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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이 공존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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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역 문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1993년 창간한 계간 종합인문교양지 황해문화가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이라는 주제로 50호 특별호를 냈다. 제1장 ‘풀리지 않은 미완의 과제, 역사’편에서는 독립운동가 후손과 친일인사의 후손의 목소리를 담았는데 연구소 장병화 이사(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와 이 윤 회원(연구소 서울 북부지부장 역임, 현 홍대부고 교사)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








장병화 이사는 독립운동가 장이호 선생의 후손이며, 이 윤 회원은 지난해 8월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 1차 예정자 명단에 실린 이준식(음성군수 역임)의 손자다. 특히 이 윤 회원은 명단 발표 후 할아버지를 대신해 친일행위를 사죄해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아래는 ‘민족 반역자는 사라질 수 있으나 결코 잊을 수는 없다’(장병화)와 ‘자아상실의 세대로 태어나서’(이 윤)라는 제목으로 두 회원의 글이다.


민족 반역자는 사라질 수 있으나 결코 잊을 수는 없다

장병화 

나의 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19세의 젊은 나이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 김 구 주석과 이 청천 장군 휘하의 독립군에 투신하여 젊음의 받쳤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용맹스러운 독립군으로 침략자인 일본군과 목숨을 건 독립전쟁을 하시다가 1945년 해방된 후 애국지사님들과 같이 환국하여 서울 성북구 돈암동 허름한 적산


(敵産) 가옥에서 운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아버님 나이30살에 친구로부터 강원도에 계신 어머님을 소개받아 결혼을 하였으며 서울 돈암동에 신혼살림을차렸지만 너무나 가난하였다고 한다. 나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 새 가족으로 1947년 10월27일 (음력 9월14일) 태어났으며, 어머님의 고향인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에 내려가 외할머니 댁에서 나를 낳았다.

외가댁은 시골에서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런 외가댁이었지만 우리 형제에게는 항상 부족하고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둘이나 있었지만 돈 벌이가 없었다. 주문진이라는 인구 3만 명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돈벌이를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일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파는 장사를 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하고 형제들에게 돈을 얻어 써야 하는 신세라 친정살이가 매우 고달프고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생활 속에서 나는 1953년 다른 애들보다 1살 작은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은 외삼촌이 선생님으로 계시는 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시는 전쟁 통에 두세 살 많은 친구들도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초등학교 생활은 모범적이었고 다른 애들보다 나이는 적었지만 공부는 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은 어머님의 마음을 괴롭혔다 아침, 정심,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처절한 삶의 고통의 연속이었다. 감자와 밀가루, 우유가루, 쑥, 칡뿌리, 보리 등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으니 언제나 배가 고팠고 배를 불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밥상이 들어오면 밥그릇은 누구에게나 똑같으련만 좀더 큰 것을 차지하려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밥상에 앉았던 생각이 난다. 공부는 헌책으로 노트는 한 권이면 족했다. 금년에는 소풍을 갈수 있을까…., 아직 몇 개월이나 남았는데.., 운동회에는 고구마와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있을까….,동심은..<後略> <전문 내려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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