에 대처할 때 힘없는 자들이 하는 방식대로” 침묵한 채 윤원섭을 돕는 일을 시작한다. “더럽혀진 것. 모욕받은 것. 그렇게 쉽게 조롱받는 것.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이 겨우 그렇게 미약한 것. 그런 것들이 해동의 푸른 새벽에 끝도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 한 평범한 사람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이었음을

심윤경 작가. 문학동네 제공

소설은 친일파가 남긴 대저택과 그것에 빌붙어 다시 영광을 누리려는 후손, 그 뻔뻔함에 분노하면서도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청년을 통해 삶의 여러 국면 속 개인의 쉽지 않은 선택 순간을 그린다. 천애 고아였던 해동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했던 모든 노력과 그 결과물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온통 미미한 것들”과 달리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 것들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면서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듯이. “저택은 그의 눈앞에 확실히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인쇄기처럼,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저택은 1966년 화재로 일부가 전소돼 방치되다, 다시 수년이 흐른 1973년 철거돼 빠른 속도로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다. 작가는 언커크와 벽수산장 화재까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윤원섭과 이해동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영원한 유산’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윤원섭에게 유산인 벽수산장이 전혀 다른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해동에겐 적이 남긴 유산, ‘적산’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찍힌 사진 속 벽수산장이 이 소설의 출발이 됐다는 심윤경은 ‘작가의 말’에서 “물질로도 정신으로도 박멸된 벽수산장의 예를 통해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자 했다”고 썼다.

작가는 “이 소설에는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해동의 선택이 그러했듯, 쉽게 희미해질 “온통 미미한 것”이라도 누군가에겐 전부를 걸어 지켜야 했을 어떤 유산이 세상에 남았을 테니 말이다.

<2020-12-30> 경향신문 

☞기사원문: [책과 삶]어찌할까?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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