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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을 이어온 의병의 맥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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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녹천 고광순 의병대장 순국 100주년 추모대제


 


ⓒ 박도



의병 집안에 의병이 나다















 


▲ 녹천 고광순 의병대장


ⓒ 녹천기념사업회


1392년 건국한 조선왕조는 200년간 태평성대를 누렸다. 꼭 200년이 지난 1592년 임진년, 왜적들이 조총을 들고서 평화로운 조선을 침략했다. 뜻밖에 국난을 당한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관군도 수령도 우왕좌왕 도적의 무리를 당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임금마저도 초라한 행차로 쫓겨다녔다.

“… 경명은 보잘것없는 선비다. 다만 충성만을 생각하고 힘이 없음을 생각지 않는다.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의(義)로써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담양에서 창의(倡義, 국난에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한 고경명은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그의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임진 국난에 나라를 구한 충의(忠義)의 귀감이었다.

어리석은 나라와 백성들은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300년이 지난 1890년대에 와서 원수 왜적이 다시 대포를 앞세우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고경명(高敬命), 종후(從厚) 인후(因厚) 삼부자의 후손으로 인후의 사손(祀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 고광순(高光洵)이 60세 노구임에도 오로지 충의의 신념으로 담양 창평에서 창의하여 10여 년간 왜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1907년 9월 11일(양 10월 17일)에 그와 함께 처음부터 싸워온 고제량 등 10여 선두 지휘자들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서편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조선 강점을 앞두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왜군은 의병 근거지를 박멸하고자 총대장 고광순과 선봉장 고광수의 집을 불태웠다. 월봉산 노적봉 기슭의 고씨 종택에 불기둥이 솟아 그 불티가 번지면서 유천리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다. 고광순의 집이 불타던 날 그의 아들 재환이 왜군에게 항거했다. 왜군은 군도로 벙어리 아들을 마구 찔렀다. 그 칼날에 음낭을 다쳐 후사조차도 이을 수 없었다(출계로 고영준씨가 대를 잇고 있다). 315년을 두고 고경명의 13세손이 똑 같은 수난을 당했다. 어찌 이 집안만의 수난이겠는가?















 


▲ 월봉산 노적봉, 산수가 빼어나다


 


ⓒ 박도


녹천 의병장은 지리산 항쟁의 원조

















 


▲ 녹천묘쇼


 


ⓒ 박도


2006년 11월 1일, 녹천 고광순 의병대장 순국 100주년 추모대제를 앞두고 후손 고영준씨가 지난해 호남 의병지 사적 순례 인연으로 강원산골까지 통문을 보내왔다. 산수 좋고 인심 두터운 고장이요, 항일 명문 가문의 부름에 내 어찌 거리가 멀고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랴.

강원도 안흥에서 서울로 가서 일박한 뒤 첫새벽에 의병선양회원들과 함께 전세버스를 타고 창평으로 달려갔다. 이날 11시 정각, 월봉산 노적봉 산기슭 녹천의 묘소 아래 새로 지은 고광순 의병장 기념관에서 추모대제가 열렸다. 경향 각지에서 500여 추모 참배객들이 모여 녹천의 신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장흥 고씨 고석태 문중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고재춘 녹천 고광순 의사 기념사업회장의 경과보고, 송계축 광주지방보훈청장, 이정섭 담양군수, 최화삼 담양군의회장, 유한상 유림대표, 윤우 의병선양회장의 추모사와 전교신 광주 향교전교의 헌시 낭독이 있었다.

















 


▲ 홍영기 순천대 교수


 


ⓒ 박도


홍영기 순천대 교수는 ‘고광순 의병장의 인품과 의병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순국 100주년 특별 추모강연을 하였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 고광순 의병장은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다. 선조 충렬공 고경명과 효열공 종후, 의열공 인후의 후손답게 국난을 당하여 신명을 바친 분으로 오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에 충실하였다.

둘째 고광순 의병장은 도량이 넓고 대담한 용기를 지녔다. 자신이 의병장이 될 수 있음에도 학연이 다른 기우만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당시 여흥 민씨 세도가로서 부패한 시관(試官) 민응식을 면전에서 비판할 정도도 대담하였다.

셋째 고광순 의병장은 불굴의 신념을 가졌다. 그 무렵 전기 의병에 가담한 유생들이 후기 의병,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초지일관한 인물은 그리 흔치 않았지만 녹천은 초지일관 끝내 신명을 나라에 바쳤다.

넷째 고광순 의병장은 전략가였다. 그는 지리산을 의병 항쟁기지로 주목한 최초의 의병장으로 ‘축예지계(蓄銳之計, 일정기간 훈련을 하여 예기를 기른 뒤 전쟁에 임한다는 전략)’를 수립하여 장기 항전의 전략을 세웠다. 그의 순국 뒤에도 지리산에는 수많은 의병들이 찾아들어 그로부터 지리산은 백성들의 피 어린 항전 터전이 되었다.”


추모대제가 끝난 뒤 나는 고광순 의병장 묘소에 분향하면서 일대 언저리 산수를 살폈다. 월봉산 노적봉의 산 능선이 무척 아름다웠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고 하더니 산수가 좋아서 이 고장에는 예로부터 숱한 인재가 나오고, 국난 때마다 나라를 구하는 의병장을 배출하는 모양이었다.

창평 땅에서 임금님이 계시는 한양 땅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한 송강 정철의 “사공은 어디 가고 빈배만 걸렸는고?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임 계신 곳의 소식 더욱 아득하구나”라는 <속미인곡>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송강이 못내 그리던, 그 머나 먼 한양 땅을 당일치기로 오르고자 음복 후 곧장 일행과 함께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 녹촌 사손 고영준 선생
ⓒ 박도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한 한평생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장의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웠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아 있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쪽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 옆에 국화 향기 뿜어 올리네

– 황현의 고광순 추모시


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 선열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천천히 더듬고 싶다.<오마이뉴스, 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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