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김포 애기봉과 강화도 갑곶으로의 평화기행
[후원회원마당] 김포 애기봉과 강화도 갑곶으로의 평화기행 ―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평화통일과 국난 극복 역사를 되돌아보다 박종선 부천지역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아래 부천지부)는 12일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과 강화도 갑곶으로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평화기행은 부천시평화통일기반조성사업 지원으로 추진되었으며, 부천시민 및 회원 등 28명이 참여했다. 이번 평화기행은 방학진 박사의 해설로 진행되었다. 평화기행을 진행하다보면 보통 현장에서 해설이 진행되기 쉬우나 부천지부는 버스가 출발한 후부터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하면 해설이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그 전에 평화기행이 추진되는 배경과 목적지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면 이해가 더 쉽기 때문이다. 방학진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는 김포가 갖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설명하며, 강원도와 경기도에 있는 접경지역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 경기도 내 총 31개 시군 중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은 에버랜드가 있는 용인이며 두 번째로 많은 곳은 임진각이 있는 파주다. 대결과 전쟁 그리고 평화가 공존하는 파주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셈이다. 과거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교류협력을 촉진해야만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다고 방학진 박사는 강조했다. 즉,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안전한 곳으로 인식시켜 외국자본이 투자해도 안전하고 관광을 해도 좋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연장선 상에서 우리가 가고있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도 관광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의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포애기봉생태공원 입구에 도착한 일행은 군사지역으로 신분증을 확인해야
사진 한 장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강상호
[후원회원마당] 사진 한 장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강상호 임승관 전남동부지역위원회 위원장 광복절을 맞아 순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인사의 행적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발간했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의 삶을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처음 강상호 선생을 만났다. 강상호 선생은 1919년 2월 6일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 매산학교와 고창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 요코하마전문학교(현 가나가와대학)에 진학했다. 일본 유학 중에는 주오대학의 배종윤, 릿쿄대학의 원용학 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창씨개명과 한국어 말살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41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지만 다시 후배들을 규합해 활동했고,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광복을 불과 석 달 앞둔 1945년 5월 11일, 혹독한 고문 끝에 스물여섯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강상호 선생의 공적을 살펴보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국가의 공훈기록에는 그의 삶과 독립운동이 남아 있는데 정작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스물여섯 살에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친 이 청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진 한 장이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선생이 다녔던 가나가와대학에 학적자료와 졸업앨범의 존재 여부를 문의하고, 대학 자료편찬 부서와 연락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인연도 만났다. 강상호 선생의 사연을 알게 된 일본인 다섯 분이 뜻을 모아 작은 모임을 꾸리고 자료 찾기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어가 가능한 분은 대학과의 연락과
조선공산당 선언
[자료소개] 조선공산당 선언 김단야 김찬 조봉암 조동호 남만춘이 이끌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가 1926년 7월 「조선공산당 선언」을 작성해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 제7호(1926.9.1)에 발표하였다, 조동호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공산당 선언」의 주요 내용만 전할 뿐 전문이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가 소련 해체 후인 1992년 1월 모스크바 러시아 현대사자료 보관 및 연구센터에 소장된 『불꽃』 제7호가 발굴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선언」은 식민지 조선의 당면 과제를 민족해방과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규정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통해 부르주아적 민주공화국 건설을 천명했다. 강령에서는 직접·평등 선거, 8시간 노동제, 신분제 타도, 남녀평등, 무상 의무교육 등 진보적인 사회적·경제적 요구를 담았다. 다음은 「조선공산당 선언」 전문이다. 「자료발굴 조선공산당 선언」(『역사비평』 1992 겨울호)과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의 「조선공산당선언 전문읽기」를 저본으로 삼았으며 일부 한자어를 현대 표기법으로 고쳤다.―편집자 주 전조선 노력자들께 전조선 인민들께 사정없이 실행하는 약탈과 폭력 정책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이래 조선은 이제 이미 더 참을 수 없는 곤란한 경우에 빠졌고, 조선인은 민족적 최후 멸망의 위험에 다다랐다. 전국민의 경제생활이 어느 하나가 일본 자본가들의 장악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이 없나니 공장, 제조소, 상업, 금융, 교통 내지 자연의 부—광산, 삼림, 어장, 염전 등등이 모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무한정 소유로 되었으며 국민생활의 유일 기초인 농작의 토지까지 일본 회사, 은행 및 개인 소유자들의 점유한 바 되었고, 조선인은 오직 무제한의 노역으로써 일본 자본가와 금융기관들의 착취 대상으로
경성유람버스(京城遊覽バス) 탑승기
[식민지 자료관 8] 경성유람버스(京城遊覽バス) 탑승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바야흐로 시절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거리에 넘쳐나고, 인천항에는 세계유람기선이 드나들며, 또 하늘에는 공중산보객(空中散步客)이라고 하는 유람비행이 막 성행하기 시작하던 1931년의 일이었다. 때마침 친일귀족 민영휘(閔泳徽) 자작이 몸소 여의도 조선비행학교를 방문하여 원기왕성하게 비행기에 올라 고령자로서는 처음 경성의 푸른 하늘을 날으며 경성시가지를 유쾌하게 부감하였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에 게재되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이처럼 유람의 바람이 일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변화가 땅 위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이른바 ‘경성유람버스(일종의 시티투어버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머지않아 ‘만주사변’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요긴한 새로운 문명의 편의시설로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 1931년 2월 14일자와 6월 21일자의 지면에는 경성유람버스의 운영이 곧 개시된다는 소식을 각각 이렇게 알렸다. [1] 시내 욱정(旭町) 노노무라 켄조(野野村兼三; 경성택시 운영주)는 금 13일 오전중에 경기도경찰부 보안과(保安課)에 경성유람버스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동(同) 유람버스는 지방사람이나 또는 외국사람들이 경성 유람을 올 때에 동 유람객을 자동차에 싣고 시내 유명한 건물과 창경원, 신사 등과 유명한 백화점을 자동차로 안내하기로 된 것이다. 요금은 2원 20전이라는데 보안과에서는 동 원서를 접수하고 고려중이라 한다. [2] 경성의 명소 등을 소개할 목적으로 이미 계획중에 있던 경성명소유람승합자동차(京城名所遊覽乘合自動車)는 오는 22일부터 운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동(同) 자동차는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의 2회를 운전하는 바 시내 장곡천정 ‘경성택시’ 앞에서 승차하고 조선신궁, 창경원, 경복궁, 기타 14개소를 하차하여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7. 영화 <아리랑> 개봉과 주제가 <아리랑> 1926년 10월 1일 금요일 저녁 7시, 서울 종로에 있는 극장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했다. 원작·각색·연출·주연 등에서 나운규(羅雲奎)가 종횡무진 활약한 영화는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고, 한국 영화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작품으로 지금껏 평가되고 있다. 단성사 첫 상영은 불과 닷새 동안이었으나, <아리랑>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재상영되었다. 잡지 <삼천리> 1930년 7월호에 실린 나운규의 회고에 의하면 그때까지 평양 등지에서도 16회 상영이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정식 극장 상영 외에 각지 순업(巡業)까지 더하면 실제 상영 횟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조선 무성영화 중 첫손에 꼽히는 걸작으로 그토록 절찬을 받았던 <아리랑>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영상을 볼 수가 없다. 해방 전에 제작된 무성영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아리랑> 역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까지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필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아리랑>과 관련된 상실은 필름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분명치 않고 아쉬운 점들이 여전히 많다. 무성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했을 때 스크린 옆에는 변사가 앉아 관객들에게 영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또 <아리랑>에는 주제가가 있으므로, 극 중 노래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실제 가수가 등장해 악단 반주에 맞춰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단성사 첫 상영 당시 해설을 맡은 변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노래를 부른
해방 직후 이극로의 한글운동 전개와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 정치 행보
[연구소 글방 28] 해방 직후 이극로의 한글운동 전개와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 정치 행보 박광종 특임연구원 1. 한글운동 전개 조선어학회 재건 1945년 8월 17일 이극로(1893~1978)는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과 함께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2년 10월 체포되어 홍원경찰서로 압송되고 재판 끝에 징역 6년형을 받아 복역한 지 3년 만에 출옥한 것이다. 이극로 일행은 하루 속히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서울로 향했다. 1945년 8월 25일 이극로는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과 서울에 남아있던 김병제 김윤경 등을 소집하여 조선어학회 임시총회를 안국동 불교선학원에서 열었다. 여기서 임원진 선정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당면 과업을 결의하였다. 임원진으로는 간사장에 이극로, 간사로 최현배(경리부) 김병제(서무부) 이희승(교양부) 정인승(출판부) 김윤경(도서부)이 뽑혔고, 당면과업으로 ① 한글교원 양성을 위한 한글강습회 개최 ② 초중등 한글교재 편찬 ③ 『한글』지 속간 ④ 한글사전편찬의 완결등을 내걸었다. 이렇듯 부서별 임원 배정과 사업계획 구상이 끝났으나 조선어학회가 입주할 보금자리와 각종 사업 실시를 위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이극로 간사장을 중심으로 각계 요로에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해방 직후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회관과 기금 마련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에 서광이 비치는 희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곧 함남 풍산 출신의 실업가 이종회가 해방 전에 경성보육학교로 쓰이던 서울 종로구 청진동 188번지 2층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부했다. 9월 11일 청진동 건물로 이전하여 조선어학회의 ‘청진동 시대’가 열렸다. 한편 김영세라는 전 총독부 직원이 50여 만원의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함께 걷고, 함께 기억한 강화도
[초점] 202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 – 함께 걷고, 함께 기억한 강화도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 동안 인천 강화도 일대에서 2026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모꼬지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회원들은 강화도의 역사 현장을 함께 걸으며 우리 근현대사의 흔적을 살펴보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번 모꼬지는 강화도가 품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기억을 직접 마주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통제영학당 터를 시작으로 성공회 강화성당, 연무당, 합일초등학교, 강화 중앙교회, 연미정을 차례로 찾았다. 이어 교동도로 이동해 을지타이거여단 관련 민간인 학살 현장과 송해면사무소에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이사현 추념비를 돌아보았다. 각 답사지에서는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특히 교동도 답사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의 역사를 되짚으며 분단과 전쟁이 남긴 상처를 생각했다. 참가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조강과 북녘땅을 바라보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분단 현실을 체감하기도 했다. 송해면사무소에서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에게 직접 피해자 유족의 삶과 활동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한 회원은 “방문했던 모든 곳이 다 좋았지만,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 아버지를 위해 놀라운 역사를 손수 만드신 이희자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쉬운데 오히려 건강하고 단단한 분노로 무장하신 것 같다”며 그 삶과 실천이 준 울림을 되새겼다. 강화도의 역사 현장만큼이나 참가자들의 기억에 깊이 남은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었다. 대구에서 참가한 정주영 회원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새로운 이정표를 찾아서 현장 보고〈제5회 민연포럼〉
[초점] 한반도 평화를 향한 새로운 이정표를 찾아서 현장 보고 〈제5회 민연포럼〉 지난 8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제5회 민연포럼이 열렸다. 이번 포럼은 국제정치학자 서재정 교수를 초청해,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한반도가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였다. 서재정 교수는 우리가 직면한 시대를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려 ‘괴물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기존 질서는 무너졌으나 새로운 질서는 아직 들어서지 않은 막막한 이행기, 그 혼란 속에서 무수한 비정상과 분쟁이라는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배하던 미국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고, 그 빈자리를 채울 대체 세력도 불분명해 전 세계가 미증유의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이 혼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서 교수는 냉전이나 신냉전 같은 기존의 단편적인 틀을 넘어 ‘삼중분단’이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어는 생소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의 뼈아픈 실상이다. 약 100년 전 동아시아에서는 세 가지 거대한 비극이—첫째 미국과 일본이 벌인 강대국 간의 패권 전쟁, 둘째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민족의 독립투쟁, 셋째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내부 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 겹겹이 얽혀 일어났다. 문제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패권 다툼만 대충 정리했을 뿐, 식민 잔재 청산이나 내부 갈등 해소 같은 과제는 제대로 풀지 않은 채 덮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렇게 미완으로 남은 세 비극의 유산이 굳어진 결과가 바로 오늘날 한반도의 ‘삼중분단’이다. 결국
연구소가 발굴한 김상구·김서호 지사, 8·15에 발맞추어 독립유공자 포상
[초점] 연구소가 발굴한 김상구·김서호 지사, 8·15에 발맞추어 독립유공자 포상 올해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 김상구 지사, 김서호 지사가 포함됐다. 김상구 지사는 전남 순천 출신이다. 김상구 지사는 1920년대 일본 오사카에서 이마후쿠(今福)조선노동조합,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신간회 오사카지회 등에서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1926년 6월 상애회와의 폭력 충돌로 체포된 김상구 지사는 1928년 4월 오사카공소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1929년 2월에는 신간회 오사카지회 회장에 옥중 당선되기도 했다. 김서호 지사는 제주도 조천면 출신이다.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에서 노동야학을 지도하던 김서호 지사는 1930년 2월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월(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이후 김서호 지사는 일본에 건너가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가담했는데, 일본공산당원으로서 전협(全協)화학 오사카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33년 6월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를 바탕으로 수록 인물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고 있다. 1945년 3월 제작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는 일제 경찰이 식민통치나 침략전쟁 수행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인물들을 관리한 자료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감시 체계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일제판 블랙리스트로 불린다. 이번에 포상된 김상구·김서호 지사는 작년 6월에 연구소가 포상을 신청했던 분들이다. 올해 6월에도 26명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으며, 앞으로도 연구소는 신청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김상구 지사는 건국훈장 애족장, 김서호 지사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됐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민족사랑 202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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