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른] 경찰에 쫓기던 독립운동가에서 경찰영웅으로, 안맥결 총경

2021년에 경찰청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시민을 구하다가 40세 나이로 아파트 9층에서 추락한 고 정연호(1977~2017) 경위와 더불어, 제3대 서울여자경찰서장을 역임한 안맥결 총경(1901~1976)을 ‘2021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다.
서울경찰청이 그해 6월 17일 발표한 ‘호국보훈의 달, 영원히 기억될 경찰영웅’이라는 글은 경찰청이 안맥결을 경찰영웅으로 선정한 이유를 알려준다. 이 글은 그가 “사회적 약자 보호”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세 자녀를 둔 45세의 워킹맘인 안맥결이 경찰 간부로 기용된 1946년 이후는 한국 경찰의 흑역사가 전개된 시기다. 이 시기의 경찰은 항일투사나 진보적 인물을 탄압하거나, 아니면 극우단체나 정치깡패들과 합세해 정권 수호에 앞장섰다. 그런 시절에 그는 여성·전쟁고아·아동·노인을 묵묵히 보호했다. 이는 그가 경찰영웅으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다.
안맥결은 서른세 살 때인 1934년에 동아일보사 선천지국 기자인 동갑내기 독립운동가 김봉성과 결혼했다. 김봉성은 해방 4개월 뒤인 1945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안맥결이 늦깎이 나이로 경찰이 된 것은 1946년이다. 그 나이에 경찰이 된 데는 생계 상의 사유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경찰의 부패상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친일 경찰들이 계속해서 조직의 주축을 이룬 데다가 경찰이 정권 및 극우와 결탁해 대중을 탄압할 때였기 때문에, 경찰의 부정부패를 견제할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기 힘들었다.
자녀 셋을 홀로 키워야 했던 안맥결은 그처럼 부정부패가 심각한 속에서도 약자 보호에 주력했을 뿐 아니라 금전적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뇌물이 들어오면 돌려보냈다. 뇌물은 ‘내 물건’이 아니라 ‘네 물건’이니 도로 가져가라는 식이었다.
그는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조했다. 위의 서울경찰청 글은 “청렴하고 성실한 삶으로 후배 경찰의 표상이 되었던 안맥결 총장의 웅혼한 삶”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같은 청렴결백 역시 그가 경찰영웅으로 선정된 이유다.
도덕성과 역량 겸비한 경찰

안맥결은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깨끗함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약자 보호에도 힘썼다. 가족을 위해 두 눈 질끈 감고 자신도 더럽히고 세상도 희생시키는 경찰이 아니라, 자신도 지키고 가족도 부양하고 세상도 살리는 도덕성과 역량을 겸비한 경찰이었다.
그처럼 골고루 구비한 경찰관을 보게 되면, ‘경찰 일이 체질에 맞나 보다’라는 느낌을 갖기 쉽다. 그런데 경찰 입문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찰에 쫓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찰을 피해 다니며, 혹은 경찰을 의식하며 일생을 살았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24권 안맥결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19년 10월 1일 숭의여학교 학생 한선부 등과 함께 일제의 시정기념일을 반대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0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1919년 3월 1일이나 그로부터 2개월 이내에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된 게 아니었다. 3·1운동의 열기가 상당히 가라앉은 그해 10월 1일에 그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조선총독부가 출범하고 일본군의 한국 주둔이 법적으로 공식화된 것은 그해 10월 1일이다. 일제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이날에 맞춰 10대 학생인 안맥결 등이 시정(始政) 9주년에 대항해 대한독립 만세와 더불어 “일본 나가라”(1919년 당시의 주요 구호)를 외쳤다. 일제가 볼 때는 3~4월에 시위를 벌인 사람들보다 10월에 벌인 사람들이 훨씬 더 ‘독종’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석방 뒤에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등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안맥결은 36세 때인 1937년의 유명한 공안사건인 수양동우회(흥사단 자매단체) 사건에 연루돼 서울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때는 결혼 3년 뒤였다. 만삭의 몸이 아니었다면 구금 40여 일 만에 석방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열여덟 살에 옥살이를 한 인물이 30대 중반 때도 독립운동 때문에 만삭의 몸으로 투옥됐다.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항상 순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생을 살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함께 체포된 남편 김봉성은 3·1운동 때문에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전과자’였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또다시 선고받았다가 상급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자기뿐 아니라 남편도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므로, 경찰 입문 이전만 해도 경찰에 대한 안맥결의 인식은 좋을 리 없었다.
‘신성한 파수꾼이 되자’

안맥결과 가까운 사람 중에서 일제 경찰에 많이 쫓긴 또 다른 인물은 작은아버지 안창호다. 안맥결과 안창호는 일반적 의미의 조카-숙부 관계가 아니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박광종 선임연구원이 2019년 5월 24일 자 연구소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안맥결의 인생 노선을 결정한 것은 안창호의 가르침이다. 안맥결은 스승인 안창호를 “아버님”으로 불렀다.
본인과 남편 외에 ‘아버님’도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고 시달림을 겪었기 때문에, 안맥결이 경찰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듬해에 신속히 경찰 간부가 됐다. 생계 문제가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이기는 해도, 또 일제 지배가 종료된 이후이기는 해도, 경찰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가 경찰이 된 것은 주위 사람들의 의문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위의 서울경찰청 글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한번은 여동생이 안 총경에게 경찰이 된 이유를 묻자, ‘옛날에는 일본의 경찰이라 우리 애국자의 가족을 못살게 억압했으나, 지금은 해방된 우리나라의 파수꾼이니 신성한 직무가 아닌가’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친일 경찰이 해방 뒤에도 경찰의 실권을 쥐었다는 사실을 안맥결이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지만 그는 해방을 계기로 경찰이 나라의 파수꾼으로 거듭날 것이므로 앞으로는 경찰의 직무가 신성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인식이 그를 경찰의 길로 이끌었다.
생계 문제 때문에 경찰에 들어간 측면도 있어 보이지만, 나라의 파수꾼이 되겠다는 신념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만한 근거가 있다. 부패 경찰이 공공연히 용인되던 시절에 그는 청렴결백한 길을 걷고 약자 보호에 주력했다. 이는 ‘생계가 급해서 경찰이 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신성한 파수꾼이 되자’는 생각이 더 강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안맥결의 특이한 이름도 그에게 그런 삶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요소였다. 위 박광종 연구원의 글은 “맥결(麥結)이란 이름은 춘궁기에 결실을 맺는 보리에 비유한 것으로 숙부인 안창호가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춘궁기에 사람들을 살리는 보리처럼 되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어줬다. 경찰청이 경찰영웅으로 선정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안맥결은 그 이름에 부끄러움 없는 경찰이었다.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평양 숭의여학교와 도쿄 나카무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난징 동명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한 다음에 국내에서 교사 생활을 한 안맥결은 경찰 입문 후에 서울여자경찰서장, 치안국 보안과 여경계장,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근무했던 서울여자경찰서는 1957년에 청량리경찰서로 변모하고 2006년에 동대문경찰서로 바뀌었다.
경찰을 그만둔 것은 1961년 7월 1일이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이 러브콜을 했지만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정권에 협력할 수 없다’라며 사표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실패한 쿠데타 세력과 거리를 두는 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한 쿠데타 세력과도 거리를 둘 수 있는 용감한 경찰이었다. 1976년 1월 14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성 기자
<2026-09-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쿠데타 정권의 러브콜 거부하고 사표 낸 경찰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