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9]
‘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 옆에 잔존한 유구는 ‘봉안전’의 흔적(?)
선인 학교에는 1937년 12월 이후에야 천황 사진을 차별 배포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정동길을 따라 걷다가 커다란 회화나무(서울시 보호수 서2-3, 1976년 11월 17일 지정)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캐나다대사관(옛 하남호텔 자리) 앞에서 발길을 돌려 서울성벽이 지나는 창덕여자중학교(정동 28번지) 구역으로 올라가면, 그 안쪽에서 옛 프랑스공사관 시절의 흔적 하나를 만날 수 있다. ‘RF 1896’이라는 글자와 더불어 프랑스공화국의 상징 문양인 오크와 올리브 가지가 나란히 새겨진 정초석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공사관은 맨 처음 수표교 쪽에 터를 잡았다가 1889년 10월에 정동으로 옮겨왔으며, 그 이후 우연의 일치인지 — 을사조약의 여파로 프랑스총영사관으로 격하된 상태에서 — 조선총독부가 출범하던 바로 그 날인 1910년 10월 1일에 서대문 밖 합동(蛤洞) 30번지에 있던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의 별서(別墅)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정동에 남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구역은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귀속되었고, 이 자리에는 1914년에 일본인 아동의 전용 학교로 설립된 서대문소학교(西大門小學校)가 들어서게 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서대문소학교’는 ‘서울서대문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달고 존속했으나 1973년에 이르러 폐교되었으며, 그해 2월 18일자로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곧장 이곳으로 옮겨오는 과정이 이어졌던 것이다. 운동장 남동쪽 모퉁이를 찾아가면 약간 경사진 언덕의 구석 자리에 지난 1991년 12월 30일에 건립한 ‘서울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서울의 사대문 중의 하나인 서대문에 가까운 이곳에 1914년 경성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세워졌으며 조국 광복과 더불어 1945년 서울서대문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이래 8,40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제26회의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1973년 정부의 시책에 따라 폐교되었다. 이에 뜻깊은 이곳이 서울서대문국민학교의 발상지임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1991.12.30. 서울특별시 중부교육청 교육장.
그런데 이곳과 바로 이웃하는 지점에는 네모난 주춧돌 몇 개를 올려놓은 — 정체 모를 — ‘콘크리트’ 시설물의 흔적이 눈에 띄는데, 이곳 아래쪽에는 예전에 방공호의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것이 과연 어느 시기에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구체적인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냥 외관만으로 추측컨대 일제강점기에 각 학교마다 성행했던 ‘봉안전(奉安殿)’의 잔존 유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시절의 봉안전이라고 하면 ‘교육칙어(敎育勅語, 1890년 10월 30일 제정)의 등본(謄本)’이라든가 이른바 ‘천황 내외의 어진영(御眞影)’ 따위를 모시는 공간을 말하며, 화재와 도난의 피해 또는 불경(不敬)스러운 손길이 닿지 않도록 학교의 본건물과 이격(離隔)된 별도의 공간을 정해 가급적 불에 타지 않는 재질로 이를 구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등하교(登下校) 시각에 아동들이 봉안전 앞을 통과할 때는 반드시 최경례(最敬禮, 상반신을 직각으로 굽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방식)를 반복적으로 행하게 함으로써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가짐을 배양하도록 했다.
『조선교육대관(朝鮮敎育大觀)』(1930), 72쪽에 정리된 내역을 살펴보면, 서대문소학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교육칙어등본 및 천황과 황후의 사진이 하사된 내력을 지녔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대문소학교의 교육칙어 및 어진영 하사 연혁

이것으로 추정컨대 필시 서대문소학교 구내에 이를 보관하는 ‘봉안전’ 시설이 별도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기사나 사진자료 등은 찾지 못하였다. 다만, 『조선신문』 1934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어진영 봉안고(御眞影 奉安庫) 개선추가예산(改善追加豫算)」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서대문소학교에도 봉안전 시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경성부에서는 금회(今回) 어진영 봉안고의 개선을 하기로 되어,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를 제외한 소학교(小學校) 10교(十校)에 대해 한 학교마다 170원(圓), 총액 1,700원, 여자실업(女子實業)의 봉안고 수선비 170원을 추가예산으로 하여 계상(計上), 16일 제1교육부회(第一敎育部會)에 부의(附議)하여 가결(可決)하기에 이르렀는데, 우(右) 수선은 비(扉, 문짝)를 동철비(銅鐵扉)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소학교 10교’라는 것은 당시 경성 시내에 존재했던 10개 소학교 전체 — 일출(日出, 히노데), 남대문, 앵정(櫻井, 사쿠라이), 종로, 서대문, 동대문, 삼판(三坂, 미사카), 용산, 원정(元町, 모토마치), 남산소학교 — 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 학교마다 수선비 예산이 배정되었다고 함은 당연히 서대문소학교에도 봉안전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만약에 학교나 관공서에 불이 나서 천황의 사진이 소실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엄청난 불경(不敬)이자 씻을 수 없는 큰 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탓에 불길 속에 뛰어들어 교육칙어등본이나 천황의 사진을 꺼내려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곧잘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이 빈번히 거듭되자 교장실이나 교무실 주변에 설치했던 ‘봉안실’은 차츰 교실에서 벗어난 안전한 공간에 별도로 설치하고, 더구나 그 재질도 불에 타지 않는 콘크리트와 철문 형태의 것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기억해두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천황 내외의 어사진 하사가 일본인 학교인 소학교(小學校), 중학교(中學校),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에 대해서만 실시되었고, 조선인 학교인 보통학교(普通學校),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여자고등보통학교(女子高等普通學校)는 아예 그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조선인학교의 경우에는 설령 봉안전(奉安殿)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육칙어등본’을 보관하는 용도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식민통치자들에게 기껏해야 ‘이등국민(二等國民)’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조선인들에 대해 부랴부랴 어진영의 하사를 실시토록 한 것은 1937년에 발발한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과 더불어 ‘전시체제기’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관념을 드높일 필요성이 막 제기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의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조선일보』 1937년 11월 12일자에 수록된 「천황황후 양폐하(天皇皇后 兩陛下) 어사진 봉대(御寫眞 奉戴)에 대(對)하여, 미나미 총독(南總督) 근화 발표(謹話 發表)」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금회(今回) 전조선 각도 남녀고등보통학교 및 남녀보통학교에 천황, 황후 양폐하의 어사진을 봉안(奉安)하기로 되었는데 천황 황후 양폐하 어사진 봉대에 대하여 미나미 총독은 좌(左)와 여(如)히 근화(謹話)를 발표한 바 있었다.
종래(從來) 남녀고등보통학교 및 남녀보통학교에서는 천황 황후 양폐하의 어사진을 봉대하여 모신 학교(學校)가 1교(一校)도 없는 것은 심(甚)히 유감(遺憾)으로 사(思)하였던 바이다. 총독부(總督府)에서는 과반(過般) 궁내성(宮內省)과 협의하여 금후 순차(順次)로 차등(此等) 학교에 대하여서 어사진의 어하사(御下賜)를 봉대하여 봉안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종래에는 봉안설비(奉安設備)가 완성(完成)한 후(後)에 비로소 어사진 어하사 신청(申請)을 하여 왔으나 특(特)히 금회(今回)에 한(限)하여는 명년(明年) 1월 1일 사방배시(四方拜時)에 봉배(奉拜)의 광영(光榮)을 나누게 하기 위(爲)하여 봉안설비가 완성되기까지 도청(道廳) 우(又)는 부청(府廳)의 봉안고(奉安庫)에서, 봉안가능(奉安可能)의 학교에 대하여는 설비완성 전에도 신청수속(申請手續)을 하기로 되었다. 이에 대하여 관계방면의 각별(恪別)한 편의(便宜)를 얻은 것은 실(實)로 공구감격(恐懼感激)에 불감(不堪)하는 바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1937년 12월 24일자에 수록된 「양폐하 어사진(兩陛下 御寫眞), 금일(今日) 각도대표(各道代表)에 전달(傳達)」 제하의 기사를 통해서도 시대적 배경 요인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사변에 제하여 황국의 적자로서 총후의 반도가 내선일체 애국열성은 파격의 신례로서 조선인 측 학원에도 어진영 어하부의 고마움을 배수한 총독부에서는 계관이 도동(渡東; 도쿄로 건너가는 것), 금번 전조선 관공립 59교에 대하여 천황, 황후 양폐하의 어사진을 궁내성으로부터 어하도를 받았으므로 23일 오전 9시 반부터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관계 각도에 대한 전달식이 엄숙히 거행되어 미나미 총독으로부터 관계 각도 계관에 양폐하 어사진을 전달, 이번 어하사하옵신 고마운 어취지를 전하고 식을 마치었다. 어사진을 배수한 도대표는 곧 귀임 각도 일시 도청에 봉안(奉安) 신춘 원단(元旦) 사방배까지에는 각 학교에 전달할 터로 전조선 59교는 명춘 사방배부터 양폐하 어사진을 봉배할 광영을 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학교 59개교에 대해서는 그해 12월 23일에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어사진하사 전달식이 거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서울 소재 조선인 학교로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공립고등보통학교, 교동공립보통학교, 재동공립보통학교, 어의동공립보통학교, 매동공립보통학교, 미동공립보통학교, 덕수공립보통학교 등이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 무렵에 조선인 학교에 대한 어진영 일괄 배포와 더불어 각 지역마다 봉안전을 새로 건립하는 사례들이 부쩍 늘어나게 되자 이것의 건립양식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7월 14일자에 게재된 「어사진 봉안전(御寫眞 奉安殿)은 ‘신명조(神明造, 신메이즈쿠리)’로 통일(統一), 13일 정무총감(政務總監)이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어사진 봉안전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는 종래 일정한 설계와 양식(樣式)이 정해 있지 않아서 그 구조도 자못 구구하였으며 어사진을 봉안하는데 별단 지장이 없고 불경스럽지만 않으면 그냥 어떠한 형식이든 이것을 인정해왔었다. 더욱이 학교 같은 곳에서는 생도와 아동들이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받들어 절하는 까닭에 봉안전의 기품도 생각지 않으면 안 되고 또는 학교훈육상 상당히 중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총독부에서는 금후 새로 짓는 봉안전의 양식은 학교나 일반을 물론하고 신명조(神明造, 신전과 같은 형식으로 짓는 것)로 통일할 것을 결정하고 이에 대하여 13일 각도지사에게 정무총감으로부터 통첩을 발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신명(神明, 신메이)’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별칭(別稱)이며, 따라서 ‘신명조(神明造, 신메이즈쿠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본전 형식대로 따라 짓는 건축양식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어진영 봉안전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에 실상 그 말로는 씁쓸한 마무리로 귀결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9일자에 수록된 「일천황(日天皇)의 진영(眞影) 종언(終焉)」 제하의 기사는 그간 절대적인 경의(敬意)의 대상이었던 봉안전이 일괄 폐지된다는 소식을 이렇게 알렸다.
[도쿄(東京) 7일발 AP합동] 일본 궁내성(宮內省) 발표에 의하면 금후로는 일본천황의 소위(所謂) 어진영(御眞影)에 대한 강제적 경의표시(敬意表示)는 폐지될 것이며 또 궁내성으로부터 문부성(文部省)에 전달된 통첩(通牒)에 의하면 이 소위 어진영을 특별한 장소에 장치(藏置)시키거나 소위 봉안전(奉安殿)에 안치(安置)하는 것은 폐지하고 어진영은 요구하는 사람에게 매각(賣却)되리라 한다.
언젠가 『조선일보』 1989년 1월 8일자에 게재된 ‘이규태(李圭泰) 코너’의 글 「히로히토의 사진」을 본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바로 해방 직후 봉안전의 처리에 관한 생생한 증언 한 토막이 담겨 있었다.
해방이 되던 날 봉안전이 두들겨 부숴지고 교실에서 일왕 사진이 뜯겨져 내렸다. 그 사진을 처분하는 일이 당번(當番)이던 나에게 맡겨졌고, 그 처분에 무척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면 그것은 한낱 사진이 아니라 사진 이상의 주력(呪力)이 붙어 있어 그 사진을 구기거나 찢어버리면 그 신명(神明)의 노여움으로 해코지를 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으며, 그 두려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몰라 그 사진을 접어서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 후 허리가 아프다는 그 일왕의 꿈까지 꾸었던 기억이 난다.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고백했다. “태워서 묻어 버리려무나” 하기에 태워 그 재를 묻고서 돌아서는데 그 신명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겁을 먹고 돌아서서 큰 절을 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하략)
창덕여자중학교 안의 한쪽 구석에 남아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이러한 ‘봉안전(奉安殿)’의 흔적이 확실히 맞는지는 아쉽게도 아직껏 명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옛 서대문소학교 또는 서대문국민학교 시절의 졸업앨범이라든가 무슨 사진자료 같은 것이 서둘러 발굴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만약에 이러한 확인작업이 가능해진다면 — 서울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기 봉안전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 이 유구에 대한 보존조치는 물론이고 참으로 고약했던 봉안시설에 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 같은 것도 함께 설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수고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이 도시에 일제침탈사의 증거물로 사용될 실물자료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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