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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3 1️⃣편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2022년 1월 21일 121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 백년전쟁 스핀오프 시리즈 《과거청산의 빌런들》 ▶3화 친일차 후손들의 역습 1️⃣편!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시리즈 #민족문제연구소3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과거청산의 빌런들》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성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해피빈 모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련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2️⃣편 :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영상 보면 더 이상 그런 말 못 합니다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1️⃣편 : 미 CIA문서로 드러난 박정희의 한일협정 뒷거래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2️⃣편 : “안두희의 입을 열게한 비밀무기는?”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1️⃣편: 안두희와 빌런추적단

[오마이뉴스] 촉석루 ‘이지용’ 이름 앞 ‘친일 반민족행위자’ 팻말 세웠다

2022년 1월 19일 119

[보도 후] 진주성관리사무소, 지난해 10월 말 설치 뒤늦게 알려져 … “진주시 설치에 의미” 경남 진주성(사적 제118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지용(李址鎔, 이은용, 1870~1928) 글자 앞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관련기사 : “촉석루 아래 암벽에 친일파 이지용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일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 사이 암벽 난간 앞에 가로 150mm, 세로 220mm 크기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음각 현황. 촉석루 아래 암벽에는 이은용(李垠鎔, 왼쪽)과 개명 후 이름인 이지용(李址鎔, 오른쪽)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 당시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일제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라고 적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2021년 10월 말경 설치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진주시의회에서 지적도 있고 해서 벼랑에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설치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안내판을 크게 세우려면 문화재청과 협의를 해야 하지만, 작으면 허가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지용은 ‘을사오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은용’이 본래 이름인데, 세자 책봉된 ‘영친왕’의 이름인 ‘이은(李垠)’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이지용’으로 바꿨으며, 그는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시기에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 같이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지용은 1911년 일왕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고,

[경향신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2022년 1월 14일 87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 고문 친일인명사전 지도위원 참여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경희대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 등 사회운동에 적극 목소리를 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당시 원로 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교수, ‘사상의 은사’ 언론인 리영희·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장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15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광릉추모공원이다. <2021-01-13> 경향신문 ☞기사원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관련기사 ☞한국일보: 한국사 연구 힘쓴 김태영 교수 별세 ☞연합뉴스: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디지털타임스: `한국사 연구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향년 84세 ☞한겨레: “조선 토지제도에서 실학 연구까지 중요한 성과 남기셨죠”

[한겨레]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외쳤다고 15년형 이어 억울한 죽음

2022년 1월 13일 194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5) 통일운동 선구자 이수병 4·19후 통일운동 이끌었다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미운털 혁명재판서 15년형 선고 이어 74년 2차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다른 7명과 함께 사법살인 당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제키엘 37,21-2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 9,2-3) 1961년 4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4·19 일주년 기념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 이수병 선생님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청년 학생들이 3·1 독립선언과 항일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 종속된 정치체제를 넘어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을 위한 불길을 댕긴 것입니다. 4·19로 분출된 뜨거운 시대정신은 청년과 시민을 각성시켰고, 이는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절절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청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청년 학생들의 열정과 울부짖음은 뿌리를 찾고자 하는, 구원과 완성을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2022년 1월 13일 341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학교 명예교수가 1월 11일 오후 8시경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태영 교수는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비롯한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는 강만길 고려대 교수, 언론인 리영희, 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는 지도위원으로 자문했다. 그의 진면목은 만년까지 이어진 치열한 학술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1982년 저술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는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현대 한국의 명저 100권’에 포함되었으며, 1986년 이 저서로 제 1회 단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외에도 『실학의 국가개혁론』 『조선성리학의 역사상』 『유형원-국가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의 비조』 등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다. 수많은 논구는 한결같이 국가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세사 연구자임에도 화두는 항상 현실 개혁이었던 것이다. 단재상, 미원학술상, 다산학술상 학술대상, 벽사학술상 등 숱한 수상 경력은 그의 실천적 탐구정신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례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7호, 발인은 15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추모공원이다.

[경향신문] 차별과 혐오, 타향살이 아픔···주소 불명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다

2022년 1월 10일 183

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학자 백름 백름(白凜)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발굴한 학자다. 이 발굴을 ‘반전’이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연구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계기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다. 재일조선인에게도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 2세들이 중심이 돼 개최한 이 전시에 재일조선인 1세 화가의 작품들이 나왔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집단의 에너지에 감동했다. 고흐나 마네 같은 서양 미술인들은 알면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이름도, 인생도, 작품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 졸업을 앞둔 때다. 당시 이 학교 교수 리용훈이 ‘재일코리안 미술의 궤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리 선생님이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정리하는 연구자가 나와야 하는데…’ 하고 몇 번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살다 1945년 해방 뒤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남북이 분단하면서 ‘대한민국’ 지지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지자로 나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각각 소속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백름은 재일조선인이 “ ‘북한 사람’이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름은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집단 활동을 연구했다. 활동의 시작은 1947년 설립된 조선미술협회 결성이다. 이들은 “민족이 대립과 차이의 키워드가 아닌 공존의 키워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조선미술회’가 설립됐다. 백름은 “조국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불러오겠다는

[오마이뉴스] 1920년대 일본이 남산에 한 짓은 끔찍하다

2022년 1월 10일 183

남산 통치기구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우리에게 남산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얼이 서린 산’이라 비견해도 무방할 것이다. 백두산과 더불어 오랜 관념으로 그리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불러 굳어진 노랫말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시작하며 우리 기상을 드러내는 존재로 남산을 묘사한다. 환경결정론이라 할 수 있는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도시가 한양이다. 이때 남산은 계획 중심요소로, 내사산 중 주작에 해당한다. 이성계는 새 나라와 도읍 한양을 지켜 줄 수호신으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면서 정상에 국사당을 세운다. 산은 또한 여러 이름을 가졌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불렀으며 경복궁과 관계도 중요하다. 경복궁은 외사산 중 삼각산을 조산 삼고 백악산을 주산 삼아 앉힌 새 나라 법궁(法宮)이다. 남산은 경복궁 안산이다. 이렇듯 조선의 도성 한양에서 경복궁과 남산은 도시 조영과 핵심적 통치공간을 상징하는 장소성을 갖는다. 또한 남산은 국방통신인 봉수제 원점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 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순하고 부드러워 도성 사람들에게 일상으로 바라다보이는 친근감과 편안함을 줌은 물론이다. 왜성대와 남산대신궁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최초 외국 공관, 일본 공사관이 돈의문 밖 청수관에 자리한다. 하지만 임오군란 때 불타 버리고, 제물포조약 후 금위대장 집을 2년간 임시로 사용한다. 교동에

[SBS] ‘뜻은 못 이뤘지만’..이봉창 재평가 목소리

2022년 1월 8일 262

<앵커>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큰 물꼬를 튼 의거였습니다. 그래서 의거 90주년을 맞아 이봉창 의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임상범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기자> 임시정부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청년. 밀정이라는 의심도 받았지만, 은밀히 서약서를 쓰고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된 이봉창. 차라리 일본인으로 살겠다며 일본 땅에서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는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게 됩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고민을 하죠. 내가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해도 일본 사람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봐주지 않는구나.] 삶의 목표를 바꾸고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삼십 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다 했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어야 되는데. 김구 선생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준비를 끝낸 이봉창은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일왕이 1월 8일 날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을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아 그날 거사하면 되겠구나.]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는 일왕의 마차 행렬에 수류탄을 던집니다. [송성희/이봉창 역사울림관 : 이봉창 의사는 성공한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엄청 큰 소리가 났거든. 근데 위력은 너무 약했던 거야.]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거사는 실패도, 끝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렸고 석 달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연합뉴스]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 장손녀 유해 구미에 안장

2022년 1월 10일 190

지난달 96세 일기로 별세한 허로자 여사, 할아버지 곁으로 (구미=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경북 구미 출신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의 장손녀인 허로자 여사의 유해가 구미에 안장된다. 10일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 따르면 허 여사 유해 봉안식이 오는 12일 오전 11시 구미 공설 납골당인 숭조당에서 열린다. 허 여사는 지난달 26일 서울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해 유해를 모실 곳을 찾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도 구미지역 국회의원과 모 대기업의 도움을 받아 치렀다. 화장한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서울 사는 5촌 조카가 잠시 모시고 있다가 이번에 구미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허 여사의 유해를 구미로 모시는 데는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과 구미시의 도움이 있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허 여사는 지난 2006년 10월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으며 이후 최근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허 여사의 할아버지인 허위 선생은 1907년 13도 연합의창군 1만여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돼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항일운동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허위 선생 후손들은 한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명했다. 김영덕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평생 고생을 하셨을 텐데 이제는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용민 기자 yongmin@yna.co.kr <2022-01-10> 연합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 장손녀 유해 구미에 안장 ※관련기사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일제는 왜 조선임금의 탯줄까지 집단이주시켰나

2022년 1월 5일 252

조선왕릉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왕과 왕비 무덤 44기 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왜 4기는 빠졌을까. 제릉(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릉)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릉)은 북한 땅에 있으니 뭐 그렇다치자. 연산군(1494~1506)과 광해군(1608~1623)의 무덤도 제외됐다. ‘왕릉’이 아니라 ‘묘’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등재명칭이 ‘조선왕릉’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묘’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은 만 12~15년간 조선을 다스린 임금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폐위됐지만 그것은 조선 왕조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 ‘왕릉’이 아니라 ‘묘’라는 딱지를 그대로 붙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케케묵은 왕조의 잣대로 연산군과 광해군에게 행한 ‘잔인한 2차 가해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까맣게 잊고 있던 연산군의 태실 필자는 최근 두 가지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연산군과 광해군을 떠올리게 됐다. 하나는 경기도가 도내에 존재하는 조선 왕가의 태봉·태실 65곳 자료를 집대성한 보고서(<경기도 태봉·태실 보고서>)를 발간했다는 소식이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길지를 선정해 그 태(태반과 탯줄)를 봉안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태봉은 태를 묻은 산봉우리다. 보고서를 읽은 필자의 시선이 머문 쪽이 있었다. 이번에 연산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처음 지목된 이령(梨嶺·경기 광주시 목현동 골프연습장 일대)이었다. 이령은 광주시 목현동에서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지명은 이뱃재이다. 사실 성종 때(1481년)에 처음 편찬되고, 연산군(1499년)과 중종(1530년) 연간에 수정·보충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령에 성종과 금상(今上·현재 재위 중인 임금)의 태를 묻었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