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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자료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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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이돈명 변호사께서 장서와 소장품을 기증해 주셨다. 지난 4월 21일 자택에 1.5톤 트럭까지 동원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좁아져만 가는 자료실 공간에 너무 많이 주시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머리에 이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한 마음이 앞서서 일찍 서둘러 댁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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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이돈명 변호사,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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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조문기 이사장님 출판기념회 후로 뵌 적이 없었는데, 침대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표정은밝았으나 다리와 허리를 감고 있는 보조기구는 선생의 건강이 심각한 상태임을 바로 알게 해 주었다. 그래도 『돈명이 할아버지』표지에 실린 ‘촌놈 이돈명’의 푸근하고 재미난 웃음은 여전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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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명 민족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 보유 장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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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손때 묻은 책만도 1600여 권에 달하고, 선생이 걸어오신 역정을 알려주는 상패와 임명장들, 격동기였던 1961~63년 판사재직 시절 판결문 원고 초고, 변호 연설문 원고와 이돈명 변호사 구속사건 변론요지서, 주요 민주인사들의 항소이유서 원고 등 귀중한 민족민주운동 자료 130여 점을 기증해 주셨다.
1922년생으로 해방 직후 조선대학교를 졸업하신 후, 1950년대에 판사를 지내신 터라 일제시대 고서들이나 해방직후 책들을 기대했으나 의외로 최근 책들이 대부분인 것이 조금은 의아했다. 어느 회고에서“책은 시골에 파묻혀 있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안내해준 길잡이였다. 제대로 된 스승 하나 없는 촌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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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에서 책을 통해 처음 넓은 세상을 접했고, … 이때 시작된 책 읽는 습관은 팔순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고 쓰신 대로 아픈 몸을 누인 침대 옆에 신간들이 수북했다. 다 읽었으니 이 책들도 다 가져가라고 챙겨주시는 모습에서 옛 책들은 이미 도움되는 곳에 아낌없이 주셨으리라 짐작되었다. 선생의 독서량에읽은 책을 다 쌓아두실 수 없었을 테고, 소유보다는 더불어 베푸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 더욱이 책을 묵혀두지 않았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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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시기산악회 활동 당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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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80년대 인권변론 활동으로 인권변호사의 대명사로 불리는 선생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역시 사진들이다. 기증해주신 1,132장 가운데 400여 장이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그 현장을 함께한 동지들의 사진이다. 그 중에도 ‘거시기산악회’ 사진이 가장 많다. 선생이 산악회의 좌장이자 최연장자로,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직된 교수나 탄압을 받은 문인들과 함께했던 흔적을 사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유신과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삶터에서 쫓겨난 그들이 산에서만큼은 자유와 민주를만끽했던 것 같다. 한손에는 술잔이,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동지의 어깨가 있었으니 그만한 위로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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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장취임 축하 걸개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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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부임시 학교 건물 전면에 걸린 총장취임 축하 걸개그림 사진은 학원 전체가 선생에게 바친존경과 기대를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대학교 1회 졸업생이기도 한 선생은 1988년부터 3년간 특별채용으로 이뤄지던 교수인사제도를 공개채용으로 바꾸고, 전국 대학 최초로 예산을 공개하는 등 거침없는개혁에 앞장섰다. 총장 퇴임시 조선대 학생들이 보낸 편지들은 학원민주화를 위한 그의 노력과 늘 학생들의 편이었던 소박하고 친근한 이돈명 총장님을 기록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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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판결문사진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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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였던 1961~63년 판사 재직시 판결문 원고들이나, 각종 시국관련 변호문, 성명서 등도 앞으로 꼼꼼히 살펴본 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기증을 적극 주선하신 분은 추모연대(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의장이신 박중기 선생님. 두 분의 오랜 인연과 연구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이 오늘 연구소 자료실 한켠에 가득 쌓였다. 보내주신 책과 소장품은 지금 겨우 수량과 대강의 내용만 파악한 상태이다. 앞으로 알뜰하게 정리하여선생의 호를 딴 ‘범하장서’로 보관하려 한다. 따뜻한 봄날 가벼운 산행이라도 할 수 있도록 쾌유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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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범하(凡下) 이돈명(李敦明) 변호사가 회갑을 맞이한 것은 1982년 10월이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1972년 유신정변이래 민주인사들에 대한 헌신적인 변론활동을 해온 인권변호사그룹의 맏형격이었다. 엄혹했던 긴조(긴급조치)시대를 거쳐 국보(국가보안법)시대에 그는 항상 법정의 피고인 곁에 있었다. 바로 그때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그때 두레출판사를 운영하던 조선투위의 정태기(鄭泰基)와 회갑을 맞는 이돈명 변호사를 위해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감사의 뜻을 담아 회갑문집을 간행·봉정해드리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그 뜻이 통해져 크게 애먹지 않고, 「범아 이돈명선생회갑기념문집」을간행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그 뜻에 동감하고 때맞추어 글을 써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자(題字)는 원주의 장일순(張壹淳)선생이 썼고, 연보(年譜)는 내가 작성했는데 해방 후 고시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쉬고 있던 시기를 ‘건달 생활을 하다’라고 적어, 한때 이 말이회자되기도 했다. 이 책은 「역사와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보급판까지 냈다. 이돈명 변호사의 회갑문집이 간행되고 난 뒤 한참동안은 민주인사의 회갑문집의 간행과 봉정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어쨌든 이돈명 변호사의 회갑문집 간행은 내가 한 일 중에서는 그래도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되거니와, 뒤이어 여러분들의 회갑문집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또한 민주화운동진영에서 있었던 ‘옛날 옛적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헤아려본다
회갑문집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나에게는 회갑이 멀고먼 뒷날의 일처럼 느껴졌고, 회갑 때쯤 되면 누구나 이돈명 변호사처럼 노성(老成)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회갑을 맞은 이돈명 변호사의 경륜과 지혜는 적어도 나의 눈에는 완숙의 경지에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모자라고 서툰 것이 너무도 많아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어느덧 내가 이돈명 변호사의 그때 그 연륜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한테는 회갑문집을 만들어주는 사람은커녕 빈말이라도 축하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는 웃자고 하는 소리지 결코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보다 이순(耳順)하기는커녕, 아직도 탐·진·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슬프고 더 미운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를 넘기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까지는 민주화다 뭐다 하면서 세상에 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멈추어서서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헤아려보게끔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오직 잘 살기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생(生)은 잘 죽기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요컨대 앞으로 어떻게 남은 생을 살 것인가를 놓고 어쭙잖은 한자락 고민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최근 나는 아주 오랜 방황 끝에, 남아 있는 생에 지침이 될 수 있는 좋은 ‘말씀’ 하나를 찾아냈다. 이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주교의 묘비명으로 쓰여져 있는 글이라고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나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 변화했을지…”
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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