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자료소개] 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지난[1959년] 11월 12일 “순국선열유족회”가 그들 유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232선열의 유족들이 뭉쳐 서로 도와 나가자는 모임인 것이다. 경향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유족들 가운데는 세상에 알려져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대로 파묻혀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조국 광복을 얻기 위하여 피로써 싸워온 조상의 영광을 간직한 그들에게는 있을 법도 한 ‘특권’이 시대사조에 희생당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몇 유족들 가정을 찾아 그들의 근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 동아일보 편집자 ① 이준 선생 따님 이종숙 여사 시내 사직동 262의 36에 있는 조촐한 2층 양옥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이준 열사 따님 이종숙(李鍾肅) 여사는 ‘따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색할 정도로 얼굴에 주름이 흔한 진갑이 지난 할머니(64세)였다. “그때 내 나이 12세 양원(養源)학교 3학년이었지요. 헤이그로 가셨는지 어디로 가셨는지 전혀 집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글쎄 7월 14일 멀리 이국땅에서 자결하셨다는구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15일 하오 2시경이었는데 전보를 받아든 어머니는 하도 놀라서 그때부터 심장병을 얻어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고종 황제의 밀사로 멀리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서 왜제(倭帝)의 도적행위를 규탄하고 스스로 배를 갈라 창자를 ‘독립의 거름’으로 뿌린 이준 열사의 ‘역사적 장거’를 이 외동따님은 반세기 전의 가물가물한 감회를 섞어 띄엄띄엄 이렇게 회상해 나갔다. 선친의 비보를 받은 지 3년 후에 모친은 성묘라도 하여볼 셈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오빠 이용(李鏞) 씨를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있다는 이상설(이준 열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염상(鹽商)’ 최병희(崔炳熙) 삶의 명과 암
[돌려보기] 일제강점기 ‘염상(鹽商)’ 최병희(崔炳熙) 삶의 명과 암 일제강점기 소금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지역에서 일제에 적극 조력하다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1935년 10월 14일 부천군 소사역(현 부천역) 부근에서는 진흥관(振興館) 개관식이 성대히 열렸다. 일제의 식민 침탈과 식량 수탈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소사(素砂)에 극장뿐만 아니라 공동회의와 집회를 진행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진흥관을 만들 수 있도록 비용을 댄 사람이 최병희(崔炳熙)였다. 이 당시 진흥관을 만드는데 15,000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고하는데 그렇다면 최병희는 그 당시 부천에서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거대한 금액을 낼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지역의 유지였던 최병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최병희의 생애 최병희는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출신으로 1891년에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일찍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였다.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상업에 일찍 뛰어들었으며, 1910년대 최병희가 뛰어든 인천의 상업계는 이미 일본인 거상들에게 잠식되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1913년 모회사 외교원으로 입사하여 장사를 할 수 있는 밑천 자금 3-400원을 모았으며, 1918년 소규모의 중국소금 수입상점을 인천 지나정에 열었다. 하지만 일본대상과의 경쟁에서 밀려 실패하였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 상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을 준비하는 동시에 중국인들과 직접 무역을 하기 위해 중국어를 집중 연구하였다. 1923년이 되어 중국 상인들에게 신용을 얻어 성공을 할 수 있었으며 이때 이미 10만 원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중국 지부항의 유명한 무역상 덕표창과 거래를 하였고,
전국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들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2] 기꺼이 천황을 위해 죽기를 반복 세뇌한 ‘황국신민의 서사’ 전국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들 이순우 특임연구원 독립기념관, 서산 나라사랑공원, 당진 면천읍성, 대전 한밭교육박물관, 대전여자고등학교, 대전유성초등학교, 세종연남초등학교, 연기향토박물관, 옥천 정지용문학관, 보령문화의전당, 대구 현풍초등학교, 광주 금선사(송정신사 터), 해남 해창주조장 등등……. 여기에 나열한 것은 전국 각 지역에 걸쳐 현재까지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들이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는 장소들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들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나는 바람에 옛 모습 그대로 잔존한 경우도 있고, 또 여기에는 ‘해방기념비’라거나 혹은 ‘독립기념비’ 등의 형태로 둔갑하여 재활용한 형태로 남아 있는 사례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황국신민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の誓詞)’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의 개시로 전시체제기가 본격 도래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37년 10월 5일자에 실린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전조선(全朝鮮)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에서 사용토록, 학무국(學務局)에서 각도지사(各道知事)에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반도시정 중 교육체제의 근간이 되는 ‘황국신민의 조성(造成)’에 관하여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시국극복과 함께 더욱 일본정신의 철저발양에 매진하기로 되어 반도 신민중으로 하여금 항상 “우리는 일본인민이다”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여 언제나 이를 잊지 않도록 전조선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 기타 각종 단체에서 적어도 다수인이 회합하는 때에는 일동이 합창하여 그 정신을 전지에 피력시키기 위해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작성하여 지난 2일 미나미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1. 한일합병과 <학도가> 하필이면 서울 주요 신문의 휴간일이기도 했던 1910년 8월 29일 월요일, 한국과 일본국의 합병을 결정한 조약이 대한제국 마지막 관보를 통해 공포되었다. 한 주 전인 8월 22일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대일본제국 한국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양국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조인한 조약은 공포와 함께 즉시 발효되었고, 그렇게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마지막 관보 호외에 실린 조약 전문(全文) 앞에는 한국 황제 순종(純宗)의 8월 22일 조칙(詔勅)과 8월 29일 칙유(勅諭)도 있었다. 조칙을 통해 “한국 통치를 거(擧)하여 차(此)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께 양여(讓與)”함을 결정하고 “장래 아(我)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고자 했던 순종은, 칙유를 통해 “대소 신민은 국세와 시의(時宜)를 심찰(深察)하여 물위번요(勿爲煩擾)하고 각안기업(各安其業)하여 일본제국 문명신정(文明新政)을 복종하여 행복을 공수(共受)”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황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안녕을 바라는 한편, 조약 체결에 대한 인민의 반발과 그로 인한 소요 사태를 걱정했던 데에서는 나름의 진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관보가 발행된 바로 그날에는 조선총독부의 첫 번째 관보도 발행되었다. 1875년 9월 운요(雲揚)호 사건 이후 35년 동안 집요하게 진행된 침략이 완성되는 순간 한 치의 행정 오차가 없도록, 꼼꼼하게 준비한 일본의 치밀함이 보이는 모습이다. 일본어로 먼저 쓰고 뒤에 조선어 번역까지 넣은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에는 메이지(明治)천황의 칙령이 여러 건 실렸는데, 그중 첫 번째인 칙령 제318호에서는
한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 가곡의 배반 :〈선구자〉와 조두남
[연구소 글방 27] 한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 가곡의 배반 : 〈선구자〉와 조두남 이명숙 연구실장 함축적 시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문학적 표현 외에 시대적 배경, 작가가 처한 상황들이 그 기저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설이나 의미 부여가 이뤄지기도 한다. 대중을 사로잡은 시어들은 곧잘 아름다운 선율에 실린다. 노래는 시어의 감성을 증폭시키며 더욱 폭넓게 전파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노래들은 그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힘을 가졌다. 시대적 상황과 요구에 따라 항일투쟁의 바탕이 되기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의지가 되기도, 민주화 투쟁의 힘이 되기도 했다. 조두남(趙斗南, 1912~1984)이 작곡한 <선구자(先驅者)>는 한때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노래였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갖은 핍박과 설움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희망을 품었던 ‘선구자’를 표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제 시기 만주에서 작곡했던 것을, 해방 직후 가사 일부를 시대에 맞게 수정했다고 했다. 1947년과 1949년에 출간한 가곡집은 현재 온라인 상에서 원문이나 목차를 제공하고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고, 세 번째인 1962년 발간 가곡집 『분수(噴水)』에서 8번 곡 <선구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두남의 가곡집, 가곡 음반, 수상집 등에 꾸준히 수록되어 있다. <선구자>가 전 국민에게 알려진 계기는 1963년 연말,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한 서울시립교향악단 송년음악회에서 공연되면서부터다. 이날 공연 음원을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7년간 시그널 뮤직으로 쓰면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입니다
[초점]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입니다” – 현장 보고 제3회 민연포럼〈The Story of Palestinian〉 6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포럼 진실과 정의가 주최·주관한 제3회 민연포럼〈The Story of Palestinian〉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에서 2022년 한국에 온 가자지구 이브나(Yibna) 출신 난민이자 유학생인 살레 엘란티시는 강연을 통해, 봉쇄된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집단학살의 실상과 역사적 진실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살레 씨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잃은 자신의 주변인들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전쟁 발발 2주 만에 폭격으로 숨져, 그 시신이 아직도 건물 잔해에 깔려있다는 친한 친구 암자드(Amjad)의 사진과 함께, 이번 폭격으로 할아버지, 삼촌 등 가족들은 물론 수많은 이웃들을 잃었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리고 최신 업데이트된 구글 위성지도에 접속해 가자지구 지도의 ‘항공뷰’를 직접 움직여가며, 처참하게 파괴된 고향의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 가자지구는 건물 약 80%가 파괴되어 온전한 집이 없고, 최소 7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1만 2천 명이 넘는 이들이 여전히 건물 잔해 속에 깔려 실종된 상태라고 살레 씨는 전했다. 그는 “단순히 집계된 숫자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1만 2천 명의 어머니가 건물 잔해에 깔린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라며 이 사태를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비극의 뿌리를 1917년 영국의 불법적인 ‘밸푸어 선언’과 1948년 ‘나크바’(아랍어 ‘대재앙’), 이스라엘 자경단의 학살 및 강제
민족사랑 202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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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선정판사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 선고 받은 이관술 선생과 관련한 해방 직후 신문기사
[자료소개] 최근 조선정판사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 선고 받은 이관술 선생과 관련한 해방 직후 신문기사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조선공산당 이관술과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문) 귀당(貴黨)은 민족통일운동의 현황이 어느 정도로 진전되었다고 보는가? (답) 대중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준비되었다. 다만 다른 당들의 수뇌에서 고집을 세우고 있으므로 지연되고 있는데 그들 중에서도 곧 고집을 버리리라고 믿는다. (문) 귀당에서 민족통일의 영도권은 어느 세력이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또 그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답) 근로대중이 영도권을 잡아야 함은 말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과거 일본제국주의 반대투쟁에 있어서 가장 선두에서 싸웠으며 또 앞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와 싸우는 데 있어서도 가장 철저하고 용감한 층이 근로대중이므로 그들이 영도권을 잡아야 함은 당연하다. (문) 귀당에서는 임시정부와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임시정부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답) 자본가 지주계급의 옹호를 받고 있다고 보는데 우리 민족통일원칙을 찬성한다면 다 같이 일할 수 있다고 본다. (문) 귀당에서는 우익정당(右翼政黨)과 타협 내지 협조할 의사와 용의가 있는가? (답) 물론 있다. (문)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와는 다르다고 보는가? 다르다면 어떻게 보는가? (답) 인민공화국은 국호요, 인민위원회는 정치의 기구이다. (문) 일부에서는 인민공화국 또는 인민위원회와 귀당과의 관계가 투명치 않다고 하여 귀당이 즉 인민위원회라고도 보는 이가 있는데 (답) 이것을 같다고 보면 상식 부족이다. (문) 일부에서는 귀당의 정강이 급진적이고 귀당의 행동이 너무
‘제주4‧3의 의인, 쉰들러’ 문형순
[후원회원마당] ‘제주4‧3의 의인, 쉰들러’ 문형순 주동욱 경희대 민주동문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문형순 문형순(文亨淳:1898~1966)은 제주4‧3 당시 무고한 민간인을 살려 ‘제주의 의인(義人)’ ‘제주판 쉰들러’라고 불린다. 1898년 평안남도 안주군 태생으로 1919년 3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인 만주 신흥무관학교(경희대학교 전신)를 졸업했다. 이후 문형순은 문시영(文時映), 이도일(李道日)이라는 가명으로 시베리아에서 한국의용군(1920), 고려혁명군(1921)으로 활동했다. 1929년 국민부(만주 한인사회 준자치정부)에서는 중앙호위대장과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1935년부터 북지(중국 북부) 허베이성에서 광복군 지하공작대 요원으로 활약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당시 문형순 나이 47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기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의인(義人)’ 경찰 문형순 문형순은 1947년 5월 경찰에 투신했다. 그가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는지 광복군 신분으로 직접 서울에 왔는지 알 수 없다. 경찰 간부로 특채된 문형순은 그해 7월 제주경찰관 교습소 교두 겸 기동경비대장(경위)으로 제주에 첫발을 디뎠다. 1947년 제주시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숨지고 제주인들의 저항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또 냉전 시기 한반도는 통일국가로 갈 것인지 분단국가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있었다. 이듬해 1948년 제주4‧3항쟁이 일어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서북청년회) 단원이 ‘산(山)사람’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0월 17일 송요찬(2연대장)이 “해안에서 5km 이외 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하고 사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지자, 군경의 ‘토벌’은 대량 학살로 바뀌었다. 특히 한라산과 가까운 중산간 마을은 무장대에 식량을 올려보냈다는 이유로 초토화되었다. 광풍은 문형순이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교육자 배상명과 제국의 수사학
[연구소 글방 26] 살아남은 이름 ‘상명’, 사라진 이름들을 외면하다 : 교육자 배상명과 제국의 수사학 강은정 선임연구원 1. 교정에 새겨진 이름과 지워진 목소리 우리는 말과 글이 목소리로 발현되는 순간,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 목소리가 권력과 결탁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을 넘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가 ‘교육’이라는 현장에서 스승의 권위를 입고 터져 나올 때는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 5월의 교정에서 넘실거리는 ‘스승’이라는 단어의 숭고함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에 올바른 이정표를 세워준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그 이정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스승의 가르침이 학생들의 삶을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전쟁터를 향한 독려였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식민지 시기에 학교 설립과 교육을 통해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 가운데 배상명(裵祥明, 1906.5.17.~1986.2.17.)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동시대의 여성 교육가들에 비해 개인적 인지도는 낮지만, 자신의 이름을 교명(校名)으로 내건 덕분에 그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상명(祥明)’이라는 이름에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상서롭게 밝히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서 마주하는 그녀의 행적은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자신이 세운 교정에서 제자들에게 죽음을 종용했던 스승, 그녀가 세운 이정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배상명은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교육계의 원로로 추앙받으며 자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