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출신 사도광산 노동자가 위험한 갱내 작업에 종사한 비율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남아 있다.”
21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아이카와향토박물관 별관 2층.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실에선 한국어와 일본어를 포함한 5개 나라 음성으로 이런 무미건조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관련 기록은 없다. 지난해에 이어 일본 정부가 보였던 태도와 마찬가지로 전시실도 지난 1년간 달라진 게 없었다. 7평(23㎡) 남짓 공간에는 “(조선인을 포함한) ‘징용’은 법령에 기반한 것”이라는 안내 문구가 담겼다. 조선인들이 한달 평균 28일 일했고, 처우개선 쟁의를 벌인 일, 사다리 가설 작업 도중 사망 실태 등 가혹한 노동 환경 일부를 기록했지만, 끝내 강제동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전시관 한쪽 구석에는 어느 조선인 노동자의 나무 도시락통 하나가 말끔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당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했지만 강제동원 기록을 제외하는 꼼수로 대응하고 있다. 2022년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낸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노동’ 보고서에는 조선인 110여명의 기구한 사연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갱내에서 떨어져 두개골이 깨지는 사고를 당했다.” 1941년 충남 청양군에서 사도섬에 끌려간 김주환은 이렇게 갱도 내에서 참혹하게 숨졌다. 그해 10월20일 오전 7시, 불과 25살 나이였다. 같은 해 사도섬에서 바위 깨는 작업에 투입된 노병구는 “갱도 안에선 추락·승강기·누전·발파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본인 기숙사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했다. 이기상은 31살 때 이곳 암석 폭파 작업에 투입됐다가 두 눈이 멀었고, 서병인은 너무 배가 고파 우연히 발견한 죽은 말의 다리를 썰어 삶아 먹기도 했다. 박승만은 충북 청주에서 인근 마을 사람 50여명과 함께 집단동원됐다. 정쌍동처럼 고향인 전북 익산군 한 마을에 강제동원 대상 2명이 할당되자 늙은 부모와 아내, 두 아이를 남겨두고 사도에 끌려온 사람도 흔했다.
오랜 기간 한·일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미 사도광산 조선인 피해자 1519명이 확인된 바 있다. 일본 정부와 조선인 강제노동에 가담했던 일본 전범기업들은 니가타 현립 도서관에 ‘조선인에 대한 반도 노무자 명부’ 존재가 확인됐는데도, 원본 공개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겨레에 “해당 문서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증명할 가장 유력한 증거”라며 “한·일 정부가 미래 지향적 관계를 말하는데, 반듯한 미래로 나가기 위해 비뚤어진 과거를 우선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조건으로 지난해 열린 첫 ‘사도광산 추도식’은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노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 정부와 유족들이 참석을 거부해 파행으로 끝났다. 올해도 일본 정부는 9월 한국 쪽 참여 없이 ‘반쪽 추도식’을 마쳤다. 주일 한국대사관은 21일 오전 10시 사도시에서 또 다른 ‘반쪽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유족들은 이날 행사 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기거했던 ‘제4 상애료’ 터에 헌화하기로 했다.

사도(니가타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2025-11-21>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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