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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2026년 4월 6일 146

[특별기고]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을소냐!” – 강우규 의사의 항일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의 자료보완(1) 이순우 특임연구원 거족적인 3·1만세의거 당시 독립선언사건 관련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무죄선고로 방면)를 치렀던 임규(林圭, 1867~1948) 선생이 남긴 『북산산고(北山散稿)』(1959년 필사영인본)라는 책이 있다. 여기를 보면 그 당시 감옥창살 안에서 전해 들었던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에 대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구절이 나온다. 1919년 9월 2일 바로 그날 오후 5시, 가혹했던 무단통치의 원흉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전임 총독이 경질된 자리를 물려받은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남대문정거장에 막 당도했을 때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내외가 탄 마차(馬車)에서 7보(步) 떨어진 자리에서 터졌다. 그 바람에 총독 저격에는 실패하였고, 주변에 있던 영접 인파 속에서 37명의 부상자(중상자 5인 포함; 전체명단은 『매일신보』 1920년 1월 30일자에 게재된 ‘예심결정문’에 서술)가 발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기도 순시(巡視; ‘순사’와는 다른 별개의 직급) 스에히로 마타지로(末弘又二郞)가 좌편 대퇴부를 뚫은 탄환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8일 뒤인 9월 11일에 숨졌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1881~1919)도 복부 손상에 따른 복막염과 폐렴 증세로 그해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경성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1880~1924) 역시 흉부에 파편을 맞아 여러 해에 걸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도져 그 또한 1924년 4월 11일에 이르러 끝내 세상을 떠났다. 거사 이후 강 의사는 여러 동지의 주선으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2026년 4월 6일 101

[초점]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개최 조선민족대동단 창설 107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월 27일(금)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동농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동농문화재단 김선현 이사장, (사)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권영관 회장,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수옥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조선민족대동단이 창설된 지 107년 만의 첫 전시로, 조선민족대동단의 독립정신과 대동 정신을 재조명하고 있다. 조선민족대동단은 직업과 신분, 성별, 종교를 초월하여 황실 인사부터, 관료, 유림, 종교인, 교사, 학생, 상인, 보부상, 백정, 기생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포용하였다. 이들은 대동 정신을 실천하여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이번 전시는 여러 역사적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이 지향했던 가치와 그 의미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관람객들은 전시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조선민족대동단의 무차별의 절대평등 정신과 실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시를 통해 직접 확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꼭 실천해야 할 덕목임에 큰 공감을 표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제2차 3·1혁명선언’으로 불리는 ‘대동단선언’과 총재 김가진이 작성한 ‘시국강연회’,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 등 30여 점의 희귀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도 ‘일제 본토 침공계획을 의논한 편지’는 총재 김가진(1846~1922)이 무정부장(武政部長) 박용만(1881~1928)에게 보낸 비밀편지로, 10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편지는 조선민족대동단이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너머 전쟁을

연구소가 발굴한 김한동 지사에 애국장 추서

2026년 3월 31일 95

[초점] 연구소가 발굴한 김한동 지사에 애국장 추서 제107주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신청한 김한동 지사가 포함됐다. 지사에게는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한동 지사는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항일투쟁에 나섰던 분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전남노농협의회에 참여했으며, 1932년 10월에는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1935년에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했다. 1937년에 서울에서 적색노동조합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결국 1939년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김한동 지사는 미군정 법령 위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혔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좌익계열 수감자 등을 적법 절차 없이 학살했는데, 지사도 1950년 7월 진주에서 총살당했다. 김한동 지사는 이미 국가보훈부로부터 서훈이 거부당한 이력이 있는 분이다.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였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역위원회(위원장 김순흥)는 2019년부터 윤윤기·김범수 선생을 시작으로, 2020년 이기홍·장재성 선생 그리고 2021년에는 김한동 지사에게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시민의 이름으로 수여했다. 국가는 외면하지만 시민은 독립유공자로 기리겠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이번에 국가보훈부가 김한동 지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다. 지사의 후손과 지역 시민사회의 노력이 쌓이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이다. 연구소도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연구소는 2025년 6월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를 토대로 전남지역 독립운동가 37명의 포상을 신청했다. 자료 발굴과 간행을 계기로 잊힌 독립운동가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김한동 지사가 서훈된 것이다. 다른 분들에 대한 포상 여부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 열어

2026년 3월 31일 106

[초점]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 열어 지난 2월 28일(토) 오후 3시,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한국순교복자수녀원 강당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연구소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전 행사부터 새로운 5년을 설계하는 비전 선포, 그리고 소장 이취임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후 1시부터는 사전행사로 회원들이 효창원에 방문해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참배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창립 35주년 기획전’을 관람하며 연구소가 걸어온 고난과 투쟁의 역사를 다시금 확인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본격적인 기념식이 시작됐다. 함세웅 이사장의 기념사가 있었고, 연구소 초창기 이사를 지낸 송기인 신부가 격려사를 하였다. 송기인 신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초대 위원장 재직시 받은 급여 전액인 2억원을 연구소에 기부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초석을 놓았다. 격려사에서 연구소와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며 시민단체의 재정 자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서 지난 35년을 돌아보는 기념 영상을 상영한 후, 연구소의 향후 5개년 주요 사업계획이 발표되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개정증보판 및 디지털 통합 플랫폼 구축 ▲‘신흥무관학교인물사전’ 발간 및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한일 과거청산 아카이브 네트워크 구축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디지털 시대에 발맞춘 역사정의 실천의 청사진을 공개했다. 뒤이어 소리꾼 백금렬 회원이 민요 뱃노래 반주에 맞춰 연구소의 35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개사곡을 열창해 큰 호응을 받았다. 3대와 4대 소장의 이취임식이 거행되었다. 23년간 연구소를 이끌며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등 큰 업적을 세운 임헌영 소장께 연구소는 감사패를 드리며 종신 명예소장으로 추대하였다.

민족사랑 2026년 3월호

2026년 3월 27일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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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불꽃을 꿈꾸다―부민관 폭파 의거 다큐멘터리’ 제작 소회

2026년 3월 10일 145

[후원회원마당] AI로 재현한 그날의 생생한 이야기 ‘청년, 불꽃을 꿈꾸다―부민관 폭파 의거 다큐멘터리’ 제작 소회 김욱환 프로젝트 AI 수퍼바이저, ‘표현하는 나무’ 대표 민족문제연구소가 수행한 광복 80주년 ‘경기도 독립운동 자료 수집 사업’ 영상제작 수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출자한 기획사인 민연주식회사에서 진행했다. 나는 콘티, AI 영상 수퍼바이저로 참여했다. 연구소 김세호 PD가 총괄 PD, 감독으로 메가폰을 잡았고, 작가 경력 17년차 사학과 출신인 변지혜 작가가 멋진 글을 써주었다. 그리고 연구소 오경아 씨가 AI 소스를 멋지게 편집해 후반작업을 완성해 주었고, 최하연 씨는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는 전 과정이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자료조사부터 촬영, AI 생성까지 많은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부민관은 현재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구조는 출입구의 위치나 화장실, 복도 등의 배치가 많이 바뀌었지만 큰 뼈대는 그대로라고 한다. 한편 202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 80주년으로 경기도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에서 특별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사전 미팅에서 AI로 역사 다큐가 제작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2025년 초반 당시 ‘나노바나나’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과도기적 생성형 AI가 여러 개 쏟아져 나오던 그때, ‘VEO3’가 출시되어 ‘클링(Kling)’과 경쟁하던 시기였다. 스테이블 디퓨전에 이것저것 설치해서 커스텀을 공부하며, 파이어 플라이로 AI 영상 제작을 처음 공부하며 맛보고 있을 때라서 데이터나 소스에 대한 비중을 크게 가져가는 작업방식을 추구했다. 애초에 그림꾼이었고 기획자였는데 장면을 하나씩 구성하는 건 감독이 의도한 대로 가주면 더 효율적이라고

한일 양국 정부는 모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에 나서라

2026년 3월 10일 140

[돌려보기] 한일 양국 정부는 모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에 나서라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2026년 1월 13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조세이(長生)탄광에서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을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양국 정부의 합의는 유족들의 절실한 염원에 응답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일 시민사회가 양국 정부를 움직여 거둔 중요한 성과이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결성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아래 보추협)와 보추협의 사무국을 맡은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오랫동안 벌여왔다. 유족들은 돌아가신 가족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고 싶다는 일념으로 2000년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반환 청구 소송을 시작으로 2005년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 1948년 한국으로 송환된 유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또한 두 단체는 2014년부터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가마후야’와 연대하여 일본 국회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교섭을 벌여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조사와 반환을 요구해왔다. 한일 시민단체는 2016년 아베 총리가 주도하여 추진한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 제정을 앞두고 조선인 희생자도 조사 대상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조선인 희생자를 제외시킨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야당 의원의 질의를 통해 후생노동대신으로부터 한국 정부의 제안이 있으면 대응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끌어내기도 했다. 한일 시민사회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일본 정부는 DNA 감정 대상 기준을 확대했으며, 2023년에는 문재인 정부 당시에 확인했지만 코로나로 봉환하지 못한 한국인 희생자 한

가슴 떨렸던 난징, 항저우,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2026년 3월 10일 235

[답사기] 가슴 떨렸던 난징, 항저우,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정해성 교사 2026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경기남부 역사교사모임의 주도하에 4박 5일의 난징-항저우-상하이 답사가 있었습니다. 답사의 주요 목적은 1926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설립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독립운동가분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했던 유적지를 체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답사에는 18명의 역사 선생님, 6명의 가족분들과 함께 해설사로 참여해주신 전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 독립운동여행사 ‘후라’ 김재운 대표, 대성투어 이민정 이사 등 총 28명의 답사단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답사팀은 24일 오전 12시 30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후, 떨리는 마음을 안고 약 2시간을 이동하여 ‘난징의 루커우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난징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정부(당시 국민당)와 교섭하기 위해 설치한 공식 외교 기구였던 ‘주화대표단’의 건물이었습니다. 본래 이 건물은 충칭에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충칭에서 난징으로 대표단 건물이 이전되었고, 1948년에 해체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내 외교사무를 전담하였습니다.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귀국 등 여러 가지 현안들을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철거될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건물의 외형이 잘 보전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화청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화청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바로 김구 선생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흥(자싱)’에서 인연이 닿았던 여인이자 뱃사공이었던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하고

어느 신입회원의 비효율적인 답사기

2026년 3월 10일 372

[답사기] 어느 신입회원의 비효율적인 답사기 김선미 후원회원 ‘현재’는 너무 천연덕스럽게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저에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종종 가늠하지 못한다. 역사책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보며 항상 궁금했다. 그 당시를 살던 김 아무개와 최 아무개는 본인들이 어떤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지 체감했을까? 그들의 경험과 기억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씨앗이 되고 또 어떤 함정이 될지 자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조급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나. 만약 내가 어떤 중요한 순간을 관통하는 중이라면,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아니,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누군가는 거창하게 굴지 말고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나 충실하게 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편이 더 안전하고 실속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질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 꼭 그것에 관한 경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대지를 디디며, 몸으로 잘근잘근 씹어서 흡수해야만 비로소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비효율적인 태도. 나는 항상 그러한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 2026년 1월 21일, 연초의 정신없는 회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3박 5일의 답사를 덜컥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아리랑 로드를 가다’는 나의 첫 번째 민문연 모임이다. 2025년 하반기에 후원회원이 되었던 터라 민족문제연구소를 민문연으로 줄여 부르는 것조차 익숙지 않았다.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2026년 3월 6일 161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1] 선농단(先農壇) 자리의 ‘청량대’ 비석은 경성여자사범학교 시절의 유산 ‘청량대(淸凉臺)’라는 명칭은 『채근담(菜根譚)』에서 따온 표현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역(祭基驛)’에서 내려 1번 출구 쪽으로 나오면 곧장 선농단역사공원(선농단역사문화관)과 서울종암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왕산로19길)이 길게 이어진다. 이곳으로 접어드는 초입에는 ‘느티나무어린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숲을 이룬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표지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1954년 12월~1975년 2월) 여기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6천여 명이 넘는 교육계의 동량을 길러내던 곳이다. 이제 지난날의 웅지를 기리고 겨레와 함께 교육의 미래를 열고자 하는 뜻을 담아 기념표석을 세운다. 2006년 10월 25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서울대학교 사범대학동창회. 여기에 표시된 내용처럼 이 일대는 서울대학교가 새로 조성한 관악캠퍼스로 1975년에 통합이전을 완료한 때까지 ─ 경성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대학 시절까지 합치면 ─ 3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사범대학(1968년 12월에는 ‘가정대학’ 분리신설)이 터를 잡고 있던 구역이었다. 그에 앞서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원잠종제조소(京畿道原蠶種製造所, 1916년 12월 이전), 경기도농사시험장(京畿道農事試驗場, 1917년 4월 개설), 경기도잠업취체소(京畿道蠶業取締所, 1929년 9월 이전) 등의 조선총독부 산하 농잠실무기관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가 1938년 3월 1일에 이르러 일괄하여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의 신축청사로 옮겨갔고, 다시 그 자리는 1939년 9월 이후 경성여자사범학교(京城女子師範學校)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이래로 이 일대는 선농단(先農壇, 제기동 274번지)과 아울러 그 아래쪽으로 동적전(東籍田, 용두동 138번지)이라는 너른 벌판이 펼쳐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역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