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23]
9만여 한글 어휘를 정리한 원고를 기증한
한글학자이자 교육자인 늘봄 이상춘
박광종 특임연구원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과 9만여 어휘 원고 기증

1929년 10월 31일 하오 7시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이 조선연구회 회원들과 교육계, 언론계 인사들이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 신명균의 개회사와 안재홍의 축사로 기념식을 간단히 마친 후 이극로의 발의로 우리글의 정리와 발전을 위해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회를 열고 준비위원 이윤재로부터 경과보고를 듣고 규약을 통과한 다음, 준비위원 30여 명을 선임하였다. 준비위원에는 이광수 주요한 등 문예계 인사와 방정환 안재홍 유억겸 정인보 등 명망가 그리고 이극로 이만규 이상춘 이윤재 이중건 이희승 정열모 최현배 등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이 뽑혔다. 이들 위원 중 이극로 이중건 신명균 이윤재 최현배가 집행위원이 되어 실무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듬해 1월 6일 서울 화류정 29번지로 사무실을 옮겨 구체적인 후속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는 “금일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로(捷路)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의 지름길은 조선어사전 편찬에 있다고 보고, “본회는 인물을 전 민족적으로 망라하고 과거 선배의 업적을 계승하여 … 엄정한 과학적 방법으로 언어와 문자를 통일하여 민족적으로 권위 있는 사전을 편성하기로 자기(自期)한다.”고 천명하며 사전편찬 사업에 전 민족적 참여와 성원을 독려하였다.
1930년 1월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의 임원이 모여 두 단체의 역할 분담을 논의하였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사전 편찬의 일반 사무 즉 조선어 어휘 수집과 풀이, 원고 작성 편집을 맡고 조선어연구회는 기초작업 곧 철자법 통일(한글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을 담당하기로 했다.

우리말 큰사전을 간행할 목적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한다는 여론이 높아갔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어사전편찬회는 개성에 사는 어느 교사가 9만여 자의 한글 어휘를 정리한 원고를 무보수로 기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원고 기증자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10년간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던 이상춘(李常春) 교사(당시 47세)였다. 이상춘 교사는 원래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으로 일찍이 한글 연구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1923년 정월부터 각종 문헌과 신문잡지에 나오는 한글 어휘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학생과 지방민들에게서 사투리까지 수집해 왔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낱말이 차곡차곡 싸여 89,820개나 되었고 그 원고가 28권으로 분책되어 있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 간부 이극로는 이상춘의 공적이 얼마나 큰지를 다음과 같이 상찬했다.
실로 놀라운 보물이올시다. 이것은 이상춘 씨가 온전히 개인의 힘으로 더구나 낮에는 학교 일로 온전히 밤 시간에만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 계해(癸亥. 1923년) 정월부터 착수하였고 이 속에 모인 말수가 9만 어휘가 넘으므로 총독부에서 10여 인이 11년간에 만든 『조선어사전』(1920)이 겨우 5만여 어휘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나 충실한지 씨의 노력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소 수정만 가하면 씨 개인의 사업으로 완전한 사전 하나를 인쇄할 수 있는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 사전 하나를 위하여 그처럼 대성한 원고를 우리에게 아무런 보수도 없이 내어놓는 것을 우리 간부들은 눈물겨워 감사할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할 즐거움이 있습니다.(『중외일보』 1929.11.15)
1929년 후반기에 우리말 사전에는 개인이 펴낸 사전이 몇 종 있었고, 위에서 말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사전』이 그나마 대사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전에 실린 낱말 수는 한자어 40,734개 고유어 17,178개 등 총 59,000여 개여서 실제 생활에 쓰이는 어휘를 다 담지 못했다. 이상춘이 기증한 사전 원고의 어휘가 9만여 개였으니 조선어사전편찬회로서는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기 위한 귀중한 마중물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듬해 4월 동아일보사가 창간 10주 년 기념으로 각 방면의 공로자를 표창했는데 이상춘이 ‘조선어문’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5년 뒤인 1935년 4월에도 동일한 표창을 받았다.
한영학원 시절 <애국창가집> 사건으로 구금

이상춘(李常春, 1882~?)의 본명은 이우용(李愚鏞), 호는 백야(白夜)이고 별칭 늘봄은 ‘常春’의 한글풀이다.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1살 때까지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신학문에 눈떠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에 입학했고 1910년 11월 한영서원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 무렵 청년학우회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신민회 회장 윤치호의 지시로 평양에 가서 신민회 회원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또한 이상춘은 1913년과 1914년 연이어 신소설 두 편을 저술했다. 하나는 자신의 고향 개성을 무대로 한 『박연폭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형제가 태평양을 건너 남극을 탐험한다는 내용의 『서해풍파(西海風波)』이다. 특히 『서해풍파』는 “개화기 해양문학의 장을 연 최초의 소설”이라 평가되어 2006년에 최영호가 현대 문체로 옮겨 재출간되었다.
1915년 5월 이상춘은 모교인 한영서원에서 한글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한영서원에는 ‘11월 동지회’(1914년 7월 결성)라는 애국 교사 모임이 있었다. 11월 동지회의 핵심 인물인 신영순이 1914년 8월경 백남혁(한영서원 서기)과 모의하여 신영순의 거처인 고려정 230번지(이상춘 집)에서 등사기로 창가집 제1집을 40부를 제작해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이상춘도 동지회에 가입하여 그해 9월 창가집 제2집의 발간에 협력하고,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선죽교’라는 노래 가사를 지어 그 창가집에 실었다. 창가집 편찬 취지에서는 국가의 흥망성쇠의 열쇠는 곧 국민정신에 있다고 인식하고 이를 중요시하면서 국민정신 함양을 위해 조국을 생각하는 노래와 독립군가, 애국가 등을 모아 창가집을 만든다고 밝히고 있다. 1916년 <애국창가집>이 일경 손에 들어가 한영서원 교직원과 학생들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어 이상춘, 신영순, 백남혁, 오진세, 정사인, 윤월석 등이 체포되었다. 아울러 이상춘은 창가집 제작 관여 외에도 총독부가 불허 처분을 내린 『초등본국역사』(조선사를 말함)를 한영서원 고등과 1학년 학생들에게 가르친 혐의도 받았다. 폭압적인 수사 끝에 위 6인은 1916년 11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불경죄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17년 7월 이들 중 이상춘과 윤월석은 범죄에 가담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풀려나왔고 나머지 4인은 실형을 살았다.
이상춘은 한영학원 교사에서 해임되어 가족을 이끌고 충청도 입장으로 이사 갔다. 1년가량 수사받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은 탓에 심신이 쇠약해져 정양이 필요해서였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재직 시절의 한글문화운동
1920년 후반 이상춘 일가족은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모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한영서원의 후신) 교원에 임용되어 한글과 성경 과목을 담당하였다. 『송도학원(松都學園) 100년사』에 따르면 이상춘은 1924년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우회 창립총회 때 임시회장을 맡고 교우회 이사에 임명되었고, 1927년과 1931년 각각 종교부 이사에 선임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이상춘이 동료 교사 원홍구와 함께 10년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근속한 것을 기리는 기념품을 받았다.
이제 동교 재직 시절 이상춘이 펼친 한글문화운동을 살펴보자.
강제병합 전후 신학문에 눈뜬 이상춘은 주시경이 교수하는 한글강습소에 다니며 우리 말글 연구에 큰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1921년 주시경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립학교 한글 교사 15, 6명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자 이에 즉시 가입했고, 그해 12월 서울에서 열린 임시총회에 참석하였다. 조선어연구회의 목적은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하여” 후세 국민교육에 이바지하자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매월 월례회를 열어 각자의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1927년 2월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을 창간해 어문연구와 한글교육과 관련한 논문을 실었다.

이상춘은 서울과 거리상 먼 개성에 살고있음에도 조선연구회 회원으로서 연구회 활동에는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1924년 10월 13~18일 1주일간 개성 고려청년회가 주최하는 조선어강습회에 조선어 음운론과 문법 일반을 밤늦은 시간에 강연했다. 1929년 9월에도 개성중앙회관 교육부 주최, 조선일보 개성지국 후원으로 열린 한글강좌를 1주일간 맡았다.
1925년 이상춘은 한글 문법에 대한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조선어문법』을 개성의 숭남서관(崧南書館)에서 출간했다. 저자는 서두에 이 책이 연구서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한글 문법을 가르칠 목적으로 쓰인 교재라고 밝혔다. 이 책의 구성은 그 시기의 다른 문법책과 같이 음운론, 조어론, 품사론, 문장론 순으로 되어있다. 각 편마다 참고문헌을 밝혀두었는데 제1편 음(音)에서는 주시경의 『국어문전음학』, 권덕규의 『조선어문경위』, 김두봉의 『조선말본』 등을 열거했다. 표기법에서는 주시경의 형태주의를 철저히 따랐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쓰인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서 확인되는 형태음소적 표기법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형태소를 철저히 분석해 표기에 반영했다. 한편 책 말미에 ‘문장부호’의 장을 따로 두어 사점, 종지점, 의문표, 감탄표 등 총 13개 부호의 사용법을 용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1946년에 출간된 『국어문법』은 『조선어문법』과 대동소이하며 문장부호 등 몇 항목이 빠져 있을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상춘은 1929년 11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어서 동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한글 대사전 편찬이란 대의에 부응하기 위해 7년간 수집한 9만여 한글 어휘를 담은 원고를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이후 이상춘은 조선어학회 산하의 한글맞춤법 초안 작성위원과 한글철자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글 큰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작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31년과 1932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해 전국 각지를 돌며 한글보급운동에 힘썼다. 다음은 두 차례의 조선어강습회 강사로 다닐 때 이상춘이 남긴 감상이다.
관북방면 강사 이상춘
청강자는 남녀 합하여 30여 인이었습니다. 그중에는 교원과 기자가 다수이었고 10여 리 밖에서 다 니는 이도 있었습니다. 양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많다고 못하겠으나 질로 보아서는 교원, 기자가 많 으니만치 혹적(或績)이 파호(頗好)하다고 하겠나이다. (중략) 낮에는 강덕동에, 밤에는 청진에 왔다 갔다하노라고 조금 피곤하였으나 취미(흥미)는 퍽 많았습니다. 내일은 회령에 갑니다. (『동아일보』 1931.8.16)
관북방면 강사 이상춘
(함흥) 28일 오후 6시반에 강습을 마쳤습니다. 명일 오전 8시 차로 곧 떠나 집으로 돌아가려 하나이 다. 가는 길에 족하(足下. 같은 또래에게 쓰는 존칭어. 여기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가리킴)를 뵈옵 고 가야 옳을 줄로 아오나 무엇보다도 집 생각이 앞을 서서 바로 개성으로 가겠나이다. 마지막으로 귀주사, 본궁사 명승 구적(舊跡)을 보여주시던 학우 김흥빈 군에게 사의를 표하나이다. (『동아일보』 1931.9.5)
한글순례 인천에서 이상춘
나는 8월 1일 오전에 인천에 안착하여 오후 7시 30분부터 사립영화학교 안에서 강습을 열었다. (중 략) 양보다 질이 매우 좋았다. (『동아일보』 1932.8.13)
‘불온’한 노래를 가르친 죄로 인한 수감생활과 해방 후 활동
이상춘은 1932년~1934년 사이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감리교 계통 미션 스쿨인 원산 루씨(樓氏)여자보통학교로 전근했다. 조선어 교사로서 재직하고 있던 이상춘에게 1934년 5월 30일 원산경찰서 경찰들이 들이닥쳐 불경죄(不敬罪) 혐의로 체포해 개성경찰서로 압송해갔다.
사연인즉, 송도고등보통학교 제자였던 최기진이 어느 책 사이에 ‘영웅모범’의 가사를 적은 쪽지를 끼워놓았는데 개성경찰서 사찰계가 이를 적발해 최기진을 경찰서로 끌고갔다. 형사들이 최기진에게 불온한 노랫말의 출처를 대라고 닥달하자, 최기진은 1931년 송도고보 4학년 때 역사 수업시간에 이상춘 선생이 이 가사를 칠판에 적고 노래를 가르쳤는데 그때 필사해 놓은 것이라고 실토했다. 1934년 10월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두 사람은 공판에 회부되었고 11월 12일 이상춘에게 징역 1년 6개월이, 최기진에겐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상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복역한 뒤 1936년 5월 출소하였다.
출소 후 원산부 광석동 14번지에 위치한 자택으로 돌아왔다. 1937년 9월 루씨여자보통학교 후원회 총회에서 후원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이상춘의 아내인 장경애가 사망하자 원산 자택에서 장례식을 치렀다(『조선일보』 1937.12.2).
1938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사 향토문화조사위원으로 평북 선천과 전라도 무안·목포로 출장 가서 선천의 토속춤인 항장무(項莊舞)나 화순 영벽정(映碧亭)에 얽힌 일화 등을 조사하고 『조선일보』에 「향토문화를 찾아서」라는 기획 기사를 10여 차례 연재했다.
해방 후 이상춘은 개성으로 돌아와 교직자로서 교육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아울러 국어와 관련한 학술서를 꾸준히 집필했다. 1945년 11월에 미군정청으로부터 개성고등여학교 교장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9월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육성할 목적으로 서울과 개성에 사범학교를 신설할 때 개성사범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3·1절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개성 80여 단체가 시위행진 기념문을 건립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계획했는데 이상춘이 행사 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해방 후 집필한 저서로는 앞서 언급한 『국어문법』(조선국어학회 출판국, 1946.9) 외에도 <용비어천가>의 첫 번째 현대적 해석서로 평가되는 『주해 용비어천가』(동화출판사, 1946.9)와 고어휘의 풀이와 용례를 밝힌 『조선옛말사전(辭典)』(을유문화사, 1949)을 출간했다. 일반 잡지에도 기고하고는 했는데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 『협동』 통권 25호(1949.11.1)가 대표적이다. 이 잡지에는 특이하게도 이우용 명의로 「고인(古人)의 독서」, 이상춘 명의로 조선시대 야담집에서 취재한 「옛 사람 옛 이야기(5)」 두 편이 실렸다.
1949년 이후 이상춘의 행적이 신문잡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 이영철의 기록이나 기존의 인명사전에 따르면 6·25 때 행방불명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다만 『동아일보』 1947.10.11.일자의 「철의 장막 삼팔선답사(9)」 기사에는 “[폭동사건] 그중 적화사건의 총본령은 개성고녀와 개성중학, 개성상업학교의 3교이다. 개성고녀는 교장 이상춘(李相春. 李常春의 오기로 판단) 외 18명의 교원이 전부 좌익교원”라고 기술되어있는데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이상춘이 북한에서 생존했을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상춘은 청년기에 신학문을 눈뜬 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회에 나가면서 한글 연구를 시작했다. 7년간 공들여 정리한 9만여 한글 어휘 원고를 기증해 해방 후에 완성될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글맞춤법 제정과 표준어 사정에도 직접 참여해 힘을 보탰고, 자기 나름의 국문 연구도 계속해 『조선어문법』, 『국어문법』, 『주해 용비어천가』, 『조선옛말사전』 등을 펴냈다. 아울러 1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고 그로 인해 2년 남짓한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한글학자이자 교육운동가로서 이상춘 선생의 공로는 더할 나위 없이 높다 하겠다. 아직까지 이분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무나 안타깝다. 하루빨리 이상춘 선생의 공적에 걸맞은 서훈이 추서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참고문헌]
박금숙, 「동화작가 이영철의 생애 고찰」, 『동화와 번역』 32, 건국대학교 GLOCAL캠퍼스 동화와번역연구소, 2016
김수영, 「백야 이상춘의 생애와 학문」, 『진단학보』 127, 2016.12
『송도학원100년사』, 송도고등학교. 2006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책과함께, 2005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history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