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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새 고교 한국사 현 ‘집필기준안’으로 확정 땐 ‘암살’ 김원봉, 교과서 빠진다
▲ 교육 당국, 학습 부담 이유로 김구 한국독립당 중심 서술케 민족혁명당 등은 배제·축소 ▲ “집필자에게 상당한 구속력 특정한 관점의 강제는 문제” 정부가 추진 중인 ‘2015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질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영화 <암살>의 중심인물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사진)과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민족혁명당 활동이 빠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교육당국이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내세워 독립운동 정당을 되도록 생략하고 김구 주석이 이끈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서술하라고 집필기준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이 17일 입수한 ‘2015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한국 근대사 영역’을 보면 ‘1930~1940년대 국내외 민족운동의 흐름과 건국 준비 활동을 이해한다’는 성취기준 부분에 이 같은 내용이 적시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집필기준(안)에 담은 집필 유의점으로 ‘1930년대에 중국에서 활동한 다양한 독립운동 정당을 자세히 다룰 경우 학습 부담이 대폭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에 유의하여 되도록 생략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한국독립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고 적시했다. 사실상 한국독립당 외에 다른 단체들의 활동은 배제·축소하라는 얘기다. 현재 교과서에 사용되고 있는 2009 집필기준에는 이와는 반대로 ‘태평양전쟁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정치세력이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음을 유의한다’고 돼 있다. 해방을 앞두고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합작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2015 교육과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중 집필 유의점의 독립운동 부분. 1930년대 독립운동의 한 축은 집필기준안이 제시한 대로 김구
[재판으로 본 현대사](45)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下)
ㆍ정치적 헌재 ‘노, 위법 인정되지만 탄핵 불가’… 국회의 무리수 입증 ■ 헌법재판의 정치성, 재판관의 보수성에 우려도 대통령 대리인단의 선임과 활동에는 문재인 변호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그해 2월 말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네팔로 날아갔는데,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서울의 탄핵소추 뉴스를 접하고 급거 귀국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구해야겠다는 ‘의리의 사나이’다운 그의 일념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노 대통령의 말은 역시 그다운 명언이었다. 야당 측의 이런 저의와는 별개로, 노 대통령의 탄핵사태 대응에 아쉬움을 보이는 의견도 있었다. 즉 그의 실언이나 과오가 과연 탄핵을 받을 정도의 사안이었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탄핵 시비가 벌어졌을 때 노 대통령이 이를 진화하려는 노력을 왜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홍서여, <미추의 말과 글로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 팝샷, 2015). 국민 여론의 역풍에 놀란 야당에서는 탄핵안을 둘러싸고 사과, 철회 등 후퇴론이 나와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두 번 죽는다’는 의견이 강세여서 기존의 밀어붙이기를 유지하기로 했다. 탄핵사건의 심리(공개변론)가 열리는 날엔 헌법재판소 건물 앞에 탄핵을 주장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이 제각기 피켓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더러는 양편이 말다툼을 벌이는 등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헌재의 심리를 방청한 시민들의 반응 역시 편이 갈렸다. 탄핵을 추진했던 세 야당의 대표들은 총선정국에서 역풍에 몰리자 국민의 뜻에 반하여 탄핵소추를 강행한
영화 의 ‘반역자’로 알려진 염동진은 누구인가?
[임기상의 역사산책 119] 해방정국에서 정치인 테러의 문을 연 극우파 ▲ 해방 직후 대중집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그의 죽음과 함께 남북한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은 물거품이 되었다 “탕~탕~탕!”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서울시내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몽양 여운형이 탄 승용차가 트럭에 막혀 멈춘 순간, 괴한 1명이 자동차 범퍼에 뛰어올라 몽양을 향해 권총 3발을 쏘았다. 한 발은 등에서 복부로, 다른 한 발은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관통했다. 총탄을 맞은 여운형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멈췄다. 그의 나이 62세일 때이다. 이렇게 해서 남북한의 좌우를 아울러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경찰은 3일 후 범인이 평북 영변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라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먼 훗날 진짜 범인 4명이 자수하고, 유명한 정치깡패 김두한이 방송에서 폭로하면서 ‘백의사'(白衣社)라는 단체가 암살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 일제 관헌이 남긴 염동진의 사진과 기록. 그의 얼굴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김두한은 1969년 12월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의 ‘노변야화(爐邊夜話)’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자세하게 토로했다. “백의사의 총사령인 염동진이 참모였던 나를 오라고 해서 갔죠. 그랬더니 암만해도 여운형을 패야 된다고 해요. 그러니 ‘김 동지가 정보와 돈과 무기만 우리한테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좋습니다. 여기서 못하면 제가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저보고 총을 구해달라는 거에요. ‘총이요? 제가 드린
“부끄러운 광복 70주년…의미 없다”
“부끄러운 광복 70주년…의미 없다” [변상욱-김갑수의 스타까토] 46회 ① 암살당한 광복70년 ■ 팟캐스트 방송 : CBS <변상욱-김갑수의 스타까토> ■ 공개 일시 : 2015.08.14 (팟캐스트/팟빵) ■ 진행 : 변상욱 대기자, 김갑수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 게스트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 실장) 지난 14일에 공개된 이번 46회 파트1은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박사님과 함께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 우리가 잊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그리고 광복 그 이전과 그 이후에 대해서 짚어봤습니다. 또한 영화 ‘암살’로 이슈가 된 인물 의열단 ‘약산 김원봉’에 대한 스토리와 이인호 KBS 이사장이 내세우고 있는 ‘건국론’, 친일파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짚어봤습니다. ◆ 김갑수>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박한용> 저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부끄럽기 때문에…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전 이사장님이 살아계실 때 여쭤봤어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데 대답이 “살아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3가지 죄를 짓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더니 “첫 번째로 독립이 되었다고 하지만 버젓이 친일파와 그 후계 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것을 독립으로 보는가? 그것이 첫 번째 죄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더니 남과 북이 분단되어서 싸우고 있는데 이것을 멀쩡한 국가로 말하는 것이 두 번째 죄이다.” “세 번째 죄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독립운동가라고 연금을 받고 있으니 무슨 낯으로 선배들을 뵙겠느냐…”라고
“주민 숨결 담은 지역연구로 현대사 왜곡 바로잡을 터”
여수 일대 일제 군사기지 현장조사 연구서 낸 여순연구센터장 주철희씨 “여수는 일제가 호남의 양곡을 수탈하고, 징병·징용 등으로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는 전진기지였어요.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내 참호 구축에 내몰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의 주철희(50) 여순연구센터장이 17일 광복 70돌을 맞아 <일제 강점기, 여수를 말한다>라는 지역사 연구서를 펴냈다. 주씨는 전남 여수에 남아 있는 일제 군사기지 40여 곳을 답사해 침략과 동원의 진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288쪽 분량에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신월동 일대를 비롯해 돌산도와 거문도에 흩어져 있는 요새·공항·진지·동굴 등을 정리했다. “일제는 여수를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시모노세키 연락선을 부산에 이어 두번째로 운항했어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요새사령부와 항공기지, 지하참호를 구축하는 등 전략 요충으로 삼았죠.” 그는 일제가 당시 순천중이나 광주고보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근거도 제시한다. 그는 2013년부터 3년 동안 여수 일대의 군사기지 흔적을 찾아다녔다. 기지 40여곳을 답사해 한 곳에 2~3명씩 모두 100여명의 진술을 들었고, 각종 문헌을 뒤져 사진·그림 등 자료 500여점을 모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여수 신월동 해안선을 따라 길이 200m, 너비 900m 규모의 해군 활주로가 만들어졌고, 남쪽으로 4㎞ 떨어진 주삼동에 해군 지하요새가 구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수의 관문인 돌산도에는 계동(두릉개)과 임포(향일암) 2곳에 고사포를 설치했고, 평사리 대미산에는 관측소를 운영했다는 흔적도 발견했다. 여수의 전초인 거문도에는 서도 덕촌마을에 통신기지, 동도 죽촌마을에 해안동굴 9곳을 만들었다는 보고도 담았다. 후속 연구를 위해 사진·그림 등의 출처를
임시정부 장준하와 만주군 박정희의 ‘70년 전쟁’
[김종철 칼럼] 광복 70년-장준하 타살 40년, 친일파가 독립군을 이길 수는 없다 2015년 8월 15일은 광복 70돌이 되는 날이었고, 17일은 민주·민족·통일운동가 장준하가 타살당한 지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박근혜 정권은 나라 안을 태극기로 뒤덮고 광복절 연휴에 하루를 더하는 ‘선심공세’를 펼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는 대대적 ‘애국 캠페인’을 벌였다. 친미사대주의자이자 포악한 독재자였던 이승만,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장교로 참여했고 18년 동안 파쇼통치와 ‘사법살인’으로 주권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박정희가 각기 ‘국부’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투쟁을 주도한 백범 김구와 박정희의 반민족적 행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준하를 기리는 ‘광복 70돌 잔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8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군의 ‘장준하공원’에서 그의 40주기를 추모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릴 뿐이다. 전말이 뒤바뀐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쇼’를 보면서 ‘장준하와 박정희의 70년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현대사를 조명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절감한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군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장준하는 그해 10월 일제가 실질적 강제징집제도인 ‘학도지원병제’를 공포하자 11월 하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자원 입대 후 탈영’을 결심한 그는 1944년 1월 결혼한 뒤 일본군에 입대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의 부대에 배치된 장준하는 그해 7월 7일
모욕적인 아베 담화와 짝을 이룬 박근혜 정부의 대응
<칼럼>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종전’ 70년을 맞아 지난 8월 14일 담화를 발표했다. 앞서 최근 가속화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우경화 행태와 관련해, 담화가 1945년 패전 이전으로 회귀하는 기조를 띨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제를 요구하는 일본 내외의 압력이 적지 않았고 각의결정이라는 형식으로 발표되는 담화인 만큼 최소한의 성의 표시나 절충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베는 그와 같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자신이 과거 군국주의를 계승한 극우 정치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담화가 아니라 망언의 집성이요, 반성은커녕 선전포고라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다. 담화의 내용은 일반적인 평가보다 훨씬 교활하며 악의에 차있다. 전문에 흐르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역사인식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기의 세계적인 추세에 따랐을 뿐이며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호도한다. 특히 “러일전쟁이 식민지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다”는 억지는 일본이 황인종들의 보호자로서 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 아시아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른바 ‘대동아사관(大東亞史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일제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군국주의 이론이자, 현재 극우파가 자학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확산시키고 있는 역사수정주의의 대표적 논리를 담화에 담은 것이다. 한편으로 그간 포함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침략전쟁 식민지배 사죄 반성 등 핵심 용어들을 군데군데 나열하여 얼핏 보기에 여론을 수렴한 듯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유체이탈 화법과 모호한 표현으로 가해의 주체를 은폐하고
독립운동가 고 지복영 여사 회고록 펴낸 아들 이준식 박사 “아버지 그리던 딸의 고단한 삶 담아”
어머니는 아들이 군인이 되길 바랐다. “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말 타고 일본군과 싸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다. 손주들 중 한 사람은 할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아들은 군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가 됐다. 어머니는 역사학자가 된 아들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네 할아버지의 평전을 남기고 싶은데 공부 많이 한 네가 쓰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번에도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평전을 쓰면 객관성이 흔들린다”고 했다. 결국 할아버지의 평전은 1995년 당시 나이 일흔이 훨씬 넘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로 태어나 본인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고 지복영 여사와 아들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박사(59·사진)의 이야기다. 지 여사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이 출간됐다. 지 여사가 남긴 대학노트 3권 분량의 글을 이 박사가 정리해 펴냈다. 16일 경기 안산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박사는 “어머니의 생전 부탁을 두 차례나 저버려 늘 죄송했는데 이제야 마음의 짐을 하나 던 것 같다”고 했다. 회고록에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던 지 여사의 유년 시절의 고단한 삶이 녹아 있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 대한 솔직한 마음도 담겼다. 10대 시절 지 여사는 어렵게 이어가던 학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에게 “내가 글자나마 깨우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덕일 뿐, 연필 하나, 공책 하나, 아버지께 신세진 것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반지하서 궁핍한 삶… 내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다
광복 70주년… 봉오동 전투 승리 이끈 최진동 장군 손녀 최정선 씨 기초수급자로 생활 ▲ 독립투사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정선 할머니(가운데)와 윤관석 의원(오른쪽),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과 함께 웃어보이고 있다. <사진=윤관석 의원실 제공>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진동(1887~1941)장군의 손녀 최정선 할머니가 인천시 남동구의 반지하 방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할머니는 특별한 수입 없이 국민기초생활 급여만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 할머니의 오빠 역시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노령연금만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처우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독립투사의 손녀인 최 할머니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나고 자라 지난 2010년 귀국했다. 최진동 장군의 손자, 손녀인 최 씨 남매가 독립유공자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수급권자가 1인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현재 최 장군의 유공자 연금은 최 장군의 셋째 동생이 받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선순위자 1인에게만 독립유공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여전히 법률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최 할머니의 사연은 윤관석(새정치·인천 남동을)국회의원이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과 함께 전수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윤 의원은 16일 “독립 유공자 후손이 이렇게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한 탓이 크다”며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 독립투사의 후손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책소개] 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 저자: 조한성ㅣ출판사:생각정원ㅣ신국판ㅣ16,000원ㅣ 360쪽ㅣISBN 979-11-85035-27-7 03910 <저자소개> ■ 조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료 읽는 법과 연구사 정리하는법 등을 훈련하며 역사학의 정수를 배웠다. 2006년부터 3년 반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일제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반대편에 섰던 지식인들의 활동과 고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4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과 새 조국 건설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던진 7개 비밀결사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대서사, 《한국의 레지스탕스》가 있다. <책소개> ■ 해방 후 3년은 어떤 시대였는가? – 1945년 8월 15일~1948년 8월 15일,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945년 8월 15일, 민족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다. 해방은 급작스럽게,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과 함께 찾아왔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국내외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던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은 세계대전에 기여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두 개의 핵폭탄으로 일제의 패망이 앞당겨진 탓이었다. 이로 인해 민족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곧바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완성하고, 일본 제국주의 및 봉건제도의 잔재를 뿌리 뽑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해방 후 3년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꿈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