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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기고] 야스쿠니와 죄의 정치

2015년 5월 26일 720

(이 글은 필자가 종전 7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5월 7일에 베를린에 개최된 기념행사에 야스쿠니촛불공동행동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발제한 것을 약간 수정하였다.) 죄의 정치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어떤 죽음을 배제하고,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이상화할 것인지는 예로부터 정치의 본령에 속한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한 아테네 병사들에 대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유족의 위태로운 감정을 배경으로 애도의 정치를 보여주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일본사회가 그랬듯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도 희생자를 어떻게 애도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앓고 있다. 그런데 애도의 대상이 전쟁과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전범이나 가해자라면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파행을 겪게 된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를 생각할 때 애도의 정치가 아니라 죄의 정치(politics of guilt)가 더 어울린다. 죄의 정치란 전쟁범죄나 중대한 인권범죄에 따른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을 이행하고 국내적 또는 국제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역동적인 정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국가폭력을 자행한 사회의 성원들은 죄의 얼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리적으로도 정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법적 대가도 치러야 한다. 죄의 정치는 외부세력의 강박이 아니라 사회의 내재적인 발전을 통해서 전개되는 경우에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국가폭력에 소극적으로 연루되거나 수수방관하였던 보통사람들이 후회와 성찰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재구성하려는 집단적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때, 죄의 정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죄의 정치의 최종생산물은 평화를 사랑하는 건강한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희생자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역사학회·역사교육자단체 성명

2015년 5월 26일 1008

일본의 역사학 관련 16개 주요 학술단체들이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인하는 아베정부를 정면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1만 3800여명이 참여한 성명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역사학회·역사교육자단체 성명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에 의한 기사 취소를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의 사실이 근거를 잃은 것처럼 하는 언동이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 사이에 보인다. 우리 일본 역사학회·역사교육자단체는 이러한 부당한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여한 것을 인정한 일본정부의 견해 표명(고노담화)은 해당 기사나 그 기초가 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사의 취소에 의해 고노담화의 근거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지금까지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 실증되어 왔다. 강제연행은 단지 억지로 끌고 간 사례(인도네시아 스마랑, 중국 산시성에서 확인되었고 한반도에도 많은 증언이 존재함)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연행의 사례(한반도를 비롯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됨)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위안부’가 된 여성은 성노예로서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폭력을 받았다. 최근 역사연구는 동원과정의 강제성뿐만 아니라 동원된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한 성노예 상태에 놓인 것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위안부’ 제도와 일상적 식민지 지배·차별구조와의 관련성도 지적하고 있다. 설령 성매매 계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구조가 존재하였으며,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사상하는 것은 문제의

‘친일’ 민영휘 후손 국가 귀속 토지에 불법 묘지 조성

2015년 5월 20일 577

가묘 4기도 설치…청주시 “법률 검토해 복구명령 내릴 것” (청주=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이 국가에 귀속된 토지에 불법으로 묘지를 조성, 말썽이 일고 있다. 20일 청주시에 따르면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의 한 야산에 친일파 민영휘의 증손자 묘지가 안장돼 있다. 올해 초에는 둘레석 설치 등 허가 없이 묘지 주변에 대한 공사가 이뤄졌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 분묘가 들어선 이 일대 44만1천㎡는 친일 행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민영휘 소유였다. 그러다가 친일반민족행위 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반민족 행위자 10명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리면서 2007년 12월 10일 소유권이 국가로 귀속됐다. 청주시는 이 묘지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국가 귀속 이전인 1981년 조성된 것이어서 강제 이장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청주시 관계자는 “국가 귀속이 이뤄지기 전부터 이곳에 분묘가 있었기 때문에 임의로 이장하거나 훼손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후손들에게 이전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민영휘의 후손은 이 묘지 인근에 4기(400㎡)의 가묘도 추가로 설치했다. 시는 2005년에 촬영한 이 일대 항공사진에서도 가묘가 확인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산지관리법상 산지 전용을 할 경우 그 용도를 정해 관계 당국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어길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청주시는 법률적 검토를 거쳐 원상복구 명령을 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영휘(1852∼1935)는 동학농민운동 혁명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관직을 이용해 부를 축적해

여운형 탄신기념 ‘몽양여운형의 날’

2015년 5월 22일 548

▲ 지난 2013년 열린 ‘몽양여운형의 날’ 기념식에서 두물머리합창단이 축하공연을 했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은 오는 25일 여운형선생 탄신 제129주년을 맞아 ‘몽양여운형의 날’ 기념행사를 여운형기념관에서 연다. 기념식은 오전 11시 개회사를 시작으로 축사, 여운형선생 약력 소개, 유족 인사 순으로 진행된다. 기념식 후에는 양평청소년예술단, 양평문화원 현악4중주단, 가수 전경옥씨가 출연해 축하공연을 펼친다. 오전 10시부터 생가 앞 잔디밭에서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한마당도 연다. 민족문제연구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 수도권 지역 독립운동기념관과 양평곤충박물관, 전교조 양평지회 등 군내 기관·단체 12곳에서 체험행사를 운영한다. 심산 무궁화 만들기, 최용신 상록수일기장 만들기, 독립운동가 저금통 만들기, 안성 태극기만세가방 만들기, 여운형 손수건염색·배지만들기·손편지쓰기·종이인형만들기·통일기원연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캐리커처그리기,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 프로그램을 오후 1시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문의: ☎772-2411 <2015-05-21> 양평시민의소리 ☞기사원문: 여운형 탄신기념 ‘몽양여운형의 날’

정부 편찬 ‘새마을운동 교재’ 역사 왜곡 논란

2015년 5월 18일 516

행정자치부,최근 ‘지구촌 새마을운동 표준 교재’ 펴내…박정희 전 대통령 찬양 및 새마을운동사 과대 평가 등 ‘일방적 편파적 역서 해석’ 지적나와 지구촌 새마을운동 표준교재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정부가 최근 공식 출판한 새마을운동 교재를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 경제ㆍ농촌 발전ㆍ새마을운동 전개 과정을 담으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과대 평가하는 등 현대사를 과장ㆍ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행정자치부는 최근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함께 ‘지구촌 새마을운동 표준 교재’를 펴냈다. 14권짜리 2주간 교육 분량이며 새마을운동 관계기관이 추천한 8명의 전문가가 2년간 집필하고 감수받은 후 지난 4월 출판됐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등 유관기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국내외 교육을 진행해왔는데 교재 내용이 기관별로 달라 혼선을 줬다는 점에서 표준 교재를 발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교재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편파적으로 해석하거나 왜곡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정부 공식 교재’인데도 일방적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교재에서는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가발전을 주도했다”,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의 요인들 중 그들이 모방할 수 없는 요인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그 하나는 한국에는 ‘박정희대통령’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는 ‘새마을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돼 있다. 마치 한국 경제의 발전을 박 전 대통령이 혼자 다 이뤘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유신

‘2500㎞ 대장정’ 신흥무관학교와 잊힌 영웅들

2015년 5월 18일 576

500㎡ 유골밭 ‘이보다 더 충격적일 수 없다’ [일요신문]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일본의 반인륜적 침략과 수탈에 시달린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일요신문>은 ‘신흥무관학교와 잊힌 영웅들 2500㎞ 대장정’의 종착지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撫順)의 ‘핑딩산 대학살’ 유적지를 찾았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슬픈 역사를 들춰냈다. [5탄] 핑딩산 대학살 현장에서 지난 4월 6일, <일요신문> 취재진은 랴오닝성 푸순에 다다랐다. 푸순은 세계 최대 규모의 노천탄광이 위치한 유서 깊은 산업도시다. 푸순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탄광은 12세기부터 개발됐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취재진이 탄광을 찾았을 때, 연무에서 비롯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불구불 산업 철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규모의 탄광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뤘다.   80여년 전 일제에 의해 대학살이 벌어진 핑딩산 기념관엔 유골들이 발굴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500㎡ 유골밭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사진은 어린아이를 감싸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 모자의 유골.      이 푸순의 탄광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담고 있다. 동북아시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 거대 탄광은 100년 전 열강들에게 있어선 매력적인 침략의 대상일 뿐이었다. 푸순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가 강점한 곳이었다. 그 이전엔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한 땅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푸순은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을 안고 있다. 1932년 9월 16일, 푸순의 탄광 근처에 자리 잡은 핑딩산(平頂山)에선 일제에 의한 피의 향연이

이승만의 냉대에 결국… 사할린 ‘잔혹사’는 현재형

2015년 5월 17일 800

[서평]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 <사할린> ▲ 브이코프 탄광마을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 ⓒ 최상구 양력 8월 15일이면 러시아 동부의 섬, 사할린이 들썩거린다. 한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쇠기 때문이다. 음력이 아닌 이유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리는 ‘해방절’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다. 날짜는 다르지만,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벌초를 하고 차례를 지내며 잔치를 벌인다. 야외경기장에서는 씨름대회도 열린다. 비단 ‘추석’만이 아니라 평소 풍경도 한국과 꼭 닮아있다. 이곳 재래시장과 상점에서는 담근 김치를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식당에서는 오징어무침도 나온다. 봄이면 소쿠리를 들고 고사리를 뜯으러가는 풍경도 펼쳐진다. 바로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 살게 됐나… 멈춰버린 시계 여기까지, 외국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화목한 민족의 정이 떠오르는가? 미안하지만, 틀렸다. 이제 애써 떨쳐 내오던 진실과 만날 시간이다. 이들의 이면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최상구 작가는 이곳을 오가며 기록한 진실을 낱낱이 적었다. <사할린>은 그 결과물이다.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우리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고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그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우리 국민 일부는 국외로 나가게 됐다.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 이게 바로 동북아 재외동포의 역사가 시작된 가슴 아픈 배경이다. 특히 1930년대 ‘전시강제동원체제’는 이런 경향에 더욱 불을 댕겼다. 일본기업에 노동자를 조달하기 위해 소위 ‘감옥노동’이 횡행했다. 탄광, 벌목장, 도로공사,

‘민주를 인양하라’ 광주서 5·18 35주년 전야제

2015년 5월 17일 482

  【광주=뉴시스】구용희 기자 =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5·18 전야제가 막을 올린다. 제35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과 금남로 등지에서 35주년 전야제가 펼쳐진다. ‘민주를 인양하라! 통일을 노래하라!’ 라는 주제의 전야제는 1부 80년 오월의 함성, 2부 결전의 그날, 3부 쓰러진 오월 쓰러진 대한민국, 4부 민주를 인양하라 통일을 노래하라, 5부 임을 위한 행진곡 대합창 등 각 부에 맞는 소주제로 나뉘어 진행된다. 특히 4부에서는 지난해 4·16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의 국민적 아픔과 80년 5·18의 만남을 주제로 한 공연이 무대 위에 오른다. 본격적 행사에 앞서 금남로 일대에서는 ‘오월·민주·인권·통일·환경’을 주제로 한 소통의 마당 ‘시민 난장’이 벌어진다. 이 자리에는 5월 골목길·인권담벼락·세월호 아이들의 방·사적지 사진전 등의 미술전시와 함께 광주트라우마센터·광주인권영화제·민주노총쌍용자동차·참교육학부모회·광주여성회·민족문제연구소 등 36개의 체험부스도 설치됐다. 체험부스중에는 ‘네팔 그리고 안산의 친구들을 위한 힘모아 기금 마련 카페’ ‘네팔을 돕는 핫바의 기적’ ‘비정규직 무료노동상담’ ‘5월 심리치유 이동센터’ ‘영상으로 본 오월에서 세월까지’ ‘광복 70년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외침’ 등의 공간도 마련됐다. 같은 날 오후 4시30분부터 금남로공원에서는 광주시민대성회 ‘오월의 약속’이, 오후 6시에는 시도민과 함께하는 민주대행진과 오월 풍물굿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전야제는 여전히 슬픔과 아픔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과 위기의 민주주의를 광주시민 대동의 힘으로 다시 열어가는 한편 민중의 아픔을 오월정신으로 보듬어 안자는 취지와 함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승만 저격사건

2015년 5월 17일 941

‘범인은 62살 유시태, 선동은 69살 국회의원 김시현….’ 최근 1952년 6월25일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공개됐다. 6·25 2주년을 맞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뒤에서 유시태가 총을 겨누기 직전의 사진이었다. 사건은 권총 불발로 미수에 그쳤다. 의열단 출신의 독립투사 두 사람이 벌인 저격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호호백발의 두 노인은 왜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괴뢰의 도발이 예상됐는데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혼자 살자고 도망갔으며,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또한 국민방위군 같은 사건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김시현(사진)은 8월22일 열린 공판에서 “이 대통령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대중의 원한을 풀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했다. 김시현·유시태 두 사람은 불의를 보면 먼저 권총을 빼드는 ‘뼛속까지 의열단원들’이었다. 의열단은 일제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과 같은 폭력투쟁을 독립운동의 노선으로 삼은 무장독립단체였다. 김시현은 폭탄제조와 밀정처단 등으로 6차례에 걸쳐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유시태 역시 의열단 군자금을 모으려다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광복·전쟁을 거치면서 백발로 변했지만 의열단 기질은 여전했다. 김시현은 1951년 10월부터 “그 자(대통령)는 해외에 있을 때부터 파벌을 조성하고 사욕에 치우쳤다”면서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유시태는 그런 김시현의 제안에 “내가 하겠다”고 자처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의 피란정국은 큰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 대통령은 간선제로는 임기를 연장할 수 없다고 보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땃벌대와 백골단 같은 깡패조직을 동원한 대통령은

[논쟁으로 읽는 70년](6)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

2015년 5월 17일 2133

ㆍ‘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하나의 역사, 서로 다른 기억 ▲ 해방 전후 역사 해석·복원 민중·민족 관점 중심으로 새 접근법 제시한 ‘인식’ ▲ 2006년 출간된 ‘재인식’ 민족 지상주의 폐해 우려 정치 상황 맞물려 ‘시끌’ ▲ “인식, 낡은 역사관에 묶여 재인식, 좌우 대립에 편승” 19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한 시기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소장 연구자들이 기성 진보적 학자들과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임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냉전분단체제 아래서 위축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가운데 한 축을 이룬 것은 해방 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바로 이러한 연구들이 집약돼 있다. 이 시리즈의 필자들로는 고(故) 박현채(조선대 교수·경제학),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역사학),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등 당시 진보를 대표하는 중견 학자들부터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정해구(성공회대 교수·정치학),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등 패기만만했던 소장 연구자들을 망라했다.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왼쪽부터) ■ <인식> 대 <재인식>의 논쟁 <인식>에 참여한 학자와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가 늘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복·미군정·정부수립·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변동을 분단체제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 과정 속에 냉전의 구조화라는 국제적 상황은 물론, 좌우합작·농민운동·노동운동 등의 국내적 변동을 ‘민중적·민족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분석하고자 했다. 민중적·민족적 관점이란 지배계급과 외세에 맞서는 ‘민중’과 ‘민족’을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관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해방 8년사(1945~1953) 한국 현대사야말로 세계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