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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이탄광 터에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의 조세이탄광은 1942년 2월3일, 해저 갱도가 무너지며 183명(조선인 136명, 일본인 47명)의 노동자가 차가운 바닷속에 수장된 비극의 현장이다. 사고 당시 회사는 2차 사고를 막는다며 갱도 입구를 막아버렸고, 희생자들은 83년이 지나도록 깊은 바닷속에 갇혀 있었다. 지난 8월 25일과 26일 43m 바다 밑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뼈로 보이는 유골 3점과 두개골이 발견되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되어 참혹하게 희생된 분들의 진상을 밝혀줄 명확한 단서를 찾아낸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아니었다.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활동해 온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모임)이 오로지 시민의 힘으로 해낸 것이다. 그 활동의 중심에는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와 우에다 게이시 사무국장이 있다.
이노우에 대표는 1991년 모임이 만들어질 때부터 참여하여 활동을 이끌어왔다. 작년 12월 3일 ‘모임’이 리영희상 특별상으로 선정되어 모임의 대표로 수상식에 참석한 그는 수십 년 동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참사 직후 봉인된 갱구를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을 때 지역의 토건업자가 자신이 해보겠다며 나섰다.
마침내 찾아낸 갱구에는 극도로 시계가 불투명한 흙탕물이 넘쳐났다. 작업의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수중탐험 전문잠수사가 나섰다. 이노우에는 이런 뜻있는 사람들의 자발적 헌신과 용기가 어우러져 기적이 이어졌다고 공을 돌렸다. 하지만 그 자신이 기적을 엮어내는 중심축이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이 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이노우에 대표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신병으로 소집된 군인이었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상관들에게 매일 구타를 당했고 이로 인해 골수염에 걸려 일주일 가까이 의식을 잃고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아버지는 오른쪽 눈을 가리려고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이노우에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용기를 내어 “왜 오른쪽 눈이 하얀색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총에 맞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노우에는 당시 그곳에 총탄을 맞으면 죽었을 거라 생각하며 전쟁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노우에의 고향 나가노현은 일본에서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 재일동포 사학자 박경식이 쓴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읽다가 고향마을 근처인 히라오카댐의 건설공사에 강제동원돼 희생된 조선인들의 유골이 방치되었다는 내용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결혼해 야마구치현으로 이주한 뒤 조세이 탄광에 잠들어 있는 유골들의 존재를 알게 되자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정부로부터 상이군인에게 나오는 연금을 받아 생활했다. 아버지가 타계하기 전에는 연간 300만엔에 달하는 연금을 받았다. 그는 일본인 가족이자 유족으로서 이 연금을 받는 것에 대해 늘 부담을 느껴왔다. 특히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은 아버지와 유골조차 수습되지 못하고 바닷속에 갇혀 있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의 현실을 대비하며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깊은 미안함을 느껴왔다.
2013년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본명을 찾아 새긴 ‘조세이탄광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를 세운 뒤 유족들의 애절한 호소에 모임은 바다 깊이 잠겨 있는 유골을 발굴하기로 결의했지만, 이 엄청난 일을 시민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을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2014년 처음으로 이노우에 대표를 만났는데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는 어디든 달려간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한국 정부를 찾아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한 뒤에 일본 정부는 외면하는 이 문제에 한국 정부가 귀를 기울여주었다며 감격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그는 전사자 유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여러 차례 교섭을 한 경험이 있는 우에다 게이시 씨(이하 경칭 생략)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사무국장으로 영입하여 도쿄의 의원회관에 수시로 드나들며 의원들을 설득하고 미디어를 동원하여 정부 교섭을 통해 일본 정부를 본격적으로 압박했다.
나는 한국 유족들과 1992년부터 인간관계를 맺어오며 성심성의껏 그들을 대하는 이노우에 대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지역구로 아주 보수적인 지역이다. 그가 이런 풍토에서 유골 발굴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유족들과 30여 년 넘게 맺어온 인간적인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족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현실 앞에서 그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헌신이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9월25일 땅속에 묻혀있던 갱도의 입구가 발견되어 그곳에서 물이 솟아 나오던 순간 관계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이노우에 대표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에다 국장은 2023년 여름 무렵부터 조세이탄광 유골반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나는 우에다 국장과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그는 일본제철 소송의 원고로 2013년 12월에 돌아가신 여운택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오신 분들이 피해자의 묘소까지 찾아간다니 처음에는 의아한 마음도 들었지만, 피해자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맺은 끈끈한 유대감의 깊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집념의 소유자다. 나는 그가 조세이 탄광 희생자의 유골을 찾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드시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한번 일을 추진하면 거의 매일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문자와 메일 등으로 연락한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런 집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싶다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유족들의 호소를 듣고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 사진 한 장밖에 없는 유족의 증언을 단서로 수백 곳의 연금사무소에 전화한 끝에 그는 유족 두 분 부친의 기록을 찾아냈다.
“당시 임금을 받았으면 소 여섯 마리를 샀을 것이고, 그 돈이 있었으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 겁니다.”
1997년 일본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여운택 할아버지가 한 말씀을 그는 늘 마음에 새겨두었다고 한다. 2018년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승소 판결이 내려진 날 우에다는 이미 고인이 된 여운택, 신천수 두 분의 영정을 들고 법정에 들어섰다. 당시 유일한 생존 원고였던 이춘식 할아버지는 승소 판결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함께 싸워 온 동료들이 아무도 없어서 슬프다고 말했다. 그날 승소를 축하하는 자리에서도 우에다는 고인이 되신 피해자분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KBS의 ‘시사직격’이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다룬 ‘춘식의 시간’에는 우에다가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박근혜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이 없었다면 고인이 된 피해자들께서 판결을 직접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다며 한탄했다.
그가 만든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이하 연락회)’는 ‘일본제철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1997)’, ‘한국인 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2001)’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한국에서 ‘보추협’,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대하여 진행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투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군인·군속 희생자의 유골반환 문제를 과제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전사자 유골 조사에서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과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한국인 피해자들의 유골조사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는 이런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식민지배 문제에 관한 관심을 높이는 길이 바로 조세이 탄광 유골수습이라고 확신했고, 유골 조사에 돌파구를 만들고자 모임의 사무국장으로 결합했다. 그는 일본제철 강제동원 소송 원고인 고 신천수 씨와 군인·군속 유족들의 ‘한’이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스며들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지난 8월 9일 나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조선인 2만1천여 명 희생자의 합사 철폐를 위한 ‘야스쿠니 반대 도쿄 촛불 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도쿄를 찾았다. 그곳에서 우에다를 만나 조세이탄광에서 며칠 전에 본 갱도로 들어가는 연결통로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8월 23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되었기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정상회담에 의제에 올려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서 조세이 탄광 유골 발굴에 이재명 대통령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에다 국장이 이노우에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8월 12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다음날 우에다는 도쿄에서 여권을 가지러 오사카에 있는 집에 들러 그다음 날 서울로 날아왔다. 이노우에는 서울로 출발하기로 한 날 규슈 지역에 집중호우가 예상되어 교통편이 끊기면 후쿠오카 공항까지 못 갈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전날 밤 출발해 밤새 동료의 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해 서울로 날아왔다.

두 사람의 이러한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은 5억원에 가까운 시민 모금으로 해저 유골 발굴을 성사시켰고, 이 문제를 일본 사회에 전국적인 이슈로 알렸다.
8월 23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다. 해방 80년, 한일협정 60년을 맞은 뜻깊은 해인 만큼 역사 문제에 대한 진전을 기대했지만, 역사를 덮고 ‘미래지향’을 선언한 듯한 이번 회담에 많은 이들이 크게 실망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아직도 이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희생자의 절절한 외침이 조세이 탄광의 바다 밑에서 이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역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상 밖으로 터져나온 희생자의 절규에 이제 성실하게 대답할 책임이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있다.
• <리영희 네트워크>, 20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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