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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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자료관 7]

의정부 소재 흥선대원군의 직곡산장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생전에 거처로 삼았던 주요 공간 몇 군데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우선은 운현궁(雲峴宮)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여기에 더하여 창의문 밖 석파산장(石坡山莊)과 마포 아소당(麻浦 我笑堂), 시흥산장(始興山莊, 시흥동 별장)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양주(楊州) 쪽 의정부에도 직곡산장(直谷山莊, 직동산장)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곳은 1873년에 권좌에서 밀려난 대원군이 첫 번째 은거지로 선택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직곡산장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라치면 이렇다 할 자료를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가 옛 신문 파일을 뒤지던 와중에 『경성일보』 1935년 11월 18일자에서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하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카토 칸카쿠(加藤灌覺)의 기고문인 「감악산(紺岳山)」이라는 글[고노 특파원(河野 特派員) 촬영]에는 매우 드물게 보는 직곡산장의 모습에 곁들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직동(直洞, 곧은골)에 유거(幽居)했던 대원군(大院君)]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즉위 10년, 우리 명치 6년(1873년)에 민비 전하(閔妃殿下)와의 정쟁(政爭)에서 깨졌던 대원군(大院君)은, 원로(元老)라고 하는 허명(虛名)을 지니고 마침내 경성(京城)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퇴은(退隱)의 땅이 이 직동(直洞)의 한거(閑居)였다.

직동은 의정부(議政府)의 정거장(停車場)에서 거리가 겨우 10수 정(十數町, 1킬로미터 남짓), 도봉산(道峰山)의 율림(栗林, 밤숲) 속에 있으며, 도봉산 북측의 계류(溪流)가 서로 모여들어 그 가운데를 흐르는 청렬(淸冽)한 용천각소(涌泉各所)에 옥(玉)을 부풀어 올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조망이 어느 것이든 그 빼어남을 즐겼던 승지(勝地)인데, 지금도 여전히 그 구시(舊時)의 모습을 남아 있어서 회고(懷古)의 염(念)을 금(禁)할 수 없는 지점(地點)이다.

이곳 별저(別邸)는 목하(目下) 경성(京城)의 문덕상(文德相)의 소유(所有)가 되어 있는데, 바라건대 이왕가(李王家) 쪽이거나 운현궁(雲峴宮) 쪽이거나에 그 보호(保護)를 인수(引受)하여 영구(永久)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고적(古蹟)으로서 특별한 시설(施設)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도 된다면 매우 만족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곳은 한때 밤나무숲으로도 유명했던 것인지 이곳에서 습률(拾栗, 밤줍기) 행사가 곧잘벌어지곤 했던 모양이었다. 가령 『조선일보』 1930년 10월 11일자에 수록된 「본사 학예부 주최 여자밤줍기놀이, 의정부 고든골 밤동산에서, 양주에서 회원모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본사 학예부 주최인 제4회 여자습률대회(女子拾栗大會)는 누차 보도한 바와 같이 오는 12일(일요일)에 의정부(議政府)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본보 양주지국(楊州支局)에서는 경성회원은 물론 해 지방 독자 제씨의 가정부인을 위하여 청량한 가을날에 흥미있는 소창과 뜻있는 위안을 만일이라도 도웁고자 이에 적절한 장소를 택하게 되었다. 1년 6천여 석의 산출을 보이는 조선에 있어 밤(栗)의 명산지인 양주인 만큼 의정부 교외(郊外)에 널려 있는 밤동산 중에 특히 고든골[直洞, 곧은골] 율원(栗園)을 개방하게 되었는바 그곳은 한말 영걸(韓末 英傑) 대원왕(大院王)께서 민권(閔權)을 저주하며 시기의 불우함을 탄식하고 잠재하시던 별장[현 문태영 소유(現 文泰榮 所有)]이 있고 단풍이 곱게 붉은 산기슭을 휘돌아 맑게 흐르는 연내[蓮川]가 꿰뚫은 양편의 밤동산은 평탄하고 광활하니만치 연년이 가을이 되면 수천 명의 습률객이 답지하는 곳이라는 바 당지 일반가정에서는 회비 30전을 첨부하여 본보 지국으로 12일 오전 아홉시까지 신청하는 동시에 다수 참가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드물게도 이곳을 직접 다녀간 탐방기가 남아 있는 것도 뒤늦게 확인하였는데,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6~1934)의 기고문인 「의정부(議政府)의 반일(半日), 양주 직곡(楊州 直谷)에 있던 옛날 대원군(大院君)의 은서(隱棲)를 찾아서」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경성일보』 1926년 10월 17일자에서 21일자에 걸쳐 4회 연재되었고, 그 이후 호소이가 『여왕민비(女王閔妃)』(1931)를 펴낼 때 그 말미에 ‘여록(餘錄)’으로 「의정부의 반일(議政府の半日)」을 재수록한 자료가 남아 있다.

처음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가 이곳 의정부 직곡별장을 탐방한 때는 ‘1926년 10월 14일’로 적고 있으나, 그 당시의 안내인인 양주군청 ‘정 군속(鄭郡屬, 정재덕)’의 재직기간(그의 이름은 1921년판 및 1922년판 직원록에만 등장)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곳을 다녀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튼 호소이의 직곡별장 탐방기는 비록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사료가치는 있다고 판단하여 그 내용을 아래에 소개하여 두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원문 전체를 다 옮기는 것은 분량이 많은 탓에 직곡별장이 직접 묘사된 부분만을 간추려 싣도록 한다.

참고로 덧붙이면, 탐방기에 등장하는 문태영(文泰榮, 1863~1933)이라는 인물은 경성부 관철동(貫鐵洞) 28번지에 주소를 둔 대지주이며, 『남평문씨대동보』에는 그의 이름이 문영호(文榮鎬)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직동교 앞에는 1928년 12월에 건립된 ‘문태영 공덕비’가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양주군 시둔면 가릉리)』(1913)에는 흥선대원군 직곡별서 인근 지역의 토지 소유주로 ‘문희상(文熙相, 1888~1945)’이라는 이름이 무수히 등장하는데, 그는 곧 문태영의 큰아들이며 선천군수(1925년 6월 5일 임명, 이튿날 의원면직)를 지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카토 칸카쿠의 기고문 「감악산(紺岳山)」에 언급된 의정부 직동별저의 소유주 ‘문덕상(文德相, 1889~1976)’ 역시 문태영의 작은 아들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아래의 인용자료에 직곡별장의 소재지에 걸린 문패에 ‘시둔면 가릉리 232번지 이영수(李永洙)’라고 되어 있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토지조사부』를 확인해보면 ‘가릉리 232번지(1,007평, 문희상 소유)’는 지목(地目)이 ‘전(田)’으로 표시되어 있는 걸로 봐서 이곳이 집터일 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의정부 직곡별장의 정확한 위치는 지목이 ‘대(垈)’로 표기된 ‘가릉리 233번지(2,262평, 문희상 소유)’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실제로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항공사진(1954년 촬영)을 통해서도 해당 지역에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음이 또렷이 확인되고 있다.

의정부(議政府)의 반일(半日), 양주 직곡(楊州 直谷)에 있던 옛날 대원군(大院君)의 은서(隱棲)를찾아서

상전(桑畑, 뽕밭)이 좌우로 이어지고 등외도로(等外道路)치고는 한참 넓은 한 줄기 도로를 따라 직동(直洞)으로 ──.
나는 지금, 대원군(大院君)이 제1차 섭정(第一次 攝政)에 실락(失落)하여 운현궁(雲峴宮)으로부터 양주 직곡(直谷, 곧은골)의 별장(別莊)으로 은퇴(隱退)했던 그 별장터를 실검(實檢)하려 하고 있다. 안내(案內)하는 정 군속(鄭郡屬)은 무언(無言)에 총총걸음으로 앞장섰다.
…… 대원군(大院君)은 그 도량(度量)과 식견(識見)이 협소(狹小)함이 이 분지(盆地)와 같고, 세계(世界)의 대세(大勢)를 반도(半島)의 병풍(屛風)에 자꾸만 누구를 꺼리지 않고 드러누워 가면서 교만(驕慢)의 끝장을 다하였으며, 상수(相手, 경쟁자)에게는 검(劒)처럼 예리한 보복(報復)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퇴유곡(進退維谷)이 되어 이 직곡(直谷)에서 숨을 죽이고 정적복살(政敵覆殺)의 밀책(密策)을 궁리하고 있었다. (중략)
“이제 곧입니다.”
정 군속이 거듭 말했다.
홍안(紅顔)에서 초로(初老)로, 또다시 한 걸음 박찬다. 마음을 고쳐잡는다.
다리를 건너자 조금 평활(平闊), 오른쪽에 삼각형(三角形)으로 흐릿하게 경계 지어진 약간의 맥포(麥圃, 보리밭)가 있다. 맥포를 한 바퀴 두르는 삼각형의 한 변(邊)에 십수(十數)채의 고옥(藁屋, 초가집)이 천인(天人)의 위혁(威嚇, 위협)에 부종(俛從, 굽혀 따르는 것)하며 지중(地中)에 조아리는 듯한 자세 그대로 묵재(黙在)한다. 옥근(屋根, 지붕)에는 토가라시(唐辛, 고추)의 붉음도, 바가지(パカヂ)의 둥긂도, 카포챠(カポチャ, 호박)의 껑충함도 아니 보인다.
걸어서 반정(半丁, 50미터 남짓)이 되어, 길을 따라 삼각형의 한 변이 끝나고 우절(右折)하는 한 길로가는 근처에 토병(土塀, 흙담)의 일곽(一廓).
“저기입니다, 대원군의 별장(別莊)은.”
“어허, 저긴가요?”
공덕리(孔德里)의 별장(別莊) 흔적을 보았던 나의 눈에는, 문자(文字) 그대로 볼품없는 것이었다. 금시(今時), 조금 빈틈없는 양반(兩班)이라면 부끄럽게 여기며 사는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상세한 서류(書類)를 되살펴보며, 옛일을 알고 있는 × 상(さん)의 거처에 들리겠습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정 군속은, 다른 샛길을 부리나케 전진(前進)하여 간다.
한참 이전에 잘라놓은 듯이 풍상(風霜)에 거무스름해진 신목(薪木, 땔감)을 산처럼 쌓아놓은 곁에서, 경성(京城) 이래로 참았던 소변(小便, 오줌)을 실경(失敬, 실례)했다. 추선(秋蟬, 가을매미)이 힘없는 합주(合奏), 이름은 모르는 명금(鳴禽)의 소리.
── 조선(朝鮮)에서는 권력 즉 생활(權力卽生活), 권력을 떠나면 사멸(死滅)이었다.
혁작태양(赫灼太陽)과 같은 권세(權勢)를 종횡(縱橫)으로 흔들었던 대원군조차도 일단 권력에서 이락(離落)하자 이런 유폐(幽閉)와 동양(同樣)의 은서(隱棲)에 칩거(蟄居)할 수밖에 없이 되었던 것이다.
──
그런 것을 상상하고 있었더니,
“자아, 이쪽으로.”
모습이 사라졌던 반대쪽의 한 길에, 정 군속이 서 있었다.
안내받아 가니, 문(門)은 열려 있었다. 표찰(標札)에는 ‘시둔면 가릉리 232번지(柴芚面 佳陵里 二三二番地) 이영수(李永洙)’라고 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자, 정면(正面)에 내실(內室)과 첩지(貼紙)를 한 소문(小門)이 있고, 오른쪽도 왼쪽도 하인방(下人房)이다. 왼쪽으로 내문(內門)을 들어선다. 약(約) 3백 평(坪)가량의 일곽(一廓), 방(房)은 대청(大廳)을 더하여 겨우 4칸(間), 1칸이 3첩(疊, 타타미) 정도의 협고(狹苦, 비좁은)한 방이 대청의 오른쪽에 2칸, 4첩반(四疊半)가량의 방이 대청의 왼쪽에 약간 좀 높이 1칸, 단지 그것뿐, 대원군은 5척(尺)에 못 미치는 소남(小男)이라고 듣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간소(簡素)한 별장(別莊)이기는 하다.
별장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광대(廣大)한 건물(建物)과 정원(庭園)을 연상한다. 일찍이 카마쿠라(鎌倉)에 ×××××씨(氏)의 별장을 방문했었다. 그 무렵 도쿄(東京)의 교외(郊外)라면 20원(圓, 엔) 쯤으로 빌릴 것 같은, 현관(玄關)을 더해 4칸의 비좁은 저(邸, 저택), 연선(緣先, 툇마루 앞)에 묘액(猫額, 고양이 이마) 크기의 뜰이 있는 객간(客間, 객실)의 바로 아래가 애(崖, 절벽), 촐랑촐랑거리는 파도소리가 손님을 응대하였다. 사상(史上)에 양주 직곡(楊州 直谷)의 별서(別墅)라고 쓰면, 허풍이 이만저만 아닌 것이, “뭐야, 이게.”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주련(柱聯)에는 「龍門意氣高」라든가 「琴書萃一堂」이라든가 「淸襟蘊秀氣」등, 여느 곳처럼 써져 있다. 물론 당주(當主, 지금의 주인)가 새로이 붙인 것임에 틀림없다.
남쪽을 마주하며, 따끈따끈하게 포근한 남연(南緣, 남쪽 툇마루)에 앉아서, 볕 쬐기를 하기에는 절호(絶好)이다.
툇마루에 허리를 가볍게 걸쳐 않으면, 토병(土塀) 너머로 도봉산의 일각(一角), 검(劒) 같은 기초(奇峭)가 흘립(屹立)하여 있다.
“어허, 대원군도 매일 이것을 보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바라다본다. 풍수(楓樹, 단풍나무)가 핏빛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붉은 것은 활동(活動)이고, 열성(熱誠)이다. 혁명후(革命後)의 현재 러시아(ロシア)는 빨갛다.
대원군은 이 험준한 산골(山骨)의 능릉(稜稜)함을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바라보며 어떤 활동, 어떤 열성, 대관절 또 어떤 혁명과 어떤 핏빛을 꿈꾸었을까?
“당저(當邸, 이 집)의 어주인(御主人)이올시다.”
정 군속에게서 주의(注意)를 받고, 보니까 70 언저리의 온아(溫雅)한 양반(兩班), 은근(慇懃)하게 일읍(一揖, 가벼운 인사)을 받게 되었다. 나도 외투(外套)를 벗어 명자(名刺, 명함)를 꺼내며, 당돌(唐突)하게 한거(閑居)를 놀라게 한 비례(非禮)를 사죄(謝罪)한다.
표찰에 있는 이성(李姓)과는 다르게 명자면(名刺面)에는 문태영(文泰榮)이라고 되어 있다. 정 군속의 설명으로 표찰의 이름은 옥상(奧さん, 부인)의 동생(즉, 처남)이란 것을 알았다.
2, 30평(坪)의 뜰은 공지(空地)다. 물치(物置, 광)의 횡목(橫木, 가로대)에는 서속(黍束, 수숫단)이 매달려 있고, 광 옆으로 곳간(庫間)이 열린 채로 있었다. 그것을 왼쪽으로 보며 뒤쪽으로 돌아간다.
예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8첩부(八疊敷, 타타미 8장 크기의 방) 정도의, 5평(坪)까지는 안 되는, 방형(方形)으로 돌을 칸막이로 삼아 물을 흘려놓은 못 같은 것이 있다. 멋도, 아무 것도 없다.
후지다나(藤棚, 등나무 시렁) 같은 것이 병세에 시달린 사람의 가늘어진 팔처럼 뼈만을 남기고 있다. 그것이 적막을 더하고 있다고 하면 말할 수 있을 뿐인 것, 아주 평범하고 하등(何等)의 타기(他奇, 별달리 기이한 것)가 없다.
소문(小門)으로 내실(內室)로 연결된다. 주인은 상당히 개명(開明)한 인물(人物)인 듯이, 내실을 보도록 하라고 말한다. 대단히 황송하여 사퇴(辭退)했는데, 정 군속이
“지금은 꽤나 옛날과 풍습이 변했습니다. 애써 주인이 권하는 것이므로, 괜찮겠지요.”
그래서 정 군속을 따라서 주뼛주뼛 문을 빠져나간다.
15, 6평(坪) 가량의 내방(內房)의 이정(裏庭, 뒤뜰), 계두화(鷄頭花, 맨드라미)의, 계절을 만들기라도 하는 듯이, 볏이 촉립(矗立)한 것이랑, 다알리아(ダリヤ)의 눈부시게 흐드러져 핀 것은, 우아(優雅)한 여인(女人)의 방으로서 어여쁜데, 바로 그 곁에, 조선특유(朝鮮特有)의 장대(長大)한 츠케모노가메(漬物瓮, 김장독)가 10본(本)가량도 나란히 정리되어 있고, 옥채(玉菜, 양배추)랑 총(葱, 파)이 장소가 비좁을 정도로 무성하며, 한구석에 측(厠, 뒷간)이 있는 것은 정취(情趣)에 있어서 아쉽다.
내방의 주련(柱聯)은 역시 고상하게 「雙枝玉樹新」, 「池靜魚編逸」, 「門欄柳色新」, 「院落梅花早」 등이 써져 있다.
별도의 소문(小門)을 나서자, 거기에 또 10평가량의 뒤뜰이 있다. 주인과 군속의 뒤를 따라가서 이번에는 내방의 전면으로 나왔다.
놀라웠던 것은, 내정(內庭)에 한가득 마츠카사(松かさ, 솔방울)가 쌓여있었고, 10명 남짓의 노유부녀(老幼婦女)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객래(客來, 손님이 온 것) 탓에 소리를 죽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소리가 없는 무성(無聲)의 내정에 이것뿐인 사람이 이것뿐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은 조금 의외(意外)였다. 보아하니, 노유(老幼) 10명가량의 비녀(婢女, 여종)는 제각기 적당하게 편평(扁平)한 돌을 앞에 두고 낫등(鎌の背な)으로 솔방울을 때려 부수며, 벗겨 떨어진 솔방울 속에서 소나무 씨앗이 빼내어져 간다. 이것은 카메야(龜屋)나 조선관(朝鮮館)으로 운반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고, 주인이 상용(常用)하는 영양자료(營養資料)인 것 같다.
“이 별장의 후방에 있는 소나무의 열매입니다. 보통의 소나무와는 다른 오엽(五葉)의 소나무이지요.”
정 군속이 설명해 가면서 솔 씨앗 2, 3개(個)를 빼내어 보여준다.
말할 것을 잊었는데, 후정의 토병(土塀) 너머로 울창한 송림(松林)이 보인다. 송림에 이웃하여 율림(栗林, 밤숲)도 은견(隱見, 보일락말락)했다.
들어보니, 이 집을 넣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인(主人)인 문씨(文氏)는 소년(少年)이던 무렵부터 지나(支那, 중국)와의 인삼무역(人蔘貿易)에 상당히 자산(資産)을 축적하고, 지금은 노후(老後)를 안온(安穩)하게 보내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토록 평화롭고 즐거운 전원생활(田園生活)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운 전원생활에 예고(豫告)도 없이 돌연(突然) 문을 두드린 불의(不意)의 틈입자(闖入者)인 낯선 모닝스가다(モーニング姿, 모닝코트)의 나를 노유부녀(老幼婦女)가 신기하게 빤히 보고, 설마 “왜놈(倭奴)”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만, 표정(表情)은 차갑다.
부인(夫人)은 방안에 있는 것 같고, 바삐 물러 나오기로 하며 미간(楣間)을 보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되어 있다. 선여인(善女人)이 거처할 곳, 주인이 선남자(善男子)라는 것을 분명히 함이도다.
한번 휙하고 저내(邸內)를 둘러보기를 끝내고, 다시 내문(內門)을 들어가 대원군(大院君)이 기와(起臥)했던 방안으로 이끌려 간다.
방안에는 윤용구 씨(尹用求氏)의 글씨랑, 석방초창(石邦樵倡)의 난(蘭), 동암(東庵)의 글씨를 비롯하여 뛰어난 서화(書畵)가 오후스마(戶襖, 장지문)에 온통 둘러쳐져 있다.
미혹(迷惑, 폐를 끼치는 것)을 끌어서는 안 되므로, 굳게 사양하며 구두를 신었던 때에 맥주(ビール)가 나왔다. 일부러 베푼 호의(好意)라는 정 군속의 간곡한 권유에, 다시 구두를 벗고 대청(大廳)에 앉는다. 반상(飯床)에는 비스켓(ビスケット), 마른오징어(乾するめ), 거기에 침채(沈菜, 김치)가 올려져 있다. 요령(要領) 어중간하게 적당히, 잔을 들어 주인의 아정(雅情)에 응하고, 깊은 호의에 감사하며 문을 나섰다.
예의 바른 주인은, 작별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하고 또 하고, 문밖의 좁은 길을 터벅터벅하며 배웅을 나온다. 끝내 구부러진 모퉁이까지 전송을 나온 것은 깊이 감동하였다. 이토록 예절(禮節) 있는 민족(民族)에게 저주(咀呪)와 반항(反抗)의 혈액(血液)을 부여한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앞서의 길을 되돌아와서 정 군속과 작별하고 역전(驛前)의 ××옥(屋)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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