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나의 스승] ‘평가’보다 ‘수행’에 방점을 찍은 한국사 수행평가를 소개합니다

지필평가를 전후한 수행평가 기간이다. 수행평가는 획일적인 정답을 요구하는 지필평가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중고등학생 대상의 평가 방식이다. 도입 초기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교육의 본령에 부합하는 평가라며 주목을 받았다.
이내 모든 교과에 수행평가가 의무화됐다. 수행평가의 결과로만 성적을 산출하는 교과도 여럿이고, 아예 지필평가를 없애고 수행평가로 대체한 지역도 있다. 고교학점제가 전격 시행되면서 수행평가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내신 반영 비율이 높아진 데다 비슷한 시기에 모든 교과의 수행평가가 몰리다 보니 아이들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수행평가를 폐지해 달라는 청원마저 잇따르고 있다. 이는 전국의 모든 학교가 대입에 목매단 현실에서 ‘수행’보다 ‘평가’에 방점이 찍힌 까닭이다.
서론이 길었다. 내 과목 한국사의 수행평가는 모둠별로 진행된다. 개인별 평가는 지필평가로도 족하다는 생각에서다. 아예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곤 모둠원끼리는 점수가 동일하다. 모둠활동을 요약 정리한 보고서만 제출하면, 반 아이들 대부분 만점을 받는다.
모둠별로 보고서 양식과 함께 주제가 주어지면 교실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왁자지껄해진다. 옆 교실 수업에 방해되지나 않을지 우려될 만큼 토론이 활발하다. ‘무임승차’하는 아이들이 아예 없진 않지만, 기회비용으로 여기고 이를 줄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친일 잔재 찾기 수행평가… ’10인 10색’ 보고서
이번 수행평가 주제는 ‘우리의 일상 속 친일 잔재’로 잡았다. 각자 친일 잔재라고 여기는 걸 찾아, 그렇게 생각하는 나름의 이유를 적게 했다. 그런 뒤 모둠별로 모여,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모둠 내에서 가장 청산이 시급하다고 여기는 친일 잔재 하나를 정해 발표하도록 했다.
스마트 기기는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일단 스마트 기기가 개입되면, 아이들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토론은 맥이 빠지고 만다. 거기에 ‘정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친일 잔재인지 아닌지가 평가 기준이 아니고 상식에 기반 한 합리적인 추론인지를 따져보겠다고 강조했다.
고등학생 수준에선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리라 여겼다. 교과서에도 군가와 행진곡풍의 교가, 일본 천황가의 문장을 본뜬 교표 등이 지금도 수많은 학교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아이들은 반장과 부반장이라는 용어조차 친일 잔재였다며 놀라워했다.
모둠활동 보고서는 말 그대로 ’10인 10색’이었다. 일상생활에 스며든 일본식 용어와 전체주의적 군사 문화 등 예상했던 주제부터 천편일률적인 교복과 조회 의식, 학교장의 학생회장 임명장 수여 등을 친일 잔재로 꼽기도 했다.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모습이 자못 대견했다.
친일 잔재라는 말의 의미부터 낯설어하는 아이도 물론 있었다. ‘스시’나 ‘모찌’, ‘오뎅’ 등을 손꼽는 아이들이 그런 경우다. 멀쩡한 기찻길과 도로, 항만 시설을 친일 잔재로 규정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면 모두 친일 잔재 아니냐며 엉뚱한 반문까지 늘어놓았다.
모둠별 수행평가를 진행하다 보면, 교사인 내가 아이들로부터 깨달음을 얻게 될 때가 많다. 배움은 교과서에만 있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는 거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끼리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지식을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교사로서 뿌듯하다.
일제 식민 지배 없었다면 전쟁 없었을 것이란 아이들

한 모둠은 보고서에 6.25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가 대표적인 친일 잔재라고 적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없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이어 일제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단선이 그어졌으니, 이보다 더한 친일 잔재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명문대와 일부 보수 언론들을 친일 잔재로 손꼽은 모둠도 있었다. 서울대가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고, 고려대의 설립자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 등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점을 꼬집은 거다. 일제에 부역한 언론사가 어디인지는 이미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아예 ‘대한민국 자체’라고 쓴 모둠도 있다. 광복 후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고, 이승만 대통령도 그들과 공생하면서 되레 독립운동가가 핍박을 받고 친일파가 승승장구한 나라가 됐다며 그 이유를 댔다. 말미엔 ‘친일 잔재가 청산되는 날이 대한민국의 진짜 건국일’이라고 적었다.
정반대의 당혹스러운 주장도 있다. 개중엔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음’이라고 적은 보고서가 눈에 띈다. 해당 모둠의 논리는 단순하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파는 모두 죽었고, 지금 남은 건 철도와 도로 등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근대 문물뿐이라고 설명했다.
곧 건설 당시엔 식민지 수탈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해도, 광복 후에는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었다는 뜻이다. 근대 문물은 ‘청산’이 아닌 ‘활용’의 대상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아가 친일 잔재에 대한 맹목적 비난보다 공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모둠 내 토론은 친일파에 대한 은근한 두둔으로 수렴됐다. 광복 후 미군정이 중용할 만큼 지식 계층이었던 친일파가 모조리 처단됐다면, 대한민국의 발전이 불가능했을 거란 설명이다. 친일 지주와 지식인들을 일망타진한 북한이 ‘저 모양’인 걸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거다.
애먼 북한의 현실까지 끌어와 친일파를 옹호하는 아이들의 인식은 분명 바뤄야 할 일이다. 다만, 일방적 강의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다. 수행평가 등을 활용해 또래끼리 활발한 토론을 통했을 때라야 부작용이 없다.
수행평가 도입 취지 되찾으려면, ‘평가’ 부담 덜어내야
이번 수행평가의 주제와 모둠별 활동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모둠마다 딴청 피우는 아이가 거의 없었고, 서로 언성을 높일 정도로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수행평가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모두 토론에 열중했다. 작성해야 할 활동 보고서도 뒷전이었다.
노파심에 한마디 얹자면, 언제부턴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수행평가가 도입 취지를 되찾기 위해선 ‘평가’라는 용어가 주는 부담을 덜어내야 한다. 수행평가는 기실 강의식 수업의 변화를 이끄는 도구로 설계됐다. 정작 수업과 ‘따로국밥’이라면 수행평가가 존속될 이유는 없다.
이번 수행평가의 압권은 ‘역사가 밥 먹여 주느냐는 우리 국민의 천박한 역사의식’이야말로 대표적인 친일 잔재라고 밝힌 보고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의 어록을 그 이유로 덧붙였다.
사족. 공교롭게도 9월 22일은 1948년 제헌 헌법의 규정에 따라 ‘반민족행위 처벌을 위한 특별법(반민법)’이 제정된 날이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안 된, 이듬해 6월 6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친일 잔재 청산의 국민적 열망은 물거품이 됐다. 무려 77년이나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을 수행평가 주제로 삼는 현실이 착잡할 따름이다.
서부원 기자
<2025-09-23>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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