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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 재판대로 오른 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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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있는 현대청운고등학교 2학년 근현대사 수업에서 ‘김성수 모의재판’이 열렸다.수행평가의 일환으로 마련된 모의재판식 수업에서 학생들은 김성수 변호팀과 검사팀으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검사팀의 자료준비과정에서 연구소의 방학진 사무국장과 김승은 자료팀장이 도움을 주었다. 지도교사가 보내온 학생들의 모의재판수업 후기를 변호팀과 검사팀 각 1명씩 선정하여 소개한다.


<검사팀 후기>


인촌 김성수를 법 앞에 세우다


 현대청운고등학교 2학년 김민지


2학년이 되면서 사회탐구과목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한국근현대사 과목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여러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인물들을 세세하게 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0월 근현대사 과목의 수행평가이자 수업 활동으로 우리 반 학생들은 역사 재판을 하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검사와 변호사를 서로 하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다 하지는 못하고 나를 포함한 12명의 친구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6명씩 변호사팀과 검사팀을 짜고 각각 3명씩 증인을 정하는 과정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재판, 그리고 또 우리가 정한 역사 속 인물 김성수. 모든 것이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 고려대학교에 있는 김성수 동상 


재판 날짜를 한 달 가량 앞두고 우리는 함께 모여서 주제를 정하였다. 그 수많은 인물 중 우리는 인촌을 택하게 되었고 각 팀별로 조사에 들어갔다. 재판을 2주 앞두고 검사팀의 검사였던 나는 친구들과 난생처음 기소장이란 것을 접하였다. 검사가 죄인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쓴다는 기소장, 우리는 이 기소장을 쓰기위해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선생님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연구소에서 받은 자료로 우리는 기소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배심원들에게 기소장을 보여주고 하루하루 재판 날짜가 다가왔다.

매일매일 자율학습시간, 주말에는 또 따로 모여서 우리는 늘 재판을 준비했고 고대하던 재판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김성수라는 인물의 양 측면을 골고루 이제 익혀가고 있었고 검사팀 친구들과 나는 그를 친일파로 판명 짓기 위해 타당한 증거와 근거를 준비했다.

드디어 재판 날, 우리는 긴장과 설레임을 안고 재판에 임했다. 말도 더듬고 어눌한 말투로 재판을


진행하긴 했지만 그 기분은 정말 묘했다. 우리의 판단에 의해 한 인물이 친일파 혹은 민족자본가로 판명날 수 있다는 사실에 책임감과 의무감 또한 적지 않게 갖게 됐다. 재판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소했다. 하지만, 승패를 떠나서 역사 속 한 인물에 대해 깊게 알 수 있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
후세의 시각으로 그 때를 바라본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인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당연히 친일파라고 생각하던 사람의 업적을 보면서도 ‘어라?’하고 깜짝 놀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변호사팀 애들은 친일행적만 보고 놀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약 한 달가량 재판을 준비하고 주제 정하고 의논하던 그 시간, 친구들과 함께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어 정말 보람찬 기간이었다. 사건으로서 나열되던 그 역사가 아닌 한 인물을 통해 바라본 새로운 시각도 가질 수 있었다. 비판적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힘든 일일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해냈다는 그 느낌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재판을 무사히 할 수 있게 도와주신 연구소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변호팀 후기>


김성수, 그는 누구 인가??
<인촌을 변호한 뒤……>


 현대청운고등학교 2학년 김현진


태어나서 처음해보는 재미있을 것 같은 경험, 수행평가 100점을 받기위한 수단. 처음에 역사재판은 나에게 이런 의미 밖에 지니지 못했다. 2학기 중간고사를 끝낸 뒤 4주정도의 기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나는 변호사팀에 배정되었고 3명의 변호사중 한명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피고를 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많은 토의를 거친 뒤 친일의혹이 강한 김성수를 피고로 내세우기로 했다. 첫날, 우리는 쉼터에 모여서 김성수에 대해서 알아봤다.

그 다음날 변호사팀은 김성수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할 때 마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들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반박 주장과 반박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상대팀에 대해 적개심도 들었고 실제 재판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김성수를 조사하고 김성수의 친일의혹에 대한 반박에 대한 증거를 모으면서 첫 주와 둘째 주를 보냈다.

셋째 주, 검사측에서 기소장을 제출했다. 기소장은 네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경성방직 관련, 둘째, 동아일보 관련, 셋째, 전시동원연설 관련, 넷째, 각종친일단체 가입 관련. 이렇게 네 가지 측면으로 구성된 기소장을 읽어본 뒤 우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2주간에 걸친 조사에서 우리는 김성수 관련 친일 행각을 모두 찾아보고 다녔기에 이미 기소장에 있는 내용은 반박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셋째 주부터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다듬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장은 첫째, 김성수는 3.1운동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을 민족대표 모임의 장소로 제공 했으며 둘째, 동아일보는 1932년 LA올림픽 때부터 일장기를 말소해 왔으므로 베를린 올림픽 당시 일회적으로 일장기를 말소한 것이 아니기에 민족지라는 것이 확실하고 일장기 사건 이후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실은 것은 단순히 민족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신문이 꼭 필요하므로 폐간을 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또 만약 친일 대변지였다면 박춘금의 인촌 린치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점을 주장으로 들었다. 또 전시동원연설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패색이 짙어지자 한국의 청년들을 동원하기위해 강압적으로 우리 민족지도자들에게 연설을 시킨 것이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친일 단체가입은 일제가 강제적으로 넣은 것이며 김성수는 실제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매일신보에 실린 전시동원기사는 김성수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경성방직은 민족의 자본을 결집하여 만든 것이며 그 당시 수익성이 좋은 다른 사업을 하지 않고 수익성이 낮은 경성방직을 택했다는 점, 그 과정에서 총독부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은 일제에게 예속된 것이 아니라 쟁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준비 3주차가 끝나가면서 우리는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실제 재판 과정과 유사하기에 우리는 재판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역사적 인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고 그 시대의 상황을 알아 간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당시 민족지도자들의 삶의 방식, 또 어떤 방식으로 민족의 독립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어려움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재판장에 들어섰다. 첫 번째 측면에서 검사측은 그들의 주장을 한 뒤 사이토 마코토를 증인으로 내세웠다. 아찔했다. 사이토 마코토를 증인으로 내세울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인촌 린치 사건을 그에게 질문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 것은 재판이 끝날 무렵이었다.

예상외의 치열한 공방 끝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사실들을 알았다. 예로 우리는 경성방직이 수익성이 없어서 파업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인촌은 노동자들을 민족을 위한 일이니까 참아 달라는 부탁을 해서 파업이 멎었다는 사례를 주장했지만 검사측은 경성방직은 원래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었지만 갑자기 공황의 영향으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파업이 일어났고 그것을 인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을 핑계거리로 삼았다는 주장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그 당시의 상황을 알아 가며 김성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결과는 변호사측이 검사측에게 패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승패 보다는 이런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재판을 통해 김성수의 양쪽 측면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록 한 사람밖에 조사 하지 못했지만 이런 역사 재판들이 많이 시행된다면 그 자료들을 한 곳에 모아서 볼 수 있게 만든 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쪽에서만, 현재의 상황에서 보는 역사가 아니라 그 당시 상황을 보며, 역사의 다른 면을 보며 역사의 흐름과 상황을 알게 되었고 역사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교육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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