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태항산을 품은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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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조선의용대 답사기
태항산을 품은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

최필숙 ‘약산 김원봉과 함께’ 단원

‘약산 김원봉과 함께’가 기획하고, HURA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시작부터가 이전과는 달랐다. 석가장으로 직행하는 비행기는 처음이다. 석가장은 하북성 성도이지만, 공항은 정정현(正定縣)에 있다. 정정현은 시진핑이 복무한 적이 있었고,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에 위치해서인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복잡한 북경 공항이 아니니 출입국 과정이 편안했고, 태항산 관광을 하는 한국인들만 공항에 머물고 있어 중국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스물여덟 명이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직접 답사하려는 마음을 품고 함께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후원과 홍보에 힘입어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멕시코 지부장까지 참여하였다. 모두 나름의 커리어와 조국 광복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떠난 터였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후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직된 조선인만의 부대다. 처음 출발 당시 구대(교육적 기구)에서 지대(군사적 기구)로 변경되었다. 약산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고, 본대와 1, 2, 3지대까지 구성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방어전에 참여하고,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1940.9.17.), 여러 이유로 인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하고, 대원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조선인이 많은 화북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1941년 1월, 중경의 조천문에서 출발한 본대와 각 전구에 배치된 대원들이 화북으로 진격하던 중, 중국 팔로군의 근거지인 태항산에 뜻하지 않게 들어서게 되고, 이후 그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다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포로로 붙잡히는 등 피맺힌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 그곳이 이번 답사의 목적지다.

나로서는 태항산 답사가 열다섯 번째이다. 밀양 사람인 석정 윤세주의 활동지이자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2006년 이후 거의 매년 이곳을 찾았다. 동지와 함께 이역 땅에 누워있는 그는 내게 있어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내게 그 공간을 메우며 자리한 분이다.역사를 가르쳤던 나는 민족해방투쟁사를 접할 때 관련된 조상이 없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반민족행위에 관련되지 않음에 안도했다. 1995년, 염인호 교수의 『약산 김원봉 연구』를 처음 접한 후 나의 수업은 달라졌다. 약산 김원봉이 밀양인이라는 자부심에 내용이 달라졌고, 밀양 지역의 학생들에게 약산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러다 약산의 여동생(김학봉)과 석정의 종손녀(윤명애, 윤명화, 윤명숙, 윤명옥)를 만났고 그사이 김영범 교수와 많은 저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김영민 사장을 만나 학생들과 함께하는 태항산 답사를 2006년부터 진행하였다. 석정 윤세주 관련 단체와 약산 김원봉 관련 단체의 후원,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태항산 답사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속되어, 2025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와 이 길을 나섰다. 고맙게도 의열단 창단 단원인 밀양 사람 초산 김상윤의 장손자(김기봉)도 동행하여 더없이 값진 답사가 되었다.

우리 일행이 처음 향한 곳은 석가장에서 가장 가까운 호가장 전투지였다. 1941년 12월 12일에 전개된 이 전투에서 4명이 전사하였고, 여러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김학철이 허벅지에 총을 맞아 포로가 된 곳도 이곳이었다. 선무공작을 나온 조선의용대원은 원씨현과 찬황현 일대에서 활동을 마치고 마지막 날 민중대회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던 새벽,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이 전사하였고, 대장 김세광, 분대장 조열광, 대원 장례신과 김학철이 중상을 입었다. 김학철은 포로가 되어 석가장 포로 형무소에서 갇혔다가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팔로군도 이 전투에 참여하여 12명의 전사자가 생겼다. 답사의 첫 목적지로는 꽤 발걸음이 무거운 곳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쇠귀 신영복의 글씨로 아로새겨진 김학철과 김사량의 문학비가 우리를 반겼다. 호씨들의 집성촌인 이곳, 호숙영의 집은 당시 조선의용대원들이 머물렀던 장소다. 마당에는 적을 속이기 위한 가짜 우물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고, 지붕이 일부 개조되었으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2024년부터 이곳이 김학철문학관으로 탈바꿈한 것이 안타까움을 남겼다. 네 분의 희생자와 부상자, 그리고 당시 전투에 대한 내용은 점점 희미해졌다. 1, 2, 3, 4관에 펼쳐진 김학철의 삶과 문학! 그것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나,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웠다. 호숙영 씨는 석가장에서 손자들을 돌보고 있어 그녀가 기억하며 부르는 ‘불멸의 영령(김학철 작사, 작곡)’을 직접 들을 수 없었으나, 남편이 문을 열어주어 헛걸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다음 이동한 곳은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하신 네 분의 투사를 호가장 주민들이 밤새 달려와 매장했다는 황북평촌이었다. 행여 일본군이 그 시신을 훼손할까 한 분씩 업고 쉬지 않고 40리 길을 달렸다. 언젠가 찾을 것을 예상하여 매장하였던 곳에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겼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그 묘역을 황북평촌의 높고 좋은 자리로 옮겼고, 그들의 보살핌 속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네 분 영령들께 조국에서 가져간 제물을 놓고, 김기봉 어르신의 초헌으로 시작, 우리는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의식을 진행하며 그들의 뜻을 잊지 않고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고속도로 근처에 있었던 초장지 표지석은 지난 홍수로 인해 유실되었다고 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네 분의 영령을 뒤로 한 채 한단으로 향했다. 중국 역사의 시작인 여와(女媧)의 고향, 조선의용대의 투쟁의 발자취가 가장 많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각자를 소개하며 답사에 임하는 마음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염인호 교수의 특강을 청해 들었다.

숙소는 최근에 생긴 힐튼호텔이었다. 나도 처음 투숙하는 곳이라 기대가 되었다. 예전 섭현의 숙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국인 관광객이 이곳까지 오는지 한글도 제법 눈에 띄었다.

둘째 날, 조선의용대가 이곳에 정착한 순서대로 답사하기로 하였다. 첫 답사지는 상무촌(上武村)이다. 이곳은 원래 요현이었으나 태항산 전투에서 희생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의 이름을 따 좌권현이 되었다. 상무촌은 조선의용대가 북행을 결정하고, 중경과 각지에 흩어진 부대가 이동하여 태항산록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이다. 이곳 홍복사에 정착한 대원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칭한 뒤 선무공작을 위주로 활동하였다. 상무촌까지 처들어온 일본과 전투 중 두 명의 전사자가 생겼고, 그 중 한 분의 묘소가 마을 뒤에 있다. 해마다 청명일에 지역민이 제사를 올린다고 하는 무명열사묘(義勇隊烈士之墓)는 두 분이었으나, 일본군 패망 이후 가족들이 찾아와 한 분의 시신을 찾아갔다고 하니, 아마 북한을 고향으로 한 대원이 아니었을까 추정하면서 길을 걸었다.

우리는 제물을 우산 아래 두고 빗속에서 정성을 다해 예를 올렸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묘 앞이 너무 좁아 한 줄로 서기도 불편했으나 지금은 여럿이서 예를 올려도 될만큼 넓어서 참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상무촌은 한국의 여느 농촌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언제까지 이곳에 계시게 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상념이 나를 일깨웠다. 2024년, 이곳에 노신음악당이 재건되었고, 홍복사 주변도 정비되었다. 리보온 선생이 중심이 되어 세운 전적비도 노신음악당 앞에 옮겨졌다. 상무촌 답사를 늘 안내해주시던 조은경 할아버지는 2015년에 돌아가셨다. 그는 생전에 ‘김위’라는 젊은 조선의용대원이 첫사랑이라고 하며,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조선의 딸’이라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것도 추억 속의 한 장면처럼 마을을 내려오는 길목에서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 모습이 겹쳐 나타났다.

상무촌을 떠나 운두저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첫 전투 이후 팔로군 전방총사령부 근처로 옮긴 곳이다. 이 마을 입구에도 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이전의 비는 마을을 지나는 개울의 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마을 입구 큰 연자방아 앞 작은 개울 너머에 있는 집은 김무정 장군이 집무하던 사무실이다. 그는 대장정을 끝낸 후 팔로군에 소속되어 조선의용대와는 별개로 이곳 운두저촌에서 대포를 제작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그 공장을 볼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많은 짐을 쌓아두어 그 흔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상무촌에 있던 조선의용대원들이 운두저촌으로 이동한 것은 어쩌면 김무정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일본군이 공격하면 최전선에서 그들을 맞아야 하는 위치인 상무촌, 그곳보다 운두저촌은 팔로군 전방총사령부와 가까운 곳이다. 김무정 장군이 같은 민족을 좀더 안전한, 자신이 보호해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한 것은 아닐까?

운두저촌의 최고 답사지는 한글 표어가 있는 곳이다. 청장하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성문 세 벽에 새겨진 한글! ‘왜놈의 上官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라는 글귀와 함께 최근 새로 복원한 전면의 글이 있다. ‘强制兵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곧마당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날노 향하여 쏘시요!’이다. 지금 우리의 문법과는 다르지만, 흐릿하면 다시 덧칠하는 이곳 주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운두저촌을 돌아나온 우리는 팔로군 전방총사령부가 있는 마전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국의 새로운 학습처로 변하고 있다. 거대한 기념관과 팔로군을 상징하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조선의용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전시물은 사라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의 행렬은 항일투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좌권 부참모장 집 앞마당에서 거행된 1942년의 장례식 현장과 그의 부인과 딸이 살았던 거처를 둘러보았다. 팔로군 수뇌들의 거처는 일본군 방어를 겸한 곳이기에 그 견고함에 놀라고, 그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던 우리 조선의용대의 운두저촌 마을이 대비되어 마음이 아팠다. 마전에 새로 생긴 팔로군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일본군의 소탕전에 대항해 반소탕전을 펼쳤던 십자령으로 향했다. 십자령은 아래에 좌권령도 있어 찾는 사람을 혼란케 했다. 십자령 가는 길목에 거대한 두 산을 깎아 만든 좌권기념관과 기념탑은 중국인만이 할 수 있는 듯 위용을 자랑했다. 끝없이 펼쳐진 계단과 건축물을 눈으로 감상하며 십자령 고개에 올랐다. 그곳에서 전사한 좌권, 그리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특공대 40명을 이끌었던 박효삼과 비무장 동지를 거느리고 흑룡동굴을 향해 내려간 석정 윤세주와 김두봉의 흔적을 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내려왔다. 처음 접어든 길을 내려오면서 라서경과 윤세주가, 즉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헤어졌던 곳, 남예보를 보지 못했다. 그 사이 새로운 길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서경이 이끌던 중국인들이 걸었던 흑룡동굴을 향해 갔다. 여전히 차고 맑은 물을 내뿜는 동굴은 예전 야전병원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진다. 특히, 석정 윤세주 열사가 이곳 야전병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중국인들은 주장했다.

대일항전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지도자가 장자령 다락밭 절벽에서 죽었다고 말하기가 미안해서인지 그들은 흑룡동굴의 야전병원이 석정의 순국지라 했었다. 바위 깊은 곳에서 뿜어나오는 샘물이 마치 영령들의 몸부림 같았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장자령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 대나무 속에 숨겨진 표지석, 그 표지석에는 진광화와 석정이 순국한 곳이 흑룡동굴이 아니라 이곳 장자령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 답사를 위해 사전 답사를 왔던 여행사 팀장이 처음 발견해 우리를 이 자리로 안내했다. 표지석은 2020년에 세워졌는데 그동안 공사로 인해 진입이 불가능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었다. 석정의 후손이 최채의 증언을 통해 장자령 계곡이 순국지라 하였건만. 드디어 그의 순국지가 흑룡동굴의 야전병원이 아니라 이곳이 장자령이라 표기한 것이다. 위로 올려다본 절벽, 어쩌면 진광화 열사의 마지막 순국지일 것이다.

우리는 마을을 향해 걷다가 다락밭으로 향했다. 그사이 다리가 놓여 모습이 변했다. 다락밭 움집 마당의 맷돌만 그대로이고, 그곳에도 새로운 집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는 석정의 순국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역시 제물을 놓고 예를 올려 그의 넋을 위로하고, 우리 자신도 위로받았다. 초헌관을 맡은 김기봉 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열사님, 초산의 손자입니다.’

자꾸만 돌아보며 장자령 계곡을 돌아나왔다. 탐방단의 귀한 보물 김영주 님이 독립기념관 자료에서 찾아온 남서정촌을 찾았다. 한글이 아닌 한자로 새겨진 그곳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글귀가 또렷이 쓰여 있었다. 이곳을 15차례나 찾은 나도 처음 만난 글귀였다. 또다시 감동이 몰려왔다. 매번 하나씩 선물처럼 주어지는 새로운 사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러한 매력이 나를 태항산으로 불러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섭현의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맛난 저녁 식사는 여행의 또다른 면을 채워주었다. 집행부의 세심한 배려이다.

셋째날, 석정과 진광화의 초장지를 향했다. 이곳은 태항산 자락 중 연화산에 위치한 반소탕전 희생자를 모신 묘역이다. 좌권 부참모장뿐만 아니라 신화일보 사장 하운 등 중국인 전사자들이 전사된 곳에 묻혀 있다가, 1942년 10월 10일 합동장례식을 통해 이곳 석문촌에 안장되었다. 올라가는 중앙에 좌권의 묘가 있고 그 묘로 향하는 우측에 중국인 희생자 묘역이 있다. 좌쪽 높은 곳에 한국인 희생자 석정과 진광화가 안치되었다.

마전에서 팔로군장으로 치뤄진 장례는 이곳 석문촌에 안장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묘역을 살펴본 수많은 사람은 묘의 위치를 두고 감탄한다.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명당’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조선의용군 기념관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그들의 활약상을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작년 말, 김학철의 저서가 전시되는 등 전시물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곳을 가장 좋아한다. 연화산의 자태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도, 그리고 석정 할아버지를 흠모해 두 묘역 사이에 수목장을 한 관건 대원의 뜻도, 한국과 중국이 함께 가꾸어온 무궁화동산도 모두 이곳에 있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조동걸 선생의 ‘애국영령 영생불멸하리’라는 1992년의 비석도 이제는 역사가 되어 우리를 반기고 있어 더욱 좋다.

석정과 진광화의 죽음은 조선의용대원에게 크나큰 상실감으로 다가왔고, 이제는 중경에 있는 약산 김원봉과의 관계를 이어갈 끈이 사라졌다. 그들은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중원촌에 모였고, 이곳 원정사에 군정학교를 세우고 조직을 다시 꾸렸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아닌 조선의용군으로 재탄생했다. 약산과 맺어진 고리의 핵심인 석정이 순국하자, 비탄에 빠졌던 화북지대 대원들은 이제 의용군으로 태어났고, 김무정의 지휘 아래 놓였다. 그리고 팔로군 전방총사령부 후방에서 직접 전투보다는 학습과 선무활동에 열중하였다.

이들이 중원촌에서 다시 이동한 곳은 남장촌이다. 남장촌에서 이들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썼다. 이때 교육장으로 부임한 사람이 정율성이다. 정부은이라는 본명 대신 ‘음률로 세상을 완성하고픈’ 율성이,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한 뒤, 이곳에 와서 조선의용군의 교육을 책임졌다. 이 학교의 흑판에는 한국인 탐방객이 낙서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우리 팀에서도 몇몇이 그 일에 동참했다. 일정상 우리는 남장촌 오지산에 가지 못했다. 오지산에서 조선의용군은 개간한 밭 700무를 지역 주민에게 주고, 연안으로 떠났다. 지금도 지역민들은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 기록을 남겨 두었다.

그들이 전시 중에 개간한 오지산으로 가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진기로예열사능원이 있는 한단시로 이동했다. 한단시는 산서성과 산동성, 하북성과 하남성이 인접한 곳이다. 이 네 지역에서 항일투쟁 중 희생한 분들을 위한 열사능원이 조성되었다. 1950년 만들어진 이곳에 석정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의 묘가 있다. 석문촌의 초장지에서 옮겨진 진짜 묘이다.

남묘구 3열 17호에 묻힌 석정에게 먼저 참배의 예을 올리고, 북묘구로 옮겨 장군릉에 모셔진 진광화에 대해 참배를 드렸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나처럼 많은 사람이 진광화 묘와 석정의 묘를 비교하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팔로군 지역에 먼저 들어와 있었던 진광화는 화북청년회 총책이었고, 석정은 부책이었다. 더구나 진광화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당원이었기에 묘역의 크기에 맘 상하지 않길 바랐다.

잘 가꾸어진 묘역에서 항일 영령에 대한 중국 정부와 국민의 애정이 느껴졌다.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하면서 한국인들이 관광으로 가장 많이 찾는다는 하남성의 임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증조할아버지의 의병투쟁에 대한 이야기와 그 활동비를 찾았던 과정을 들려주신 최장원 님! 큰누나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잇는 삶에 가슴 뭉클했다. 우리의 답사에 항일투사의 후손이 함께하시니, 감회가 새로웠다.

짧은 답사 중에 통천협에서 태항산 협곡의 절경을 만끽할 기회가 있어 좋았다. 15차례 답사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았다. 가보지 못한 여러 곳이 눈에 밟혔다. 다음을 기약하고, 심화반을 모집하자는 의논 속에, 마지막 숙소가 있는 석가장으로 향했다.

석가장 구역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전망대가 기억나, 떠나는 날 새벽 몇몇이서 포로수용소와 일본군 헌병대 본부가 있었던 곳을 찾았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으나, 기억하기 위한 비가 섬뜩한 모습으로 있었다. 쇠사슬로 감겨있는 비는 5만 명의 포로 중 2만 명이 희생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헌병대 건물 10여 채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다만, 포로수용소에 세워졌던 전망대 자리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음 답사에는 이곳도 일정에 담을 것을 생각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이 아닌 답사! 늘 담아올 것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다시 깨닫는 시간이었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연구의 최고 권위자와 함께, 그리고 의열단 창립 단원 손자와 함께, 그리고 의병투쟁을 하신 증손녀, 증손 자와 함께, 그리고 역사적 부채감으로 인해 늘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각오를 가진 이들과 함께한 답사여서 더욱 뜻깊고 행복한 답사임을 고백한다.

약산과 석정의 길에 동참하고자 중국 현지에서 합류한 두 분께도 감사드리고, HURA 김재운 대표, 여행사 이민정 팀장, 박영호 가이드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동참한 모든 분들께 존경과 애정을 드린다. 광복 80주년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값진 답사였기를 소망하며, 함께한 이들이 밀양을 찾아오는 꿈을 꾸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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