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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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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2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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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 및 기술원 양성소 졸업생 사진,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행정·측량 분야의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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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지역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 1911
1911년 작성된 전라남도 영암군 곤일종면 학송리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이다.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목포와 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비롯한 부재지주였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재정기반 확충과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지질 조사 등 사전준비를 해왔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측량기술을 가르치면서 전면적인 지적조사에 대비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자본가에 의한 토지매수는 통감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해 한국 내 일본인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개설했고 병합 후인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1910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2,400여 만 원의 경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査定)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것이고, 토지가격조사는 전국의 땅값을 조사하여 지세(地稅)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며, 지형·지모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았다. 방법을 몰라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이 많았고 구한국정부·왕실소유(역둔토·궁장토)를 포함한 공전(公田) 100만 여 정보는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지주들은 큰 혜택을 보아 식민지지주제가 정착하게 된 반면 실질적으로 토지를 경작해 왔던 다수의 농민들은 영세 소작민 또는 화전민·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 행렬이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게 되어 한국 내 최대의 지주로 자리매김했으며 재정수입 또한 크게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이 토지의 일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지주들에게 무상 또는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는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과 생산력 증진을 토지조사사업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재정정책의 토대와 수탈 구조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통치를 위한 경제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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