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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1919를 걷다’ 수원 만세운동 재연행사, 21일 800명 행진
임시정부 애국가, 수원 공식 행사에선 첫 합창 [수원=뉴시스] 박종대 기자 = 경기 수원시자원봉사센터가 1919년 수원 만세운동의 주요 동선을 시민들이 직접 걸으며 되새기는 ‘수원 독립운동의 길 1919를 걷다’ 재연행사를 21일 연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수원 독립운동의 길’ 추진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수원시자원봉사센터가 주관한다. 행사는 오전 10시 30분 연무대에서 시민추진단 출범식이 먼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출범 선언과 독립선언문 낭독 후 경기소년소녀합창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를 합창한다. 수원에서 이 곡이 공식 행사에 불리는 것은 처음이다. 출범식 후 시민·청소년 800여 명이 만세 행진에 나선다. 연무대에서 출발해 삼일공업고, 매향여자정보고, 북수동 천도교 교당 안내판을 거쳐 화성행궁까지 이어지는 역사 체험 코스다. 종착지 화성행궁 광장에서는 바리톤 이재혁 축하공연, 독립운동가 그래피티 퍼포먼스, 평전 저자 사인회 등 문화행사를 선보인다. 이주현 ‘수원 독립운동의 길’ 추진위원장은 “시민사회가 지난해부터 지역 독립운동 역사를 공간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논의해 왔다”며 “시민들이 독립운동사를 몸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pjd@newsis.com <2026-03-19> 뉴시스 ☞기사원문: ‘1919를 걷다’ 수원 만세운동 재연행사, 21일 800명 행진
[한겨레] “친일인명사전은 역사 정의,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짬] 한상권 제3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김성수, 김활란, 윤덕영, 윤치호, 박흥식, 이완용…”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한상권 제3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전시실 벽 한 켠에 가득한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에 적힌 이름을 나즈막히 읽어나갔다.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 선생이 친일파들의 이름, 본적, 친일 행위 등을 갈무리해 빼곡히 적어둔 1만3천여장의 친일인명카드였다. 한 위원장은 임 선생의 친일인명카드 제작이 선생의 개인적 아픔에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선생의 부친이신 임문호 선생은 천도교 활동을 하셨어요. 천도교는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이었죠. 임 선생도 아버지께 ‘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렇게만 들었답니다. 그런데 친일파 연구를 하다가 사료에서 아버지 성함을 발견한 겁니다” 충격에 빠진 아들이 진위를 묻자, 아버지는 괴로움에 담배를 태우며 답했다고 한다. “나는 친일파가 맞다.” 그렇게 만들어진 친일인명카드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의 소중한 기초자료가 됐다. 임 선생 사후 자료를 물려받은 역사학자들은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친일인명사전 제작의 물꼬를 틔웠다. 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항의와 소송이 이어졌다. 온갖 방해가 있었지만, 199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전국 교수 1만인 선언’을 통해 국민적인 지지를 얻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2001년 12월 민족문제연구소를 주축으로 정식 출범했다. 임 선생이 타계한 뒤 20년이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4389명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이 완성됐다. 임종국 선생의 부친인 임문호 선생도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 위원장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청산은 대부분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의 결과에 따라 국가가 주도했다. 우리나라는 이승만
[전남교육통] 성지송학중학교-민족문제연구소, ‘역사로 세상을 배우다’ 업무협약(MOU) 체결
대안교육의 자율성과 역사 전문 기관의 만남, 미래형 역사 인재 양성 기대 성지송학중학교(교장 하승균)는 지난 1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 및 역사문화탐방 내실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은 ‘자아를 찾고 세상을 배우는 교육’을 지향하는 성지송학중학교의 특성화 교육과정과 국내 최고 권위의 근현대사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전문성을 결합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양 기관은 이번 협약을 통해 ▲국내외 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기획 자문 ▲연구소 소속 전문가의 역사 특강 및 현장 해설 지원 ▲연구소 보유 역사 콘텐츠의 교육적 활용 ▲인권·평화 중심의 민주시민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특히 성지송학중학교의 대표 교육과정인 ‘해외이동수업’ 시, 민족문제연구소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학술적 고증과 현지 교육 지원을 통해 학생들이 더욱 깊이 있는 역사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상임이사는 “성지송학중학교 학생들의 뜨거운 배움의 열정에 연구소의 전문성을 더하게 되어 기쁘다”며, “청소년들이 역사를 통해 정의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전했다. 성지송학중학교 하승균 교장은 “교실 밖 세상을 배우는 우리 아이들에게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든든한 길동무가 생겨 매우 기쁘다”며, “이번 협약을 발판 삼아 학생들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당당히 설계하는 글로벌 역사 인재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성지송학중학교는 이번 협약 이후 첫 행보로 오는 10월 예정된 역사문화탐방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반영한 자기주도적 탐구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강민구 기자 <2026-03-16> 전남교육통 ☞기사원문: 성지송학중학교-민족문제연구소, ‘역사로
[서울&] 안중근의사 순국 116주년 추모식 21일 효창원서 거행
‘안중근의사 순국 116주년 추모식’이 3월2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효창원(효창공원) 안중근의사 빈 무덤(삼의사 묘역)에서 거행된다. 이번 추모식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이하 기념사업회)와 (사)안중근평화연구원(원장 신운용)이 주최하며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효창원을사랑하는사람들 등이 후원한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번 순국 116주년 추모식이 단순한 추모를 넘어, 안중근의사께서 생전에 염원했던 동양평화의 정신을 계승하고 남북의 화해와 공존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며 “매년 순국일(3월26일)에 안중근의사 빈 무덤에서 시민사회단체와 일반시민이 참석하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나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주말에 거행한다”고 밝혔다. 기념식에서는 안중근 의사 유언 낭독과 추모사, 안중근어린이합창단과 안중근청소년오케스트라의 추모공연 등이 진행된다. 기념사업회는 또 누리집(https://greatkorean.org/34)와 유튜브 채널 ‘청년안중근’의 안중근 샌드애니메이션(https://www.youtube.com/watch?v=aLKofDlpdAk) 및 효창원 다큐멘터리(https://www.youtube.com/watch?v=ryijxL8pJZ4)로 운영되는 특별추모관을 통해 누구나 안중근의사를 기억하고 기리는 메시지를 남기고, 추모 활동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동구 기자 donggu@hani.co.kr <2026-03-17> 서울& ☞기사원문: 안중근의사 순국 116주년 추모식 21일 효창원서 거행
[오마이뉴스] ‘3.15 의거’ 김주열 시신 유기한 자의 최후… 아이들 경악
[아이들은 나의 스승]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김주열만큼이나 중요한 이름, 박종표 탁상 달력에 ‘3.15 의거 기념일’이라는 글자가 도드라져 보인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맞서 마산(현재의 창원특례시 마산합포구)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거를 기리는 날이다. 3.15 의거는 한 달여 뒤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수업 시간 지나가는 말로 아이들에게 3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물어봤다. 예년 같으며 조회 시간에 따로 이날의 역사적 의미를 간략히 설명한 뒤 함께 기억하자며 훈화라도 했을 테다. 그런데, 올해는 공교롭게도 일요일과 겹쳐서 미리 이야기를 잠깐 나눠 볼 참이었다. “뭐긴 뭐예요. 화이트데이 다음날이죠.”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이성 친구들과 애정으로 표현하는 화이트데이가 3.15 의거 기념일보다 백 배는 더 중요하다. 웃자고 건넨 대답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3.15 의거를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승만이 부정 선거를 자행한 날”이라고 말한 아이를 향해 대부분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다들 그게 맞나 싶은 표정이었다. 아이들만 손가락질할 일도 아닌 듯하다.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를 증명이라고 하듯, ‘3.1절’을 비롯해 ‘4.3 추념일’, ‘4.19 혁명 기념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6.10 민주 항쟁 기념일’ 등 날짜를 앞세운 기념일이 달력에 빼곡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가 기념일들이 국민의 관심사에서 나날이 멀어지는 느낌이다. 사건이 발생한 해당 지역의 주민이 아니면, 대부분의 기념일이 왜 지정되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3.1절이나 광복절, 개천절, 올해 공휴일로 추가된 제헌절
[오마이뉴스] ‘친일 인사’ 남인수 기념 가요제 광주 예선 ‘논란’
빛고을 시민문화관서 4월 25일 개최 예정…시민사회 반발에 “대관 취소 검토 중” 광주광역시 빛고을 시민문화관에서 친일 논란이 있는 가수 남인수를 기리는 가요제 예선이 예고돼 논란이 일고 있다. 10일 <오마이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오는 4월 25일 오후 1시부터 광주광역시 남구 빛고을 시민문화관 소공연장에서 ‘2026 제4회 남인수가요제 광주 예선’이 열릴 예정이다. 가요제 예선은 광주를 비롯해 진주, 부산, 창원, 일산, 서울에서 차례로 열리며 8월 준결승, 10월 결승이 치러진다. 진주 출신으로 가요 황제로 불렸던 남인수는 지난 1942년 ‘강남의 나팔수’, ‘병원선’, 1943년 ‘혈서지원’ 등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군국가요를 불러 조선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 행적이 드러났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정치부장,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을 지낸 김승학(1881~1965) 선생이 펴낸 책 ‘친일파 군상’에도 그의 친일 행적이 언급돼 있다. 이 때문에 남인수의 고향인 진주에서 1996년부터 열리던 ‘남인수가요제’는 2008년 폐지됐다. 남인수기념사업회 측이 최근 4년간 가요제 개최를 계속 추진해 왔으며 광주 예선은 올해가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는 시민 혈세로 운영되는 시민문화관에서 광주 예선이 치러지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관계자는 “남인수의 고향인 진주는 물론 부산, 창원에서도 친일파 가수를 기리는 가요제에 대한 공공기관 대관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며 “광주에서 시민문화관을 대관해주는 게 매우 의아하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기관 대관이 막히자 남인수기념사업회 측이 농협 강당 등을 대관해 가요제를 열었는데, 시민사회단체와
[오마이뉴스] 이완용의 선정비, 창고에 있다고 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매국노 이완용의 자취를 찾아 떠난 전북 부안 줄포 답사기 “이완용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었나요?” 이번 주말(7일) 답사는 한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이 잘못된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대개 독립운동가들은 영남 출신이 많고, 호남에 유독 친일파들이 많다고 말씀하셨단다. ‘보수의 본향’이라는 대구와 경북 사람들의 긍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땅이라는 자존심에 기인한다고 설명하시더란다. 나름의 수긍 가는 논리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는 여전히 농업의 경제적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때였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등 너른 들이 펼쳐진 호남은 지역의 토호와 권세가들의 ‘먹잇감’이었다. 권력에서 밀려나 좌천되더라도 물산이 풍부한 호남으로 발령되길 바랐고, 그들에게 지역민에 대한 수탈은 일상이었다. 이완용이 호남 출신이라는 착각은 그와 관련된 자취가 서울 주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어서 생겨난 듯하다. 당장 그의 무덤이 전북 익산에 있었다. 지금은 직계 후손에 의해 파묘되어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해방 직후부터 그의 무덤은 온 국민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파묘 당시 그의 유해가 담겼던 관 뚜껑이 한때 인근 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그조차 지금은 사라졌다. 그와 먼 친척뻘이었던 역사학자 이병도가 친일 잔재 청산을 주장하며 박물관에서 꺼내어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다. 친일 잔재 청산의 대의를 강조했지만, 우봉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조상의 행적을 지우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병도 자신도 지난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 하긴 친일파가 친일
[제주의 소리] 반란 프레임 깨는 4.3의 새 이름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 ③ 김동윤 /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연구를 위하여 2028년이면 제주4.3은 80주년을 맞는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을 지나, 특별법 제정과 희생자 보상까지 성사되는 등 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그것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2월 5일부터 6일까지 열린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 제5회 학술대회 ‘4.3연구, 80주년을 향해/너머’는 4.3 연구의 2기를 여는 자리로 평가받을 만큼, 유의미한 내용들이 공유됐다. [제주의소리]는 독자들과 함께 4.3 80주년 이후를 함께 고민하고자, 4.3융합전공과 함께 제5회 학술대회 기조발제문을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4. 해방기 제주 항쟁의 의의와 4.3의 재구성 그렇다면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무의미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고,41) 반면에 5.10단선을 분쇄했다는 통일독립 항쟁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4.3 봉기는 그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제주 남로당이 나름의 사정에 따라 이행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이에 앞서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이어지는 해방기 제주도민의 상황, 특히 1947년 3.1절 기념식 집회로 폭발된 제주도민의 거대한 움직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것이 남북협상운동을 만나면서 5.10단선 반대 투쟁으로 꽃피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판단이다. 3.1절 기념식으로 분출된 혼연일체의 열정과 더불어 제주도의 해방기 통일독립 항쟁에서 특히 두드러진 성과는 5.10단선 거부라고 할 수 있다. 단선 반대 열기가 여타 지역보다도 뜨거웠고,42) 결국 가시적인 결실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민들레] K-민주주의 시대, 이재명 정부에서 국보법 끝장내야
이종형 등 친일 매국 세력이 만든 희대의 악법 반민특위 맞서 생존 몸부림…치안유지법 뿌리 여순항쟁 직후 제정, 숙군 종료 직후 1차 개정 87년 6월 항쟁 뒤 일부 수정, 독소조항 그대로 대부분 형법으로 대체 가능…민주주의에 역행 UN인권이사회, 국가인권위 지속적 폐지 권고 해방 직후 당면 과제는 친일 과거사 청산과 자주독립 국가 건설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을 반대합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노덕술, 하판락, 안정묵을 비롯해 친일 고등계 경찰들은 쥐새끼처럼 숨어버립니다. 아예 경찰서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1945년 8월 16일~9월 초순 경찰서 출근율이 20%에도 미치질 않았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인 8월 16일~8월 23일 1주일 동안 전국에 걸쳐 사적으로 경찰을 응징, 처단한 사건이 177건 발생합니다. 그중 111건이 조선인 경찰에 대한 응징, 처단이었습니다.1) 조선인 경찰이 일본인 경찰보다 2배 많았습니다.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의 고문 악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경찰 수사는 곧 고문이기에 다리 관절 꺾기 고문, 화롯불에 달군 쇠젓가락 고문, 비행기 태우기, 통닭구이,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은 기본이었습니다. 주사기로 항일지사의 피를 뽑아 다시 항일지사의 얼굴에 뿌린 착혈 고문를 자행한 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배후를 대라며 15살 어린 중학생의 혀를 펜치로 잡아 빼 죽이기도 했습니다.2) 친일 경찰의 고문 기술은 해방 후 1990년대까지 이어져 ‘수사=고문’으로 인식됐습니다. 특히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의 남영동 칠성판 물고문과 관절 뽑기 등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이근안은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겨레] 아직 한국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txt]
‘위대한 지도자’와 ‘잔인한 독재자’ 사이를 오가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신간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이같은 찬반의 구도를 반복하기보다, 박정희라는 인물을 떠받치고 있는 사상과 체계의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저자는 역사문제연구소 연구부소장과 한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다.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공과’의 목록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한 시대와 정치의 문법이다. 그런 점에서 5·16 쿠데타 이전까지 ‘박정희’를 빚어낸 그의 생애와 행적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소농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6년 내내 뛰어난 성적으로 일본인 교사들의 신임을 받았고, 반장을 도맡으며 또래 위에 군림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뺨을 때려 그에게 맞지 않은 동급생이 드물었다고 한다. 총명함과 통솔력, 승부 근성, 권력의지는 이 시기부터 그를 수식하는 핵심 어휘들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지만, ‘교련’이나 ‘체조’를 제외하면 성적이 바닥이었다. ‘나폴레옹 전기’와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을 탐독하며 군사적 영웅상에 매혹됐던 그에게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 과정은 흥미를 주지 못했다. 졸업과 동시에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결국 ‘군인’의 길을 택해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한다. 나이와 혼인 경력으로 원칙적으로 입교가 어려웠지만, ‘혈서’를 써서 지원함으로써 합격했다. 만주군관학교 2년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2년에 걸친 교육은 박정희의 개인적 성향은 물론 이후 ‘박정희 체제’로 불릴 통치 방식의 원형을 형성했다. 일본 극우 파시즘과 군국주의,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 규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