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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
1. 입장문 발표의 배경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도 많아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민 여러분과 회원들께서는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사태를 책임 있게 정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대정친목회 등 친일단체의 성격, 전문직의 친일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 그리고 바람직한 친일청산의 방향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견해를 표명하고자 합니다.
2.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안상호(1874∼1927)는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 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습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습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습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습니다.
3.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입니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습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습니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입니다.
4.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하여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입니다.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입니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 · 종교 · 법조 · 언론 · 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습니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습니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5.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수록 인원의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습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습니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습니다.
6.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습니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곧 ‘친일 행적이 없음’을 뜻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입니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7.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이번 논란의 본질은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습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합니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참고자료] 안상호 이력 및 친일 관련 행적(2026.8.14. 현재)
1. 주요 이력
– 1874.11.5. 서울 출생
– 1898 관립일어학교 졸업
– 1898∼1902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 입학 및 졸업
– 1902∼1908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연구·근무
– 1907.3.31. 귀국
– 1908.01. 의친왕(이강)을 배종해 일본으로 건너감
– 1908.00. 일본에서 귀국해 종로에서 개원
– 1910.8∼1926.9 시종원 전의, 이왕직 전의 및 어용괘(촉탁의) 역임
– 1927.12.31. 사망
2. 친일 관련 행적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추도
–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할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1909.11.)으로 참여, 민간에서 조직되었으나 실제 추도회는 시행되지 않음
• 1912.8.1.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 일제 식민통치와 수탈에 협력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 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년)에 임명
– 식민통치의 금융수탈기구라고 할 수 있는 경성 종로금융조합 조합장(1922~1927)
• 내선융화 단체 가입과 활동
– 일제 식민통치의 정신적 수탈기구인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 경성의 유지를 중심으로 “내선인 융화, 관민 교정, 식산흥업 장려”를 표방하면서 설립된 내선융화단체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1916)
– 반일운동 배척과 내선융화를 표방하고 조직된 친일단체 동민회 회원(1924), 평의원(1925~1927) 역임
3. “내선가정의 성공자 의사 안상호”
•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자 기사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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