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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미영격멸을 구호 삼아 달린 부여신궁과 조선신궁 간 대역전경주

2017년 1월 23일 12

미영격멸을 구호 삼아 달린 부여신궁과 조선신궁 간 대역전경주 – 징병제를 대비한 매일신보사의 조선청년 체력향상 프로젝트 식민지 비망록 21 ∷ 이순우 책임연구원   간혹 신사(神社)와 신궁(神宮)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한 때가 있다.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명문 규정은 찾을 수 없으나, 신궁은 대개 메이지시대 이후 ①천황, ②황실의 조선신(祖先神), ③일본평정에 공적이 있는 특정한 신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신사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개념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신궁은 ‘신사 중의 신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여느 신사와는 격을 훨씬 달리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매일신보> 1941년 1월 4일자에 수록된 부여신궁 모형 사진. 부여신궁은 이른바 ‘내선일체’의 정신적 지주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이 추진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창립된 신궁은 두 군데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 땅을 영구 통치하기 위한 그네들의 수호신이 사는 영역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 땅에 세우려던 ‘부여신궁(扶餘神宮)’이며, 이곳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여신궁의 창립과 관련하여 <통보(通報)> 제42호(193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총독부의 발표문에는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때마침 미증유(未曾有)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반도의 사명은 점점 무거워져 가고, 혼연일체 로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중대사명달성에 매진할 때를 당하고 있으므로, 총독부로서는 시정(施 政)의 전반에 걸쳐 거듭 일단의 비약적 진전을 도모하고자 전력을 경주해 나가겠습니다만, 이 럴 경우 서정(庶政) 진전의 원동력이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 항일·친일·친미를 넘나들다

2017년 1월 23일 26

열전 친일파 10 ∷ 이명숙 선임연구원   2016년 12월 28일 교육부는 국민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내놓았다. 앞서 자신들이 검정 통과시켰던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매도하고,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수십 억의 홍보비를 들여 대대적인 홍보도 진행했다. 7편의 홍보 영상 중 두 편의 영상 주인공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 첫 영상에서는 기존 교과서에 유관순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육부 국정역사교과서 홍보영상 캡쳐화면 하지만 초・중등 교과서에는 모두 있다는 비판을 받자,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없다는 내용으로 바꿔 두 번째 영상을 발표했다. 이 영상의 도입부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다”라고 어느 역사학자가 주장했다는 글로 시작한다. 즉 유관순을 친일파가 영웅으로 만들었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집필자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초・중등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유관순에 대해 고등학교에서는 세세히 다루지 않고 오히려 3・1운동에 대해 심화학습을 진행하는 것이 교육과정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위 홍보영상에서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주장만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관순을 대중적으로 알린 데에는 친일파이자 유관순의 스승인 박인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친일파 중 유일하게 체포와 투옥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창씨명 永河仁德)은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닐 때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유관순을

이승만 독재의 서막 – 부산정치파동

2017년 1월 23일 17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3 ∷ 조한성 선임연구원   대통령 vs 국회 : 두 개의 자유당 1950년 5.3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는 이승만에게도,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에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총선의 결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어 다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도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납북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원내단체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70명 정도의 국회의원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확보했지만 1951년 초 세상에 드러난 국민방위군사건, 2월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계속된 실정(失政)으로 그마저도 지키기 힘들어졌다.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국민방위군사건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며 사임하자 국회는 민국당의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민국당 소속 부통령의 출현은 이승만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승만은 거대 여당의 조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먼저주력한 것은 거대 여당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원내 지형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고 1952년에 있을 정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당은 원내와 원외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원외 신당은 이범석의 족청 계열과 국민회 계열 등이 주도했다. 원외 세력은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든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원내의 신당 추진은 이승만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었다.   원내의 신당 추진은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만든 공화민정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화민정회에서 신당의 조직을 주도한 세력은 소수의 공화구락부 계열이었다.

[인터뷰]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과 독립운동에 대한 소회

2017년 1월 23일 5

인터뷰 – 박도 회원 ∷ 정리 : 김덕영 선임연구원     문 : 본인 소개와 더불어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계기는? 답 :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해방 전 해 나의 아버지는 중학생이었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대동아전쟁 학병으로 끌려갈까 도쿄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아들을 곧장 결혼시켜 그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출생부터 우리 현대사와 맞물렸다. 나는 중학교까지 고향 구미에서 자랐다. 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전방 소총소대장으로 병역을 마친 뒤 곧장 국어교사가 됐다. 2004년 정년을 5년 남긴 채 조기퇴직한 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시민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은 연구소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부터 시작된다. 당시 김봉우 선생이 소장이었는데, 연구소 소식을 언론으로 가끔 접하면서 인연을 갖고 싶었다. 2002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후 당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을 인터뷰하게 되면서 인연을 갖게되었다. 좀 쑥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2004년 6월에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발간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인세를 받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족정기 선양을 위해 수고하는 연구소 가족들에게 밥을 한 끼 사고 싶어 이곳을 처음 찾게 되었다. 오늘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왔는데 옛 모습 그대로다. 연구소 옆에는 그새 교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재벌들은 무슨 단체에는 돈을 수십억씩 퍼붓고, 한 승마 선수에게도 수십억 원짜리 말도 그저 사주면서 우리 민족정기를 지켜나가는 연구소는 마냥

[기고] 민족문제연구소의 품에서 펼쳐 온 보추협 활동 13년을 되돌아보며

2017년 1월 23일 32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여러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대표 이희자입니다. 2017년정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다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13년 전을 떠올리며 회원분들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활동가도 지식인도 아닌 저는 일제의 강제동원에 아버지를 빼앗긴 유족입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다보니 그것이 저절로 운동이 되었고, 29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활동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 여섯 건을 찾았습니다. 모두 일제가 작성했고, 거기에는 징용 나가실 때 우리 집 주소가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1944년 강화군 송해면을 떠나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끌려가셨고, 그때 저는 겨우 돌을 갓 지난 나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 전현 181 병원에서 전병사(戰病死)하셨습니다. 저는 관련 기록이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어서 2003년에야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4월 일본이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켰다는 기가 막힌 사실도 2003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록을 하나하나 찾으면서 도대체 왜 일본은 이 사실들을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화가 났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나서서 찾지 않았다면 아버지 죽음에 관한 기록은 가족들도 모른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아직도 분통이 터집니다. 보추협의 설립과 활동 아버지 기록을 찾은 계기로 저는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분들과 유족들과 함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설립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사실을

‘5·16쿠데타 발상지’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철거 비사

2017년 1월 23일 6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20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기습 철거하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   국회의 박근혜 탄핵소추 의결을 5일 앞둔 지난해 12월 4일, 영등포구 문래동 근린공원의 박정희 흉상에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지고 코 부분 등이 망치로 훼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 영등포경찰서는 흉상 훼손 당사자로 최모 씨(32·조형미술작가)를 특수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자들은 가장 먼저 ‘동종 전과 용의자’에게 전화로 사건을 친절히 설명하고 난 후, ‘혹시 이번에도 네가 한 짓 아니냐?’ 혹은 ‘이런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동종 전과 용의자는 바로 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입니다. 감시카메라의 보호까지 받고 있는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이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다시금 수난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 달에는 박정희 흉상 수난사의 압권인 2000년 11월 5일 박정희 흉상 철거의 숨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DJP연합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후보는 1998년 대선을 앞두고 ‘TK의 대부’라 불리는 신현확을 만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동서화합 차원에서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결과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은 물론 야당인 한나라당까지 모두 건립에 찬성합니다. 이에 대해 270여 시민사회단체들은 2000년 9월 28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를 결성하였고,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 국회의원들조차 박정희기념관 반대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연대가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반대

독립운동 탄압의 대명사, 종로경찰서-송장 아니면 산송장 되어 나와

2017년 1월 23일 17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29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 표지. 1915년부터 1929년까지 사용했던 종로경찰서 건물(종로 2가 8번지에 있던 옛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그려져 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악랄하게 탄압하던 일제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건물 외벽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누군가 건물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게시판과 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 사원 5명이 병원에 실려 가고 지나가던 민간인 2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피해도 피해지만 총독부의 대표적 통치기구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경찰서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성 시내에는 비상이 걸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삼엄한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 한 총독부는 사건을 취재하거나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돌입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제일’의 고등계 주임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를 선봉에 내세웠다. 그는 추적 끝에 폭탄투척을 했거나 적어도 그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으로 보이는 자를 김상옥(金相玉)으로 지목하고 은신처를 알아내는데 주력하였다. 매부의 집에서 은신하던 김상옥은 주변인의 밀고로 미와에게 탐지되자 총격전을 벌이면서 도주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도 경찰 몇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포위망을 여러 차례씩 뚫으면서 일본경찰에 많은 피해를 주게 되자 일본은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은 수백 명의 경찰에게 포위당해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기증자료소개

2017년 1월 23일 1

심정섭 지도위원 제49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12점 보내와   지난 11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49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담양군지>(2002), <완도군지>(1977), <함평군사>(1999) 등 지방사 관련 자료 12권이다. 이 중 완도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완도군지>에서는 “새마을 지도자의 거룩한 정신과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 마을이 발전했다”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새마을운동을 미화하고 있다.   이경숙 님, 부친의 거창공립국민학교 졸업앨범 등 귀중한 소장자료 120점 기증   지난 12월 13일, 이경숙 님이, 부친이 생전에 소장하고 있던 자료 120점을 기증했다. 1933년생인 부친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공립국민학교, 거창공립농업중학교 등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기증 자료는 거창공립국민학교 졸업앨범(30회, 1942.3), 졸업증서 및 상장, 1950년대에 쓴 일기장, 간이세금계산서 및 영수증 등이다. 이경숙 님은 조승미 회원(전 연구원)의 소개로 연구소를 알게 되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게양탑

2016년 12월 20일 308

식민지 비망록 20 ∷ 이순우 책임연구원 남산 위 한양공원 터가 조선신사 건립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9년 7월 20일자 기사 3·1만세사건이라는 민족적 저항의 여파가 아직 거세게 지속되고 있던 1919년 7월 18일, 일제는 이러한 혼돈상태를 서둘러 봉합하려 함인지 관폐대사 조선신사(官幣大社 朝鮮神社)의 창립을 공표하였다. 여기에는 이른바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으로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죽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제신 (祭神)으로 삼는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6월 27일에 개칭)의 건립을 통해 자기들의 영구적인 식민통치가 무탈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조선신궁이 들어선 자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서울 남산 중턱이었다. 처음에는 신사의 배치가 남면(南面;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는 것)이어야 하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야 좋다는 조건에 따라 경복궁 신무문 후면의 백악산 중턱과 남산 왜성대 남쪽의 경성신사(京城神社) 인접지가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결국 경성 시가지가 한 눈에 조망되는 명승지라고 하여 남산 위 한양공원(漢陽公園; 1910년에 개설) 터가 신궁조영 터로 최종 낙점되었다. 이에 따라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말끔히 제거되었고, 신궁 영역에 포함된 이런저런 시설물들도 잇달아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다. 우선 1913년 정초 이래 한양공원 내에 자리했던 오포대(午砲臺)는 그들만의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감히 대포소리를 울릴 수 없다는 이유로 1920년 5월에 효창원(孝昌園)과 인접한 선린상업학교의 뒤편 언덕으로 이전되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5일자에 수록된 남산 국사당의 모습이다. 그리고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국사당(國師堂)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고종 때의

우리나라 최초의 위조지폐사건과 이관술

2016년 12월 20일 260

해방70년 특별기획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2 ∷ 김선호 선임연구원 소공동의 위폐범 1946년 5월 15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희대의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했다. 사건의 개요는 서울시 소공동에 있던 정판사(精版社)라는 인쇄소에서 일단의 무리가 900만 원 이상의 조선은행권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정판사는 해방 전 조선은행 지폐를 찍어내던 곳이었다. 수사당국은 정판사 직원들이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정판사에 있던 조선은행권 지폐원판을 가지고 위폐를 찍어냈다고 발표하였다. 위폐사건의 주범은 의외로 손쉽게 잡혔다. 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에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하는 해방일보사가 입주해 있었다. 당시 사장은 권오직(權五稷), 편집주간은 조일명(趙一明)으로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장택상은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수사당국은 백원권 원판 9개, 옵셋트 인쇄용 원판 3개, 잉크 3종을 증거로 제시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사진에 있는 건물이 조선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이다. 「위조일당은 16명, 전부가 공산당원, 이관술, 권오직은 피신」 <동아일보> 1946.5.16. 명색이 희대의 위폐사건인데, 위조지폐가 한장도 안 나온 희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 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을 포함해 정판사 직원 15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거물급 인사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의 이름은 이관술(李觀述)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겸재정부장이었다. 체포령이 떨어진 이관술은 도피 중 7월 7일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8월 12일 검사국에 송치되어 8월 21일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공판과정에서 자신은 사건 당시 북한을 여행 중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권오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