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항쟁의 한복판에서 안식처 제공한 사찰… 두 스님의 간절한 호소

188

[1980사북, 늦은 메아리] 사북항쟁의 민중사적 뿌리를 찾아서

[기자말]
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현재 행정구역상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함백산 정암사와 적조암은 1980년 당시 사북읍에 소속된 공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적조암은 이 지역에 탄광이 생기기 100년 전에 이 땅에서 시작된 민중운동 동학의 뿌리와 맞닿아 있다.

사북과 고한을 품은 함백산 정암사 부근 적조암 터에는 “천도교 제2대 교조 해월신사 독공지(篤工址)”라고 적힌 비석이 놓여 있다. 가파른 함백산 오솔길의 끝자락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소박하게 앉아 있는 이 나지막한 비석처럼, 조선 민중운동의 뿌리인 동학이, 한때 사북읍에 속해 있던 정암사 터에서 그 철학적 기반과 실천적 조직을 강고하게 다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적조암이 동학과 관련된 터라는 임을 보여주는 팻말과 비석함백산 등산로 144번 지방도로변 적조암 입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천 미터를 더 올라가면 동학유허지 적조암 터가 나온다. 그 옆에는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독공지(天道敎第二世敎祖海月神師篤工址)”라고 적힌 나지막한 비석이 놓여 있다. ⓒ 황인욱

동학을 품은 정암사

1861년 경상도 경주의 한마을에 살던 최제우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최경상을 동학에 입교시켰다. 최경상은 이제 더 이상 천대받는 머슴이 아니라 ‘몸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어 스승이 열어준 새로운 길을 따라갔다. 1863년,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최제우는 최경상을 후계자로 공식화하기 위해 그해 음력 7월, 그를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면서 ‘해월당(海月堂)’이라는 도호를 내렸다. 바로 이 해월당이 1864년 제1대 교주 최제우가 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 후, 제2대 교주로서 동학을 이끌었던 최시형이다.

1871년 3월 문경에서 일어난 이필제의 난으로 수많은 동학 도인이 희생되었고 지도부는 관군의 혹독한 추적을 받았다. 해월과 많은 도인들은 강원도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최경상(최시형)은 이 와중에도 포교를 멈추지 않았다. 해월이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정선 남면에서 유인상이 찾아와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듬해 봄 최시형은 그가 살고 있던 남면 무은담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은담은 정암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해월은 이곳에서 49일 기도를 준비했다.

1872년 10월, 강수, 김해성, 유택진 세 명이 먼저 기도처를 물색하기 위해 함백산 만항재 부근 적조암(寂照庵)에 들렀다. 적조암은 정암사에 딸린 산속 암자로서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입적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곳에서 기거하던 노스님 철수좌(哲首座)에게 허락을 받은 후, 10월 15일 강수(강시원), 유인상(유시헌), 전성문, 김해성은 최시형과 함께 적조암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 강수는 자신들이 동학도임을 스님에게 고백하였다. 그날로 시작된 기도는 일주일이 일곱 번이 지나도록 이어져 동학의 스물한 자 주문이 한밝산(함백산) 자락에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至氣今至 願爲大降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이 지금 내 몸과 마음에 크게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내 안에 한울님 모셔 우주 조화에 마음을 정하니, 이를 영원히 잊지 않고 모든 일 깨닫게 하소서.

12월 초에 49일 기도를 마치는 날 해월은 궁을부(弓乙符)를 그렸다. 해월은 이 그림을 통해 우주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누구든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1872년 적조암의 그늘에서 신앙적 결사를 다진 동학 지도부는, 교단을 다시 양지로 이끌어낼 준비를 시작했다. 1875년, 해월은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니, 때를 따라 활발히 움직여야 한다”고 선언하며 스스로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쳤다. 이와 동시에 49일 기도에 참여하여 고난을 함께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은 강수와 유인상에게도 ‘때 시(時)’자 돌림의 새 이름을 내려 강시원, 유시헌으로 각각 개명하도록 함으로써 지도 체제를 공고히 했다.

당시 동학은 도주(최시형), 차도주(강시원), 그리고 도접주(유시헌) 3인 체제로 운영될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컸다. 이 덕분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선 농민군이 인근 지역과 연합해 강릉 관아를 점령할 정도로, 정선은 동학 교세가 매우 강한 지역이 되었다.

적조암 49일 기도는 동학과 천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일월산을 떠나 동학 조직을 재건하고 동학의 주요 의례와 지도 체제를 확립한 시기가 바로 적조암 기도 시기였다.

자장율사의 꿈이 닿은 정암사

해월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의 피어린 기도가 울렸던 적조암은 100년 후 인근 광산에서 일을 하는 광부들과 가족들이 찾는 일상의 공간이 되었다.

강원도 정암사는 흔히 조용한 산사로 기억되지만, 광산이 번성하던 시절 1980년대에는 한국 최대의 탄광촌에 둘러싸여 있던 사찰이었다. 정암사 주변에는 초기 탄광 개발이 시작되었던 만항 광구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있었으며, 사북의 박심리, 고토일, 만항, 두문동재 등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광산과 그 가족들이 마음의 안식처로 삼아 드나들었던 곳이다.

특히 붕락사고, 폭발사고, 매몰사고, 추락사고 등 위험한 환경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광부의 가족들은 정암사와 적조암을 수시로 찾아와 가족의 무사귀환과 희생자의 천도를 빌었다. 특히 자장율사의 전설이 얽혀 있는 수마노탑과 적조암은 정암사 못지 않게 광부 가족들이 자주 찾아 두 손을 모으던 소망과 해원의 공간이었다.

자장율사(慈藏, 590 ~ 658)는 ‘자비(慈)를 마음속에 감추고 있다(藏)’라는 뜻의 법명을 가진 7세기 실존 고승으로 정암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 편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 자장율사의 정암사 창건 설화가 실려있다.

꿈에 이상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亭)에서 만나자” 하므로 가 보니, 문수대성이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 칡넝쿨이 얽힌 곳)에서 만나자”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자장은 태백산에 들어가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갈반지”라 하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어 문수대성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구절 바로 뒤에 “이 석남원이 지금의 정암사이다”라는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5년( 636)에 중국 오대산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석상 앞에서 간절한 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선덕여왕 12년(643)에 부처님 사리 100과와 가사 1벌을 가져 와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에 나누어 안치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창건했다. 신라 조정에서 내린 대국통이라는 직위를 받아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야말로 실제로 신라에 계율을 정착시킴으로써 우리나라 불교가 하나의 교단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최초의 뿌리라는 평가도 있다.

<삼국유사> ‘자장정률(慈藏定律)’ 조에는,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거사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아상(我相)을 뉘우치며 숨을 거두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문수보살을 찾던 자장은 남쪽 고개에서 쓰러져 돌구멍(석혈)에 장사 지내졌다. 평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했지만, 결국 알아보지 못하고 입적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정암사 적조암은 바로 자장이 쓰러졌던 장소로 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말년을 보낸 정암사와 마지막 입적을 한 적조암은 민중사적으로보나 불교사적으로보나 유서 깊은 장소로서, 1980년 사북항쟁을 일으켰던 광부들과 가족들의 희망과 소망을 품어주었던 안식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연의 끈을 생각하게 만든다.

지장산 사택의 광부들과 지장보살의 서원

▲1980년 당시 가장 많은 광부들이 몰려 살았던 사북의 지장산사택(제공: 사북공공도서관) ⓒ 사북공공도서관

한편, 1980 사북항쟁의 주력부대이자 가장 많은 국가폭력 피해자가 발생한 지장산 사택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지옥의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고통받는 이가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그런 의미에서 땅속 깊은 곳에서 일했던 사북의 광부들과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놓였던 사북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지장(地藏)”의 위대한 서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북의 탄광 역사 속에서 지장보살은 목숨을 담보로 막장에 들어가야 했던 광부들과 그 가족들에게 최후의 구원자이자 최종의 위로였다. 가장 어둡고 비참한 지하 세계로 직접 찾아와 손을 내미는 지장보살의 이미지는 매일 지하 수백 미터 아래로 내려가 목숨을 내놓고 일을 해야 했던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1980년 4월 사북 사건 이후, 심각한 공동체 파괴를 겪었던 지역사회가 폭력의 상처와 이웃 간의 불신을 치유하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화려한 극락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중생의 모든 고통과 죄업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 남아 있는 지장보살의 연민과 자비다.

해발 800미터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입구에는 “아빠, 오늘도 안전!”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어 이들의 실생활을 한 마디로 대변하고 있다. (사북청년회의소 편 <탄광촌의 삶과 애환 중에서>)

한때 검은 광부들의 보금자리였던 지장산 사택은 사라졌지만, 강원랜드 메인카지노는 아직도 푸르른 ‘지장산’의 품 안에 있다. 이제 더 이상 검은 물줄기는 아니지만, 고한을 거쳐 사북을 관통하는 시내의 이름도 여전히 ‘지장천’이다.

공동체의 아픔에 더 주목하는 정암사의 스님들

▲정암사의 모습. ⓒ 연합뉴스

불기 2570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정암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국가에 전하려고 한다.

정암사가 자리한 이곳 정선은 1980년 사북항쟁이라는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품고 있는 땅입니다. 당시 생존의 벼랑 끝에서 인간다운 삶을 외쳤던 광부들의 절규는 정당한 권리의 외침이었습니다. 46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고통 속에 머물러 있는 피해자들이 존재합니다. 이제 국가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과도한 공권력 행사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이고 진심 어린 사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피해자들의 명예를 조속히 회복시키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를 일주일 앞두고 사북사건 피해자들을 초청하겠다는 뜻을 전한 정암사 천웅 주지스님은, “진실의 등불을 밝혀 억울함을 씻어내는 것이야말로 ‘번뇌가 사라진 평화로운 세계’를 구현하는 첫걸음”이라면서 “사북사건을 외면하지 않고 부처의 눈으로 응시하겠다”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며 ‘삼계가 고통이니 내 마땅히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편안케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박제된 경전 속의 문구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약속을 받들어,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과제들을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런 한편으로 정암사는 공동체 내부를 향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비극적인 역사는 공동체 내부에도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웃이 이웃에게, 동료가 동료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며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비극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오해와 반목의 세월은 사북의 마음을 차갑게 얼어붙게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의 아픔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쇠사슬을 끊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암사 적멸궁 앞에 서 있는 천웅스님과 두엄스님 ⓒ 황인욱

정암사 두엄 총무스님은 “사북사건은 사건으로서도 잊혔지만 공동체 안에서도 잊힌 이야기”라고 말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

“이렇게까지 스스로에게서 잊혀진 사건이 있었을까요? 저는 못 들어봤습니다. 제주든 광주든 역사적 재평가를 받기까지 물밑에서는 자기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확산하고 그러면서 해원과 복권의 요구들이 공동체로부터 생겨났던 거잖아요. 그런데 사북의 경우에는 공동체에서 직간접으로 연관돼 있던 사람들이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치 폐석더미에 깔린 듯 질식돼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80년대 초 민초들의 요구가 가장 먼저 분출된 사건이잖아요. 여기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이루어져야 되고요. 영화 <1980사북>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의 흐름을 보면 이 사건이 충분히 재평가 받을 수 있고 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리라고 봐요. 하지만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아픔에 우리는 좀더 주목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해요.”

두엄 스님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경우가 있고, 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 항쟁의 정당성을 평가하고 의의를 확산하는 데서 마치 응어리처럼 막혀 있는 것 같다”면서 “그 응어리를 풀려는 노력을 공동체와 함께 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갈등을 지혜로 다스리고, 아픔을 정의로 바로 세우며, 상처를 자비로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오늘 이 시대에 부처님이 다시 오시게 하는 일입니다.” 부처의 불상이 없는 정암사 적멸궁(寂滅宮) 마당에서 천웅과 두엄, 두 스님은 따뜻한 눈으로 하늘과 땅을 굽어보며 한 목소리로 말한다,

“용서는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혜입니다. 가해의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용기를 내어 참회하고, 피해의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자비의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때, 비로소 검은 탄가루가 날리던 고통의 땅은 고결한 연꽃이 피어나는 화장세계로 변모할 것입니다.”

함백산의 신록이 부처님의 가사처럼 온 산하를 덮고, 정암사 수마노탑의 풍경 소리가 맑은 깨달음의 소리로 울려 퍼지는 2026년의 오월. 46년 동안 응어리진 공동체는 바야흐로 그 치유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황인욱 기자

<2026-05-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항쟁의 한복판에서 안식처 제공한 사찰… 두 스님의 간절한 호소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