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학암 이관술 선생의 회상기
기미년 3‧1운동이 일제의 말발굽 아래 덧없이 유린되고 일부 상층 계급이 타협적인 노선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뒤 조선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인민의 반제국주의투쟁의 형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 공산주의운동이요, 그것을 지도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이리하여 1925년 4월 17일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그 뒤 당과 그 운동을 습격한 일제의 무수한 박해와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 유일한 반일본적 혁명운동으로 공산주의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그 운동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끼친 공헌은 절대한 바가 있다.
이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붕괴 전 최후의 수년간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지하에서 활동한 조선공산당 이관술 씨의 회상기를 소개하는 바이다 — 현대일보 기자
① 반제투쟁의 회상

내가 반일혁명투쟁에 첫걸음을 들여놓기는 광주학생사건이 발발하여 전국이 들끓던 1929년경이다. 그전 해 나는 일본 동경고사(東京高師.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학교에 와있었는데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 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일본을 말함]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의식의 강화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그때 나의 생각은 우리민족을 위해서 도움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輕重大小)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당시 도쿄에서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이러한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견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은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귀국해서 교사 노릇을 하면서도 나의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서 경향(京鄕)이 물끓 듯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 그때 학교 내에서 또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주의자란 결국 이러한 층이 자기 위장을 하기 위한 정치사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투쟁에 있어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방향은 그때 전국 학생운동이 걸어가고 있던 공통한 길이었고 나는 우선 내가 가르치던 동덕여학교 학생들을 지도하여 1931년에는 학생의 자기 교내에 경찰 침입 반대, 교육자의 무성의 등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동맹휴학을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들어갔다. 이것이 내가 반일적인 실천운동으로 들어간 제1보요, 또 민족해방의 실제에 있어 공산주의만이 유 일한 지침이라는 것을 자각한 때였다.
이때에 동덕여학교에는 연전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제도에 반항해 자살해버린 신명균(申明均)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알았던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휴투쟁에 있어 신선생은 사상의 차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협동자였고 열렬한 반일투쟁의 지도자이었다.(『현대일보』 1946.4.17)
② 이재유 씨와의 연락, 반일지하투쟁의 회상

동대문서에 잡혀 이순근(李舜根) 김도엽(金度燁) 외 몇 사람의 일본 청년과 내 누이동생 이순금(李順今)—이 뒤부터 내 동생은 나와 내 동지들과 같이 옥중과 지하의 온갖 반일혁명투쟁의 고난을 같이하였다—과 함께 송국되어 서대문감옥에 2년을 있다가 보석으로 나온 직후의 일이다.
1934년 4월에 감옥을 나오니 때마침 이재유사건이 벌어져 경향에 검거선풍이 크게 불고 이재유 동무 역시 피검되었는데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운동선상으로 돌아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간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사건으로 일망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으로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심리적 타격을 가슴에 안고 일단 나는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갔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내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여름이 지나자 이내 8월 하순께 다시 상경하여 갖은 고심 끝에 드디어 9월 중순경 고대하던 이재유 동무와의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 연락은 그때 출옥해서 서울에 있던 내 누이 이순금의 헌신적 노력에 의하여 달성된 것인데 장소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櫻丘) 약수터였다. 역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는데 우리는 인사할 여유도 없이 곧장 일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이재유 동무는 탈주 후 벌써 약간의 학교에 연락을 부쳐 재출발의 단서를 가지고 있어 내게 그중 몇 학교의 지도를 맡으라고 했으나 나는 그때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동안에 실제 투쟁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테리’로서의 약점을 통감하고 있었고 또 그러기 때문에 이로부터는 명심코 전선의 한 병졸로서 종군하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재유 동무는 그러한 사고방법이 역시 일종의 ‘인테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나에게 좌우간 적당한 부서를 맡을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이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 동무의 첫인상은 논리가 명철한 것, 매사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 그리고 대단히 사무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그해 12월에 이재유 동무의 권고에 의하여 공판을 받게 되어 2년 징역에 4년 집행유예를 받고 계속해서 각 학교운동을 지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있던 중 그다음 해 즉 1935년 1월 용산서에 한 동지가 잡히자 또다시 검거선풍은 전 경성으로 엄습하여 이재유 동무는 삽을 메고 나는 괭이를 지고 농부로 가장하여 경계 삼엄한 경성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경기도 경계를 넘어 강원도 수성 홍천 춘천 등의 산속을 배회하기 약 2개월 신문 한 장 못 보아서 경성 소식이 궁금하였다.
이 동안에 나는 이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 구실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그리하여 다시 상경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1935년 5월에 경성으로 들어와 창동 근처 공덕리라는 마을에 근거지를 정했다.
두 사람은 형제라 칭하여 마을사람의 눈을 속이고 밭을 약 4천평 얻어서 채마농사를 열심히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이재유 동무는 경성에 있는 변우룡(邊雨龍) 이종국(李鍾國) 동지와 연락하는데 성공하고 나는 순전히 토막(土幕)을 지키며 『적기(赤旗)』라는 작은 잡지를 간행하면서 1년 농사를 마쳐 운동이 어느 정도 재건 도상에 오를 때 통한하게도 이재유 동무가 창동 부근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는 다시 그 길로 산속으로 난 길을 잡아들어 단신 강원도로 들어갔고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모든 반제운동이 괴멸된 뒤 최대한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던 이재유 동무는 그 길로 옥중에서 영면하고 말았다.(『현대일보』 1946.4.18)
③ 박헌영 씨와 나, 반일투쟁의 회상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박헌영(朴憲永) 동무와 만난 것은 1939년 12월 12일인데 1936년 12월에 창동을 탈출하여 강원도 경상도 등지를 전전한 지 실로 3년 만에 일이었다. 창동을 뛰어나와 이내 잡화 궤짝을 둘러메고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깎고 홍천 인제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1937년 7월경에 상경하여 영등포에서 공장노동자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이때 생각나는 것은 기술상 직접 공장에 손대기가 어려워 이순금의 출옥을 기다리고 있던 중 박진홍(朴鎭洪) 동무의 알선으로 여의도비행장 부근에서 이순금을 만났었다. 그런데 때마침 한강 상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 그만 건너갈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행장 쪽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다가 순사에게 남매가 잡히고 말았는데 당시는 중일사변이 한창 진행중이라 순사들이 나를 중국 스파이로 의심하게 되어 파출소 안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순사들의 대화를 들으니 기가 막힐 형편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저것들이 일본말도 모르는게 필시 중국 스파이 같으니 날이 밝거든 영등포 고등계로 넘기자는 것이다. 가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영등포서에는 그때 내 얼굴을 잘 아는 일본인 형사가 있으니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잡히는 판이라 할 수 없이 순금만 남겨두고 나는 도망하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파출소에서 도망해 나오기는 나왔으나 물 건너 갈 것이 큰 일이었다. 다행히 그전에 수영을 좀 배워두었으므로 옷을 벗어 둘둘 묶어서 머리에 이고 물을 건넜다. 간신히 건너와서 보니 머리에 이었던 옷은 몽땅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순 나체가 되었다.
그러나 방을 얻어가지고 있는 주인집에 발가벗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밤중에 벌거숭이가 노상에 헤맬 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 딱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비가 몹시 오는 밤중이라 주인집 대문간에 가만히 들어서서 보니 인기척이 없기로 얼른 내 방으로 뛰어들어가 옷을 입고 다시 뛰어나와 날 밝기를 기다려 경성을 떠나 대전으로 갔다. 그때 경계가 철통같고 해서 여인숙에선 물론 잘 수 없고 다리 밑 땅바닥 걸인들이 자는 틈에 끼어 자면서 내려가는데 걸인 자는 틈에까지 경찰의 탐사가 미쳐 혼자서 떨어져 자면서 대전까지 갔다.
여기서 한여름을 지내자 또 순금이가 경성서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와서 다시 대구로 올라와 조그만 반찬가게를 경영하면서 반전 반제적인 소그룹운동에 착수하고 있었다. 거기서 약 1년을 지내고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홍화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19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金三龍)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 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김삼룡 동무의 부인인 이옥숙(李玉淑)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門町) 태창직물공장에 ‘콤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 6개의 공장세포와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 그해 12월 영등포 초입 육교 위에서 암호 표식에 의하여 박헌영 동무를 만났다.
첫눈에 그는 진실에 넘치고 접하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고 또 관후(寬厚)한 포용력을 가진 것을 직각(直覺)케 하였다. 박동무와 이순금이 있던 인천으로 내려가서 전반적 운동 전개에 관해 상의한 다음 나는 다시 혼자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오자마자 함북에서 사람이 와서 박동무를 함북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 형편이 박동무가 떠나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함북을 가게 되어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張順明) 김형관(金亨寬)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조직에 착수하고 한편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 조직 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을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해 연말에 다시 상경하니 예의 서대문서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 수습을 위하여 원동 김태준(金台俊) 동무와 처음 만났고 그 뒤에 다시 함북으로 떠나는 데 관한 몇 가지를 부탁하러 김태준 동무 집에 다시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잡힌 뒤 경찰의 추궁 중심은 박헌영 동무를 내어놓으라는 것이었으나 박동무는 다행히 무사하였고 그 뒤에 옥중생활—소위 대동아전쟁 중의 참혹한 감옥상태—을 겪은 뒤 집행정지로 나왔다가 다시 도망한 뒤 솥땜장이, 심부름꾼이 되어 전라도 산중으로 촌사람의 솥을 때워주며 다니다가 8.15를 만났는데 그동안의 이야기도 많으나 다시 다음 기회를 미루고 이만 두기로 한다.(『현대일보』 194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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