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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前대법원장 별세…영욕 얼룩진 삶-경향신문(0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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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前대법원장 별세…영욕 얼룩진 삶 


 
인재(仁齋) 민복기, 그의 삶처럼 영욕이 교차한다는 평가가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명석한 두뇌에 주변을 다독이는 조정력까지 갖춰 고위 관직을 섭렵했지만, 부당한 권력을 묵인·합리화하며 내내 권력을 좇았다는 냉혹한 평가도 받고 있다.

일제시대 고등문관 시험 합격 후 판사를 시작으로 해방 후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에 대법원장까지.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포함해 수십년 동안 법원과 검찰 모두에서 요직을 거친 재조(在曹)의 대표인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대법원장 시절을 ‘법조의 암흑기’로 평가한다.

이런 영욕과 포폄의 인생길은 어쩌면 출생 때부터 예고되었는지 모른다. 한일합방 3년 뒤인 1913년, 그는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이자 궁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과 형이 자작 작위를 받았고, 그 역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물로 분류됐다.

경성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뒤 45년 경성복심법원 판사 등 일제 치하에서 순탄하게 출세의 길을 달렸다.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군정청 사법부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으로 일했다. 47년 법무부에 들어가 검찰국장과 법무국장으로 일한 데 이어 49년 대통령 비서관으로 기용되었다.

이듬해에 제5대 법무차관으로 갔다가 51년 서울지검장으로 발탁되는 등 초고속 승진했다. 53년 외자구매처 차장, 55년 초대 해무청장 등을 거친 뒤 같은해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56년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개업했다가 61년 대법원 판사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곧이어 63∼66년에는 16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에 흠결을, 그리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직후부터다. 박정희 정권 때인 68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10년 동안 그는 5·6대 대법원장으로서 사법부의 수장을 맡았다. 최장수 대법원장을 기록했다. 그의 역할은 박정희 철권통치를 법적으로 지켜내는 것이었다. 재직기간이 긴 만큼 역할이 많았던 것일까.

71년 사법파동, 72년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용 파동’, 그리고 75년 ‘인혁당 사건’은 다 그의 재임 중 벌어졌다. 특히 최근 과거사진상조사위 및 대법원에서 ‘사법 살인’으로 재평가된 인혁당 사건 판결은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더럽혔다.

군법정에서 날조된 공판조서를 근거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 8명의 무고한 생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음에도 생전에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73년 신년사를 통해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이 당연한 귀결”이라며 유신을 예찬하기도 했다.

대법원장 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80~84년), 국정자문위원(80~88년), 헌정제도연구위원장(86년)을 지낸 뒤 87년부터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형사소송개정법 해설’ 등이 있다.

한편 이날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 조문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빈소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김성호 법무부 장관, 정상명 검찰총장, 호문혁 서울대 법대 학장 등 각계 인사들이 보낸 조화가 늘어서 있었다. 이용훈 대법원장과 고현철 중앙선관위원장, 이학수 삼성 부회장 등은 직접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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