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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친일’ 안익태 국립묘지 안장된 날, 눈에 띈 박정희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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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77년 7월 8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안익태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이 있다. 재벌들이 숱한 폐해를 끼치고도 재벌개혁을 번번이 비껴가며 불사의 신화를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덩치가 이미 대마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친일의 죄악이 지대한데도, 예술계에서 이미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고도의 영예를 누리는 인물이 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1906~1965년)가 대표적이다.

그가 일생의 역작으로 자부했던 작품이 있다.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가 그것이다. <환상곡 에텐라쿠>로 약칭되는 이 노래는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노래였다.

<친일인명사전>은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 작품으로 연주된 것”이라면서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에텐라쿠>는 1938년에 발표된 이후 로마방송 오케스트라 연주회(1939.4.30.),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1940.10.19.), 독·일협회 빈 지부 주최의 빈 심포니 연주회(1942.3.12.), 함부르크 연주회(1943.4.22.) 등에서 자신의 지휘로 계속 연주되었다”고 설명한다.

일왕을 찬미하는 노래였으므로 해방 뒤에는 이 작품을 멀리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뒤에 그는 이 작품을 살리고자 이른바 ‘작품 세탁’을 감행했다. 1959년에 <강천성악>이란 이름으로 개작해서 다시 내놓은 것이다. 그가 일왕 찬양가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지은 노래가 <애국가>이니, 이 노래가 정말로 한국의 <애국가>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안익태의 친일행적은 <환상곡 에텐라쿠> 작곡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왕과 사쿠라와 후지산, 사무라이와 ‘일본해’를 찬미하는 <대관현악을 위한 일본 황기 2600년에 붙인 축전곡>의 연주를 1942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휘했다. 또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고자 <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만주국 건국 10주년인 1942년에 작곡했다. 이 노래는 <만주국 경축 음악> 혹은 <만주 환상곡>으로도 불린다.

안익태 향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안익태. 1977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 동아일보

이랬던 그가 사후 12년 뒤인 1977년 7월, 한국 언론으로부터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가 그해 7월 6일 귀환하고 이틀 뒤인 7월 8일 국립묘지에 묻혔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안장식에 관해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리던 모국 품에 포근히’는 이렇게 보도했다.

“고 안익태 선생 유해 안장식이 8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소에서 미망인 로리타 여사와 안나 세시리아, 레오노루 등 두 딸과 심흥선 총무처장관, 아구아도 스페인 대사와 음악계 인사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박 대통령과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등 각계에서 보낸 조화 속에, 현충사에서 가진 영결식에 이어 시작된 안장식은 비까지 내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묻히는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날 안장식 때 조화만 보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열흘 뒤인 18일, 그는 안익태 유족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가 안익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 안익태 유족들을 접견하는 박정희. 1977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다. ⓒ 경향신문

박정희가 안익태에게 마음을 베푼 이유가 있다. 1961년 5·16 쿠데타 뒤에 안익태가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앞세워 박정희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1962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세 번째 찾아온 조국, 세계적 명지휘자 안익태 씨’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세 번째로 고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심포니 지휘자이며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씨는 13일 하오 반도호텔 816호실에서 기자와 만나 ‘세계 각국은 지금 우리나라를 주시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두 번째로 고국에 돌아온 것은 3·15 선거 당시였는데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꽉 차 있어 보인다’고 혁명 조국에 머무는 동안의 감상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승만 정권 때 벌어진 3·15 부정선거는 1960년 일이다. 안익태의 세 번째 귀국으로부터 조금 전의 일이었다. 두 시기의 간격이 길지 않을 뿐 아니라 두 시기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안익태는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차 있다’며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다.

이뿐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로 치켜세웠다. 박정희를 ‘교향악단의 위대한 지휘자’인 듯이 묘사했다.

“안씨는 국내의 음악단체 등이 통합되고 국내 질서가 호전되어 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한 나라는 마치 한 교향악단과 같은 것으로 지휘자 여하에 달렸는데,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장군 밑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 부서를 잘 지켜나가면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열을 띠고 말했다.”

안익태를 인터뷰한 기자는 그가 박정희를 칭송할 때 ‘열을 띠고 말했다’고 묘사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은 4개월 뒤의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때도 이어졌다.

1962년 5월 16일 전국 각지에서는 이른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서울에서는 3만여 명이 서울운동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다. 이 행사에도 안익태는 열정을 다해 ‘혁명 1주년’을 찬미했다.

안익태는 이날 오전과 오후 행사에서 마치 주인공처럼 활약했다. 5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5월 만세’는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막을 연 이날 식전은 먼저 안익태씨가 지휘하는 각군 군악대의 우렁찬 주악(국기에 대한 경례 및 애국가)에 이어 박 의장을 비롯한 각계 요인의 축사가 진행”됐다고 오전 풍경을 묘사한다.

▲ 1962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 동아일보

같은 신문의 5월 18일자 기사 ‘선율에 매혹’은 “2백 5십여 명의 시향·KBS교향악단·3군 및 해병 군악대와 5백여 명의 연합합창단이 본부 스탠드에 자리 잡은 가운데, 안익태씨 지휘로 먼저 베토벤 작곡 교향곡 9번 제4악장이 연주되고 이어 지휘자 안씨 작곡인 <코리아 환상곡>이 연주되어 웅장한 코러스가 5월의 밤하늘에 울려 퍼져 3만여 명의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 속에 9시 반 음악의 향연은 그 막을 내렸다”며 오후 풍경을 묘사했다.

이처럼 안익태는 음악적 명성과 재능을 활용해 일본제국주의뿐 아니라 박정희 쿠데타까지 미화했다. 1977년 7월에 박정희가 안익태 유족들에게 보여준 호의는 1962년 일에 대한 답례의 성격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일파 안익태의 안장 실태. ⓒ 국립서울현충원.

‘친일’이 자발적었음 짐작케 하는 노래

안익태는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음악인이 아니다. 그가 친일에 상당히 자발적이었다는 점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주요 부분이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한국을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와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의 주요 부분이 똑같았던 것이다.

음악학자 송병욱은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기고한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조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안익태가 일본의 강압 때문에 억지로 친일을 했다면, <코리아 환상곡>에 쓰는 선율과 <만주 환상곡>에 쓰는 선율을 어떻게든 구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의식 속에서 한국과 일본제국주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친일이 상당부분은 자율적이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안익태의 유해를 박정희 정권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77년에 박 정권이 만들어놓은 이 부조리함은 2020년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던 음악인이 국립서울현충원 내에서 ‘불사’의 존재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든 노래가 <애국가>로 울려퍼지고,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울 올림픽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아직 친일파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울시 송파구의 올림픽공원에 있는 안익태 동상. ⓒ 김종성

<2020-07-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 안익태 국립묘지 안장된 날, 눈에 띈 박정희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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