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인터뷰 │ 이용길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장, 역사와 기억을 둘러싼 고독한 투쟁 – 임종국 조형물 건립은 그의 뜻을 알리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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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혜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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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9일 임종국 선생이 친일청산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천안에서, 그의 뜻을 잇는 이들이
모여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임종국 선생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에 분노해 친일문제 연
구에 착수했다. 1966년 그가 저술한 <친일문학론>은 친일파 연구의 기원을 연 기념비적 저작으로 지식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옥중필독서로 널리 읽혀졌으며 ‘운동권의 교본’으로도 활용됐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 외에도 <일제침략과 친일파> <일제하의 사상탄압>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등 수많은 일제침략사 연구서를 저술하였으며, 필생의 목표였던 <친일파총서>를 준비하던 중 1989년 폐기종으로 별세했다. 그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였으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빛을 보게 되었다. 
<친일문학론> 출간 50주년을 맞이해 선생의 실천적 삶과 선구적 학술 업적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세우기 위한 모금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회원이 있다. 조형물 건립과 임종국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용길 추진위원장을 만났다.
이용길 위원장은 고등학생 시절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최남선의 시를 암송하며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처럼 군인이 되어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꿈을 가진 야심만만한 청소년이었다.
학도호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선생님들과 주위의 어른들도 철없는 영웅주의를 부추겼다. 그러다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임종국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읽으면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임종국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친일문학론>을 통해 임종국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1974년도니까 박정희 유신정권 시기였죠. 제가 읽은 <친일문학론>은 저에게는 그냥 단순한 책 한권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년기에 형성되었던 나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소개된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그들을 흠모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을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존경하면서 혁명공약을 외우고 다녔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그렇게 흠모하던 문학가들의 친일행적을 낱낱이 파헤친 <친일문학론>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리고 근현대사 등 역사를 공부하면서 박정희의 친일행적과 5‧16쿠데타, 군사독재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으니 반공소년이 운동권학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후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결과적으로 보아도 임종국 선생을 <친일문학론>을 통해서 만난 것이 나의 인생행로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지요.

<친일문학론>을 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대학에 입학 후 서클 선배들의 권유로 읽게 되었는데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입문서로 읽던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었지요. 그 중에 <친일문학론>도 필독서였어요. 군사정권 시절에 대부분 금서들이었는데 저의 집에 형사들이 들이닥쳐서 책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기도 했었던 암흑같은 시절이었습니다. 낡은 책들을 돌려가며 숨겨서 읽던 긴장된 대학생활이었는데 은근히 독립운동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요.

임종국 선생을 실제로 만나 뵌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임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뵌 건 대학생활을 마치고 7~8년이 지난 뒤 천안에서입니다. 1980년대 초반에 지역운동을 하겠다며 고향인 천안으로 가게 되었는데 요산재樂山齋에 계신 임 선생님을 찾아뵈었죠.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런닝셔츠에 짧은 머리셨는데, 웃는 낯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독립군’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첫 만남에서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먼저 제가 <친일문학론>을 읽고 이러이러해서 운동권이 됐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도 말씀드렸고요. 그랬더니 대견스럽다는 듯 껄껄껄 웃으시며 누가 가장 충격적이었고 궁금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이광수라고 대답했더니 이광수에 대해서 적어 놓은 인명카드를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이광수의 친일행위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그 카드에 적힌 <조선총독부 관보>와 <매일신보> 등 여러 자료들을 찾아서 보여주셨는데, 누런 종이에 빨간 볼펜으로 줄이 이곳저곳에 그어져 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읽었던 책도 이런 자료조사를 통해 만들어 졌다는 걸 알게 됐죠. <친일문학론>을 처음 읽고 당황하고 고뇌하던 때가 되살아나더군요. 그 후에 몇 차례 뵙고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면서 뵙지 못하였지요.

위원장님이 보시기에 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한마디로 마지막 독립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분이 하셨던 연구와 저술들을 보면 정말 마지막 독립군의 치열한 삶을 사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당신의 아버지 이야기(부친 임문호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일)까지 포함해서 지독한 분 같았어요. 그런 정신력과 기백이 아니면 그런 일을 끝까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실질적 근거에 입각한 연구를 하셨는데, 친일행위자 한 명, 한 명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기록을 해 놓은 것을 보면서 정말 놀랬어요. 서재 한쪽에 이런 인물에 대해서 적어 놓은 카드가 빽빽하게 있었습니다. 독립군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시대상황으
로 봐도 목숨을 내놓고 일을 하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본인이 하는 일을 과장하지도 않으셨고, 아무도 안하는 일을 내가 목숨걸고 해야지 하는 느낌도 아니었어요. 당신이 해야 할일을 당연히 한다는 당당함과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임 선생님 추모제를 연구소보다도 먼저 지내셨다고요?
서울로 울산으로 노동운동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활동하다가 1996~7년 민주노총 총파업 때 대전충남본부장이었는데 징역형을 받고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어요. 그 때 다시 천안으로 가면서 천안에 있는 단체들과 함께 천안민주단체협의회를 결성하였는데 의장을맡게 됐지요.
천안민협 의장으로 여러가지 지역활동을 하던 중에 임 선생님 추모제를 지내자는 제안을 하였고 뜻이 잘 모아져서 9주기부터 추모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연구소에서도 추모제를 지내지 않을 때여서 연구소 분들이나 임 선생님과 관련된 분들을 초대하였지요. 회원 집에서 제수를 준비하고 지역 언론에도 알리고 하면서 저한테는 돌아가신 임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걸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느꼈어요. 천안이 임종국 선생님이 사셨던 곳이고, 유택도 있는 곳이니 천안에서 선생님 추모제를 지내고 술 한 잔 올리자는 정도의 행사였거든요. 그럼에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친일파 청산을 위해서 활동을 하신 선생이 지역사회에서 다시 부각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던 부류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을 겪으며 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가 아직도 진행 중인 현재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죠.

10사실 위원장님은 임 선생님과는 인연이 있지만 연구소의 활동에 직접적인 참여는 안하셨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선뜻 맡아주셨는데요. 이유를여쭤 봐도 될까요?
사실 망설였지요. 1980년도 중반 이후 저의 주요활동은 노동운동에 집중되어 있었고 2000년도 들어서는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지요. 그러던 중 최근에 모든 직책과 활동을 중단하고 쉬고 있는데 임 선생님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이지요. 임 선생님 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제안을 받고 내가 맡을 자격이 있는가 싶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싶었습니다. 사실 걱정도 되지만 임종국 선생님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구현하고 싶었거든요. 그 분이 평생 연구하셨던 친일문제가 지나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생생한 현재의 당면 과제임이 분명하다는 인식에서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단적으로 친일을 미화하고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려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음모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요? 이런 시기에 임 선생님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유효한 해법을 만들어내고 이를 관철해내기 위해 선생님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조형물 건립도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구요.
제 개인적인 성장과정과 활동과정 속에서 보면 선생님께서는 주요 계기마다 저를 호명하셨던 것 같아요. 그것도 10여년을 주기로 ‘너 이런 일 해야 하는 것 아니냐’하고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그분을 따라서 구체적으로 함께 했던 건 아니지만 선생님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중요한 변화의 시기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이번 조형물 건립추진위 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내가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과제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선은 선생님을 잘 알리고 공부하는 계기로 만들어야지요. 제가 젊은 시절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임종국 선생님으로 인해서 청소년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세계관을 바르게 키워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친일문제가 친미로 반공으로 분단으로 천민자본주의로 변화하면서 계승되고 확장되고 있는 현 시기를 관통하는 구조적 모순의 출발점이라는 겁니다.
임 선생님을 이 시대의 과제를 조명하는 거울로 우리의 미래를 비치는 등대로 삼는다는 우리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일정과 건립 장소는 아직 미정인가요?
임 선생님의 기일인 11월 중순 경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아직 구체적으로 의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독립기념관, 천안삼거리, 천안터미널 주변 등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곳으로 의견을 모아 결정해야 되겠지요.

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각오 한 말씀 해주세요.
해방된 이후 70년이 지났어요. 일제 식민지배 기간의 두 배의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떤가요? 임종국 선생의 투쟁이, 마지막 독립군의 전투가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임종국 선생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조형물건립 운동은 선생님을 널리 알리고 배우는 첫걸음이라 하겠습니다. 조형물 건립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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