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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산업’ 시초가 된 일제의 ‘근대적’ 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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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이화여대 사학과 박사과정)

 




















아래 글은 월간지 <민족21> 최신호에 실린 글이다. 남북이 함께 만드는 유일한 월간지로 창간 7주년을 맞는 <민족21>에 축하를 드림과 동시에 글싣기를 허락해 준 <민족21> 편집진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몇 해 전 한 여성 경찰서장이 성매매 단속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일시적인 공창제 도입을 주장했다가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진의가 어떻든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매매춘을 허용하자는 이 주장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인권적 측면에서 매매춘을 뿌리뽑아야 한다가 아니라 매매춘은 없앨 수 없는 필요악이니까 ‘관리’를 통해 통제 가능하게 만들자는 생각은 우리 사회가 가지는 성의식의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일제시대의 공창제이다.

 


이정희 이화여대 사학과 박사과정
사진 (사)현대사연구소 제공

 





매매춘을 필요악처럼 여기며 여성들의 성을 사고 파는 상품으로 바라보게 만든 결정적인 공로자는 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어쨌든 매매춘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일찍부터 공창제를 운영하고 있던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그들의 필요와 관행에 따라 ‘안전하고’ ‘근대적인’ 산업의 형태로 매춘업을 이식하였다.


이 산업은 전쟁과 불황을 타고 나날이 성장하였고 그 와중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성과 육체를 상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해방 후 공창은 사라졌지만 그 잔재는 그대로 남아 우리의 성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일선 경찰서장의 공창제 도입 주장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매매춘 산업화의 결정적인 공로자는 일제


돈을 매개로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매매춘’이라고 한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이 대개 비밀리에 몰래 행해지는 ‘밀매음’의 형태를 띠었다. 흔히 그 주체라고 생각하는 기생(또는 기녀)들은 본래 춤과 음악 등 예능에 관련된 일을 하던 특수한 여성들이었다. 그럼에도 기생들이 의례 매매춘의 주체로 여겨지는 것은 이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본업 이외에 매매춘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부류가 등장하였다. 흔히 ‘갈보’(3패라고도 함)라고 불렸는데, 은근자, 더벅머리(탑앙모리), 사당패, 색주가 등 다양하였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도 이중적인 정조관념이 강조되었던 전통사회에서 경제적인 자립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여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나 정조 상실 등으로 보호받던 가정이나 사회에서 밀려났을 때 그만큼 손쉽게 남성들에게 성적 대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 형태는 은밀히 드러내지 않고 이루어지는 밀매음이었다. 매매춘이 공식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거나 합법적으로 용인된 적이 없었으니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양상은 달라졌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나 신사 근처의 마을 등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아예 매매춘을 위한 합법적인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1585년 오사카에서 창녀들이 생활하는 구역인 ‘유곽’을 만들고 매매춘을 공인하였다. 에도 시기에는 여자 가운데 16명 중 1명은 어떤 형태로든 매춘업과 연관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그후 1872년 창기해방령을 계기로 ‘근대적인’ 계약으로 맺어진 공창제도로 변화하였다. 종래의 노예적인 유녀제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매춘을 하는 창기와 대좌부업자(대좌부는 방을 빌려준다는 의미로, 대좌부업자는 일종의 포주이다)와의 ‘근대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창제도가 정착하였다.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남성들이 늘어가면서 일본의 매매춘 관행은 그대로 조선에 이식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어 이전과는 다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 일환으로 조선에는 부산, 원산, 인천 등지에 일본인이 거주하는 개항장이 마련되었다. 이곳에 많은 일본인 남성들, 군인 혹은 장사치들이 들어왔고 이들을 따라서 매춘업자와 매춘 여성들이 이주해왔다. 점차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남성들이 늘어가면서



▲ 인천의 부도루 유곽지역 개항 후 일본인들이 조선에 건너오면서 그들의 매매춘 관행도 이식되었다. 부산을 필두로 1902년에는 인천 지역에 부도루 유곽이 생겨났다. 1920년대말에는 전국에 25개의 공창 면허지와 22개의 공창 병원이 들어섰다.

 








그들의 수요에 맞춰 매춘 여성도 늘어갔다. 당시 일본의 매춘 여성들은 영사관에 허가를 받아 세금을 내고 영업을 하였다.

이는 당시 여성의 정절과 윤리를 강조하였던 조선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외적인 위신을 염려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일부 일본인 거류지에 허가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는 매매춘을 금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매춘업자나 매춘 여성들에게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일본의 이민보호법에서 조선과 중국은 제외되었다. 청일전



쟁과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조선이나 중국에서의 매매춘에 대한 수요가 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일본인 개항장이나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매춘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일본인 거류지마다 들어선 유곽


처음에는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영업을 하던 일본인 매춘업자들은 곧 유곽을 형성하여 본격적으로 매매춘 영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일본인 유곽이 등장한 것은 1900년 부산의 녹정 유곽으로, 그후 급속도로 퍼져 인천, 원산, 목포, 진남포 등 일본인 거류지마다 유곽이 들어섰다.


특히 조선에 그 지배력을 강화해가던 일제는 마침내 1904년에 들어 서울에서도 창기와 매춘업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영사가 특별히 지정하는 구역 안에서만 영업하고, 창기는 18세 이상으로 한다는 규칙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 매춘업자와 매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규칙이었지만, 점차 조선 사회로까지 확대시켰다. 이제 조선에서도 여성들의 성은 합법적인 공간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돼 버렸다.


먼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창기들을 일정한 지역에서 영업하도록 집창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창기들의 성병을 검사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조선인 창기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 성병 검사가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위생)경찰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당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옷








을 벗고 성기를 노출시켜 하는 검사는 ‘금수(禽獸)로 학대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매우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일제가 성병 검진을 강행한 데에는 매매춘에 대한 성의식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식민지인을 천시하는 그들의 시각이 저변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특히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이 급속도로 늘어가던 상황에서 화류병이라고 불리던 성병은 일제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식민지의 ‘열악한’ 상황에 자국민인 일본인들을 노출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군인들이 병에 걸리면 전쟁 수행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유곽이라는 합법적인 매매춘의 공간이 생겨나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쉽게 매매춘에 빠지고 있었던 조선의 여성들은 일제에게는 ‘잠재적’인 보균자였다. 따라서 조선 여성들, 그 가운데서도 창기들에 대한 성병 검진은 비인간적이었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창기 조합


당시 적은 인원의 경찰이 조선인 창기들을 관리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내려 조선인 매춘 여성들 스스로 ‘근대적인’ 형태의 창기조합(후에 일본식 권번으로 변화하였다)을 만들도록 유도하였다.

창기조합의 표준 규약에는 매월 1회 경시청이 지정한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도록 했다. 화채는 한 시간에 80전 이내로 제한되었다. 특히 성병 검진과 관련하여 치료소의 설치, 성병 감염자에 대한 치료, 치료비의 부담, 치료소 수용자의 행동 제한 등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규정하였다. 이제 여성의 성은 합법적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일 뿐이다. 그래서 상품을 이용하는 남성들에게 ‘안전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품질 관리를 위한 성병 검사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평양의 기성권번에서 운영하던학교 일제는 조선에 공창화 정책을 펴 자연스럽게 창기조합의 결성을 유도하였다. 손쉽게 창기들을 관리하고 영업세도 거두려는 의도였다. 점차 창기조합은 일본식 권번으로 탈바꿈하였다. 서울에는 조선권번과 한성권번 등이 생겨났고, 평양에는 기성권번이 만들어졌다(위).


조선사회와 화류병 일제의 공창제가 이식되면서 조선에서 매매춘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화류병’이라고 불렸던 성병이 퍼져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이 성병에 걸렸다고 보았다. 이를 문명이라는 구호 아래 포장하기위해 ‘화류병은 문명의 병’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개벽》대정 11년(1922년) 5월호 제23호(아래 왼쪽)


화류병 치료 광고 일제 시기 조선사회의 성병 문제는 심각하였고 그만큼 임질이나 매독 등의 치료제를 광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후 조선총독부는 1916년 3월에 각지마다 조금씩 달랐던
규칙과 명칭 등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조선 전 지역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모두 포함한 매춘업자와 창기, 예기(기생), 작부 등 매춘에 관련된 여성에게 적용되는 공창제도가 최초로 확립되었다. 요리점이나 음식점, 여관 등과 대좌부를 엄격히 구분하였고 창기나 작부 등의 거주와 영업지역을 제한하였다. 공창의 허가요건이나 영업소의 위치, 영업상 수칙, 건강검진, 창기의 수칙, 경찰의 단속내용, 벌과금 등을 자세히 규정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수상한 자를 경찰에 신고할 의무’도 있었다.























 


검문에 도망가는 매춘 여성 일제 시기 공창제의 도입은 매매춘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창(밀매음)을 조장하기만 하였다. 이렇게 번성한 매매춘의 관행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아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주간 희망》제20호 1956년 7월20일


이 규칙들에서 주목해야 할 조항은 조선인 매춘업자들에 한해 ‘당분간’ 지정된 장소 외에서도 영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매춘을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와 일본인 거류지에 정착한 일본인 매춘 여성과 달리 조선의 매춘업자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 하지만 이는 조선 전 지역으로 매매춘 관행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공창제를 추진하면서 성병을 예방하고 풍속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춘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안전한’ 여성들의 육체와 성을 제공하여 남성들의 성욕을 배출하도록 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또 창기조합이라는 근대적 형태의 조직을 도입하여 전통사회의 노예적 매매춘을 없앴다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창기들에게 영업세를 거두는 부수입도 있었다. 1916년에 제정된 일련의 규칙들은 1947년 공창폐지령이 발포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관리에서 벗어나 몰래 매매춘을 하는 밀매음(사창)은 강력한 단속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계속적인 매춘업의


장으로 1909년 서울에서만 밀매음을 하던 여성이 25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거나 교복을 입고 다니면서 여학생을 사칭하여 밀매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극장에서도 밀매음이 이루어졌다. 개항장의 여관이나 음식점, 요리점 등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매매춘을 하였다.










성병을 검진하고 밀매음을 막는다는 구실을 앞세워 세워진 공창은 조선 내에서 매매춘 관행을 확산시키면서 오히려 사창만을 조장하였다. 공창은 식민지 당국의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관리 아래 있으면서 일정한 세금도 내야 했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은 사창(밀매음)을 더 선호하였다.


거리에서 손님을 부르는 ‘밀매음’만 들끓고


1920년대 말 일본에서 유행하던 ‘까페’와 ‘빠’가 도시에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자연히 빈곤에 내몰린 여성들이 이곳에 흘러 들어갔다. 이곳에서 일하던 여급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손님들로부터 받은 팁만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해서는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하였다. 농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들병이들이 돌아다녔다.


농촌의 궁핍한 상황은 평범한 아낙을 매춘의 길로 내몰고 남편은 이를 방조하거나 조장하고 있었다. 까페의 여급이나 들병이의 존재는 일제시대 식민지 경제의 모순을 반영하는 동시에 공창제 도입의 영향으로 조선 사회의 성의식이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공창제 도입을 통한 매매춘 관리는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사창을 불식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매매춘을 더욱 번성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공창이라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공간이 생겨남으로써 조선인들은 매매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매매춘을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시각은 더욱 굳어졌고 여성차별적인 성의식은 더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일본에 자리 잡고 있던 공창제도를 조선에 이식하였다. 당시 매매춘을 허용하지 않았던 조선 사회는 일제의 공창화 정책으로 더욱 왜곡된 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 매춘산업이니 섹스산업이니 하는 말을 방송에서 흔치 않게 접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잔재라 하겠다. 은연중에 우리도 여성의 육체와 성을 상품으로 사고 파는 행위를 산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가 매매춘을 ‘안전하고 근대적인’ 것으로 조선에 이식한 것만큼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민족21, 2008년 4월호>







향락 문화의 번창 1920년 말 일본에서 유행하던 ‘카페’나 ‘빠’등이 들어서면서 향락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대한제국 말 처음 생겨난 다방 역시 서구 문화의 유행과 함꼐 크게 발전하였다. 바로 이런 ‘카페’ 드에 종사하는 여급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밀매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식민지 당국에서는 이들에게도 성병 검진을 실시하였다.








지나가는 손님을 등치는 들병이 부부 농촌사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들병이로 나서는 여성들이 늘어갔다. 주막이나 길가에서 지나가는 남성들을 유혹하여 매매춘을 하였다. 대개 남편들은 이를 모른 척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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