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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특집] 새 정부, 역사 적폐 청산해야 – 더 이상 ‘외교참사’를 되풀이하지 말라

2017년 4월 27일 57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에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향해 치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돌출적인 독도 방문으로 역사・영토문제가 불거졌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대화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2월 28일 굴욕적인 ‘위안부’문제 합의라는 ‘외교참사’를 저질렀다. ‘합의’가 나온 이후 양국 간의 대화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으며, ‘교육칙어’의 부활을 비롯하여 평화헌법의 개정까지 시도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화 행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원폭피해자, 사할린동포, 시베리아억류자, BC급 전범, 근로정신대, 야스쿠니문제, 강제동원・강제노동 등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뜨고 있다. 피해자들의 뜻을 철저하게 무시한 한국 정부의 ‘외교참사’가 불러온 재앙이 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한일위안부 합의’는 이미 폐기되었다고 보아도 마땅할 것이다. 새 정부는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 필수적인 과거사 문제의 해결방안을 종합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재 꽉 막혀있는, 일본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전사자 유골반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016년 4월 일본 정부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하여 전사자 유골수집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유골을 수집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발굴된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기 위해 유골의 DNA를 추출하여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유족들에게는 DNA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만드는 것

2017년 4월 21일 64

회원마당 은종복 서울중부지부 회원, 책방 풀무질 대표 나는 서울 명륜동에서 작은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을 23년째 꾸리고 있다. 1985년 여름 처음 연 이 책방은 일꾼이 3번 바뀌었고 내가 4번째 일꾼이다. 그때는 전국에 있는 대학 앞에 내가 꾸리고 있는 풀무질 같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이 하나 둘씩 있었다. 지금은 모두 문을 닫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만 남았다. 책방 이름이 왜 ‘풀무질’일까. 대장간에서 낫이나 칼을 만들 때 불을 피우고 센 바람이 일어나도록 푸푸 불어주는 기구가 ‘풀무’다. 그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행위가 바로 ‘풀무질’이다. 이 단어에는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들이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정권을 잡은 것에 불바람을 일으켜 맞서려는 저항의 뜻이 담겨 있다. 풀무질은 그 당시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회지 명칭이었고 그것을 본따 책방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전에 일했던 사람들은 2, 3년씩 풀무질을 꾸렸다. 나도 딱 10년만 책방을 하려 했다. 2003년 4월 1일이 내가 책방을 꾸린 지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책방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농사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책방을 그만 두지 못하게 만든 두 가지 큰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책방을 꾸리고 3년 뒤인 1997년 4월 15일에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판매죄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고 서울구치소로 옮겨 한 달을 갇혀 있었다. 그때 수사관들은 나를 국제사회주의자 조직원으로 몰려 했는데 아무런 혐의가 없자 이적표현물을 팔았다는 죄를

사상 관측소, 총독부도서관의 건립 전말 – 도서관 지어주고 광통관 얻은 조선상업은행

2017년 4월 21일 56

식민지 비망록 24 서울 을지로입구역 쪽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 방향으로 걷다보면 이내 도로의 동측에 해묵은 2층 벽돌건물 한 채를 만나게 된다. 서울시 기념물 제19호(2002.3.5)로 지정된 이 건물의 이름은 광통관(廣通館, 남대문로 1가 19번지)으로, 이곳과 바로 이웃한 자리에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광교)가 있다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은 원래 1909년에 탁지부건축소가 수형조합사무소(手形組合事務所)의 용도로 건립했으며, 이층에는 회합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곧잘 강연회나 경축연, 만찬회와 같은 모임들이 개최되곤 하였다. 그 시절 한국의 고건축 조사를 맡았던 일본 동경제대(東京帝大) 건축과 교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도 이곳에서 강연회를 열고 그 결과를 담아 <한홍엽(韓紅葉; 카라모미지)>이라는 소책자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비용을 제공한 대가로 조선상업은행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소유권을 취득한 광통관 전경.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광통관의 준공 당시부터 이곳에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의 본점이 옮겨와 상주하였고, 1911년 2월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으로 개칭된 시기를 거쳐 1924년 9월에 조선실업은행 건물(남대문로 2가 111번지)로 본점 위치를 변경한 이후에도 줄곧 은행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건물 전면의 출입구 상단에 여전히 부착되어 있는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이라는 석판이 이 건물의 오랜 내력을 짐작케 한다. 광통관은 당초 대한제국 정부 소유였으며 대한천일은행은 세들어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건물의 소유권이 조선상업은행으로 귀속된 데는 남다른 숨은 사연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7월 13일자에 수록된 「상은 건물(商銀建物)과 교환(交換)」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최상남 회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료 총 18점 기증

2017년 4월 21일 28

기증자료소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최상남 회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료 총 18점 기증 2월 9일과 3월 22일 2회에 걸쳐 최상남 님이 선친 최판용 씨의 사진과 전사자 유골전달에 관한 문 서 등 총 18점을 기증했다. 최판용씨는 1941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되어 1945년 7월 22일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전사, 1959년 4월 6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는데, 사진 뒷면에는 전사 날짜와 장소 성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상남 님은 아버지의 유품을 기증하면서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기록이 중요하니 연구소에서 정성껏 보존해 달라고 당부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2차 자료기증, 도서류, 문서류 총 40점 보내와 2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2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 기증자료는 1950년~60년대에 강화도에 거주한 황OO가 받은 상장, 통지표와 ????오천년민족문화사료전????(1993),????제5회대한민국서예대전도록????(1993)등문서와도서다. 이덕문 회원 미주 교포사회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 기증 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3회에 걸쳐 미주 한인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등을 기증했다. 신간회 신의주지부에 참가한 선친 이윤근 선생과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모친 김복선 권사의 자료 등 총 38점이다. 미국 동부 오레곤 주에서 1980년대 민주단체가 설립되는 과정을 기록한 “오레곤주에 심은 민주화의 씨앗”, 김근태 씨의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고문 중지 서명을 조직했던 선전물 등이 포함돼 있다.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대회 관련 자료들도 남북 민간 교류를 알려주는 소중한 사료이다. 윤무한 선생 유족, 유품·도서 기증 3월

박정희 혈서 관련 정미홍 형사재판 방청기

2017년 4월 21일 79

2014년 정미홍 씨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글을 지속적으로 퍼트리자 연구소는 정미홍 씨를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민사 손해배상소송은 1심과 2심에 이어 최종심까지 연구소가 승소하였다. 올해 1월 25일 대법원은 연구소에 대한 정미홍 씨의 명예훼손 사실이 인정된다며 3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한 것이다. 이렇게 민사소송은 연구소 승소로 마무리되었지만 형사소송은 현재 1심이 진행되고 있다. 3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증인으로 하는 두 번째 증인심문 공판이 317호 형사법정에서 열렸다. 오후 2시 30분, 법무책임자인 나는 박 실장을 교대역에서 만나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시끌벅적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317호 형사법정 앞은 이미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노인들로 가득차 복도를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증인심문을 마친 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광경. 오른쪽 태극기 바로 밑 빨간옷이 정미홍   “우리 뒤에 친박집회 관련 재판이 있나봐요.” 박 실장도 그런 것 같다며 “이런데서 태극기 부대를 만나다니 별일이 다 있네”라며 실소를 지었다. 10여 분쯤 지나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객이 너무 많아서 의자가 부족하여 뒤에 온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야 했고 더 늦은 사람들은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있어야 했다. 개정 시간이 임박하자 정미홍 씨와 변호인이 들어왔다. 앉아 있던 방청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까 그 노인들은 바로 우리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정미홍 씨가 방청객을 향해 “와주셔서

이승만암살 미수사건의 진실

2017년 4월 20일 72

사진 속 노인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임시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나무 단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는 사진이다. 단상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고 그 뒤에는 헌병 한 명이 단상을 엄중히 지키고 있다. 그런데 단상 뒤편에 한 노인이 보인다. 몸은 말랐지만 예전엔 힘깨나 쓴 듯 기골이 탄탄해 보이는 노인이다. 주변 풍경과 섞여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머리 위로 한 팔을 들고 있다. 손끝에 뭔가를 쥐고 있다. 권총이었다.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광장에서 6・25 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런데 이날 기념식에서 이승만대통령암살미수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당시 나이 62세였던 유시태. 그는 내빈석에 앉아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성큼성큼 단상으로 다가가 총을 겨눴다. 그는 대통령을 향해 2~3발을 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불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기사에는 유시태가 총을 쏘려고 할 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헌병 중위 이범준과 치안국장 윤우경에게 발각되어 저지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사진을 보자. 사진으로만 판단한다면 팔의 각도가 펴지는 순간 유시태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상을 지키는 헌병 뒤에 한 남자가 유시태 쪽을 향해 서있다. 그리고 그와 유시태 사이에 앞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의 얼굴이 반쯤 보인다. 그들이 유시태의 저격을 저지한 헌병 중위와 치안국장이었을까? 그것을 알 수는

신탁통치 반대는 애국이고 찬성은 매국이라는 주장이 합당한가요?

2017년 4월 20일 25

문 : 신탁통치 반대는 애국이고 찬성은 매국이라는 주장이 합당한가요? 답 :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겨 져 있습니다. 1946년 초 우리 사회는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찬·반탁’ 갈등의 격랑에 휘말렸다. 이 갈등은 당대의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석한 카이로회담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적당한 절차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 결정되었다. 이어 열린 테헤란회담에 참석한 소련의 스탈린은 처음에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나중에는 신탁통치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까지도 미․영․중․소 4개국은 신탁통치안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국내진공 등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시점에 우리의 국제적 지위는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임시정부의 수립이야말로 시급한 문제였다. 해방된 지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려 조선독립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에는 우리 민족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조선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합국 사이의 유일한 국제적 협약이기도 했다. 원래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우리 연구소의 초창기 이사진들은 누구?

2017년 4월 20일 20

우리 연구소의 창립 당시 명칭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현재의 명칭인 ‘민족문제연구소’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앞의 이름에서는 비타협적 비장감과 투쟁성이 확연히 느껴진다. 초창기 회원들의 경우 반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향수도 많다. 김성환(현 민청련 동지회장) 당시 사무차장은 광복 50주년과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시대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연구소 활동의 폭을 넓히자는 취지로 사단법인화와 이름 바꾸기를 추진했다고 밝혔다.(『계간 반민족문제연구』 1994년 겨울호) 1991년 창립부터 1996년 6월 법인등록까지 연구소는 소장과 연구원만 있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사진 등록이 필수요건이어서 이사장을 비롯한 다수의 이사진을 구성해야만 했다. 이사진 섭외는 김봉우 초대 소장이 도맡았다. 초대 이사장은 인권변호의 대명사인 이돈명 변호사였는데 그외에도 이사장 물망에 오른 사회 원로들이 몇 분 더 있었지만 고사했던 모양이다. 요즘은 대선 후보들 입에서조차 심심치 않게 ‘친일청산’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연구소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던 1990년대 중반에 친일문제는 여간 껄끄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이러할진대 연구소 이사로 이름을 올린다는 일은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단이었다. 연구소 입장에서도 누구를 초기 이사진으로 모시느냐는 대단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신생 단체의 경우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그 단체가 내세우는 원대한 포부보다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 단체에 모여 있는가에 쏠려 있다. 대개 단체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그 단체의 성격과 미래를 점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등기이사는 이돈명 변호사(이사장)와 김봉우

[특집] 새 정부, 역사 적폐 청산해야 – 국정 교과서 싸움의 마무리를 위한 제언

2017년 4월 20일 633

국정 역사교과서는 실패로 끝났다.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포함한 시민사회, 시·도 교육청, 정치권(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손을 잡고 벌인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의 ‘거의’ 완벽한 승리다. 굳이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아직 국정교과서 싸움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정교과서는 끝내 나왔고 국정제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따라서 새 정부는 촛불시민혁명을 완수한다는 차원에서라도 국정교과서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지금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교육부에서 밀어붙이는 검정교과서 개발 중지 및 새로운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따른 검정교과서 개발, 독립적인 ‘역사교육위원회’(가칭) 설치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국정교과서 금지법안의 조속한 처리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보기를 들어 국정교과서 금지법안은 역사교과용 도서를 대상으로 하는데 초등학교의 경우 역사를 사회과목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국정교과서 싸움을 하면서 역사교육의 문제가 초등교육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초등학교 사회교과서는 국정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이라고 국정교과서를 통해 하나의 역사만을 배울 이유는 없다. 수많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반대서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는 이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이제 초등학교 교과서의 국정제 문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문제는 또 있다. 국정교과서 사태를 통해 자본이 교육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전경련 출신의 전희경이 국정교과서 옹호의 선봉 역할을 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경련은 10여 년부터 역사교과서와 경제교과서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기업을 폄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교육과 사회교육에 부당하게 개입해 왔다. 교육은 정치권력뿐만

[시론] 세월호특조위는 반드시 재가동되어야 한다

2017년 4월 20일 143

  3월 22일부터 인양되기 시작한 세월호가 그 다음날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된 세월호를 보면서 2014년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기 위하여 일하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변호사들이 만든 법안은 세월호 참사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가족과 시민사회는 진상규명과 함께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법안에 담을 것을 요청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안전위해요소를 점검하고 대안을 마련하여 세월호참사 이후의 대한민국이 세월호참사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유가족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만든 법안이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다. 당시 모든 국민의 열망을 담은 이 법안은 여러 정당들이 자신들의 법안을 제출하였기 때문에 청원 형식으로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여야 논의 과정에서 그 정신이 많이 훼손된 채 입안되었다. 세월호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특조위)는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작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은 올 3월 2일 국회를 통과하여 3월 21일부터 공포·시행되었다. 선체조사특별법이 시행된 지 하루 만에 세월호가 인양된 것이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위원 중 5명은 3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출되었고, 그 전에 희생자가족대표가 3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8명의 위원들이 현재 시행령과 예산뿐 아니라 조사할 직원도 없이 세월호 선체 조사를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선체조사위라도 설치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정부가 자신에게 향할 비판을 막아줄 방패막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