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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 (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 1~5

2026년 1월 16일 30

이 글은 한국독립당 기관지 『한민』 주필 엄항섭 선생이 한국 광복 성립 전례를 뵈옵고 그 진상을 가져 임시정부 봉대에 성충이 가작한 미국, 멕시코, 쿠바 재류 동포에게 뵈어주기 위하여 왜적 비행기의 작격을 피하는 방공호에서 전례 성황을 기록하여 비행 우편으로 본보에 투고하였으므로 본보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 게재하여 일반동포의 일람을 공급한다. — 신한민보 편집자 쌩— 쌩— 시계 소리에 나는 놀라 깨었다가 한숨에 방문을 열고 보니 컴컴한 하늘에는 별만 반짝거리고 고요한 세상에는 숨소리조차 잠잠해졌다. 이것이 내일의 공작을 위하여 오늘의 피곤한 몸을 쉬는 우주만물의 일상 행사인가 한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전등 아래 몸시계를 비춰보니 바로 3시였다. 오늘 7시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를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다른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광의 전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연일 바빴다. 그런 까닭에 몸도 상당히 곤하였지만 워낙 잠을 설치고 겸하여 신경이 흥분되었던 관계로 밖에서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도 놀라 깬 것이다. 10리 밖에 있는 식장에 가서 외빈을 초대할 책임을 맡은 나는 남보다 먼저 대령할 의무가 있는 관계로 비록 시간이 좀 이르기는 하지만 마음놓고 다시 더 잘 수는 없었다. 나는 소제를 마친 후 옷을 단정히 입고서 깊이 잠든 중경의 밤거리를 밟고 식장을 향하여 나갔다. 이 밤에 이 거리로 걸어 나가는 것은 나 하나뿐이려니 하였더니 수십 리 밖 향촌의 농부들은 벌써 채소를 메고

1907년, 대한제국 위기 극복에 동참한 민초들

2026년 1월 7일 77

[후원회원마당] 1907년, 대한제국 위기 극복에 동참한 민초들 – 부천지역의 국채보상운동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시민기자 1997년 11월 우리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긴급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무능한 금융정책으로 많은 기업들은 무분별하게 외국 자본을 차입하여 과잉투자를 하였으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자본들은 급격히 빠져나갔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기업들은 파산하였으며 노동자들은 대량실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를 겪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국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나라에 위기가 찾아오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위기를 극복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창의했던 의병과 조선후기에 창의했던 의병이 바로 그것이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모으기운동’을 전개하였다. 부족한 외화를 보충하기 위해 금모으기운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4년 만에 IMF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금모으기운동이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도 있었다. 대한제국시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하여 한반도로부터 강대국들을 몰아냈으며 동시에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켰다. 또한 대한제국에 과도한 차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총 1300만원에 이르는 거대한 돈으로 이 액수는 대한제국의 1년치 예산과 맞먹는 것이었다. 국력이 많이 약해진 대한제국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 선조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07년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이

시대의 마지막 불꽃, 강태선 애국지사를 만나다

2026년 1월 7일 64

[후원회원마당] 시대의 마지막 불꽃, 강태선 애국지사를 만나다 한요나 후원회원, 시민기자 미완의 독립, 완수는 후대의 몫, 세대를 잇는 연대 계승의 과제 비가 유달리 많이 내린 지난가을, 제주시 자택에서 강태선 지사를 만났다. 그는 제주도에 한 명 남은 생존 독립운동가다. 대한민국 전체에서 살아계신 독립운동가는 다섯 분뿐이다. 101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시대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리는 그의 눈빛은 궂은 비가 내리던 그날의 날씨처럼 서늘하면서도 형형했다. 강 지사를 찾은 이유는 최근 내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친일 청산’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6세에 독립운동에 투신해 일제의 고문과 옥고를 치르며 광복을 맞이한 산증인에게, 우리는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의 증언은 단순히 과거 회상을 넘어, 오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정신적 유산과 미래의 과제를 엄중히 확인시킨다. 16살의 결단, “투쟁은 그저 일상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4년 태어났다. 우리 역사 대신 일본 역사를 배우며 식민지의 청소년으로 성장한 그가 모든 것을 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때 나이는 고작 16세였다. 당시의 긴박했던 활동에 대한 물음에 그는 “다 비슷비슷했다”며 덤덤하게 답했다. 그 한마디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이 특정인의 영웅담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동지들의 ‘일상’이었다는 무게감이 실려 있다.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는, 시대를 함께 견뎌낸 이들과의 묵묵한 연대가 느껴졌다. 모든 활동은 지하 점조직으로 이루어졌다.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위장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동지들을 규합하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조선식산은행의 방계로 창설된 성업사(成業社)라는 회사의 정체

2026년 1월 7일 73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0] 대천 간척지 소작인의 명의로 세워진 ‘보령 성업사 시덕기념비(1938년)’ – 조선식산은행의 방계로 창설된 성업사(成業社)라는 회사의 정체 이순우 특임연구원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가 마을 어느 곳을 가나 그 주변에 ‘간사지(干瀉地)’라는 지명으로 통용되는 지역들이 제법 존재한다. 대개는 이 ‘간사지’라는 표현이 ‘간척지(干拓地, 갯벌매립지)’의 의미를 품고 있는 말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실상 ‘간사지’는 ‘간척지’도 아닐 뿐더러 — 정확하게는 — ‘간석지(干潟地, 갯벌)’를 잘못 적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간석지’라고 할 때 석(潟)이 ‘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앞에 붙은 ‘방패 간(干)’이라는 글자는 과연 어떤 뜻으로 새겨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고문헌 자료에는 갯벌을 나타내는 단어로 해택(海澤, 갯벌), 석로(潟鹵, 소금펄), 노지(鹵地, 짠땅) 등의 용례가 두루 확인되지만, 유독 ‘간석지’라는 표현 그 자체는 좀체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아무래도 일본 쪽에서 넘어온 근대식 용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찾아봤더니, 1867년에 발행된 『일영사전(Japanese and English Dictionary)』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Hikata, ヒカタ, 干瀉, A dry sandy beach – Hiki-shiwo, ヒキシホ, 引汐, Ebb-tide 여길 보면 우선 ‘간사(干瀉, 히카타)’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어찌 된 것인지 그 뜻이 ‘갯벌’이 아닌 ‘모래해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사(瀉; 샤)’라는 한자는 일본어에서 음독(音讀)이건 훈독(訓讀)이건 간에 ‘카타’라는 발음과 무관하고, 정작 이 음가를 갖는

항일혁명가 이관술,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무죄 확정까지 걸어온 험난한 여정

2026년 1월 2일 114

[기고] 항일혁명가 이관술,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무죄 확정까지 걸어온 험난한 여정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12월 22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선고공판. 그렇게 원했던 이관술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제에 맞서 항일혁명운동을 펼쳤던 이관술. 해방 후에는 첫 정치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을 이어 5위. 민중의 지지를 받던 지도자 이관술을 위조지폐범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사법 살인한 미군정기 재12월 22일, 서울중앙지법 서문 앞.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무죄선고 환영 기자회견판을 뒤엎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신청했을 때는 2023년 7월. 그때 재심 결과를 낙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장경욱 변호사가 신청인 손옥희(이관술의 외손녀)를 만나 재심을 논의했고 이후 신윤경 변호사(법무법인 동화)가 함께했다. 하지만 재심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가 더 컸다는 게 사실이다. 2023년 재심 신청, 낙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관술 유족뿐 아니라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재심 이전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이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사회주의계열뿐 아니라 독립운동가 서훈을 늘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019년, 공적서를 작성해 보훈처(현 국가보훈부) 서훈신청을 했지만 결과는 허탈했다. 공적심사위는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은 명백하지만 ‘광복 이후 행적 때문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해방 후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빠졌지만, 누구나 이관술이 위폐범이란 누명을 쓴 ‘정판사조작사건’ 때문이라고 여겼다. 실망한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20년에 발족한 제2기 진실과 화해를

12‧3 내란 재판의 역사성과 문제점

2026년 1월 2일 124

[기고] 12‧3 내란 재판의 역사성과 문제점 손익찬 민족문제연구소 고문 변호사 1. 12‧3 내란 재판의 역사성 주요 내란 사건은 헌법 개정과 맞물려 있는바,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차 개헌(부산정치파동) : 제헌 헌법상 대통령은 4년 중임제의 국회 간선제였다. 1950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으나 1951년 1월에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군인을 동원하여 야당의원 47명을 연행(10명 구속)하는 등의 방식으로 국회의원을 협박하였다. 다시 발의된 직선제 개헌안은 군인과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통과되었다. ② 제5차 개헌(5‧16 군사반란) : 1960년 4‧19 혁명의 결과 민주정부가 수립되며 의원내각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육군 소장 박정희 등은 1961년 5‧16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국정을 장악했다. 그리고 군사반란 세력의 주도 하에 1963년 제5차 개헌안이 통과되었다(4년 중임제의 대통령 직선제). ③ 제7차 개헌(10월 유신) : 박정희는 1963년 및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고 1969년에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3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목표로 1972년 10월에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 의원과 시민들을 납치, 고문하며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 1972년 말에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고 직선제를 폐지하는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④ 제8차 개헌(12‧12, 5‧18) :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에, 육군 소장 전두환 등이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에는 광주 민중을 학살하였다. 이 군사반란 세력의 주도하에 1980년 10월 제8차 개헌이 이뤄졌다.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26년 1월 2일 113

[초점]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2·3 불법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에서 울려 퍼진 시민들의 목소리가 이어지도록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뿐만 아니라 부산 민주공원,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까지 이어진 관련 활동을 소개해 본다.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12월 5일 금요일부터 20일 토요일까지 완전한 내란 청산을 위한 숙명 민주주의 프로젝트 〈12·3비상계엄저지 숙명인 행동 기억 전시회〉가 진행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작성한 대자보와 시국선언 현장의 다양한 사진, 영상을 소개한 이번 전시는, ‘세상을 바꾸는 숙명인들의 모임 설화’가 기획하고 주최하였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전시 장소를 제공하였다. ‘세상을 바꾸는 숙명인들의 모임 설화’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으킨 불법 계엄 시도를 저지한 지 1주년을 맞아 이를 기억하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당시 대자보에는 불법계엄에 대한 숙명여대 학생들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담겼으며, 사진을 통해서는 당시의 시위 분위기와 다양한 깃발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짧지만 의미있는 전시가 끝난 후 주최 측은 전시한 깃발과 시위용품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12월 29일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시사IN이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하는 ‘시사IN 독자, 시민과 함께하는 〈2025 올해의 사진〉’ 전시가 시작된다. 시사IN은 2016년부터 한 해의 마지막 발간 호에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고 ‘올해의 사진’을 담은 송년호를 제작해왔다. 시사IN 기자들의 사진뿐만 아니라 외부 사진가들의 다양한 사진도 포함되어 있으며, 시인, 소설가 등 문인들의 짧은 에세이를 더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올해는 10주년을 맞아

「12·3 내란외환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 핫팩 나눔 후기

2026년 1월 2일 61

[초점] 시민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었습니다 「12·3 내란외환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 핫팩 나눔 후기 지난 12월 3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12·3 내란외환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에 참여하여 12·3 불법 계엄 1년을 기억하고, 한파 속에서 다시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회원들과 함께 핫팩 1,000개를 나누었다. 핫팩 나눔을 시작하자 매서운 바람 속에서 몸을 움츠렸던 시민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모든 분들이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그리고 박물관 리플렛을 받은 시민들은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시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준비해 간 핫팩은 갑작스러운 한파 속에서 30여 분 만에 모두 소진될 정도로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구소와 박물관 회원들은 물론,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과 직접 만나 핫팩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 시민들과 마주하며, 불법 계엄으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란은 아직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내란 세력에 대한 진상 규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겨울, 계엄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앞에 모였던 시민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며, 광장에서 외쳤던 사회대개혁의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연대의 힘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직도 거리에서 싸움을 이어가는 동지들이 있고, 진실과 정의를 향한 목소리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연대의 힘을 믿기에, 우리가 바라는 사회대개혁과 역사 정의의 실현이 반드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경기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성료

2026년 1월 2일 39

[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경기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성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는 지난 12월 1일 오후 수원특례시 광교푸른숲도서관 강당에서 경기도청이 주최하고 본 회가 주관한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발굴과 향후 과제> 학술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경기도 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걸맞은 예우와 선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행사에는 기념사업회 조세열 홍보위원장과 방학진 사무국장, 이용창 학술위원장을 비롯해 김해련 경기도 복지정책과장, 김호동 광복회 경기도지부장 등 40여 명의 관계자와 시민이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방학진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조세열 기념사업회 홍보위원장의 개회사와 김훈 경기도 복지국장(김해련 과장 대독)의 축사로 문을 열었다. 조세열 위원장은 “경기도는 항일 의병 전쟁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었음에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영웅들이 많다”며 이번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에서는 역사적 현장 분석부터 구체적인 정책 제언까지 폭넓은 논의가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를 맡은 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는 ‘항일의 현장에서 만나는 경기독립운동’을 주제로, 경기 동·남부와 서·북부의 지역적 항일 투쟁 특성을 분석했다. 김 교수는 “남한산성 연합의병과 서울진공작전 등 무장 투쟁의 요충지였던 경기 지역의 특성을 살려, 안양 원태우 의거지나 이천 이수흥 의거지 등을 ‘살아있는 항일 독립정신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김대용 여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은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포상 현황과 과제’를 통해 정부와 지자체의

군국가요의 원류인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2026년 1월 2일 88

[소장자료 톺아보기 76] 군국가요의 원류인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이번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류영철 회원(대구지역위원회)이 일본 육군 수뇌부의 봉천회동 사진과 함께 기증한 일본 군가 음반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이」이다. 이 음반은 종이 케이스에 들어있는데 그 구성은 30cm 크기의 레코드 2장, 수록곡 목록과 가사, 여러 전쟁터 사진으로 구성된 내지와 구 일본 제국 시기의 임시소집영장, 군인칙유(軍人勅諭), 제국해군의 견장(肩章)으로 이루어진 광고물이다. 제작사는 현재도 음반 제작을 비롯한 각종 사업을 운용하고 있는 ‘일본 크라운 주식회사’(日本クラウン株式会社, Nippon Crown Co., Ltd.)로 1963년 도쿄에서 창립되어 1973년부터 1990년까지는 ‘크라운 레코드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2장 음반의 정식 레코드 번호는 GW10013과 GW-10014이다. 레코드와 내지, 광고물 어디에도 제작일자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앞의 일본 크라운 주식회사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동일한 사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바로 일본 군가」 음반도 이 시기에 발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군가(軍歌)는 막부 말기 서양식 군대 훈련을 위해 도입된 후, 1882년 <발도대(抜刀隊)>1의 등장을 계기로 전 국민이 부르는 하나의 장르로 확립되었다. 청일전쟁 시기에는 전황을 전하는 뉴스이자 오락으로서 폭발적으로 유행했으나, 러일전쟁 때에 과도한 생산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 전황 묘사보다는 특정 영웅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평화기였던 다이쇼 시대에는 신작 대신 기존 멜로디에 가사만 바꾼 개사곡이 성행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군가 멜로디가 노동가나 반전가, 심지어 조선과 중국의 혁명가로 변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 당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