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주간경향] “아아 일제가 그립다!”…‘친일파’ 박중양의 천인공노 ‘4대 죄상’

33

#‘1874년생 박원근’

친일파 박중양은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일본말로 “아아 무까시가 나쓰까시이나!(ああ 昔が 懷かしいな!)”라는 멘트를 날룠다. ‘옛날(일제치하)이 그립다’는 뜻이었다. 이기환 제공

“아 고꼬가 옛날의 ‘죠코 깅꼬’(조흥은행) 데스카?” 1949년 2월2일 오후 4시30분이었다. 이날 오전부터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반민특위) 3층 중앙사무국 조사실에서 6시간 이상 예비 문초를 받고 내려와 대리석 난간에 기대어 선 70대 노인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기자에게 물었다.

“이 건물이 옛 조흥은행 건물이냐”고…. 기자가 “제일은행 건물”이라고 고쳐 주자 노인이 되물었다. “아 ‘다이이찌 깅꼬’(제일은행) 데스카?”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덧붙였다.

“아아 무까시가 나쓰까시이나!(ああ 昔が 懷かしいな!)”(“아아 옛날이 그립네!”)

이렇게 99% 일본말을 내뱉고, 노골적으로 ‘일제 치하가 그립다’고 향수에 젖은 이 노인이 누구인가. ‘박충중양’(朴忠重陽·1874~1959), 즉 ‘보쿠타다 시게하루’라는 이름을 가졌던 노인이었다.

그럼 일본인이 맞지 않은가. 아니다. 이 노인은 1896년 10월 일본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박원근(朴源根)’이었다. 일본 유학 중에는 산본신(山本信·야마모토 마코토 혹은 야마모토 신 혹은 야마모토 노보루)로 일컬어졌다가 귀국 후 박중양이 되었다. 급기야 1940년 ‘박충중양’(보쿠타다 시게하루)으로 ‘창씨개명’했다. 굳이 성에 ‘충(忠)’자를 더할 만큼 ‘일본국의 신민으로서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이다. ‘박중양’이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언론은 ‘매국의 괴(魁·수괴)’니 ‘친일파의 거두’니 하는 극강의 수식어를 붙였다. ‘박원근→야마모토→박중양→보쿠타다 시게하루(박충중양)’는 그렇게 ‘뼛속까지 일본인’임을 자랑했던 인물이었다.

박중양의 젊었을 때 이름은 박원근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1896년 10월 도쿄를 방문한 조선인들의 동향을 보고한 문서에서 “박원근이 게이오대 입학을 위해 도쿄에 왔다”고 했다. 박중양의 자필 일기 <술회> 역시 “1896년 게이오대 유학을 위해 도쿄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그랬던 박원근은 유학 도중 이름을 일본 유학 중에는 야마모토(山本信·야마모토 마코토 혹은 야마모토 신 혹은 야마모토 노보루)로 일컬어졌다. 이기환 제공

#‘1912년생 박원근’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박중양의 젊을 적 이름과 한자까지 똑같은 박원근(1912~1950)이 있었다. 충북 보은 출신인 ‘1912년생 박원근’은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9년부터 항일 사상연구 및 비밀결사인 진화회-삼인회 등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고취했다. 그러다 만 20살 때인 1932년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박원근은 전라도와 충청도 청년들에게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며 중일전쟁을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단정하고 징병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39년 5월 27살의 나이에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됐다.

그랬던 박중양은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이름을 ‘박충중양’(朴忠重陽·보쿠타다 시게하루)으로 ‘창씨개명’했다. 굳이 성에 ‘충(忠)’자를 더할 만큼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이다. 이기환 제공

다시 징역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1912년생 박원근’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됐다.(7월10일)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좌익운동을 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한 단체다. 시간이 흐르자 지나친 가입 독려 탓에 일반 농민도 대거 가입했다.(회원수가 50만명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및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가담 혹은 부역행위가 우려된다”면서 이들을 학살했다. 이때 ‘1912년생 박원근’은 친일경찰 김달용에게 총살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촌극

정리해보자. ‘1912년생 박원근’은 고등학생 때 만 17세에 이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 20세와 27세에 걸쳐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는 등 생의 대부분을 감옥과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1950년 7월), 그것도 다름 아닌 친일 경찰 출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앞날이 창창한 38살의 나이였다. 반면 ‘1872년생 박원근-야먀모토-박중양-보쿠타다’는 어떠한가. 만 24세에 일본 유학을 떠난 뒤 1959년 83세로 죽을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두 ‘박원근’의 삶은 이토록 극과 극이었다. 최근 이 두 박원근을 둘러싸고 촌극이 일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들의 밥상’(2026년 7월1~10월25일)에 ‘1912년생 박원근 선생’의 친필휘호(‘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를 전시한 바 있다. 박물관 측은 개인 소장인 이 작품을 대여전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달이 벌어졌다. 이 작품이 ‘1912년생 독립투사 박원근’이 아닌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1874년 박원근(박중양)’의 휘호임이 뒤늦게 밝혀졌다. 백번 사죄해도 부족하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친일 경찰의 손에 희생된 박원근 선생을 거듭 욕보인 셈이 되었다.

또다른 박원근은 ‘1912년생 박원근’ 선생이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1912년생 박원근 선생은 만 20살 때인 1932년 삼인회 사건으로 1년6개월형을 받았다. 1939년 5월에는 27살의 나이에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이기환 제공
뼛속까지 친일파

다만 이번 기회에 박원근 선생의 ‘존재’가 주목받은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뿐이랴. 이 참에 그동안에는 소홀히 넘어갔던 ‘뼛속까지 친일파 박중양’을 집중 조명해보고자 한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1874년 박중양’은 경기 양주의 아전 출신이었다. 박중양은 만 20살 때인 발발한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두자 ‘일본’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다.

박중양은 일본인 이발소에서 상투를 자르고 일본인과 술을 마시며 필담을 나누면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유학을 신분상승의 돌파구로 삼은 것이다. 결혼해서 두 자녀까지 둔 몸이었던 박중양은 전답을 팔아 유학경비를 마련하고 일본으로 떠난다.(1896년 10월) 그의 나이는 만 22살이었다. 유학 시절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유력 인사와 두루 교유한 박중양은 귀국 후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주사로 관료를 시작했다.(1904) 이후 한국 통감이 된 이토의 후원으로 대구 군수 및 경북관찰사 서리가 된다.(1906년 7월) 이때부터 ‘뼛속까지 친일파’의 첫 번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1912년생 박원근’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됐다. 선생을 죽인 자가 다름 아닌 악질 친일 경찰 김달용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기환 제공
대구 성벽 허문 ‘야마모토 군수’

박중양이 대구성벽을 무단으로 헐어버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대구에서는 성을 경계로 상권이 나뉘어 있었다. 성 안의 상권은 조선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일본인들은 이 성벽을 헐어 이른바 구역을 없애려 했다. 이때 박중양은 일진회를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야마모토(박중양의 일본 유학 시절 이름) 군수’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오로지 한 사람,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일어난 활동적인 걸물아”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는 대한제국 내부대신의 허락도 받지 않은 무단 성벽 훼철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들의 밥상’(2026년 7월1~10월25일)에 ‘1912년생 박원근 선생’의 유묵(‘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이라는 유물을 전시했다. 하지만 이 유묵의 주인공은 독립투사 박원근 선생이 아니라 골수 친일파 박중양의 작품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기환 제공

여론이 들끓었다. 황성신문(1906년 11월17일)과 대한매일신보(1906년 11월20일)는 박중양이 “대구 성벽을 헐어 석재 1개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에 아첨하려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성벽을 헐었다’는 노래가 시중에 돌았다”고 사나운 민심을 전했다. 공무원들이 성벽파괴를 주저하면 “내년이면 없어질 정부인데 너의 공무가 무슨 소용이냐”고 강행을 지시했다. 박중양은 한술 더 떴다. “나를 잡아갈 수 없을 걸. 혹시 나를 쫓아내려거나 붙잡아 가려 한다면 나는 일본으로 떠나면 그만이다.”(11월24일) 신문은 이어 “박중양 군수가 조강지처(한국 상인)를 내쫓고, 밖에서 데려온 기생(일본 상인)이 ‘이놈 저놈’하고 떵떵거리게 만들었다”면서 “모든 이들이 박 지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흉흉한 민심을 전했다.

1906년 대구군수가 된 박중양은 상부(대한제국 내부)의 허락도 없이 대구성벽을 무단철거했다. 성벽훼철을 주저하는 공무원들에게 “어차피 없어질 정부 아니냐”고 일축했고, “나를 내쫓거나 붙잡아가려 한다면 나는 일본으로 떠나면 그만”이라고 했다. 황성신문(1906년 11월17일)과 대한매일신보(1906년 11월20일)는 박중양이 “대구 성벽을 헐어 석재 한 덩어리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비판했다. 이기환 제공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

황성신문은 “내부(행안부)가 정부의 허락 없이 대구성벽을 훼철한 박중양에게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11월19일)고 전했다. 그러나 박중양의 ‘뒷배’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박중양의 ‘성벽 철거’를 극찬했다. “이토 통감은 일본인의 요청(대구성벽 철거)를 진심으로 받아준 박중양 군수를 두고 ‘각 지방의 군수 가운데 박중양이 제일”(대한매일신보 11월20일)이라고 극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터였다. 훗날 대구시보(1949년 1월23일자)는 “일본 유학 중 만나 본 이토 히로부미에게 ‘호부(呼父)’, 즉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고 전했다. 이 ‘대구 성벽 무단 철거’ 사건은 계속 파묘되었다.

대한제국 내부(행안부)는 허락없이 대구성벽을 훼철한 박중양에게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각 지방의 군수 가운데 박중양이 제일”이라고 극찬했다. 박중양은 일본유학 중 교유한 이토 히로부미를 ‘아버지’라 불렀고, 그래서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자였다. 이기환 제공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16일자는 ‘대구성 무단 철거’를 풍자한 노래(‘중양타령’)를 소개했다. “…중양가절(重陽佳節) 말 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 객사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중양가절(重陽賈節)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肥己·제 살찌우기) 수단 대구 성곽 구 공해(옛 관아)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 대구 흥…” 이 시절 박중양의 잔인한 성격을 일러주는 일화가 또 있다. 즉 대구에 있던 군인이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박중양은 주민들에게 ‘개를 모두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처벌한다’(<매천야록>)는 엄명을 내렸다. 이 때문에 대구 관내의 개(犬)가 열흘 만에 멸종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1월16일자에서 ‘대구성 무단 철거’를 풍자한 노래(‘중양타령’)를 소개하면서 ‘애구(哀邱) 대구(大邱)’라 한탄하면서 “전무후무 비기(肥己·제 살찌우기)수단 대구 성곽 구 공해(옛 관아) 일시간에 팔아먹었다”고 노래했다. 이기환 제공
‘3·1운동 반대운동’

박중양의 ‘으뜸 죄악’은 3·1운동을 방해한 것이었다.

즉 경술국치 후(1910년 10월) 충남도장관을 지낸 박중양은 중도에 불미스러운 사생활 문제가 불거져 중도 사임한다.(1915년 3월) 이후 대구로 내려와 절치부심하던 박중양은 1919년 발발한 3·1운동을 출세의 지렛대로 삼았다. 박중양은 전국적인 시위운동에 당황하던 조선총독부 당국을 위해 앞장섰다. 4월6일 박중양은 대구에서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기 위한’ 이른바 ‘자제단’을 결성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박중양의 ‘으뜸 죄악’은 3·1운동을 방해한 것이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광분하기 시작한다. 4월6일 박중양은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기 위한 자제단’을 결성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이기환 제공

즉 ‘독립운동을 자제하라’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박중양은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국가가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3·1운동을 폄훼했다. 박중양은 4월15일 대구에서 출발하여 김천·선산·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중양은 대구에서 자제단 확대 운동을 펼쳐 4월20일까지 3787가구의 가맹을 끌어냈다.(매일신보 1919년 4월30일) 박중양의 ‘자제단’ 운동은 전북 이진호가 조직한 ‘자성회’ 운동으로 이어졌다. 1919년 8월까지 전국 138군이 넘는 지역으로 이 자제단과 같은 ‘3·1운동 반대 운동’ 조직으로 이어졌다. 기가 막힌다. 3·1운동을 박중양 본인의 ‘재기(再起) 운동’으로 활용해버린 것이다.

조선총독부 사법부장관을 지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는 “박중양은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충남)도장관 시절 10명 이상의 관내 부인을 범했다”고 전했다. 그 여성들 가운데는 일본인 유부녀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라는 잡지도 “박중양이 순시 도중 여관의 일본인 여주인과 간통하다가 주인 남편에게 발각되어 나쁜 평판을 받았다”는 전했다. 이형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 제공
돈이 아까워 유부녀만…

골수 친일행각만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차마 필설로 옮기기도 힘든 성 비위 사건을 여러 차례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다. 1915년 충남도장관에서 물러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조선총독부 사법부장관을 지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와 중추원 고문 송병준(1857~1925)이 박중양을 두고 뒷말한 내용이 남아있다.

즉 “박중양이 행실이 좋지 않아 (충남)도장관 시절 10명 이상의 관내 부인을 범했다”는 것이다. 그 여성들 가운데는 일본인 유부녀도 있었다는 것이다.

충북도지사 시절(1924년 10월) 박중양은 신성한 사찰의 법당에서 술판을 벌인 것도 모자라 술 시중에 동원된 여승을 욕보였다. 이에 낙담한 여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아일보 1925년 3월7일자는 박중양의 여승 성폭행 사건을 고발했다. 이기환 제공

“일본인 여인의 남편이 외출했을 때였다. 박중양이 유카타(浴衣·가벼운 전통의상)를 걸치고 그 집에 들어가 부인을 범하려다가 부인이 큰 소리로 ‘살인자다. 살인자’라고 소리 질렀다. 마침 귀가 중이던 남편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박중양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 겨우 살아남았다. 남편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일기>) 두 사람의 대화는 “박중양이 돈을 아끼기 때문에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남의 부인을 범한다. 말도 안 된다”는 것으로 끝난다. 잡지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1915년 5월호)는 “박중양이 순시 도중 여관의 일본인 여주인과 간통하다가 주인 남편에게 발각되어 나쁜 평판을 받았다”는 전했다. 두 이야기가 일맥상통한다.

다음 날 아침 박중양은 일행과 함께 빠져나갔다. 여승은 5일 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기환 제공
여승 성폭행 사건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 듯했다. 충북도지사 시절(1924) 박중양은 더욱더 엄청난 성 추문을 일으킨다. 이 사건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듬해(1925년) 3월7일이었다.

그 날짜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보자. 1924년 10월26일이었다. 당시 충북 보은 속리사(법주사)를 방문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재임 1919~1927) 부부와 그 일행이 대법당에서 술자리를 펼쳤다. 당연히 박중양 충북도지사가 그 술판을 차렸을 것이다. 신성한 법당에서 술판을 벌인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천인공노할 일이 이어졌다. 사찰의 여승 200여명 가운데 6명을 뽑아 술잔을 채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밤늦도록 질탕한 술판을 벌이던 중 사이토 총독 부부는 침실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박중양이 술판을 주도했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짜(3월7일)에서 천인공노할 박중양의 몹쓸 짓을 고발했다. “…이 방면에서 이미 풍문이 낭자한 박중양 지사가 여승에게 몹쓸 짓을 저질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기환 제공

박중양은 방구석 저편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여승(당시 20살)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여승을 옆으로 끌어 앉히고 손목을 잡고 술을 마셔댔다.

새벽 4시가 되어 술에 취한 다른 이들이 쓰러졌다. 박중양은 여승의 손목을 잡은 채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갔다.

27일 아침 박중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행과 함께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여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5일 후 여승은 으슥한 방 한구석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박중양에게 능욕을 당한 여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듯 숱한 성 비위사건을 저지른 박중양에게 각언론은 ‘색마(色魔)지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기환 제공

조선일보도 같은 날짜(3월7일)에서 천인공노할 박중양의 몹쓸 짓을 고발했다.

“…이 방면에서 이미 풍문이 낭자한 박중양 지사는 새벽을 틈타 전전긍긍 앉아있던 여승을 끌고 몹쓸 짓을 저질렀다…낙담하고 번민한 여승이 저승길을 택하니 이 무슨 추악한 죄과냐.” 이 천인공노할 ‘박중양 사건’은 자진사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조선통치상 공로가 많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박중양은 ‘색마(色魔)지사’라는 최악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동아일보 1925년 3월9·4월3일)

박중양은 1945년 4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선인 출신 귀족원 의원은 이때 선임된 7명을 포함, 일제강점기 통틀어 10명에 불과했다. ‘골수 친일파’ 인증서였다. 이기환 제공
‘옛날이 그립다!’

그렇게 낙마한 박중양이었지만 일제의 비호 아래 떵떵거리며 살았다. 중추원 참의(수당 2500원·1927~1941)와 중추원 고문(수당 3000원·1941~1943)을 거쳐 으로 선임되었다. 조선인 출신 귀족원 의원은 1943년 선임된 7명을 포함, 모두 10명에 불과했다. ‘골수 친일파’ 인증서였다. 그야말로 나라가 급격히 기울어간 1896년부터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일본인의 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한 것이다. 그랬기에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문초를 받고 내려오면서 일본말로 “옛날이 그립구나!(무까시가 나쓰까시이나!)”라고 탄식을 터뜨린 것이다. 박중양에게 조선인은 ‘편협성, 배타성,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먹기 등의 나쁜 폐단에 찌든 자들’(박중양의 <술회> 228쪽)이었다.

박중양에게 조선인은 ‘편협성, 배타성,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먹기 등의 악폐에 찌든 자들’(박중양의 <술회> 228쪽)이었다. 그는 “일본인이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기환 제공

그러니 ‘민도가 낮은’ 조선인은 일본과 일본인의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한국 내에 있던 사람은…모두 일제의 교육을 받고 창씨개명을 해서 일제의 신민이 되었다…해외에 나간 사람은 그만이고 일제 치하에서 갖은 고통을 느끼면서 동족을 위해 일제와 친했다고 처벌하는 것은 모순 아니냐…”(대구시보 1949년 1월23일)

박중양은 “…한국 내에 있던 사람은…모두 일제의 교육을 받고 창씨개명을 해서 일제의 신민이 되었다…해외에 나간 사람은 그만이고 일제 치하에서 갖은 고통을 느끼면서 동족을 위해 일제와 친했다고 처벌하는 것은 모순 아니냐…”(대구시보 1949년 1월23일)고 반문했다. 이기환 제공

누가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인가. 일제 강점기 내내 떵떵 거리며 살았던 박중양이 무슨 고통을 느꼈다는 건가. 하기야 일본인이 되고자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했던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을 수는 있겠다. 그 뿐인가. 박중양은 “이완용도 매국노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누구라도 이완용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그 이상 선처할 도리가 없다”고 변호해준 것이다. 이완용을 부정하면 곧 그 자신도 부정하는 셈이니 그렇게 강변했을 것이다. 그는 ‘양아버지’ 이토 히로부미를 두고는 “일본뿐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책에도 기록을 남길 세계적인 위인”이라 치켜세웠다.

박중양은 또 “이완용도 매국노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누구든 이완용에게 돌을 던져보라고 조롱한 것이다. 박중양은 이어 “이토는 세계적인 위인”이라고 치켜세우고 “나도 이토공을 표본으로 삼겠다”고 떳떳하게 밝혔다. 이기환 제공
죽어도 일본인

박중양은 반드시 법에 의해 처단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박중양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바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박중양은 1957년 친일 발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책자를 보낸 일로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이미 84살이 된 노인의 치매 증세로 여겨 정신감정을 의뢰했다.(경향신문 1957년 10월23일) 그러나 고령으로 갑자기 다가온 치매 증세가 아니었다.

박중양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었다가 바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기환 제공

대구시보는 1949년 1월23일 박중양의 일기를 소개하면서 ‘박중양=정신착란증 환자’라 규정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새삼 박중양의 발언을 곱씹어보면 소름이 돋는다.

지금 친일파를 옹호하는 자들의 논리와 어쩌면 그렇게 같을까. 그러나 박중양 같은 ‘영향력있는 자’의 친일과 일반 백성의 평범한 삶은 같을 수 없다. 무엇보다 박정양 같은 자가 일본인 앞에서 꼬리치며 떵떵거릴 때 수많은 투사가 한국의 톡립을 위해 싸웠다.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86)은 악인이 떵떵거리며 사는 세태를 두고 “하늘의 도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사기> ‘백이열전’)라고 한탄했다. ‘1912년생 박원근 선생’이 그랬을 것이다.

(이 기사를 위해 이형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조홍민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이형식,‘친일관료 박중양과 조선통치’, <일본공간> 26권26호,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2019
이형식, ‘식민지 조선의 통치자와 협력자들-고등관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관료-통치기구의 변천과 고등관 인사>, 동북아역사재단, 2024
윤주환, ‘3·1운동기 자제단의 등장과 활동’, 한양대석사논문, 2017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소개 박중양의 술회’, <민족문제연구> 9권0호, 1996
출처: https://leekihwan.tistory.com/entry/이기환의-사래자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티스토리]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2026-10-02> 주간경향

☞기사원문: “아아 일제가 그립다!”…‘친일파’ 박중양의 천인공노 ‘4대 죄상’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