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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황해도경찰부장, 윤종화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

2017년 2월 22일 336

고등관이라는 욕망의 열차 고위 행정공무원의 등용문인 행정고시, 판검사라도 될라치면 약관 20대에도 일약 ‘영감님’ 소리를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법고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외교관의 관문인 외무고시는 국가공무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출세의 지름길이다. 통상 이 세 개의 고급공무원을 뽑는 시험을 ‘고등고시(高等考試)’라고 부르는데,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의 고등고시는 머리 좋고 출세욕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입신양명의 사다리였다. 물론 그것은 친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일제로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조선인의 힘을 빌어야 했고, 이 식민통치의 하수인에게 “너희도 충성을 다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던져준 값비싼 고깃덩이의 하나가 고등문관시험 따위였던 것이다 고등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조선인의 경우 3년 동안 고등관시보(高等官試補)를 거쳐 주임관(奏任官)이 된다. 요즘으로 치면 5급 사무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임관급 이상을 고등관이라 불렀고, 6급 주사 이하는 판임관(判任官)이라 불렀다. 그런데 5급과 6급의 경계는 ‘명박산성’보다 높고 견고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9급이나 7급으로 시작한 행정관료들의 경우 평생 근무해야 6급 주사로 끝났다.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5급 주임관은 될 수 없었다. 주임관을 시작으로 한 고등관의 세계는 고등고시 합격자들에게만 주어진 황금 사다리였던 것이다. 식민지의 머리 좋은 청년들 가운데 조국의 독립이야 어떻든 이 황금 사다리를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부류들이 있었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 군수를 거쳐 마침내 조선인 최초로 ‘공안 1번지’ 경성부(서울)

용상龍床에 오른 순직경찰의 영혼들

2017년 2월 22일 398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0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순직경찰과 소방관들의 초혼제(혼령을 위로하는 제사) 명부인 <순직경찰·소방직원초혼향사록殉職警察·消防職員招魂享祀錄<(이하<향사록>)이다. 순직경찰 중 일부는 지난 호의 소개자료 서울종로경찰서 사진첩의 「순직자의 늠름한 모습」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의열단원 김상옥이 쏜 총에 맞고 즉사한 순사부장 다무라와 보합단원에게 죽은 곤도와 이정선인데 이들도 <향사록>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순직자’를 단순히 기념사진첩에 수록하여 ‘귀감’으로 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순직경찰관초혼제’를 열고 성대한 제사를 지내어 그들을 기리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시키고자 했다. 1937년 5월 1일자로 작성된 <향사록>에 수록된 순직경찰과 소방직원은 총 315명으로 경찰은 1910년 8월 10일부터 1937년 2월 3일까지 281명, 소방원은 1919년 9월 5일부터 1936년 8월 28일까지 34명이 기재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순직연월일, 관직·씨명, 출신지·생년월일, 순직 이유와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순직연월일 : 대정8년(1919년) 3월 28일, 관직씨명 :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 순직 이유 :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이 있을 때 폭동진압 중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 이처럼 ‘순직경찰관초혼제’의 향사 대상은 불령선인이나 소요사건의 폭도에게 죽은 자, 이른바 ‘비적匪賊’에게 죽은 자들인데 뒤집어 말하면 항일 투사들에게 죽은 순사들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제사를 지낸 장소가 하필이면 조선왕조의 정전(正殿 :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치러지던 곳)인 경복궁 근정전이고, 순직경찰을 위한 제단을 임금의 자리 즉 용상에다 설치했다는 것이다. 제1회 순직경찰관초혼제는 1921년 4월 26일 남산공원 앞의

추적발굴 – 이준 열사의 안국동 집터

2017년 2월 22일 285

1907년 6월 25일은 고종황제의 특사인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6.15~10.18)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날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서구열강의 외면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수포로 끝났고,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에 겨워 여러 날에 걸쳐 단식하던 도중에 그해 7월 14일 머나먼 이국의 호텔 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여파는 가혹했다. 무엇보다도 고종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윤허한 것을 빌미로 퇴위를 당하였고, 곧이어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강요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국권은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또한 세 특사에 대해서는 ‘위칭밀사(僞稱密使, 거짓되이 밀사로 자칭)’하였다는 이유로 궐석재판을 통해 교형(絞刑)과 종신징역(終身懲役)의 판결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헤이그특사사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이른바 ‘밀사’의 신분인 탓에 그런지는 몰라도 몇 가지 관련사항들이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이 지닌 위임장과 황제친서의 전달 경위와 장소 등과 같은 사항들이 그것이다. 이 당시 이상설은 만주에서 활동중이었고 이위종은 러시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밀명을 전달받고 위임장과 친서를 수령하는 일은 오롯이 국내에 남아 있던 이준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황제의 신임장을 수여받은 곳은 어디였을까? 이 점에 있어서 흔히 경운궁 중명전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에 관한 근거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유자후(柳子厚, 이준의 사위)의<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1947)에는그 장소를이준의자택으로지목하는구절이 등장한다. 해아밀사(海牙密使) 특파밀칙(特派密勅)의 하부(下付)인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

2017년 2월 22일 325

환호 속에 귀국한 여류 혁명가 이역만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로서 장군 칭호를 받은 이들이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그중 이채롭게도 ‘여장군’ 칭호를 얻은 이가 있으니 바로 해방 당시 38세 한창 나이였던 여장부 김명시(金命時)이다.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혐의로 7년간 복역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직전까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최전방에서 여성 부대원을 이끌고 선전선동과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에 개선한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하였다. 이 기자회견 내용은 <중앙신문><독립신보><동아일보>와샌프란시스코에서간행되던 <국민보>에까지 실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여장군 김명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익신문이던 <동아일보>가 김명시를 조선의‘잔다르크’로까지 치켜세운것은 당시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케 한다. <독립신보>1946년11월21일자에는「여류혁명가를찾아서⑦ 20년간투쟁생활,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유영준(劉英俊), 정칠성(丁七星), 박진홍(朴鎭洪), 유금봉(劉金鳳), 허하백(許河伯), 조원숙(趙元淑)에 이어서 여류혁명가로서 7번째로 인터뷰한 것이다. 약간 길지만 김명시의 항일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모두 옮겨 싣는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하고 물으니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몽양여운형기념관 사태에 관하여

2017년 2월 22일 329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광화문에 100만 촛불 열기로 뜨겁던 12월 초순, 몽양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양평군청이 몽양기념관 민간위탁운영자 모집 공고를 냈다는 것이다. 양평군청으로부터 2016년 한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재계약 약속을 받았다고 들은 터라 재계약은 문제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몽양기념사업회가 지역주민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방문객수가 적다는 동네주민 다섯 명의 탄원서가 그동안 재계약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이유였다. 불편한 접근성에도 매년 꾸준히 방문객이 늘고 있는데 갑자기 접수된 탄원서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다. 몽양역사아카데미 회원들은 몽양의 뜻을 계승하며 꾸준히 몽양선양사업을 하고 있는 몽양기념사업회가 몽양기념관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평군청 앞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평군청은 신뢰를 저버리고 끝내 2016년 12월 29일 새로운 민간 위탁 운영자로 상명대학교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를 선정했다. 상명대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는 몽양 여운형 선생은 물론 독립운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체이다. 더구나 두 단체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관련된 곳이다. 상명대학교는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배상명이 설립한 학교이고, 새마을회는 만주군 중위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가 남긴 유산이다. 이런 단체들에게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사업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좌우합작활동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다.

촛불혁명을 이끄는 위대한 시민의 힘을 보다

2017년 2월 22일 111

2016년 10월 19일에 시작된 시민들의 촛불혁명이 100일을 넘겨 계속되고 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한겨울의 추위를 함께 이겨냈다. 아직 승리를 단언하기에는 이르지만 시민들의 촛불은 결국 박근혜와 최순실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김기춘과 조윤선을 구치소로 보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너무나 힘들어 했던 시민들이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든 시민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을 받고 위안을 얻는 아름다운 경험을 나누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매주 토요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하기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애드벌룬으로 만든 평화의 소녀상을 앞세우고 촛불혁명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전국의 회원들이 민족문제연구소 깃발 아래 함께 싸우고 있을 것이다. 대전지부 박희인 회원은 대전 촛불집회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며 촛불혁명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시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희인 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국 각 지역에서 촛불혁명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 : 지금까지 해온 활동을 중심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 현재는 대전지역 60개 단체로 구성된 남·북·해외 3자 연대 조직인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집행위원장과 (사)우리겨레하나되기대전충남운동본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9년부터 대전지역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1999년에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노근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사무국장을 5년여 간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 소개

2017년 2월 22일 116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감성과 문화적 차이도 있지만 아직 민중가요의 실용성이 남아 있음을 이번 촛불집회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민중가요 가운데 하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와 보수세력의 금지곡이나 다름없는 이 노래의 영화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모하게 강행했다. 전투 속에서 불러지던 노래가 전투 속에서 살아남아야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미국 국가 ‘성조가’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그리고 대한민국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통점은 적군과 군대와 독재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불렀던 애국의 노래였다. ‘이것도 나라냐?’는 촛불정국에서 회자되었던 통렬한 비탄의 국민 카피였다. 그것은 명백히 국민이 국가를 부정한 사건이었다. 국가는 원시부족부락만도 못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은 곳곳에서 곪아터졌지만 그때마다 야매 봉합술로 덮어버리고 묻어버리며 입을 막았던 탓이다. 이 모든 현상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반성과 과거청산의 참회 없이 출발했다는 데 기인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주기적으로 상기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도록 상기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안네의 일기’ 같은 영화들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며 다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로 만들어 역사 바로

연구소, 명예훼손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

2017년 2월 23일 117

대법원 제1부(재판장 이기택)는 지난 1월 25일, 우리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 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각각 500만 원, 300만 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소송을 시작한 2014년 7월 17일로부터 2년 7개월 만에 최종판결이 난 것이다. 연구소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의 사실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하여,<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 직전인 2009년 10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의 「혈서 군관지원」이란 기사를 찾아내 이를 사전에 수록한 바 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제기한 <친일인명사전> 게재금지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이 “이유없다”고 기각되었음에도 이후 의도적인 혈서조작설 유포가 계속되었다. 이에연구소는 “날조스토리가 등장”, “들통난 혈서기사조작” 따위로 공공연하게 허위사실을 전파한 강용석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들은 원고가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꾸며내었다는 취지로 ‘원고가 조작한 것’, ‘원고가 허위로 꾸며낸 사기극’ 내지 ‘원고가 날조한 이야기’라는 표현행위를 한 것이고, 이는 단지 원고에 대한 비난의 의견을 표명한 것을 넘어서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영역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연구소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허위사실 유포와 근거 없는 음해가 근절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한 데는 우리 쪽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김묘희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 두 번째 승소는 보수단체인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모 씨를

최지한 회원이 교과서를 비롯한 현대사 관련 자료를 기증해

2017년 2월 22일 30

지난 1월 2일, 최지한 회원(경남서부지부)이 2012년에 이어 해방 후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에 기증한 자료는 <우리는 착한6학년>(1956), <다른 나라의 생활>(1956)등 교과서류와 <한영군용단어와 숙어의 발음책> 등 해방 이후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도서와 문서류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0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15점 보내와 지난 12월 2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0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 다. 이번 기증 자료는 <구례군지>(2005),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1982), <보성문화>(2015) 등 총 15권의 도서다.   지난 1월 5일, 박도 회원이 <韓國痛史>(1993) 등 총 5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미영격멸을 구호 삼아 달린 부여신궁과 조선신궁 간 대역전경주

2017년 1월 23일 184

간혹 신사(神社)와 신궁(神宮)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한 때가 있다.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명문 규정은 찾을 수 없으나, 신궁은 대개 메이지시대 이후 ①천황, ②황실의 조선신(祖先神), ③일본평정에 공적이 있는 특정한 신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신사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개념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신궁은 ‘신사 중의 신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여느 신사와는 격을 훨씬 달리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창립된 신궁은 두 군데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 땅을 영구 통치하기 위한 그네들의 수호신이 사는 영역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 땅에 세우려던 ‘부여신궁(扶餘神宮)’이며, 이곳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여신궁의 창립과 관련하여 <통보(通報)> 제42호(193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총독부의 발표문에는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때마침 미증유(未曾有)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반도의 사명은 점점 무거워져 가고, 혼연일체로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중대사명달성에 매진할 때를 당하고 있으므로, 총독부로서는 시정(施政)의 전반에 걸쳐 거듭 일단의 비약적 진전을 도모하고자 전력을 경주해 나가겠습니다만, 이럴 경우 서정(庶政) 진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숭고하고도 왕성한 정신력에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바입니다. …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건대 상고시대에 우리나라(일본)와 삼국제국(三國諸國)과의 관계는 대단히 깊었고, 그중에 백제(百濟)와는 서로의 왕래가 빈번하여 정치, 경제 내지는 문화에 있어서 상호의 교섭이 실로 골육(骨肉)보다도 심상치 않았던 점이 있었으니, 그 사이 6대에 걸친 12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