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지부활동

[노컷뉴스] 김해에 잔존 친일파 모윤숙·박시춘 작품비 18년만 철거 결정

2021년 7월 18일 89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 해당 작품 친일파라 부적절 판단 빠르면 이달 중 철거 작업 예정 경남 김해시에서 잇따라 발견된 친일파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의 작품 비석이 모두 철거된다. 김해시는 관리주체인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가 해당 비석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시는 현충시설에 친일파 작품이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전달,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는 이를 수용하고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김해시지회는 해당 비석이 현충시설에 있는 만큼 국가보훈처 경남동부보훈지청의 예산 지원을 받아 빠르면 이달 중으로 철거·교체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대로 철거되면 18년 만에 친일 잔재가 이곳에서 사라지게 된다. 김해시민체육공원에는 모윤숙 시인의 시비와 박시춘 작곡가의 노래비가 서 있다. 이들 작품 비석은 지난 2003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에서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를 해당 공원에 건립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는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낸 4천여 명의 친일파가 담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있다. 경남 밀양 출신 박시춘 노래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가 새겨져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시춘 작곡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군국가요를 13곡 정도 작곡한 것으로 확인된 명실상부한 친일파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 모윤석 시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쓴 것으로 알려진 반공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그녀는 1940년대 일제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 ‘지원병에게’,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항공병에게’ 등의 여러 작품을 써낸 친일파다. 김해시 관계자는

[부천타임즈] 부천민족문제연구소, 친일반민족 행위자 박제봉 단죄비 세워야

2021년 7월 13일 147

[부천타임즈:양주승 대표기자]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시는 시민들과 함께 친일파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울 것을 제안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13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이 살았던 역곡동 고택은 작년 11월 경기도지정문화재 지정 신청 예비심의에서 변형으로 문화재 가치가 미흡하다는 결과를 받고 부결되었으며, 올해 6월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의에서도 부결되었다. 경기도 뿐만아니라 부천시의 심사에서 탈락되어 문화재의 가치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상황을 맞이하였다”고 말했다. 이어 민문연부천지부는 ” 경기도와 부천시의 문화재 심사 결과에 관계없이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음으로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부천시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일제 잔재 청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세우라고 주장하며 시청 입구와 부천시청역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5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총 33회의 집회시위를 진행하였다”고 밝혔다.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집회시위를 오랫동안 진행한 이유에 대해 첫 번째, 문화재 심사와 별개로 역곡동 고택은 일제 잔재이며,두 번째, 어둡고 잊고 싶은 치욕의 역사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리고 시민들이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문연은 “우리 부천시는 여러 방법을 통해 부천의 인물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면서 ” 부천시청 1층 로비에는 부천을 빛낸 여섯 분들의 사진과 더불어 아름다운 업적을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앙공원에는 독립운동가 한항길 지사와 유일한 박사의 동상이 있으며, 변영로 선생의 논개 시비도 있다. 중동 안중근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유묵이 있어

[인천일보]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 진행

2021년 7월 4일 101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3일 죽산 조봉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강화군을 찾아 죽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를 개최했다.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21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2차 행사’로 마련된 이 날 답사는 조봉암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해설과 안내로 진행됐다. 답사단은 강화뉴스 회의실에 모여 이 작가로부터 죽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와 근무지였던 강화읍사무소, 젊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화 중앙교회, 죽산 추모비가 서 있는 갑곶돈대, 선원면 생가터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죽산은 1899년 강화도 선원면 금월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장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선원사지 정면의 금월리 대문촌 오른편 작은 촌락인 ‘가지마을’이 가장 유력하게 꼽힌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가문 족보인 ‘창녕조씨 찬성공파보’가 직계 조상들의 묘소 대부분을 금월리로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금월리 대문촌과 가지마을 주변이 확실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6월 죽산 추모사업회가 강화읍사무소 앞을 생가터로 오인하고 건립한 ‘생가터 기념비’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잘못된 위치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1911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뒤 1913년 생계를 위해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대열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그해 9월 말까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출옥 이후 다음 해인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연합뉴스] 하루 아침에 사라진 김해강 ‘친일 단죄비’…’누가 이런 짓을?’

2021년 7월 1일 95

전주시 문인협회가 단죄비 사유지로 이전…민족문제연구소 반발 “돌려주지 않으면 더 크게 세울 것” vs “시비와 함께 철거한 것”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광복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시인 김해강의 ‘단죄비’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1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단죄비가 어딘가로 옮겨졌다. 단죄비가 있던 자리에는 비석 대신 무언가로 파헤친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죄비는 김해강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알리기 위해 지난해 8월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 바로 옆에 세워졌다. 건립 비용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비에 전주시 지원을 보태 충당했다. 김해강은 ‘전북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오랫동안 지역에서 존경받는 문인으로 평가돼 왔으나, 일본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등의 시를 비롯한 친일 작품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단죄비에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던 김해강이여!’, ‘그대의 글은 생명의 외경(畏敬)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죽음을 부추긴 사악한 선동문이었다!’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자체 조사 결과, 단죄비를 옮긴 이는 전주시 문인협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 문인협회는 덕진공원에서 김해강의 시비를 철거하면서 옆에 있던 단죄비까지 도내 한 사유지로 이전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전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단죄비를 세운 것은 우리인데, 문인협회에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비석을 가져갔다”면서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문인협회에

[부천타임즈] 부천시민연대, 서울중앙지법 김양호 판사 규탄 성명

2021년 6월 17일 83

[성명서][다운로드] 부천시민단체 연대  < 성 명 서 > 제목 : 국회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판결을 한 김양호 판사를 탄핵하라! 지난 6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이번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역사적 사실과 헌법을 무시한 판결이기에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회가 김양호 판사를 탄핵할 것을 촉구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시키고 35년간 우리 강산과 민족을 억압·수탈·살상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부족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발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강제동원에 의해 우리의 수많은 국민들은 목숨을 잃거나 다쳤으며, 생존자들은 급여와 식사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반인권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제동원피해자분들의 이러한 참혹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1965년 한국과 일본이 맺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묻히게 되었다.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과 채무관계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관여한 강제동원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받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왔고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김양호재판부는 일제침략과 점령은 정당했다는 일본의 극우세력의 논리를 바탕으로 오랜

[부천일보] 역곡고택 ‘단죄비’ 1인시위 대기록

2021년 6월 17일 104

시청 앞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연일 경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가 펼치고 있는 ‘역곡 고택 단죄비’ 1인 릴레이 시위가 지난달 18일부터 오늘(17일 사진)까지 무려 22차례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1인 시위는 휴일을 제외했지만 단일사안에 대한 평화시위로, 무려 1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역 내 1인 시위를 펼친 최장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릴레이 1인 시위 첫 주자인 박 지부장은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가 살았던 집으로 일제잔재다”며 “부천시는 단죄비를 세우고 일제잔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앞서 부천지부는 역곡고택에 대한 향토문화재 지정여부가 경기도 내 친일역사 청산작업에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2차례나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1인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박 지부장을 포함해 이동호 부지부장, 김병구(15회차), 박창길(13회차), 정한교(8회차 등), 최재숙(5회차)씨 등이다. 회차 별로 부천시 역사 기록 현장을 살펴본다. <사진은 박종선 지부장 제공> 이하영 기자 serber11@hanmail.net <2021-06-17> 부천일보 ☞기사원문: 역곡고택 ‘단죄비’ 1인시위 대기록 ※관련기사  ☞ 부천일보: 역곡 고택, 친일청산 릴레이 1인 시위로 비화 ☞ 부천일보: 역곡 고택 관련 ‘왜곡 보도’ 규탄

[뉴스파고] 민족문제연구소 천안, ‘친일청산 역사문화 탐방’ 진행

2021년 6월 14일 104

[뉴스파고=한광수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지회장 최기섭)는 5월 22일, 6월 26일, 9월 25일 3회에 걸쳐 임종국 선생 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한 ‘친일청산 역사문화 탐방’을 진행한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청산의 선구자로 평생을 헌신하시고 친일 인명사전의 토대를 만드신 분으로, 천안에서 임종하셨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에서는 임종국 선생 기념사업회와 함께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탐방행사는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해방후 왜곡된 근현대사를 바로잡아 후대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는 것과 함께, 입장 양대리 만세운동 등 관심도가 미약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새롭게 발굴하고, 목천 동학군 전투현장 등 새로운 문화유적을 홍보하여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체험행사다. 시민과 학생 2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탐방은, 천안삼거리공원 앞에 집결, 친일문제연구에 매진하던 임종국 선생의 거서재인 요산재, 목천 세성산 동학 전적지, 구민산 기념탑, 아우내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입장 기미독립운동기념공원, 망향의동산, 신부동 천안평화공원을 거쳐 천안삼거리공원 앞에서 해산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답사 중 유적지 주변 미화작업에 참가할 경우에는 자원봉사활동 확인서 발급이 가능하다. <2021-06-13> 뉴스파고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 ‘친일청산 역사문화 탐방’ 진행

[인천일보]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인천지역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 개최

2021년 6월 14일 93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12일 인천 부평역 일원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인천지역 6월 항쟁의 현장을 돌아보는 ‘87년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를 개최했다.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첫 번째 순서로 전행된 이날 행사는 안재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가 해설을 맡았다. 답사단은 오전 10시 부평역을 출발해 백마장 입구-세림병원-부평경찰서-현 산곡역 앞을 거쳐 영아다방 앞까지 3시간 가까이 탐방을 이어갔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87년 1월 14일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 열사의 사망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천의 6월 항쟁은 한 해 전인 1986년 인천 전역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5.3 항쟁 때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1년 뒤인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개최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와 때를 맞춰 부평역을 중심으로 대학과, 성당, 교회, 동인천역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이날 오후 6시 부평역 광장에서 개최한 궐기대회는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플랜카드를 앞세운 수천 명의 시위대가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의 시민들을 박수를 보냈다. 상점 주인들은 빵과 음료수, 휴지를 건네며 너나없이 경찰에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줬다. 경찰은 이날 집회를 빌미로 집회를 준비한 공동대책위 7명을 수배해 그중 안영근(전 국회의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등 12명을 구속했다. 인천 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6월 18일 부평구청 앞에서 열린

[중부매일] 임종국 선생 기념관 건립 본격 추진

2021년 6월 8일 127

생가에 도서관 설립, 친일 청산 뜻 받듣다 [중부매일 유창림 기자]친일 청산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임종국 선생(1929년 10월 26일~1989년 11월 12일) 기념관 건립 추진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는 4천389명의 친일 행각을 파헤치고, 친일 인명사전의 토대를 마련한 임종국 선생의 뜻을 받들고 있다. 연구소는 후대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임종국 선생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공감대 형성을 위해 공청회 및 친일청산 역사문화 탐방을 추진 중이다. 중부매일은 임종국 선생의 발자취와 그의 뜻을 담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의 활동 상황을 들여다봤다. 임종국 선생과 천안 임종국 선생은 1929년 10월 26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천도교 지도자를 역임한 아버지 임문호와 어머니 김태강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성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광복을 맞았으며 1952년에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2년 후 중퇴했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문학평론 자료수집 과정에서 유명 작가들의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행적들을 발견하고, 이에 분노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를 시작해 ‘친일문학론’을 저술했다. 특히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던 중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발견하고 무척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국 선생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친일문학론에 올렸다. 친일문학론을 펴낸 임종국 선생은 만년(晩年)에 천안시 삼룡동과 구성동에 은거하면서 필생의 과업인 ‘친일파총서’ 편찬에 몰두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89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임종국 선생이 천안을 찾은 건 1980년으로 알려졌다. 당시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YTN] 독립운동가 초산 김상윤 의사 묘역 찾는 동포들의 여정

2021년 6월 6일 400

위성 지도로 푸젠성 천주의 설봉사 일대를 샅샅이 살피며 지형을 분석합니다. 독립운동가 김상윤 의사의 묘역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박호균 /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성 지부 단원 : 우리 김상윤 선생님 고향이 경상남도 밀양이고 돌아가신 곳이 중국 푸젠성 천주시입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설봉사 자락을 확대하면서 이 넓은 땅의 어디에 산소를 지었을까.] 의열단 창립 단원으로 의열단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5인 참모부의 일원으로 활동한 초산 김상윤 의사. 지난 1920년대 수차례에 걸친 의열 투쟁에서 의열단 집단지도체제를 이끌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역만리 푸젠성 천주에서 의열단 재건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31세의 나이로 외로이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기록이 남아있는 설봉사가 유일한 단서.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성 지부 단원들은 김상윤 의사의 묘역을 찾기 위해 선전에서 800km 떨어진 먼 길을 달려 푸젠성 천주의 설봉사를 찾았습니다. [신광용 /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성 지부 단원 : (후손으로서 독립운동가분들에게) 빚을 많이 졌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돌아가셨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일단 여기에 있는 사람으로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찾아 뵈어야 한다고 해서 찾는데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이들이 설봉사를 찾은 것은 지난 2월에 이어 벌써 두 번째. 당시 김상윤 의사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좀 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했습니다. [박호균 /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성 지부 단원 : 지난번 1차 탐사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