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주요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3 1️⃣편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 백년전쟁 스핀오프 시리즈 《과거청산의 빌런들》 ▶3화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1️⃣편!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시리즈 #민족문제연구소3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과거청산의 빌런들》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성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해피빈 모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련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2️⃣편 :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영상 보면 더 이상 그런 말 못 합니다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1️⃣편 : 미 CIA문서로 드러난 박정희의 한일협정 뒷거래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2️⃣편 : “안두희의 입을 열게한 비밀무기는?”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1️⃣편: 안두희와 빌런추적단
[김해뉴스] 김해현충시설 친일 잔재 시비·노래비 교체 완료
철거 약 3주 걸쳐 지난달 완료 “세부내용 결정하느라 다소 지체” 보훈대상자 이름 새긴 비석 세워 시설 전반 개·보수 작업도 진행 김해 삼계동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세워져있던 친일시인 모윤숙(1910~1990)·친일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작품 비석이 모두 철거됐다. 해당 비석에 새겨져 있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친일파 문학인으로 알려진 모윤숙 시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알려진지 약 6개월 만이다. 김해시 시민복지과는 모윤숙 시인이 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박시춘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 ‘전우여 잘 자라’의 가사가 적힌 비석 철거 작업을 약 3주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달 10일 모두 완료했다고 최근 밝혔다. 시와 경남동부보훈지청·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가 업체 선정, 예산 규모, 일정 등 세부내용을 함께 협의했다. 이들은 시각적인 통일성,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문제가 된 비석(시비 2칸·노래비 1칸)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다른 시비 2칸까지 총 5칸을 철거·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또 교체 작업을 하면서 글자 수정, 페인트칠 등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시설 전반을 개·보수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이 비석들이 철거된 자리에는 보훈대상자 230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새로 세워졌다. 6·25 참전용사 20명, 월남전 참전용사 26명, 보국수훈자 184명 등이다. 공사 예산은 총 1970만 원이 소요됐다.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 보수비 2000만 원을 지원받은 덕에 시비는 들어가지 않았다. 시민복지과 관계자는 “작품비를 교체하는 자리에 어떤 내용이 새겨진 비석을 세울지, 누구의 이름을 새길지 등 세부내용을 신중하게 결정하느라 다소 시간이 지체됐다”며 “이제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는 우리나라를
[단디뉴스] “진주시 명석면 발굴지(1차, 4차, 11-1차)로 향하여”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한국전쟁 전후 진주지역 민간인 학살지는 모두 24개소에 달한다. 그중에서 8개소를 발굴하였고 이번에 소개할 발굴지는 명석면 3개소(1차,4차,11-1차)이다. 3개소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아래 표와 같다. ▶ 먼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공동조사단) 출범되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다가 2007~2009년까지 1기 진실∙화해위원회(이하:진화위)가 실태조사와 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국가적 책무인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7개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으로 2014년 ‘공동조사단’이 출범하게 된다. 공동조사단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를 제1차 발굴지로 선정한다. 그때부터 필자는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인연을 맺게 된다. ▶ 공동조사단이 제1차 발굴지를 진주시 명석고개(용산치)로 선정한 이유는 현재 전국유족회 중에서 진주유족회가 전국에서 가장 잘 운영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강병현 전 유족회장이 9년간
[오마이뉴스] 곡기 끊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와 ‘민족가수’ 백년설
순국 111주기 자하 장기석(1860~1911) 선생을 기리며 1월 5일은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 1860~1911) 선생의 순국 111주기였다. 1세기하고도 10년이 더 지났으니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던가. 나는 자료를 뒤져 그의 삶을 돌이켜보다가 그 주말에 성주 벽진의 집실 마을을 다녀왔다. 감옥에서 27일간 곡기 끊어 순국 선생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순국 102주기를 맞은 칠곡의 독립운동가 만송 유병헌(1842~1918) 선생을 기리는 기사를 쓸 무렵이다(관련 기사 :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경술국치 이후에 자정(自靖) 순국한 분 가운데서 이웃 고을 성주 출신인 선생의 함자를 발견하면서였다. 자하 장기석은 국권을 잃은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전해 성주경찰서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때부터 27일간,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식음을 거부하며 저항한 끝에 순절한 것이다. 7년 뒤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장소에서 이웃 칠곡의 선비 만송도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가곡 家谷)에서 태어난 자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스물넷에야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의 함양 박씨와 혼인한 것도, 38세에 이르도록 공부를 하지 못한 것도 가난 탓이었다.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던 그는 서른아홉 살(1898)이 되어서야 학문의 길에 들어 마흔셋에 사서 육경을 통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그는 “독립 국민이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되겠느냐? 제군들은 충의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한 뒤 문하생들을 돌려보내고
[오마이뉴스] 촉석루 ‘이지용’ 이름 앞 ‘친일 반민족행위자’ 팻말 세웠다
[보도 후] 진주성관리사무소, 지난해 10월 말 설치 뒤늦게 알려져 … “진주시 설치에 의미” 경남 진주성(사적 제118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지용(李址鎔, 이은용, 1870~1928) 글자 앞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관련기사 : “촉석루 아래 암벽에 친일파 이지용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일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 사이 암벽 난간 앞에 가로 150mm, 세로 220mm 크기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음각 현황. 촉석루 아래 암벽에는 이은용(李垠鎔, 왼쪽)과 개명 후 이름인 이지용(李址鎔, 오른쪽)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 당시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일제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라고 적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2021년 10월 말경 설치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진주시의회에서 지적도 있고 해서 벼랑에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설치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안내판을 크게 세우려면 문화재청과 협의를 해야 하지만, 작으면 허가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지용은 ‘을사오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은용’이 본래 이름인데, 세자 책봉된 ‘영친왕’의 이름인 ‘이은(李垠)’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이지용’으로 바꿨으며, 그는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시기에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 같이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지용은 1911년 일왕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고,
[경향신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 고문 친일인명사전 지도위원 참여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경희대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 등 사회운동에 적극 목소리를 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당시 원로 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교수, ‘사상의 은사’ 언론인 리영희·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장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15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광릉추모공원이다. <2021-01-13> 경향신문 ☞기사원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관련기사 ☞한국일보: 한국사 연구 힘쓴 김태영 교수 별세 ☞연합뉴스: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디지털타임스: `한국사 연구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향년 84세 ☞한겨레: “조선 토지제도에서 실학 연구까지 중요한 성과 남기셨죠”
[한겨레]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외쳤다고 15년형 이어 억울한 죽음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5) 통일운동 선구자 이수병 4·19후 통일운동 이끌었다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미운털 혁명재판서 15년형 선고 이어 74년 2차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다른 7명과 함께 사법살인 당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제키엘 37,21-2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 9,2-3) 1961년 4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4·19 일주년 기념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 이수병 선생님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청년 학생들이 3·1 독립선언과 항일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 종속된 정치체제를 넘어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을 위한 불길을 댕긴 것입니다. 4·19로 분출된 뜨거운 시대정신은 청년과 시민을 각성시켰고, 이는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절절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청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청년 학생들의 열정과 울부짖음은 뿌리를 찾고자 하는, 구원과 완성을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학교 명예교수가 1월 11일 오후 8시경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태영 교수는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비롯한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는 강만길 고려대 교수, 언론인 리영희, 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는 지도위원으로 자문했다. 그의 진면목은 만년까지 이어진 치열한 학술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1982년 저술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는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현대 한국의 명저 100권’에 포함되었으며, 1986년 이 저서로 제 1회 단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외에도 『실학의 국가개혁론』 『조선성리학의 역사상』 『유형원-국가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의 비조』 등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다. 수많은 논구는 한결같이 국가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세사 연구자임에도 화두는 항상 현실 개혁이었던 것이다. 단재상, 미원학술상, 다산학술상 학술대상, 벽사학술상 등 숱한 수상 경력은 그의 실천적 탐구정신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례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7호, 발인은 15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추모공원이다.
[경향신문] 차별과 혐오, 타향살이 아픔···주소 불명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다
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학자 백름 백름(白凜)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발굴한 학자다. 이 발굴을 ‘반전’이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연구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계기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다. 재일조선인에게도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 2세들이 중심이 돼 개최한 이 전시에 재일조선인 1세 화가의 작품들이 나왔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집단의 에너지에 감동했다. 고흐나 마네 같은 서양 미술인들은 알면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이름도, 인생도, 작품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 졸업을 앞둔 때다. 당시 이 학교 교수 리용훈이 ‘재일코리안 미술의 궤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리 선생님이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정리하는 연구자가 나와야 하는데…’ 하고 몇 번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살다 1945년 해방 뒤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남북이 분단하면서 ‘대한민국’ 지지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지자로 나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각각 소속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백름은 재일조선인이 “ ‘북한 사람’이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름은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집단 활동을 연구했다. 활동의 시작은 1947년 설립된 조선미술협회 결성이다. 이들은 “민족이 대립과 차이의 키워드가 아닌 공존의 키워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조선미술회’가 설립됐다. 백름은 “조국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불러오겠다는
[오마이뉴스] 1920년대 일본이 남산에 한 짓은 끔찍하다
남산 통치기구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우리에게 남산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얼이 서린 산’이라 비견해도 무방할 것이다. 백두산과 더불어 오랜 관념으로 그리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불러 굳어진 노랫말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시작하며 우리 기상을 드러내는 존재로 남산을 묘사한다. 환경결정론이라 할 수 있는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도시가 한양이다. 이때 남산은 계획 중심요소로, 내사산 중 주작에 해당한다. 이성계는 새 나라와 도읍 한양을 지켜 줄 수호신으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면서 정상에 국사당을 세운다. 산은 또한 여러 이름을 가졌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불렀으며 경복궁과 관계도 중요하다. 경복궁은 외사산 중 삼각산을 조산 삼고 백악산을 주산 삼아 앉힌 새 나라 법궁(法宮)이다. 남산은 경복궁 안산이다. 이렇듯 조선의 도성 한양에서 경복궁과 남산은 도시 조영과 핵심적 통치공간을 상징하는 장소성을 갖는다. 또한 남산은 국방통신인 봉수제 원점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 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순하고 부드러워 도성 사람들에게 일상으로 바라다보이는 친근감과 편안함을 줌은 물론이다. 왜성대와 남산대신궁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최초 외국 공관, 일본 공사관이 돈의문 밖 청수관에 자리한다. 하지만 임오군란 때 불타 버리고, 제물포조약 후 금위대장 집을 2년간 임시로 사용한다. 교동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