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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민족사랑 2026년 8월호

2026년 8월 27일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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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2026년 8월 3일 162

[자료소개] 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기미년 3‧1운동이 일제의 말발굽 아래 덧없이 유린되고 일부 상층 계급이 타협적인 노선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뒤 조선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인민의 반제국주의투쟁의 형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 공산주의운동이요, 그것을 지도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이리하여 1925년 4월 17일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그 뒤 당과 그 운동을 습격한 일제의 무수한 박해와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 유일한 반일본적 혁명운동으로 공산주의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그 운동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끼친 공헌은 절대한 바가 있다. 이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붕괴 전 최후의 수년간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지하에서 활동한 조선공산당 이관술 씨의 회상기를 소개하는 바이다 — 현대일보 기자 ① 반제투쟁의 회상 내가 반일혁명투쟁에 첫걸음을 들여놓기는 광주학생사건이 발발하여 전국이 들끓던 1929년경이다. 그전 해 나는 일본 동경고사(東京高師.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학교에 와있었는데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 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일본을 말함]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의식의 강화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그때 나의 생각은 우리민족을 위해서 도움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輕重大小)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당시 도쿄에서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이러한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견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2026년 8월 3일 218

[식민지 자료관 7]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생전에 거처로 삼았던 주요 공간 몇 군데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우선은 운현궁(雲峴宮)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여기에 더하여 창의문 밖 석파산장(石坡山莊)과 마포 아소당(麻浦 我笑堂), 시흥산장(始興山莊, 시흥동 별장)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양주(楊州) 쪽 의정부에도 직곡산장(直谷山莊, 직동산장)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곳은 1873년에 권좌에서 밀려난 대원군이 첫 번째 은거지로 선택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직곡산장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라치면 이렇다 할 자료를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가 옛 신문 파일을 뒤지던 와중에 『경성일보』 1935년 11월 18일자에서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하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카토 칸카쿠(加藤灌覺)의 기고문인 「감악산(紺岳山)」이라는 글[고노 특파원(河野 特派員) 촬영]에는 매우 드물게 보는 직곡산장의 모습에 곁들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직동(直洞, 곧은골)에 유거(幽居)했던 대원군(大院君)]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즉위 10년, 우리 명치 6년(1873년)에 민비 전하(閔妃殿下)와의 정쟁(政爭)에서 깨졌던 대원군(大院君)은, 원로(元老)라고 하는 허명(虛名)을 지니고 마침내 경성(京城)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퇴은(退隱)의 땅이 이 직동(直洞)의 한거(閑居)였다. 직동은 의정부(議政府)의 정거장(停車場)에서 거리가 겨우 10수 정(十數町, 1킬로미터 남짓), 도봉산(道峰山)의 율림(栗林, 밤숲) 속에 있으며, 도봉산 북측의 계류(溪流)가 서로 모여들어 그 가운데를 흐르는 청렬(淸冽)한 용천각소(涌泉各所)에 옥(玉)을 부풀어 올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조망이 어느 것이든 그 빼어남을 즐겼던 승지(勝地)인데, 지금도 여전히 그 구시(舊時)의 모습을 남아 있어서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2026년 7월 31일 172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3.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과 <이팔청춘가> 근대를 실감케 했던 새로운 문물들 가운데 실로 경이로웠던 것이 비행기다. 사람이 하늘에서 자유로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행기의 우렁찬 굉음은, 종래의 통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1903년 이래 신문기사로만 접하며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궁금해했던 비행기는, 1913년 4월 3일 드디어 그 모습을 조선 하늘에 처음 드러냈다. 4월 3일 오전 11시 반쯤, 6만 관중이 운집한 경성 용산 연병장에서 조선 초유의 비행은 시작되었다. 일본 항공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제작한 비행기를 조종한 이는 일본인 비행사 시라토 에이노스케(白戶榮之助)였다. 오늘날 화려한 에어쇼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간단한 비행이었지만, 기계를 움직여 사람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제로 접한 이들은 그만으로도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틀 뒤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봉산인(瑞峰山人)’이라는 이가 쓴 <비행기> 노랫말이 다음과 같이 실리기도 했다. 가사 형식으로 보아 시조창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라 보이는데,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에는 대개 종장(終章) 마지막 음보 세 글자를 생략한다. 님 계신 곳 가 볼 마음 주야로 간절하나 / 산 높고 물 깊어서 하릴없이 단념터니 지금에 비행기 온다니 그것을 타고 조선 하늘에 비행기가 처음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많은 관중 속에는 어쩌면 열두 살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2026년 7월 30일 158

[초점]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7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송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의 세 번째 변론기일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이 소송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되어 전사한 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희생자와 유족들이 2001년 제소한 군인·군속 소송을 이어 2007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제기한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의 3차소송이다. 이번 3차소송은 지난 2025년 9월 희생자의 손주 세대 유족 6명이 원고로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17일에 열린 변론에서는 희생자 유족 길형민 씨가 법정에서 의견을 진술했다. 길씨의 할아버지는 1942년 23세의 나이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뒤 1944년 10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전사했다. 강제동원 당시 할머니는 길씨의 어머니를 임신중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전사 통지도 받지 못했다. 길씨는 법정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는 80여 년 전 일본 제국주의가 강요한 일본식 이름으로 할아버지를 묶어둔 채 여전히 식민 지배의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라며 “할머니와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이 투쟁을 손자 세대가 이어 반드시 결말을 짓겠다”며 결의를 밝혔다. 재판 이후 100여 명의 소송지원단 시민들과 많은 미디어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보고 집회에서는 희생자 유족 김옥순 씨(63) 남매 4명이 추가로 원고단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씨 역시 2차소송 원고인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손주 세대로 소송에 참여했다. 또한, 외삼촌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2026년 7월 30일 130

[초점]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7월 10일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제4회 민연포럼이 열렸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일본 논픽션 작가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는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지진과 학살 1923-2024』 저자다. 그는 현재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는 배외주의와 헤이트 스피치의 실태를 소개하며, 그 뿌리를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마바리 타올’로 유명한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서는 지역 산업을 지탱하는 베트남·중국·네팔 노동자들을 향해 “외국인 추방”을 외치는 모순된 극우 집회가 열리고,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서는 쿠르드계 이주민들을 향해 “해로운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막말과 살해 협박, 온라인 가짜뉴스가 난무한다. 야스다 작가는 “지난 20년간 일본 내 외국인은 3배 늘어 400만 명을 돌파했지만 전체 범죄 건수는 오히려 3분의 1로 줄었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차별 선동의 허구성을 짚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선동이 방치될 경우 실질적인 범죄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야스다 작가는 혐오 발언이 개별적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조직적 폭력의 도화선이 되어 왔다며 그 기원을 100여 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서 찾았다. 1923년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방화를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정부와 언론의 조직적인 가짜뉴스에 선동되어 약 6,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그 전해인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독립운동가 26분을 발굴하여 포상 신청하다

2026년 7월 24일 187

[초점] 독립운동가 26분을 발굴하여 포상 신청하다 연구소는 6월 30일 국가보훈부에 독립운동가 26명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작년에 이어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실린 인물들을 추적, 조사해 새로 발굴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는 1945년 3월에 제작된 일제의 ‘블랙리스트’로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등 항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들의 자세한 신상정보와 함께 당시 주소와 직업, 항일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했던 분들이 주목된다. 안용갑(安鏞甲)과 신규식(申奎植)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41년 도쿄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이던 안용갑은 지하학생조직을 결성했다. 안용갑과 동지들은 장기화된 전쟁으로 일본이 결국 패전할 것을 전망하며, 조국 독립 후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신규식은 유학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요코하마의 목장에서 일하며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민중의 민족의식을 계몽할 방안을 논의했다. 일제는 이들을 ‘요코하마그룹’이라고 불렀다. 안용갑은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신규식은 같은 해 12월 요코하마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장기룡(張基龍)과 황병수(黃炳洙)는 전북의 공립국민학교에서 촉탁교원으로 근무하며 조선 독립을 의논하고 학생들에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쳤다. 이들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몰래 만나 ‘일본과 소련의 전쟁이 곧 개시할 것이다. 중일전쟁으로 상당히 약해진 일본은 패전할 것이니, 그때가 조선 독립의 호기다’ 등 대화를 나눴다. 또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하며 우리는 조선인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훌륭한 조선인이 될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산청, 진주 (6.27~28)

2026년 7월 24일 140

[초점]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산청, 진주 (6.27~28)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경남 산청과 진주에서 “2026년 회원 모꼬지”가 열렸다. 올해 첫 모꼬지에는 상근자를 포함해 총 70명의 회원과 가족이 참여했다. 첫날, 참가자들은 산청군 문화예술회관에서 극단 큰들의 마당극 <남명>을 관람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애민·실천 정신을 유쾌하고 의미 있게 풀어낸 공연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어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참배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은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던 연장선상에 있기에, 우리 연구소는 지금도 유해 발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후 숙소인 한국선비문화연구원으로 이동해 뒤풀이를 하며 친목을 다졌다. 이번 모꼬지에는 경남, 부산, 대구, 광주, 전남, 전북은 물론 구미, 아산, 청주, 수도권 등 전국에서 회원이 모였다. 특히 캐나다에서 온 박인애 회원과 아들 조인의 참석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인 조박을 포함한 세 형제와 함께 5년 넘는 노력 끝에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윤리연보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 기록을 등재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들의 노력에 모든 회원이 큰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둘째 날은 진주로 이동해 형평운동의 선구자 강상호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잘 알려진 김장하 선생의 ‘옛 남성당 한약방(현 남성당교육관)’을 방문했다. 이어 진주성과 의암, 촉석루를 둘러보며 역사 답사를 이어갔다. 특히 진주성 전투와 논개에 대한 해설 중,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내의

근현대사기념관,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2026년 7월 24일 129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근현대사기념관은 6월 20일(토)부터 총 4회에 걸쳐 2026년 상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6·10만세운동을 다시 본다> 강좌를 근현대사기념관 강의실에서 진행했다. 독립민주시민학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성인 대상 교육프로그램이다. 올해는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6·10만세운동의 주도층과 역사적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6월 20일 오후 2시에 열린 제1강은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가 맡아 ‘우리는 6·10만세운동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윤교수는 6·10만세운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을 정리하고,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7월 4일에는 제2강과 제3강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제2강은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아 ‘6·10만세운동은 누가 주도하였는가?’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6·10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했던 지도부와 그 핵심 인물인 권오설, 박민영, 이지탁 3인의 트로이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어진 제3강은 박종린 한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1926년 6월 10일, 만세 시위를 이끈 학생들’을 주제로 진행하였다. 박 교수는 1926년 6월 10일 당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역할을 집중 조명하고, 구체적인 시위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7월 18일에 열린 제4강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가 맡아 ‘6·10만세운동은 민족통일전선운동이다’를 주제로 진행하였다.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진행한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 구파와 조선공산당이 연대했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성격과 의미를 깊이 있게 소개했다. 이번 독립민주시민학교는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만세운동의 주도층을 새롭게 밝히고, 역사적 의의를 대중과 깊이 있게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 근현대사기념관

민족사랑 2026년 7월호

2026년 7월 23일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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