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친일인명사전’, 소송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562
 

친일인명사전’, 소송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박태우 기자

 











▲ 2009년 11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백범 김구 묘역에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의 한 참가자가 백범 김구 묘역에 바쳐진 친일인명사전을 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민석(42)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4389명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2년전 이맘때를 잊지 못한다. 이 변호사는 사전에 친일인사로 게재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법원에 낸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의 피고(민족문제연구소) 쪽 변론을 맡고 있었다. 발간 예정일이 11월8일이라는 이유로 당초 11일로 잡혀있던 변론기일이 일주일 앞당겨졌고, 이 통보는 하루 전날인 3일에서야 받았다.

자료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려 이 변호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과 밤을 새가며 일어로 된 증거자료를 번역해 재판에 임했다. 하지만 이 변호사가 더 당황했던 것은 박지만 씨의 논리였다. 박씨 쪽 변호인은 “만주국군은 만주국의 군대이므로 일본군과는 다르다”, “만주국군은 공산군과 싸운 것이므로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증거자료를 법원에 제출했고, 법원은 11월6일 박씨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사전은 이틀 뒤인 8일 무사히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됐다.

8일로 발간 두 돌을 맞는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언론인 장지연, 화가 장우성, 고등관 홍순일 등의 유족들이 낸 소송에 휘말리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법원은 총 6건의 소송 중에 화해가 이뤄진 1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고인 민족문제연구소의 편을 들어줬다. 8년간의 시민사회의 노력, 연구원들의 방대한 분량의 자료검토가 헛되지 않았음을 법원이 증명한 셈이다.

해방 이후, 권력의 편에 섰던 친일인사의 자손들은 친일사전 발간에 대해 소송으로 대응했지만, 자신의 조상이 친일인사였음을 사죄하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달 18일에는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윤수병씨의 손자 윤석윤씨는 민족문제연구소에 편지를 보내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고, 시민역사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발간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이준석 씨의 손자 이윤 씨가 할아버지 대신 친일 행적을 사죄하기도 했다.

사전은 친일인사의 기념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충북 음성군은 지난달 10여년동안 군에서 예산을 지원해왔던 친일 문학인 이무영 기념사업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경남 거제시에서는 김백일 장군, 경기도 과천의 한국마사회에서는 김동하 전 회장의 동상 철거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달에는 국립묘지에도 76명에 이르는 친일인사가 안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장을 위한 관련법 개정운동이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보급은 아직도 더디기만 하다. 지난 2년동안 사전은 4쇄에 거쳐 총 4500질이 팔리거나 기증됐을 뿐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책을 기증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긴 하기만, 공공도서관은 전국 687개 도서관에 223질 밖에 보급되지 않아 보급율이 32% 선에 그치고 있다. 특히 울산광역시에는 1질, 광주광역시에는 2질 밖에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30만원에 이르는 비싼 가격 때문에 시민들이 사전을 보기 위해서는 도서관을 찾을 수 밖에 없는데, 공공도서관에서는 도입에 소극적인 것 같다”며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해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아는 것 만큼, 친일 인사들의 행적역시 국민들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는 25일 발간 두 돌을 기념해,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심포지움을 개최할 예정이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사회의 소망과 인권·평화·인종·종교에서의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20세기 한국 지성사의 업적”이라고 평가하며 “앞으로 사전 수정증보판 발간을 포함한 연구·저술 작업을 통해 올바른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5억여원에 이르는 <친일인명사전>의 수익금은 전액 ‘역사정의를 실천하는 시민 역사관(가칭)’ 건립 사업에 사용된다. 사전은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www.minjok.or.kr)과 대형서점을 통해 구입이 가능하다. (한겨레, 2011.11.07)

 


[관련기사]


어렵게 빛본 친일인명사전 공공도서관 보급 겨우 32% (한겨레,11.07)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