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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임금, 김종필=신하? 그렇게 당하고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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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8> 유신 쿠데타, 서른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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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67년 6.8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이 엄청난 무리수를 둔 것은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6.8선거 후 3선 개헌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나.

서중석 :
6.8 부정 선거로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할 수 있는 수의 공화당 의원들을 확보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3선 개헌을 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야당이 반대하는 건 야당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보더라도, 문제는 공화당 내에도 3선 개헌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7∼1968년 이때쯤에는 4인 체제가 주류인 셈이고 김종필계는 옛날 주류, 구주류로 불렸는데, 그런 구주류에 속한 의원들이 많았다. 김종필계의 상당수는 3선 개헌을 반대하고, 김종필이 차기를 맡으면 된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로서는 개헌 정족수인 국회의원 총수의 3분의 2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김종필계를 최대한 무력화함과 동시에 김종필계의 다수를 3선 개헌 지지로 끌어들일 것인가, 이게 초미의 과제가 됐다.


1964년 6.3 계엄 직후 두 번째 외유를 떠난 김종필은 다시 돌아와 1965년 12월 27일 당 의장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때쯤 돼서는 4인 체제라고 해서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 이 네 사람이 당을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김종필을 포위했다. 1968년 초 4인의 직함을 보면 백남억은 정책위원회 의장, 길재호는 사무총장, 김진만은 원내총무, 김성곤은 재정위원장이었다. 이 사람들 말고도 반김종필 세력으로 국회의장 이효상, 국회 부의장 장경순 같은 사람들을 꼽고 있다. 그런 포위망에서 김종필이 힘을 쓰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1967년 6.8 선거가 끝나고 나서 1968년에 김종필계에서 김종필 다음가는 일종의 중간 보스로 이야기되던 김용태 쪽이 되게 당한다. 그것을 국민복지회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3선 개헌에 부정적인 김종필계 겨냥한 국민복지회 사건…최초로 국회의원 고문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1968년 5월 공화당 당무위원 김용태가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최영두, 송상남과 함께 공화당에서 제명됐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한국국민복지연구회(회장 김용태, 부회장 최영두)를 구성, 공화당의 훈련을 거친 기간 당원과 각 지구당 청년봉사회장 등에게 ‘여기에 가입하라’고 하면서 공화당 조직에 혼선을 가져오고 당 발전에 극히 유해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얘기한 걸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을 급하게 불러서 가보니 대통령의 안색이 매우 나빴고 몹시 안 좋은 일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던 박 대통령은 “김용태가 무슨 복지회라는 걸 만들고 있다. (…) 이건 여당 안에 여당을 만드는 것이며, 암암리에 종필이를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추대하는 공작을 추진하고 있더라는 거야. 김 부장, 즉시 잘 알아봐”, 이렇게 얘기했다. 아울러 김종필계의 불충을 엄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형욱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관련된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에 호되게 당했다. 김충식 기자 책에 나와 있는 김용태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을 중앙정보부에 잡아다놓고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해서 다시 출마하는 걸 결사반대한다”, 이 내용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김용태 의원은 당의 제명 처분을 달게 받겠다고 항복했다. 최영두 전 의원도 무자비하게 당했다. 두 사람 모두 중앙정보부에서 요구하는 내용, 즉 3선 개헌을 반대하고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라는 강요를 당하며 혹독하게 당했다.


주장되는 내용들을 보면 당내 사건이라고 봐야 하는데, 공화당 관련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맡아서 처리한다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여튼 김형욱이 그런 식으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보고하자, 박정희는 격노했다. 관련자를 모두 엄단하고 특히 국회의원들을 엄중히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김용태 의원, 최영두 전 의원 등을 공화당에서 제명했다.


국민복지회 사건은 정치적 이유로 전·현직 의원들을 고문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국회의원들에 대한 협박이나 테러는 그전에도 있었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고문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최영두 전 의원은 커다란 정신적 타격을 입었는지, 이 일이 있은 후 3년도 못 가서 죽고 말았다.


프레시안 : 이 사건 관련자들은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 생각을 실제로 한 것인가? 사건 당시 김종필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차이가 난다. 3선 개헌을 추진하는 쪽이라고 할까, 박 대통령 쪽이라고 할까 이쪽에서는 김용태 쪽에서 뭔가 활동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김용태 쪽에서는 ‘그런 일 없었다. 완전히 정치적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양자 주장에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김종필계를 치는 데 있어 그 중간 보스 역할을 했던 김용태를 아주 혹독하게 무력화하는 결과를 이 사건은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 사건 자체가 어떻다고 이야기하는 걸 떠나서 그 점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김종필은 아주 세게 반발했다. 조작된 일이 아니라면 김종필이 그처럼 강한 반발을 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김용태, 최영두 같은 사람들이 제명되고 나서 일주일도 안 지난 5월 30일 김종필 당 의장은 중앙당사에서 열린 당무 회의에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당 의장직, 국회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뿐만 아니라 공화당 당적까지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당 의장만이라면 몰라도 국회의원을 그만둔다는 것도 그런데, 공화당마저 떠나겠다고 한 것이다. 공화당은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4대 의혹 사건 같은 걸 일으키면서 사전 조직을 해서 만들어낸 당 아닌가. 그런 면에서 심하게 이야기하면 ‘김종필당’이라고까지 일부에서는 한때 이야기했었는데, 그런 당에서 떠나겠다고 얘기했다는 것은 김종필이 어떤 심정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자기 쪽 세력이 너무나 부당하게 당하고 있다는 강한 울분으로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나온 게 아니겠는가.


그러고 나서 김종필은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72시간 동안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돼 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이나 4인들이 잇따라 만류한 것으로는 돼 있는데, 요상한 것은 6월 2일, 그러니까 탈당을 선언하고 나서 불과 3일 후인 이날 김종필이 자신의 출신 지역인 부여 지구당에 1일 낸 탈당계가 정식으로 접수·처리됐다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누구 지시에 의해 이렇게 됐겠나. 이걸 지시할 수 있던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다. 이렇게 정식 접수됨으로써 탈당이 확정되는 동시에 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도 한꺼번에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돼서 정계를, 이것도 ‘자의 반 타의 반’인지는 몰라도 은퇴할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이틀 후인 6월 4일,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윤치영을 당 의장 서리로 임명했다. 윤치영은 이승만 비서를 오랫동안 했고 초대 내무부 장관을 한 사람으로 극우 정객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단군 할아버지 이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워 야권으로부터 윤치영이야말로 단군 이래 아첨꾼이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하는데, 하여튼 이승만 집권기에도, 박정희 집권기에도 자기가 모시는 사람에게 과잉 충성을 한 인물로 얘기된다. 이러한 윤치영을 김종필 후임으로 임명하면서, 공화당에서 3선 개헌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이 이승만 때 자유당계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김성곤, 김진만이 자유당 사람이었는데 윤치영까지 이렇게 당 의장 서리가 됐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윤치영은 자유당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모신 충성파였다. 어떤 면에서 3선 개헌이 옛날 사사오입 개헌(1954년) 때와 비슷한 인적 맥락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프레시안 : 김종필이 탈당을 선언하고 부산에 내려갔을 때 박정희가 만류한 것으로 돼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부분과 관련해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이때 김종필은 박정희가 자신의 사퇴를 만류하는 전화를 직접 해주기를 바라며 기다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그런 전화는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만류하는 뜻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비서실장 이후락을 부산으로 보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박 대통령을 만나 단독 면담을 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이후락이 얘기했는데 김종필이 그걸 거부한 것으로 돼 있다. 김종필은 6월 3일 서울에 올라오는데, 귀경하자마자 박정희 조카인 부인 박영옥과 함께 청와대로 직행해 박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요담을 나눴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그렇지만 이미 6월 2일에 김종필의 탈당계가 정식으로 접수·처리됐다고 발표되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윤치영이 당 의장 서리로 임명되지 않나. 박 대통령의 참뜻이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인가를 이런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여튼 국민복지회 사건을 통해 박 대통령 측은 김종필계의 중요한 부분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김종필은 왜 박정희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날까


프레시안 : 박정희와 김종필의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박정희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도, 박정희가 김종필을 대한 태도에서는 뭔가 다른 기류를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5.16쿠데타를 추진할 때 김종필이 중심 역할을 했다고 다들 보고 있고, 5.16쿠데타 이후에도 박정희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하게 한다든가 공화당을 만든다든가 하는 모든 일에서 김종필의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하다고 할까,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도 그렇고 민정 이양기에도 그렇고 민정 이양 후 초기에 박정희의 권력을 다지는 데에도 김종필이 한 역할이라는 건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회의 내 비주류라든가 5.16쿠데타 세력 가운데 반김종필계가 주로 김종필을 치고 내몰고 하는 식으로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박정희를 직접 치고 때릴 수는 없었으니까 김종필에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김종필을 굉장히 견제했다. 1964년 굴욕적 한일 회담을 규탄하는 데모가 치열하게 일어났을 때 그런 면을 여러 가지로 보였고 1964년에서 1967년, 1968년에 오는 과정에서도 김종필을 많이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국민복지회 사건이 일어나고 김종필이 당적까지 내놓는 사태까지 가는 걸 볼 수 있다.


김충식이 쓴 책에는 박정희가 어떤 식으로 김종필을 견제하고 있었는지가 재미나게 묘사돼 있다. 윤필용은 1965년부터 1968년 1.21사건으로 물러날 때까지 육군 방첩부대장이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을 해치려고 한 것을 넘어 김종필한테도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안 윤필용이 박 대통령한테 보고했다. 김형욱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윤필용에게 “종필이가 너를 그렇게 미워한다면 넌들 가만있겠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김형욱 편을 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너’라는 건 김형욱을 가리킨다. 윤필용은 나중에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김형욱이 김종필을 해치려고 한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재가 없이 김형욱이 그런 짓을 할 리 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다른 일화도 있다. 1967년 대선을 앞둔 1966년 말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육사 8기 동기인 방첩부대장 윤필용을 집으로 불렀다. 김종필은 윤필용한테 “나 그만두겠소. 당 의장인 내가 김형욱이한테 도청당하고 우리 집 출입자가 체크되는가 하면 가택 수색까지 받았소. 국회의원도 우리 집을 드나들면 공천에서 떨어진다고 해요”, 이렇게 얘기했다. 윤필용이 아무리 말려도 김종필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윤필용은 청와대로 올라가서 ‘김종필하고 김형욱이 이렇게 서로 안 좋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그런다. “종필이는 옹졸해. 남을 포용할 줄 모르고 심지어 윤 장군 자네도 자르라고 해.” 또 이런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락이는 종필이 칭찬도 하는데 종필이는 이후락이 욕만 해.” 이후락이 김종필을 얼마나 견제했는가는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박 대통령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김종필을 미워하는 기색을 윤필용한테 보였다고 그런다.


어쨌건 이렇게 김종필이 윤필용을 불러서 ‘당 의장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도, 박 대통령은 한동안 김종필을 안 만나다가 나중에야 그만두겠다는 뜻을 번복하도록 이야기했다. 그래서 김종필은 그대로 당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국민복지회 사건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1979년 10.26 이후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시기에 한때 김종필이 박정희나 유신 체제에 대해 조금 비판하는 게 있긴 했지만,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걸 상당히 안 좋게 봤던 것 같은데, 그런 것 정도를 빼놓고는 대체로 박정희 대통령을 감싸는 게 참 많다는 점이다. 박정희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김종필이 할 말이 정말 많을 텐데, 얼마 전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것이라든가 여러 글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감싸고 옹호하는 게 아주 많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셈인데, 김종필이 그 시절에도 결국 홀로 서지 못하더니만 지금도 홀로 서서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며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하반기, 그리고 1970년대 박정희의 큰 굴레라고 할까, 자신이 활용당한 범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감을 상당히 준다. 김종필은 고인이 된 이후락과 더불어 박정희 집권 18년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진솔한 얘기를 좀 더 많이 털어놨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듯해 역사 하는 사람들은 많이 아쉽다.


(10.26 이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큰영애’ 박근혜는 6월항쟁을 거쳐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후 언론 인터뷰, 출간 등을 통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핵심 주장은 5.16쿠데타와 유신 쿠데타는 정당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지도자를 국장으로 장사 지내고서 매도해온 10년의 세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같은 이야기는 ‘큰영애’의 본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0.26 후 유신 체제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이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여러 차례 했다. 예컨대 <여성동아> 1989년 1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유신 시절에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들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목격되고 있습니다. (…) 그렇게 판단력이 시대에 따라 변질되고 흐린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공직을 맡으면 안 될 것입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세간에 유행시킨 ‘배신의 정치’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80년 2월 27일 공화당 총재 김종필은 관훈클럽 주최 모임에서 연설한 후 참석자들과 질의응답을 했다. 한 참석자가 “3선 개헌, 10월 유신 때 소신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의 결정에 따랐다면 앞으로도 소신 없이, 인간관계에 따라 소신을 버릴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종필은 “나라를 위해 그 어른(박정희)이 선택한 길이라면 따르겠다는 것이 생활 철학이었다”고 말한 후 “그러나 이제는 공당인 공화당의 총재로서 새 시대에 적응하며 나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굳게 지켜나가겠다”고 답했다. 이상우 기자의 책 <박정희 시대 : 민주화 운동과 정치 주역들>에 따르면, 이날 김종필은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처지를 “바람이 세게 불면 따라서 흔들리는 종이 팔랑개비”에 비유한 후 앞으로는 그와 다른 모습을 보일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지만 그 후 김종필이 보인 모습을 보면, 박정희를 감싸는 김종필의 태도는 지금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서중석 : 대체로 그렇게 보이더라. 어떤 책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 그러니까 박정희를 임금으로, 김종필을 신하로 표현했던데 자기 스스로 정말 그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참 이해가 안 간다.


▲ 박정희와 김종필의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사진은 1973년 9월 22일, 제3회 박 대통령컵(박스컵) 아시아 축구 대회 선수 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 ⓒ연합뉴스

4.8 항명 파동을 계기로 3선 개헌 공작 전면에 나선 박정희


프레시안 : 1960년대 상황으로 돌아오면, 국민복지회 사건 후 3선 개헌을 향한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서중석 : 6.8 부정 선거에 이어 김종필계의 중간 보스를 쳐내고 김종필까지 은퇴할 수밖에 없게 만든 상황이 초래된 속에서 3선 개헌을 향한 움직임은 더 구체적으로 이뤄졌다. 3선 개헌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두 갈래에서 추진됐다. 하나는 공화당이었다. 어쨌든 3선 개헌을 하려면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국회를 통과하도록 하는 일을 직접 맡은 담당 세력은 김성곤을 중심으로 한 4인 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4인으로는 추진하는 데 한계가 많았고, 또 전반적으로 3선 개헌 쪽으로 일이 잘되도록 만들어가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런 일들을 권력 쪽에서 한 대표적인 인물로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그리고 내무부 장관이자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인 엄민영 같은 사람을 꼽고 있다.


재미난 것은 이후락이나 김형욱이나 엄민영은 박정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에서 그야말로 순수하게, 순수라는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밀고 나가는 쪽이었다고 한다면, 김성곤 쪽은 생각이 좀 달랐다는 것이다. 공화당 원로인 정구영에 따르면 4인 체제 사람들이 개헌을 구상한 건 1964년 6.3사태 때라고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은 박정희의 장기 집권보다는 내각 책임제 쪽에 더 무게를 뒀다고 그런다. 김성곤은 1968년 봄부터는 이원 집정제, 그러니까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을 맡고 일반 행정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해나가는, 핀란드가 제일 대표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이원 집정제를 목표로 내각 책임제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다고 그런다. 어쨌건 이런 두 개의 큰 라인을 중심으로 3선 개헌이 추진된다.


프레시안 : 3선 개헌 문제는 언제 정국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나.


서중석 : 이게 일반인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표면화되는 건 1969년에 들어와서다. 1969년 1월 7일 윤치영 당 의장 서리가 기자 회견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조국 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입장에서 현행 헌법상에 문제점이 있다면 앞으로 검토·연구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앞서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도 다른 각도에서 ‘개헌을 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제 박정희 입만 쳐다보게 됐다.


그러면 박정희는 어떻게 나왔느냐. 1월 10일, 기다리던 연두 기자 회견이 열렸다. 그런데 이날 얘기는 맹탕 비슷했다.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가 쏙 빠져 있었다. 분명치 않았다. 뭐냐 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내 임기 중에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고치지 말아라’, 이렇게 딱 나오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다음에 “꼭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가서 얘기해도 늦지 않다”, 이렇게 나왔다. 박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은 뒷부분에 담겨 있었다. ‘연말쯤 가서 공화당에서 개헌 문제를 구체화해 꺼내라’, 이런 뜻으로 볼 수 있는 발언을 한 것이다. “임기 중에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다”, “꼭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가서 얘기해도 늦지 않다”, 이건 개헌한다는 뜻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2월 3일 재야인사들이 개헌 반대 투쟁을 위한 기구 구성을 선언하는데, 이날 공화당에서는 의원 총회가 열렸다. 이 의원 총회는 1967년 6.8선거의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재선거를 해야 할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는 문제로 열렸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의원 총회에 온 공화당 의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개헌 문제였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개헌에 대한 의견을 내놨는데,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중 박종태 의원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여기 있는 김진만 원내총무, 윤치영 당 의장, 당신들이 10(여)년 전에 3선 개헌을 해서 나라와 자유당을 망쳐먹더니 공화당에 들어와서 또 개헌을 해서 공화당까지 말아먹을 작정이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오.” 이렇게 3선 개헌 문제가 여야를 막론하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여당에서도 개헌 반대파와 찬성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큰 사건이 터진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인가.


서중석 : 공화당 정권 때는 항명 사건이 항상 큰 사건이 됐는데, 1969년 4월 8일에 또 하나의 항명 사건이 일어났다. 전에 얘기한 것처럼, 공화당은 1965년 12월에 있었던 항명 파동으로 김종필계 주류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그때는 김종필계에서 박 대통령 뜻과 달리 정구영을 국회의장으로 세우려다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러면서 이효상이 두 번째로, 다시 국회의장을 맡게 됐다.


1969년에는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신민당이 낸 것을 계기로 항명 사건이 일어났다. 권오병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파로서 법무부 차관 때 학생 운동 문제에서 너무나도 지나친, 그야말로 과잉 충성을 했다. 그래서 법무부 차관 때부터 많은 사람이 권오병을 안 좋게 봤다. 하여튼 이 사람은 1960년대 장관들 중에서 노골적인 충성파, 그러니까 학생 처벌 같은 문제에서 대통령이 하라는 대로 움직인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65년 학생 운동 참여자를 엄벌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했는데 윤천주 문교부 장관이 그걸 제대로 못하자, 박 대통령은 검사 출신인 권오병을 법무부 차관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해 강경 조치를 하도록 했다. 그 후 법무부 장관을 시켰다가,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앞두고 다시 문교부 장관을 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권오병은 전해에 국회에서 국정 감사를 할 때 제대로 감사도 받지 않은 데다,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한 폭언 논란도 일으키고 해서 여당한테도 밉보였다. ‘이 사람은 너무 심하다. 한 사람만 절대적으로 알고, 나머지 사람들의 말은 잘 안 듣고 깔보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도 듣고 그랬다. 야당은 권오병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했고, 공화당에서도 이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1969년 4월 8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이건 권오병이 국회의원들에게 밉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공화당 내부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우리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권오병 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을 통해 보여주려 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재석 152명 중에서 가 89, 부 57, 기권 3, 무효 3으로 해임안이 가결됐다. 이때 공화당 의원 중 상당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표결에 참여한 신민당 의원이 41명밖에 안됐다는 걸 생각하면, 해임 건의안 찬성표 중 적어도 48표는 공화당을 비롯한 여권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표결 참여 의원 중 11명은 정우회 소속이었다. 6.8선거 후 공화당의 단독 국회가 아닌 것처럼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만들어진 10·5구락부가 무소속 의원 등을 더 받아들여 1968년 12월 25일 발족한 것이 정우회다. 친여 성향의 원내 교섭 단체였던 정우회는 권오병 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 전에 이미 반대표를 던지기로 방침을 굳힌 상태였다. 당시 언론은 표결에 참여한 신민당 의원이 모두 반대표를 던졌을 경우 남는 48표 중 거의 대부분이 공화당 의원들의 표일 것이라고 봤다. 참고로 정우회는 유신 쿠데타 이후 등장하는 유신정우회(유정회)와는 다른 단체다. <편집자>) 부결시키라는 지시를 대통령이 내렸는데도, 공화당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권오병 해임안 가결에 가담한 것이다. 이걸 4.8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김종필계, 즉 옛 주류계가 이런 상태로 계속 존재하는 한 3선 개헌은 안 된다는 걸 4.8 항명 파동이 보여주기는 보여줬다. 그리고 4인 체제나 이후락, 김형욱의 힘만으로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이 항명 파동을 계기로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고 보고 있다.


이틀 후인 4월 10일 박 대통령은 당의 중요 간부 약 40명을 청와대로 불러서 ‘반당분자를 철저히 규명하라. 그 숫자가 몇 십 명이 되더라도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4월 15일 공화당은 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이 다섯 명의 의원을 4.8 항명 파동의 주동자로 보고 제명 처분을 했다. 이때 김종필은 일본에서 돌아와서 “박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얘기해서 ‘김종필이 어떻게 저런 발언을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다시 당 간부들을 구성하는데 박정희 총재는 김택수를 원내총무로 앉혔다. 이게 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떻게 김종필계를 원내총무에 앉히느냐는 것이었다. 그 깊은 뜻을 얼마 후 알게 된다. 자기 세력이 자기들을 치도록 또는 설득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한 것이었다. 김택수는 이제 주류계 인사들에게 사정사정하면서 ‘3선 개헌에 협조하자’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원내총무의 임무라는 게 그런 일을 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 김택수 원내총무,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런 사람들이 의원들에게 통사정도 하고, 애원이나 부탁도 하고, 협박도 하면서 3선 개헌에서 다수표를 만들려고 무척 노력한다.


▲ 공화당 원로 정구영은 3선 개헌을 통한 박정희의 집권 연장에 찬성하라는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사진은 2012년 10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대의 양심 정구영 평전> 출판 기념회 및 추모 사업회 발족식 모습. ⓒ연합뉴스


권력욕에 눈멀어 자기 당 원로의 아픈 가족사에까지 칼을 들이댄 3선 개헌 세력


프레시안 : 4.8 항명 파동 후 공화당 내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공화당 옛 주류계의 핵심으로 꼽히던 양순직 등 5명이 제명 처분을 당하자, 이때부터 공화당 최고 원로라고 볼 수 있는 정구영이 중심이 돼서 3선 개헌에 적극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미 정구영의 집 주변을 3곳의 기관원들이 지키면서 정구영 집 출입자를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다. 정구영은 공화당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지냈고, 당 총재의 상의역, 그러니까 고문보다는 높은 자리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자리인 상의역도 맡고 1963년 총선 때도, 1967년 총선 때도 공화당 전국구 의원 1번을 받은 사람이다. 공화당의 최고 원로라는 건 누가 봐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정구영의 반대에 따라 3선 개헌의 귀추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살펴보자.


정구영은 3선 개헌에 반대할 수 있는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계속 서명을 받았다. 처음에 41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탈락자가 있을 것 같고 해서 나중에 다시 서명을 받았더니 그때는 31명으로 줄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후락, 김형욱도 그렇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류계, 그러니까 반대 서명을 한 41명, 31명 이 사람들의 사생활을 들추고 호소 작전과 강압 작전을 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돈을 풀면서 회유해 이탈자가 계속 나왔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도 정구영은 3선 개헌 반대 세력을 계속 단속하면서 그 숫자가 너무 줄어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러던 6월 중순,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한참 벌어지고 있던 그때 정구영 집에 ‘정구영의 부인은 수사 기관에 오전 10시에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프레시안 : 여당 최고 원로의 집에 왜 그런 통지가 갑자기 온 것인가.


서중석 : 이건 3선 개헌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특히 1950∼1960년대에는 정구영과 같은 일을 겪은 집안이 적지 않았고 남북 관계, 분단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는 걸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내 친구 유인태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생하기 전에 재야에 묻혀 있던 정구영을 만났는데 그때 그 노인네가 세 아들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첫째 아들은 일제 때 사상 관계로 주목을 받았는데, 해방 후에는 농림부에서 최규하와 같이 과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이 나면서 납북됐다. 딸이 100일 되던 날에 애비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둘째 아들은 경성제대를 나왔는데 이 사람도 북쪽으로 가게 됐다.


셋째 아들이 서울대 사학과 사람인데, 역시 경성제대를 나온 정찬영이라는 사람이다. 서울대 사학과 역사도 기구했는데, 사학과 제1기는 경성제대, 교토제대, 도쿄제대 같은 데를 다니다가 전쟁 때문에 공부를 마저 끝내지 못하고 해방을 맞아 다시 서울대 사학과 제1기를 구성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학과 제1기는 나이 차이가 많았다고 한다. 도쿄제대에 다니다 징용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온 한우근 선생처럼 나이가 무지하게 많은 사람이 상당히 많지 않았나. 그런데 한우근 교수 등 몇 분은 남한에 남아 있게 되지만, 1기생 중 상당수가 자진 월북을 했다. 역사학 쪽에서 특히 사학과 제1기는 아주 심한 분단의 고초를 역사학자 스스로 맛보게 됐다는 걸 보여준다. 정구영의 셋째 아들이 바로 좌익으로 월북했다. 넷째 아들은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됐고 다섯째 아들만 아버지를 모셨던 것 같다.


1964년 3월 정구영은 일본 중의원 의장 초청으로 국회 사절단 대표로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갔다. 오사카에 머물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편지 하나를 건넸다. 겉봉에 부주전상서(父主前上書), 그러니까 ‘아버지께 올립니다’라고 돼 있었는데 큰아들이 보낸 것이었다. 두 아우 다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편지에 사진을 한 장 동봉했다고 한다. 셋째 아들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을 찍은 사진이었다. 셋째 아들도 사진에 보이고 손자 녀석들 얼굴도 보이고 하니까 이 사람의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반가움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정치인인데다, 예전에 변협 회장도 한 법조인이었다.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한테 그걸 가져온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평양에서 뭔가 활동을 한 사람과 연결돼 있으니까 이걸 전달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편지를 잘 받았다’는 답장을 써달라고 했다. 정구영은 ‘그건 안 된다. 최근 사진이 여기 있는데 이걸 그 애한테 전해달라’고 했다. 쩝쩝대면서 그 사람이 갔다.


그러고 나서 정구영은 이 사실을 중앙정보부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공화당 원로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항상 그랬다. 그때 정구영은 도쿄에서 김종필을 만났다. 김종필한테 이 이야기를 사실대로 다 했더니만 김종필은 ‘다 알아서 관계 기관에 얘기를 해둘 테니까 편지를 불태우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구영은 그 편지를 연탄아궁이에 넣어서 태웠다고 한다. 그 시절, 이런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5년이나 지난 1969년 6월 중순에 ‘정구영의 부인은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은 것이다. 이게 무엇 때문이겠나. 이 무렵 정구영은 3선 개헌 반대 세력을 단속하고 있었는데, 정구영 쪽으로 사람들이 더 넘어가지 않도록 그렇게 한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 문제를 끄집어내 소환한 것은 분단과 전쟁에서 비롯된 아픈 가족사,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기는커녕 정치적 목적으로 그 상처를 더 아리게 한 조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좌익 활동을 하다 죽은 형 때문에 적잖게 마음고생을 했을 박정희가 최고 권력자이던 때,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해 그런 식의 소환이 이뤄졌다는 것도 여러모로 씁쓸한 일이다.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은 후 어떻게 됐나.


서중석 : 정구영의 부인은 수사 기관에 가서 한 10시간 정도 취조를 받고 왔다. 그런데 부인만 취조를 받은 게 아니었다. 장남의 처인 큰며느리도 가서 10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고, 차남의 부인인 둘째 며느리도 또 10시간 조사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다섯째 아들도 불려가서 10시간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주변에서는 정구영에게 ‘김형욱한테 부탁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유는 뻔한 것 아닌가. 3선 개헌에 찬성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건데, 그럴 수 없으니 부탁하러 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7월 초순에는 수사 기관 간부가 정구영을 신문하러 왔다. 그런데 일단 그걸로 끝났다.


이 이야기를 한 건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뒤에 다시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도 한 번 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런 경우가 단지 정구영 이 양반 한 사람한테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1950년대, 1960년대에는 유명 인사나 학자 같은 사람들이 간첩으로 많이 내려왔다. 북한에서 큰 쓸모는 없고 그러니 남한에 보내면 뭐라도 건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내려보낸 건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 풍파가 일어났겠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아홉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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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12-23>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임금, 김종필=신하? 그렇게 당하고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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