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카리브해의 조선인들(1) – 임천택과 헤로니모 임, 이민과 혁명

759

해방70년 특별기획 /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18

카리브해의 조선인들(1) – 임천택과 헤로니모 임, 이민과 혁명

김선호 선임연구원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께
“당신을 본 지 많은 시간이 흘러서 바로 그대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정의 달콤함을 맛 본 후, 전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절 믿어주세요. 당신은 나에게 어둡고 흐린 밤이 지나간 후, 밝게 떠오르는 한 줄기 아름다움입니다. 당신의 어투와 상냥한 성격, 그 눈길은 절 지독히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대와 진실한 우정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절 시들게 만들죠. 그대가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진심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예의 없이 그 감미로운 우정을 설명하려 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자신감 없던 지난 날로 인해 저를 책망하지도 마시고 다만, 저를 용서하시길 바래요. 당신께 글을 쓸 기회를 주신다면, 전 그 순간만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 폐를 끼쳤군요.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당신을 잊지 못하는 이의 진실된 사랑과 애정을 받아주세요.”

마딴사스, 1945년 12월 26일, 우리가 만난 지 2일 뒤.
헤로니모 임(Gerónimo Im)

13
헤로니모 임과 크리스티나 장(출처 : 다음블로그)

상냥한 말씨, 감미로운 글투. 유려한 스페인어로 이 편지를 쓴 청년은 스무 살의 조선인, 헤로니모 임이다. 수신자는 크리스티나 장, 편지를 쓴 장소는 마딴사스(Matanzas). 한반도의 지구 반대편, 카리브 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쿠바 제2의 도시였다. 마딴사스는 스페인 점령자들이 세운 항구도시로, 문학과 예술이 발달해 쿠바의 아테네로 불렸다. 헤로니모와 크리스티나는 모두 조선인 2세였고, 부모님들은 1900년대 초 조선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이민 1세대였다.

카리브해의 에니깽
가톨릭 성인인 헤로니모의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의 아버지는 임천택이다. 그는 1903년 식민지 조선의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임천택이 두 살이 되던 1905년, 그는 홀어머니의 품에 안겨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알선한 유카탄반도 이민선에 올랐다. 1905년 여름 인천항에서 멕시코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다. 유카탄반도의 농장주들은 일손이 부족했고, 이역만리 조선까지 구인광고가 떴다. 손바닥만한 땅도 없던 고용농‧빈농들은 먹고살기 위해 동척을 찾아갔다. 이민노동자들은 멕시코가 어딘지도 모른 채 태평양으로 출발했다.
출발한 사람은 어른 836명, 어린이 195명으로 총 1,031명이었다. 이 가운데 196명은 독신, 200여 명은 대한제국의 퇴역군인이었다.

14
멕시코 이민 1세대의 모습(출처 : 국무총리실블로그)

한 달 넘게 뱃멀미와 굶주림에 시달려 도착한 땅은 용설란(龍舌蘭)이 가득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계약 기간 동안 노예처럼 일했다. 에네켄(Henequen)의 손바닥만 한 가시는 조선인들의 손과 발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계약 기간은 무려 10년이었다. 수많은 조선인이 고된노동과 질병에 시달려 사망했다. 10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 살아남은 한인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갈데가 없어 농장에 눌러앉았다. 일부 사람들은 사탕수수농장이 일이 더 쉽고 돈도 더 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배를 타고 카리브 해를 건너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으로 갔다. 당시 18살이던 임천택과 그의 홀어머니도 쿠바로 건너갔다. 쿠바로 간 한인은 모두 288명. 이들이 도착한 항구가 바로 마딴사스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회장, 임천택
임천택과 조선인들이 쿠바 마딴사스 주의 엘 볼로 에네켄 농장에 도착했을 때, 국제무역시장에서 설탕값이 폭락하고 있었다. 농장주들은 사탕수수 대신 에네켄을 심었고, 쿠바 이민자들은 다시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쿠바에 자리 잡은 조선인들은 신문과 서신을 통해 국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쿠바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쿠바지회를 설립했다. 임천택이 쿠바지회장을 맡았다. 쿠바의 조선인들은 농장에서 번 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이 송금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임천택이었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쿠바 조선인이 송금한 독립운동자금은 총 1,499달러였다. 하루 임금이 1센트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이 독립자금 지원 사실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15

임천택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렁이였다. 그러나 그는 쿠바에 한글학교인 민성학교(마딴사스)와 전성학교(카르데나스)를 세우고, 조선인 청년들을 위해 독서회와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그는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여자애국단도 조직했다. 그의 부인 김귀희가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장을 맡았다. 임천택은 쿠바에 정착한 후 ‘개벽사’의 이두성(李斗星)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를 통해 천도교의 교리를 접하게 된다. 그는 1930년 3월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개설하고 종리원장을 맡아 쿠바에 천도교를 포교했다.
1942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쿠바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며 연합국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쿠바기‧미국기를 들고 아바나 시내를 행진했다. 그리고 1941년 8월 14일 아바나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2차대전 중 10여 차례에 걸쳐 ‘침략국 타도대회’를 개최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쿠바의 조선인들은 그해 9월 카르데나스에서 승전축하행사를 개최하였다.

식민지, 쿠바

16

1926년, 임천택의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장남의 탄생을 축하해 가톨릭 성인 헤로니모의 이름을 붙였다. 헤로니모는 성실한 아이였다. 그는 18살이 되던 1943년, 마딴 사스종합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쿠바 조선인 최초의 대학생이었다. 쿠바의 동포들은 그를 위해 돈을 모아 입학금을 댔다. 그해
대형 허리케인이 쿠바를 덮쳤다. 그러나 부패한 정부관리들은 수해지원품을 빼돌렸다. 이를 본 헤로니모는 마딴사스 학생들을 규합해 반정부 투쟁을 펼쳤다. 이것이 헤로니모가 처음 쿠바혁명에 입문한 계기였다. 그는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그러나 마딴사스 대학교 교수들의 호소에 힘입어 그 해 겨울 석방되었다. 당시 헤로니모의 지도교수였던 지바스는 쿠바 공산주의의 대부였다.
반체제인물로 낙인찍힌 헤로니모는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45년 겨울, 아바나로 거처를 옮겼다. 쿠바 최고의 명문대학인 아바나대학의 법학과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았다. 헤로니모가 다녔던 아바나대학은 식민지시기 경성제국대학처럼 혁명의 저수지였다. 그는 법대에서 유난히 눈이 큰 동갑내기 쿠바 청년을 만나게 된다.

피델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아버지는 1895년 스페인 갈리시아지방에서 쿠바로 이주한 스페인 이민자였다. 스페인에서 설계를 배운 앙헬 카스트로는 에네켄 농장에서 도면설계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쿠바사람들이 스페인 제국주의에 고통받는 현실을 봤다. 그는 스페인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1895년부터 쿠바 독립을 위해 스페인군대와 싸우기 시작했다. 쿠바인들은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02년 쿠바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식민통치는 종식되지 않았다. 미국은 쿠바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다시 식민정부를 세웠다.

피델과 헤로니모

17
피델 카스트로(출처 : 나무위키)

그러나 혁명의 피는 앙헬에서 피델로, 천택에서 헤로니모로 이어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1946년 아바나대학 입학 직후부터 라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에 뛰어든다. 헤로니모 임과 피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도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타고난 혁명가였다. 1학년이던 1946년 겨울, 피델은 아바나대학생연맹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부패한 학생운동의 혁신, 라몬정권의 퇴진을 내걸고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피델은 쿠바사회주의혁명운동, 쿠바반정부혁명연합, 쿠바사회당과 연합해 전면적인 친미정권 타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라몬정권은 대학에 우익 갱 단원을 투입해 학생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법대에서 운동을 주도하던 헤로니모도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7년 피델은 극우 독재자가 통치 중인 도미니카공화국을 해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혁명은 도미니카공화국‧쿠바 정부군의 연합으로 실패하였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피델은 이후 쿠바의 사회주의정당인 오르토독소(Ortodoxo)당에 입당해 반정부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50년 치러진 쿠바선거에서 사회주의세력인 인민정통파는 쿠바의회의 다수당이 되었고, 미국의 식민통치는 의회혁명을 통해 곧 종식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2년 3월 친미반공주의자인 바티스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두 번째 수립된 쿠바의 민간정부는 다시 친미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쿠데타의 공포가 쿠바를 뒤덮던 1952년, 헤로니모에게는 인생의 행복이 찾아왔다. 그는 그해 아바나에서 크리스티나 장과 결혼했다.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께」라는 감미로운 편지를 쓴지 6년 뒤였다. 부부는 소박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바티스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바티스타는 의회와 언론을 통제하고,
비밀경찰을 증원해 혁명가들을 색출했다. 이에 맞서 쿠바의 혁명가들은 새로운 반독재투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헤로니모와 쿠바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