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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2019년 7월 25일 208

[회원마당]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지난 6월 9일부터 11일까지 2박 3일 동안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워크숍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진행하는 제주 4・3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제주4・3평화공원과 선흘 목시물굴, 북촌너븐숭이, 이덕구 가족묘 및 이덕구 산전, 사리물궤와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등 평소에 쉽게가 볼 수 없는 4・3 유적지를 찾았다.   목시물굴, 은신했던 주민들의 심경을 헤아리며 워크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 중 하나는 목시물굴에 들어가 본 것이었다. 목시물굴은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된 후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장소이다. 4・3 당시 주민들이 숨어 지냈다던 굴을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러나 막상 목시물굴을 눈앞에 두고 보니 두려움이 조금 엄습했다. 지하로 난 아주 좁은 입구로 몸을 구부려 들어가야 했고, 아무리 몸을 작게 구부려도 통로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천장과 양 옆, 바닥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온몸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조금만 참고 통로를 지나니 넓은 내부의 모습이 나왔다. 넓다고도 하기 어렵지만 비좁은 통로를 뚫고 지나온 터라 내부가 널찍하게 느껴졌다. 동굴 내부에서도 높이가 제각기 달라 어떤 곳에서는 성인 남성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는 잠시 그때 당시 주민들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 모든 불빛과 소음을 차단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용산육군묘지, 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침략전쟁의 기념공간 – 이곳이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2019년 7월 25일 233

[식민지 비망록 49] 용산육군묘지, 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침략전쟁의 기념공간 이곳이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에 수록된 제물포 일본군 묘역의 모습이다. 표목 옆에 기재된 ‘보병 제21연대’라는 구절이 이들의 정체가 청일전쟁 때의 전사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와 관련한 근대시기 서양도서자료에 입문하던 시절에, 영국인 여행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지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을 뒤져보다가 개인적으로 꽤나 궁금증이 일던 사진 한 장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제물포(濟物浦)의 어느 언덕 위에 백여 기(基) 남짓한 일본군 묘지가 빼곡히 들어선 모습을 담아낸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먼저 떠오는 물음은 저들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추론컨대 버드 비숍은 1894년 3월에 처음 서울을 찾은 이래로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한 행적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필시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전사자를 가매장(假埋葬)한 광경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목(標木) 측면에 표시한 ‘보병 제21연대(步兵 第二十一聯隊)’라는 구절은 이들이 일본군 쪽의 선발대인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의 주력 예하 부대(보병 제11연대와 보병 제21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곳 묘지에 묻힌 이들 유골이 그 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어디로 옮겨갔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인천부청(仁川府廳)에서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1933), 1424~ 1425쪽에

박자혜의 삶과 투쟁

2019년 7월 25일 279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3]   박자혜의 삶과 투쟁 예지숙 선임연구원   박자혜(1895~1943)는 당대에 흔치 않은 직업여성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간 신채호의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페미니즘의 부상에 따라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호응하여 이 글은 ‘직업여성’ ‘사회인’으로서 박자혜의 성장과 활동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과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의 등장 박자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기의 여성의 위상과 젠더 규범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활동기인 1898년이었다. 양반 부인들은 조선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讚揚會)’를 결성하고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여 관립여학교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들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근대적 정치운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국권 침탈의 위기에 직면하자, 양반부인과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함께 여학교가 생기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에는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여성들이 전면에 나섰다.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간호부 등은 기존의 내외규범을 위배하고 집과 학교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진출했다. 3·1운동 이후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부인계”라는 평가나, <개벽> 창간호(1920.6)의 논설에 “노동문제, 부인문제, 인종문제, 사회문제”를 전인류의 문제라 언급한 것은 ‘여성’의 등장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누군가의 아내/딸이 아닌 대체 불가의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 성장한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학교, 교회, 직장

백년전쟁 재판 방청기

2019년 7월 25일 241

[방청기] 백년전쟁 재판 방청기 권시용 선임연구원 “주문.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 순식간에 끝났다. 재판장이 하는 말을 요령 있게 잘 받아 적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던 순간이었다. 기쁨에 앞서 뭐 이렇게 빨리 끝나버리는 건지, 허탈함이 앞섰다. 피고인석에 서있던 김지영 감독과 최진아 피디를 비롯해 방청하러 온 임헌영 소장, 조세열 이사 등 연구소 상근자들은 판사의 선고가 끝나기 무섭게 법정 문을 나섰다. 다음 재판이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법정 안에서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법정 밖 복도에서 우리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악수하고 얼싸안았다. 짧았던 선고가 몰고 온 어안이 벙벙함이 지나자 기쁨이 찾아왔다.   항소심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며 결과를 낙관했다. 그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이었다. 1심 판결에서 무죄를 받았고, 항소심 과정에서 검찰은 별다른 증거를 새로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엔 불안이 남아있었다. 우리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그토록 컸다.   7년전쟁 참 오래도 걸렸다. 다큐영화 ‘백년전쟁’에 대해 고 이승만 전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이 들어왔다. 그게 2013년 5월이었다. 영화 개봉이 그 전 해 11월이었고, 그해 3월 이인호씨가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이를 얘기하고 박 대통령이 수첩에 메모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자 조선일보 뉴데일리 등 수구언론이 ‘좌파의 선전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영상물로 규정하고 공세에 열을 올렸다. 국정원은 전경련을 동원해 이승만 지지세력이 만드는 대응 영상에 제작비를 지원했다. 당시 교육부도 백년전쟁 대응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촛불혁명이 있었기에 뒤늦게나마 박근혜 정권의 사법농단을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2019년 7월 25일 347

[인터뷰]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7월 11일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최근 성신학원 이사장에서 퇴임한 황상익 서울대 명예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황상익 교수는 오랜 기간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교수로 재직했고 대한의사학회,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 회장과 제1, 2대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95년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해왔고 2010년에는 연구소를 방문해 강제병합도록을 기증해 주었다. 문 : 성신학원 이사장으로서 그간 학원 정상화에 노력하시다가 이제 그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소회를 말 씀해주십시오. 답 : 2017년 7월 교육부로부터 성신학원 임시이사로 부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학비리와 학내 분규로 성신여자대학교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요. 9월말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임된 뒤 성신학원 구성원들의 생각과 소망을 듣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심화진 전 총장의 10년간 전횡으로 인해 성신학원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어요. 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기 위해 이사회에서는 심 전 총장의 탄압에 맞서 성신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온 김호성 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하여 그분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작년 7월 성신학원의 첫 직선제 총장으로 양보경 교수가 취임하여 학원 정상화의 길을 밟고 있습니다. 성신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한 2년 가까이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교수와 학생, 직원과 동문 등 성신학원의 모든 구성원들과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최소한의 성과는 거두었다고 자평합니다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

2019년 7월 25일 90

 ▶경북 청소년수련원앞에서 회원단체사진 2019년 회원수련회가 6월 29일과 30일 양일간 경북 김천 경상북도청소년수련원에서 열렸다. 궂은 날씨에도 30여명의 상근자들과 전국에서 150여명의 회원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참여해 주었다. 비 때문에 사전행사인 외부행사는 진행하지 못 했지만 먼저 도착한 회원들끼리 간단히 맥주를 마시며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한 후 저녁 7시에 이번 회원수련회를 준비한 구미지회 소개영상을 보며 공식 행사를 시작했다. 먼저 몸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한 함세웅 이사장을 대신해 임헌영 소장이 구미지회가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수련회를 연 열성적인 구미지회 회원들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일당백 구미지회 회원 소개가 있었는데, 특히 박정희 탄생 99주년에 박정희 생가터에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에 나섰던 신윤정 회원의 영상을 보고 그 용기에 박수와 찬사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구미지회가 꾸준한 작업으로 알려온 왕산 허위 선생 일가 소개가 있었다. 이 자리엔 임청각에 살고있는 이상룡 선생님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이 안동에서, 왕산의 후손이자 일창 허발 애국지사의 손자인 허벽 선생이 서울에서, 시산 허필의 손자이며 허형식장군의 조카인 허창수 선생이 대구에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뒤이어 일본식 지명 변경 활동으로 지역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온 전북지부에 ‘모범지부’시상을 하고, 축하무대로 광주지부에서 섭외한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의 공연과 구미지회에서 섭외한 창립 30년이 넘는 전통문화 예술단체인 구미놀이패 말뚝이의 축하공연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이튿날 아침 9시에 단체기념촬영을 마친 후 왕산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서울자유시민대학과 함께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근현대사 강좌 결산

2019년 7월 23일 90

[초점] 서울자유시민대학과 함께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근현대사 강좌 결산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에서 5월 10일부터 진행해 온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일제강점기 역 사해설 교육 프로그램’이 2달간의 장정을 마치고 7월 13일에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강제병탄>(한철호), <조선총독>(이형식), <일본군>(서민교), <경찰>(장신), <경제수탈>(이송순), <강제동원>(노기 카오리), <민족해방운동>(조형열) 등의 강의와 <3・1운동-북촌・종로>(권시용),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용산>(이순우) 일대의 답사 그리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공동대표)의 증언, <박물관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식민지역사박물관>(김승은) 해설 등 일제 강점기 전반에 걸친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서울시민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응모해 당선되어 서울시의 지원을 받고 진행한 강좌여서 교재와 간식 등이 무료로 지급되었다. 회원, 비회원 참여 인원이 50 여명이 넘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각 분야 전문분야 강사들의 수준 높은 강의와 해설, 증언은 수시로 청중의 박수와 엄지척을 이끌어냈다. 강의는 저녁시간에 진행되어 직장인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었고, 회차가 거듭돼도 꾸준하게 수강인원이 유지되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수강생의 열공 분위기에 어떤 강의는 시간을 넘겨 오후 10시 무렵 끝나기도 했고, 질문자의 수준 높은 질문에 일일이 답하다보면 늘상 시간을 넘겼다. 전체 11회차 강좌 중에 8회차 이상 참석한 수강생들에게는 수료증이 발급되었고 9회차 이상 참석자들은 특별한 선물도 받았다. 성숙한 시민이 함께 성장하는 배움의 장으로써, 최고의 평생교육 콘텐츠를 제공하려는 ‘서울자유시민대학’과 일제 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춰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건전한 시민의식을 형성하고, 역사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시민운동단체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만남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백년전쟁 사자명예훼손소송,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

2019년 7월 23일 120

[초점] 백년전쟁 사자명예훼손소송,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 2019년 6월 27일 서울고등법원(형사13부, 부장판사 구회근)은 다큐영화 <백년전쟁>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씨가 제기한 사자(死者) 명예훼손소송에서 영화 제작진(감독 김지영, 피디 최진아)의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역사적 사실이라 실체적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보면 그 자체로 명백하게 허위라고 볼 객관적 증거가 없다. 영화감독과 피디에게 명예훼손 의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은 2012년 11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사회를 통해 첫 선을 보였다. 이어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무료 공개됐고, 시민사회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연구소 후원회원도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연구소와 영화 제작진은 이승만 추종세력과 보수언론 등의 이른바 ‘좌파영상’ 공세와 그에 맞물린 박근혜 정권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2013년 5월 이인수 씨의 고소는 그 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청와대는 교육부에 ‘백년전쟁 대응방안’ 마련을 지시했고, 국정원은 전경련을 통해 이승만 찬양 영상 제작비를 지원했다. 김지영 감독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런 사실은 ‘촛불’을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검찰은 이 소송을 공안부에 배당해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다루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심 재판은 2018년 8월 27일부터 28일 이틀에 걸쳐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꼬박 이틀 동안 재판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승만이란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평가, 다큐영화의 성격과 지향점을 놓고 다투는 역사법정이었다. 8월 29일 새벽 2시, 백년전쟁에 무죄가 선고됐다. 마침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2019년 7월 22일 263

[초점]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6월 9일과 16일 2부작으로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이 방송됐다. 1953년생인 김용현 씨는 요한(세례명)으로 살다가 자연인이 되어서는 ‘씨돌’로 살았다. 그가 처음 방송에 소개된 것은 2012년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자연인 김씨돌’로 나오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이번 <SBS 스페셜>에서는 뜻밖의 그의 과거와 가슴 아픈 현재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민주시민이었다. 6월 민주항쟁 때 그는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87년 대선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대표를 지지했다가 구타당해 숨진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했다.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구조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면 늘 홀연히 사라졌다. 1990년대 말에는 영월 동강댐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2013년엔 삼척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그의 흔적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큰별 PD는 말한다. 게다가 그는 방송 출연료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돈도 전부 기부했고, 정선에서 손수 농사를 지은 수확물을 시민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김용현 씨는 자신의 시집 <오! 도라지꽃>도 연구소에 보내주었으며, 2005년 가을에는 무, 당근 그리고 노란 들꽃 한무더기와 함께 연구소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 신한은행 100-033-687880 김씨돌후원회, 문의 : 리토피아 출판사 032-883-5356 • 방학진 기획실장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2019년 7월 23일 388

[소장자료 톺아보기 6]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조선징용문답>표지 와 <조선징용문답> 본장 상단에 일본어를, 하단에 조선어를 번역하여 구성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4년 2월 10일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징용문답>으로 조선인의 징용에 대한 문답식 해설서다. 저자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미야 코이치(宮孝一)이고, 친일논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일본정신의 구현과 내선일체의 생활화를 주장한 조선노무협회 촉탁 이영근(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창씨명:上田龍男)이 번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이후 곧바로 1939년 ‘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본 책자는 이러한 ‘국민징용령’의 실시에 따라 발행된 것이다. <조선징용문답>에서는 먼저 학도선등(學徒先登)이라 하여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징용에 임하고 생산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글부터 시작한다. 다음 내용으로 징용의 정의, 실행이유, 징용대상자와 징용방식 그리고 징용된 자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징용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문답형식을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징용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요.”라는 첫 질문에 대해, “천황폐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나라에서 하라는 일을 하는 것이 징용의 근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징용은 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닌 전시에 국민이 다해야 될 중요한 의무이니 “즐겁게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에 예외는 없으며 징용에 관련된 법규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국민징용령관계법령을 부록으로 제시했다. “가정의 사정에 따라 징용을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