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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야스쿠니 반대’ ‘무단합사 반대’ 2026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다녀와서

2026년 9월 7일 89

[현장 보고] ‘야스쿠니 반대’ ‘무단합사 반대’ 2026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다녀와서 최하연 대외협력실 활동가 2026년 8월 8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9명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3명은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을 위해 도쿄로 떠났다. 야스쿠니신사는 과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천황’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미화한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야스쿠니신사에는 식민지시기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2만 1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합사되어 있다.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은 2001년부터 일본에서 무단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피해자의 손주 세대가 원고로 참여한 무단합사 철폐 3차 소송이 도쿄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이며, 2025년 12월 한국에서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상대로 무단합사 철폐소송을 시작했다. 2006년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시민들이 조직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햇수로 21년째 매년 8월 도쿄에 모여 야스쿠니신사의 본질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연대와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들은 도쿄에 도착하여 첫날인 8일 일본 청년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침략전쟁의 역사를 미화하는 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침략신사 야스쿠니 반대행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십 년 동안 해오셨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도 평생 모은 야스쿠니신사 관련 자료를 기증해 주신 즈시 미노루 선생의 자세한 해설을 들으며 전시를 둘러봤다. 유슈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아시아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 여성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 운영

2026년 9월 7일 88

[초점]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 운영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광복 81주년을 맞아 8월 15일부터 29일까지 3주간 매주 토요일 국치일에서 광복절까지 2026 “기억과 성찰” 특별주간을 운영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 일제 식민지배 35년의 아픔을 성찰하고, 저항과 연대를 통해 평화와 인권의 기틀을 마련한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기획되었다. 첫 순서로 8월 15일 광복절 오후 3시에는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집 『결국, 뿌리로 산다』 북토크 〈후손과의 대화〉가 열렸다. 50여 명의 참가자가 5층 강의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김창숙·김찬기 지사의 후손 김주 여사와 이관술 지사의 후손 손옥희 여사가 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집안의 삶을 증언했다. 김주 여사는 어머니 손응교 님이 남긴 수첩일기를 바탕으로 일제 말기 독립운동가 집안의 궁핍과 경찰의 감시 등 고단했던 현실을 생생하게 전했다. 손옥희 여사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조작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어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아픔을 털어놓았다. 2025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으나 올해 광복절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현실을 밝히며, 올바른 역사를 세우는 데 함께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이날은 북토크와 함께 상설전시 특별해설과 체험 프로그램 〈독립 아이템을 모으자〉도 진행되었다. ‘이육사의 변장용 안경’, ‘지청천 장군이 망명할 때 숨겨간 일본군 군사지도’, ‘독립운동가의 적 친일파가 수록된 친일인명사전’, ‘윤봉길 의사의 폭탄이 된 수통’,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등 독립운동가의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2026년 9월 7일 79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 개막식을 8월 7일(금) 오후 3시에 개최하였다. 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김민철 소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정창수 강북구청장, 이희정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번 특별전은 강북구가 낳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일생을 조명했다. 박자혜는 비밀결사 ‘간우회’를 조직해 3‧1혁명에 앞장섰던 간호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아기 나인에서 여학교 학생으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로, 그리고 조산원을 운영하며 의열단투쟁의 숨은 조력자로 살았던 그의 삶은 조국을 향한 헌신의 여정이었다. 전시는 박자혜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관련 유물과 기록을 통해 그의 삶과 독립운동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박자혜가 운영했던 인사동 조산원을 전시 공간에 재현하고, 일제강점기 강북구 일대 지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적부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졸업대장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불분명했던 박자혜의 출생지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적사항,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조산부과의 학적사항과 졸업 연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는 2027년 2월 28일까지 진행될 예정으로 그동안 ‘단재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름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박자혜의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되돌아보고, 조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삶과 숭고한 헌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정햇살

역사를 입다, 진실을 외치다 —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 이후에 부쳐

2026년 9월 7일 83

[초점] 역사를 입다, 진실을 외치다 —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 이후에 부쳐 2024년, 일본 정부는 에도시대 금 채굴 기술만을 앞세워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결코 화려한 산업유산으로만 포장될 수 없다. 일제강점기 1,5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끌려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며 혹독한 강제노동을 견뎌낸 비극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하 갱도에서 목숨을 잃었고,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 진폐증과 광산노동 후유증에 시달리며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 같은 참담한 역사가 배제된 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른 배경에는 윤석열 정부의 굴종적 대일외교가 있었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미명 아래, 당시 정부는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에 사실상 동조하며 외교적 항의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일본 정부가 약속했던 ‘전체 역사’ 기록은 흐릿해졌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세계유산 회의장 문밖으로 내몰렸다. 2026년 7월 21일 화요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부산 벡스코(BEXCO) 현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등 여러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시민 긴급행동’을 펼쳤다. 참여한 시민들은 일제의 광풍 속에 끌려가야 했던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이름과, 2022년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함께 펴낸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노동 – 한일공동조사보고서』에서 발췌한 피해자 증언이 앞뒤(국문‧영문)로가득 새겨진 대자보(몸자보)를 직접 입고 거리에 섰다. 하얀 대자보를 입은 시민들이 벡스코 주변을 행진하고 퍼포먼스를 벌이자,

민족사랑 2026년 8월호

2026년 8월 27일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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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2026년 8월 3일 178

[자료소개] 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기미년 3‧1운동이 일제의 말발굽 아래 덧없이 유린되고 일부 상층 계급이 타협적인 노선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뒤 조선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인민의 반제국주의투쟁의 형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 공산주의운동이요, 그것을 지도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이리하여 1925년 4월 17일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그 뒤 당과 그 운동을 습격한 일제의 무수한 박해와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 유일한 반일본적 혁명운동으로 공산주의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그 운동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끼친 공헌은 절대한 바가 있다. 이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붕괴 전 최후의 수년간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지하에서 활동한 조선공산당 이관술 씨의 회상기를 소개하는 바이다 — 현대일보 기자 ① 반제투쟁의 회상 내가 반일혁명투쟁에 첫걸음을 들여놓기는 광주학생사건이 발발하여 전국이 들끓던 1929년경이다. 그전 해 나는 일본 동경고사(東京高師.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학교에 와있었는데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 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일본을 말함]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의식의 강화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그때 나의 생각은 우리민족을 위해서 도움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輕重大小)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당시 도쿄에서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이러한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견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2026년 8월 3일 255

[식민지 자료관 7]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생전에 거처로 삼았던 주요 공간 몇 군데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우선은 운현궁(雲峴宮)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여기에 더하여 창의문 밖 석파산장(石坡山莊)과 마포 아소당(麻浦 我笑堂), 시흥산장(始興山莊, 시흥동 별장)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양주(楊州) 쪽 의정부에도 직곡산장(直谷山莊, 직동산장)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곳은 1873년에 권좌에서 밀려난 대원군이 첫 번째 은거지로 선택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직곡산장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라치면 이렇다 할 자료를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가 옛 신문 파일을 뒤지던 와중에 『경성일보』 1935년 11월 18일자에서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하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카토 칸카쿠(加藤灌覺)의 기고문인 「감악산(紺岳山)」이라는 글[고노 특파원(河野 特派員) 촬영]에는 매우 드물게 보는 직곡산장의 모습에 곁들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직동(直洞, 곧은골)에 유거(幽居)했던 대원군(大院君)]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즉위 10년, 우리 명치 6년(1873년)에 민비 전하(閔妃殿下)와의 정쟁(政爭)에서 깨졌던 대원군(大院君)은, 원로(元老)라고 하는 허명(虛名)을 지니고 마침내 경성(京城)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퇴은(退隱)의 땅이 이 직동(直洞)의 한거(閑居)였다. 직동은 의정부(議政府)의 정거장(停車場)에서 거리가 겨우 10수 정(十數町, 1킬로미터 남짓), 도봉산(道峰山)의 율림(栗林, 밤숲) 속에 있으며, 도봉산 북측의 계류(溪流)가 서로 모여들어 그 가운데를 흐르는 청렬(淸冽)한 용천각소(涌泉各所)에 옥(玉)을 부풀어 올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조망이 어느 것이든 그 빼어남을 즐겼던 승지(勝地)인데, 지금도 여전히 그 구시(舊時)의 모습을 남아 있어서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2026년 7월 31일 192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3.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과 <이팔청춘가> 근대를 실감케 했던 새로운 문물들 가운데 실로 경이로웠던 것이 비행기다. 사람이 하늘에서 자유로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행기의 우렁찬 굉음은, 종래의 통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1903년 이래 신문기사로만 접하며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궁금해했던 비행기는, 1913년 4월 3일 드디어 그 모습을 조선 하늘에 처음 드러냈다. 4월 3일 오전 11시 반쯤, 6만 관중이 운집한 경성 용산 연병장에서 조선 초유의 비행은 시작되었다. 일본 항공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제작한 비행기를 조종한 이는 일본인 비행사 시라토 에이노스케(白戶榮之助)였다. 오늘날 화려한 에어쇼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간단한 비행이었지만, 기계를 움직여 사람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제로 접한 이들은 그만으로도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틀 뒤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봉산인(瑞峰山人)’이라는 이가 쓴 <비행기> 노랫말이 다음과 같이 실리기도 했다. 가사 형식으로 보아 시조창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라 보이는데,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에는 대개 종장(終章) 마지막 음보 세 글자를 생략한다. 님 계신 곳 가 볼 마음 주야로 간절하나 / 산 높고 물 깊어서 하릴없이 단념터니 지금에 비행기 온다니 그것을 타고 조선 하늘에 비행기가 처음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많은 관중 속에는 어쩌면 열두 살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2026년 7월 30일 168

[초점] “식민지 지배의 차별 끊겠다”… 손자 세대가 이끄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 3차변론 열려 7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송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3차소송’의 세 번째 변론기일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이 소송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되어 전사한 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희생자와 유족들이 2001년 제소한 군인·군속 소송을 이어 2007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제기한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의 3차소송이다. 이번 3차소송은 지난 2025년 9월 희생자의 손주 세대 유족 6명이 원고로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17일에 열린 변론에서는 희생자 유족 길형민 씨가 법정에서 의견을 진술했다. 길씨의 할아버지는 1942년 23세의 나이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뒤 1944년 10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전사했다. 강제동원 당시 할머니는 길씨의 어머니를 임신중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전사 통지도 받지 못했다. 길씨는 법정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는 80여 년 전 일본 제국주의가 강요한 일본식 이름으로 할아버지를 묶어둔 채 여전히 식민 지배의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라며 “할머니와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이 투쟁을 손자 세대가 이어 반드시 결말을 짓겠다”며 결의를 밝혔다. 재판 이후 100여 명의 소송지원단 시민들과 많은 미디어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보고 집회에서는 희생자 유족 김옥순 씨(63) 남매 4명이 추가로 원고단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씨 역시 2차소송 원고인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손주 세대로 소송에 참여했다. 또한, 외삼촌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2026년 7월 30일 148

[초점] 100년 전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보고 <제4회 민연포럼> ‘학살과 차별의 현장을 가다 – 혐오는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나 7월 10일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제4회 민연포럼이 열렸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일본 논픽션 작가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는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지진과 학살 1923-2024』 저자다. 그는 현재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는 배외주의와 헤이트 스피치의 실태를 소개하며, 그 뿌리를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마바리 타올’로 유명한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서는 지역 산업을 지탱하는 베트남·중국·네팔 노동자들을 향해 “외국인 추방”을 외치는 모순된 극우 집회가 열리고,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서는 쿠르드계 이주민들을 향해 “해로운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막말과 살해 협박, 온라인 가짜뉴스가 난무한다. 야스다 작가는 “지난 20년간 일본 내 외국인은 3배 늘어 400만 명을 돌파했지만 전체 범죄 건수는 오히려 3분의 1로 줄었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차별 선동의 허구성을 짚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선동이 방치될 경우 실질적인 범죄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야스다 작가는 혐오 발언이 개별적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조직적 폭력의 도화선이 되어 왔다며 그 기원을 100여 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서 찾았다. 1923년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방화를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정부와 언론의 조직적인 가짜뉴스에 선동되어 약 6,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그 전해인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