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보낸 여름, 역사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다
[후원회원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보낸 여름, 역사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다 전지빈 경희대 사학과 평소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박물관을 자주 찾았지만, 박물관에서 직접 일해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전시를 바라볼 때는 완성된 결과물만을 보게 되지만, 이번 여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하나의 전시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길과 고민이 필요한지를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박물관 인턴이라고 하면 전시를 관람하고 자료를 조사하는 일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료실에서 공공아카이브 도서의 정보를 입력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일부터 학예실에서 전시물품을 관리하고, 광복절을 맞아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행사 소품과 퀴즈를 준비하는 일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업무 하나하나도 결국 박물관을 운영하고 관람객에게 역사를 전달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자료실에서 자료를 정리하면서는 박물관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권의 책과 한 점의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고 기록되어 있어야 훗날 누군가가 그것을 찾아보고 다시 역사를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이 당장 전시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역사를 남기고 전달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학예실에서 전시물품을 관리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광복절 행사를 준비했던 경험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같은 역사라도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횡성 ‘치산치수지비(1941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4]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횡성 ‘치산치수지비(1941년)’ 수해구제대책으로 북선이주(北鮮移住)와 사방댐 건설이 성행하던 시절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찍이 제15대 조선군사령관(재임 1929.8.1~1930.12.22)을 지냈고 육군대신,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 대사를 거쳐 제7대 조선총독(재임 1936.8.5~1942.5.29)의 자리에 오른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가 부산항에 당도한 때는 임명 이후 20여 일이 지난 1936년 8월 26일이었다. 그는 즉시 빗속을 뚫고 달리는 임시급행 제78열차에 올라 그날 오후 3시 10분 경성역에 도착하였고, 곧장 조선신궁부터 올라가 정식 참배한 이후 창덕궁, 이우공가(李鍝公家), 이건공가(李鍵公家)를 두루 들렀다가 왜성대 관저에 든 것이 오후 5시였다. 이로부터 딱 1주일이 지나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강원도 횡성이었다. 그가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부랴부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의 부임 직전 태풍(颱風)과 호우(豪雨)에 동반하여 두 차례(제1차 수해 7월 31일~8월 15일, 제2차 수해 8월 27일~28일)나 조선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수해(水害) 현장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이 와중에 강원도 지역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고 민심을 살펴 위문(慰問)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던 까닭이었다. 『매일신보』 1936년 9월 4일자에 수록된 「횡성(橫城) 부근 수재지(水災地)를 총독(總督) 모우(冒雨)코 시찰(視察), 금조(今朝) 춘천발(春川發) 즉일 귀성(歸城)」 제하의 기사는 이때의 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춘천지국 전화] 강원도 재지(災地) 시찰중인 미나미 총독은 2일 오후 2시 일찍부터 강우(降雨)임에도 불구하고 춘천을 떠나 먼저 재해지로 향하여 동(同) 4시 횡성에 도착하였는데 이번 수해에 전천교(前川橋)가 파괴되어 기후(其後)는 내를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9.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손기정 우승과 <마라손 제패가> 마라손은 마라톤이고, 마라톤은 또 마라손이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20세기 전반에는 마라손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해방 전 조선 마라톤의 최대 경사를 꼽자면, 아무래도 1936년 베를린(Berlin) 올림픽에서 손기정(孫基禎)이 우승한 일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손기정이 1위를 기록한 것에 더해 남승룡(南昇龍)도 3위 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실로 조선 건각(健脚)이 온 세상을 호령한 시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 9일에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당시 세계 최고기록인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했고, 남승룡은 2분 남짓 뒤져 3위가 되었다. 광복을 이루기 전이었기에 두 선수는 일본 대표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일본은 금, 은, 동메달을 각각 6, 4, 10개 획득해 종합 8위에 올랐다고 한다. 유럽이나 북미 지역을 제외한 베를린 올림픽 참가국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4년 뒤 1940년에는 도쿄(東京)에서 하계 올림픽, 삿포로(札幌)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베를린 올림픽의 성적, 특히 마라톤의 우승은 다음 대회 개최국 일본의 체면을 세우는 데 나름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紀元) 2600년’ 행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었던 1940년 올림픽은 중일전쟁 여파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가슴팍에 일장기 선명한 운동복을 입고 시상식에 서야만 했다. 일본 국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상을 받는 것이
훈장 받은 고문과 조작의 책임자·기술자들
[기고] 훈장 받은 고문과 조작의 책임자·기술자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 1. 서훈 취소 운동의 시작은 『친일파 99인』 정부는 2026년 7월 21일 국무회의를 열고 12‧12, 5‧18 및 계엄업무(1980~1981년) 관련자와 간첩조작사건 관련자 등에게 수여되었던 부적절한 정부포상을 대대적으로 취소했다(167명 198점). 1964년 3월 1일 「상훈법」 시행 이후 최대 규모의 서훈 취소이다. 서훈 취소가 정치·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친일파 99인』(전3권)의 발간으로 촉발되었다. 이 책에는 김성수 등 당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여론의 반향이 컸고 이로 인해 김영삼 정부는 친일청산 문제를 개혁과제의 하나로 판단했다. 그 결과 정부는 1996년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 5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했다. 이후 서훈 취소는 국가 권력-시민, 가해자-피해자, 보수-진보 간 기억운동 또는 기억정치의 격돌장이 되고 있다. 서훈 취소는 단순한 사회적 명예와 평판의 실추·저하에 그치지 않고 서훈에 수반되는 물질적·경제적 혜택 박탈, 나아가 권력자에게는 국가폭력에 대한 예방과 민주시민교육 효과도 상당할 것이다. 따라서 고문과 조작을 수단 삼아 국가폭력을 자행한 인사들에 수여된 서훈에 대한 지속적 취소 요구가 필요하다. 2. 반헌법적 행위·간첩조작사건 관련자 역대 최대 규모 정부포상 취소 역사적 퇴행을 거듭하던 윤석열 정권 시기에 2023년 11월 영화 <서울의 봄>과 2024년 12‧3 내란은 과거사 청산이 현재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했다. 그러던 중 2025년 10월 국가보훈부는 제주4‧3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인
연대와 저항을 잇는 실천의 광장,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후원을 위한 〈식민지역사박물관×비상플리마켓〉 개최
[초점] 연대와 저항을 잇는 실천의 광장,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후원을 위한 〈식민지역사박물관×비상플리마켓〉 개최 10월 9일 한글날,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후원을 위한 〈식민지역사박물관×비상플리마켓〉이 열렸다. 총 345명이 방문한 이번 행사는 지난 7월 열린 1차 비상플리마켓의 큰 호응에 힘입어, 박물관과 비상플리마켓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 협업행사로 마련되었다. 행사는 박물관 1층과 5층, 야외 주차장과 입구 공간을 두루 활용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꾸려졌다. 박물관 입구에서는 먹거리 부스를 마련해 이웃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었다. 야외 주차장에는 원데이클래스와 반려동물을 동반할 수 있는 휴게 공간을 마련하여 참가자들이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신나는 디제잉 공연을 비롯해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긴급행동, 퀴어팔레스타인연대 QK48, 사단법인 전국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제주퀴어프라이드 조직위원회 등 현장에서 활동하는 단체들도 함께 해 연대의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1층과 5층의 플리마켓 부스에서는 다양한 수공예·빈티지·창작가가 참여했다. 특히 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했던 이들이 셀러와 운영진, 자원봉사자로 함께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다. ‘남태령투쟁’ 관련 작품을 기증한 리우, 깃발 기증자 역설, 우리는 서로를 구한다, 내향인, 도자기 작품을 기증한 이것저것 연대하는 광장의 수공예가연합이 셀러로 함께했고, 깃발 기증자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황민수, 강주은, 김세영, 멜로디언 기증자 신해나 등도 플리마켓을 방문해 박물관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플리마켓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제품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로고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인쇄해 북커버로 직접 만들어 보았다. 역사를 만나는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되었다. 오후 2시와 4시에는
극우를 키운 사회, 극우와 살아가는 사회 -현장보고 〈제6회 민연포럼 : 우리가 마주한 극우의 현장에서〉
[초점] 극우를 키운 사회, 극우와 살아가는 사회 -현장보고 <제6회 민연포럼 : 우리가 마주한 극우의 현장에서> 극우는 거리에서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교실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9월 17일 열린 제6회 민연포럼에서는 뉴스타파 박종화 PD와 광명 하안북중 문순창 선생이 각자의 현장에서 마주한 극우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박종화 PD는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이러한 움직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장에서 구호가 바뀌고, 이른바 ‘대학생진보연합 몰이’가 벌어지는 과정뿐 아니라, 집회에 참여한 청년들이 저녁에 다시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모습도 소개했다. 집회 현장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장소에 그치지 않았다. 극우세력의 정보와 주장이 공유되고, 참여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극우가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시위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박 PD는 2007년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부터 이어진 극우네트워크의 형성과 확산을 짚으며, 거리에서 벌어지는 혐오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극우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눈앞에 드러난 혐오만을 개별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데 그친다면, 그 혐오를 만들어 내고 확산시키는 구조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우의 문제는 거리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15년 차 역사교사인 문순창은 12·3 비상계엄 이후 교실에서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 그리고 민주주의 교육의 과제를 이야기했다. 학교에서는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왔다. 근현대사 교육을 강화하고,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정보를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신흥무관학교 115년…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숨은 역사와 구조를 다각도로 조명 –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 학술회의 개최
[초점] 신흥무관학교 115년…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숨은 역사와 구조를 다각도로 조명 –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 학술회의 개최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115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되짚어보는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서울시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이번 학술회의는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을 주제로 열렸다. 행사는 9월 2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북구에 위치한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제1교육관 4층 대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100여 명이 넘는 청중이 자리한 가운데 윤경로 근현대사기념관장,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와 내외빈으로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이종걸 이회영기념사업회 이사장, 안병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신종 일송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 김수옥 우사김규식연구회 회장, 김시업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그리고 강북구청 및 국가보훈부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첫 순서로 박환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이 ‘신흥무관학교 연구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맡아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와 향후 과제를 제시하였다. 주제발표 Ⅰ부에서는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검토했다.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조사팀장이 ‘서간도 지역 자치기구 검토 – 경학사와 부민단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이계형 국민대 교수가 토론에 나섰다. 이어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한족회·군정부와 서로군정서의 설립과 운영’을 발표하며 김호진 충북대 강사가 토론을 맡았다. Ⅱ부 발표에서는 서간도 한인사회 및 독립운동의 동향과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운영,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다양한 역사적 역동성을 다뤘다.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민족사랑 202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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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애기봉과 강화도 갑곶으로의 평화기행
[후원회원마당] 김포 애기봉과 강화도 갑곶으로의 평화기행 ―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평화통일과 국난 극복 역사를 되돌아보다 박종선 부천지역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아래 부천지부)는 12일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과 강화도 갑곶으로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평화기행은 부천시평화통일기반조성사업 지원으로 추진되었으며, 부천시민 및 회원 등 28명이 참여했다. 이번 평화기행은 방학진 박사의 해설로 진행되었다. 평화기행을 진행하다보면 보통 현장에서 해설이 진행되기 쉬우나 부천지부는 버스가 출발한 후부터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하면 해설이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그 전에 평화기행이 추진되는 배경과 목적지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면 이해가 더 쉽기 때문이다. 방학진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는 김포가 갖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설명하며, 강원도와 경기도에 있는 접경지역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 경기도 내 총 31개 시군 중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은 에버랜드가 있는 용인이며 두 번째로 많은 곳은 임진각이 있는 파주다. 대결과 전쟁 그리고 평화가 공존하는 파주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셈이다. 과거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교류협력을 촉진해야만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다고 방학진 박사는 강조했다. 즉,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안전한 곳으로 인식시켜 외국자본이 투자해도 안전하고 관광을 해도 좋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연장선 상에서 우리가 가고있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도 관광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의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포애기봉생태공원 입구에 도착한 일행은 군사지역으로 신분증을 확인해야
사진 한 장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강상호
[후원회원마당] 사진 한 장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강상호 임승관 전남동부지역위원회 위원장 광복절을 맞아 순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인사의 행적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발간했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의 삶을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처음 강상호 선생을 만났다. 강상호 선생은 1919년 2월 6일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 매산학교와 고창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 요코하마전문학교(현 가나가와대학)에 진학했다. 일본 유학 중에는 주오대학의 배종윤, 릿쿄대학의 원용학 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창씨개명과 한국어 말살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41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지만 다시 후배들을 규합해 활동했고,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광복을 불과 석 달 앞둔 1945년 5월 11일, 혹독한 고문 끝에 스물여섯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강상호 선생의 공적을 살펴보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국가의 공훈기록에는 그의 삶과 독립운동이 남아 있는데 정작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스물여섯 살에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친 이 청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진 한 장이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선생이 다녔던 가나가와대학에 학적자료와 졸업앨범의 존재 여부를 문의하고, 대학 자료편찬 부서와 연락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인연도 만났다. 강상호 선생의 사연을 알게 된 일본인 다섯 분이 뜻을 모아 작은 모임을 꾸리고 자료 찾기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어가 가능한 분은 대학과의 연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