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운로드: [보도자료] 250804_보도자료_민족문제연구소,_독립운동가_37명_포상_신청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80주년을 계기로 체계적인 독립유공자 발굴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연초부터 조사·연구에 착수했다. 6개월간에 걸친 작업 끝에 우선 1차로 37명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밀 행적 검증을 완료하고 지난 6월 30일 국가보훈부에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짧은 기간에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연구소가 구축해온 방대한 인물·단체 정보 DB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간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일제협력단체사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이하 약명부) 등 다수의 사전류를 발간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수집·정리한 자료정보로 근현대 인물·단체 조회시스템을 운용 중이다.
이번 발굴보훈의 분석 대상은 202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약명부』에 실린 인물들이다. 『약명부』는 일제 고등경찰이 요주의 조선인에 대한 인물정보를 각 도별로 정리해 일본과 조선 등지의 보안 관계자 그리고 연안·국경 지역의 경찰서와 헌병대 치안 책임자에게 배포한 문서철이다. 1945년 3~4월 무렵 작성된 『약명부』에는 모두 790명의 신상 정보와 함께 당시 주소와 직업, 항일 행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일제판 블랙리스트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을 입증할 강력한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중요자료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검토 결과 이 중 168명은 서훈이 되었으나, 독립운동 업적이 명백하고 흠결이 없는 상당수가 포상에서 빠져있음이 확인되었다. 연구소는 1차로 전라남도 관할 인물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했다. 전라남도 관할에는 206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미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인물 59명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소는 나머지 147명 중 국가보훈부의 현행 서훈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을 선별하는 작업을 먼저 진행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정부보고서에 수록했던 이선홍, 강영석 같은 친일파는 물론, 1945년 현재 ‘면서기’, ‘면장’ 등 부일 협력 행적이 있는 사람들까지 조사대상에서 제외했다.
최종적으로 일제에 의해 ‘처벌’ 받은 기록이 있는 59명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삼아 정밀검증에 들어갔다. 그 결과 이 가운데서도 친일 행적이 확인된 13명, 해방 후 행적이 논란이 될 수 있는 9명을 제외하고 37명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하게 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서훈 신청에 포함된 인물들의 항일 행적은 물론 결격 사유가 될 만한 부일협력행위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검증하였으므로 국가보훈부의 서훈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하리라 본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연차계획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발굴보훈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별첨 1. 포상 신청 인물 소개]
이번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처벌받았다. 1925년 4월에 공포되어 5월부터 시행된 치안유지법은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우려해 만든 치안유지법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독립운동 탄압에도 적용됐다. 일제는 식민지 독립이 그들의 ‘국체’ 변혁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독립운동에도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처벌했다.
1. 곽사길과 이영식은 이른바 ‘전남운동협의회 재건’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둘은 전남 완도 고금면 사람이다. 곽사길은 관산리, 이영식은 장용리에 살았다. 약산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경성에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왔다는 공통점도 있다. 나이는 곽사길(1915~?)이 두 살 많다.
곽사길 등이 재건 활동을 했다는 ‘전남운동협의회’는 전남 해남과 완도, 장흥, 강진, 영암 지역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결성한 협의기구였다. 각자 지역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이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을 지도할 기구로서 결성한 것이다. 1933년 5월에 만들어져 지역별 적색농민조합 건설을 진행했지만 1934년 2월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아 조직이 와해됐다.
이영식은 1934년 6월부터, 곽사길은 1937년 3월부터 전남운동협의회 재건 활동을 했다. 동지들을 모으고 일본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몰락과 무산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며, 무산 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빈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야학을 설치해 무산아동을 교육했다.
곽사길은 1938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이영식은 1939년 어느 때에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의 취조를 받다가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넘어간 것이 1939년 9월 14일, 예심에 회부된 것이 9월 22일이었다. 그리고 광주지방법원에서 1심 판결이 나온 것이 1941년 8월 6일이었다. 곽사길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이영식은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약명부』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45년 현재 완도 고금면의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 완도군 고금면 ‘고금항일운동충혼탑’에는 “1931년경 고금면 일부 사회운동가 등이 농민조합 설립에 앞장서고 농민야학 등을 조직하여 농민개화운동이 완도군 일원으로 전파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음. 특히 총독부의 고금 용지포 공유수면매립허가에 대항하기 위해 용지포 옹호동맹을 조직하고, 허가권을 쟁취하고자 투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는 농민운동 취지문과 함께 활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곽사길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 약산항일운동기념공원의 약산항일운동기념탑에는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을 설명하며 이영식, 곽사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 사진 출처 : 인터넷 블로그 앨범쟁이 근대사 사적지 탐방
이처럼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는 인물이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곽사길의 아들 곽정기의 영상을 찾게 됐다. ‘남북이산가족찾기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업로드된 영상편지였다. 80세가 된 아들이 북측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곽사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해방 후 곽사길이 어떤 경로로 북한 쪽에 살게 됐고, 그것이 곽사길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지체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2. 『약명부』에는 제주도 출신 현호진(1908~?), 현호경(1910~?) 형제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 성산면 성산리 237번지를 본적과 주소로 적었다. 
언론에서 형제의 이름은 여동생 현호옥과 함께 등장한다.(한겨레 2019.8.13) 2019년 광복절에 현호옥(1913~1986)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현호옥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기사에는 아버지 현길홍은 1930년대 오사카-제주 간 일본 기선의 횡포에 맞서 ‘우리 배는 우리 손으로’ 라는 기치 아래 여객선을 띄웠던 동아통항조합의 조합장을 지냈고, 오빠 현호진과 현호경도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의 ‘동아통항조합’ 항목을 찾아보면 식민지 시기 제주 사람들의 일본 도항(渡航), 제주와 오사카 사이의 정기 항로, 고액 운임과 나쁜 대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그래서 조선 사람 손으로 정기여객선을 운영하려는 운동, 그리고 고순흠, 김문준, 현길홍 등의 활동이 잘 나타난다. 현길홍은 민족교육기관인 나니와야학원도 운영했다.
현호진 삼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 한 가족이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케이스로 보인다. 그곳에서 삼 남매는 아버지와 더불어 재일조선인들의 생존, 노동계급의 권리 확보를 위해 분투했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에서 현호진은 1933년 ‘전협토건 간사이지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한다는 언급이 있고, 현호경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약명부』기록을 토대로 현호진과 현호경의 활동을 추적했다. 현호진과 현호경은 1925년 10월에 일본에 건너갔다. 현호진은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전협화학 오사카지부, 전협화학 효고현지부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33년 4월 체포되었는데, 기소되지는 않고 두 달 만에 풀려났다. 현호경은 전협화학 오사카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공산당에 입당, 1933년 5월에 체포되어 1935년 1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복역했다. 『약명부』는 두 사람이 1945년 현재 제주도 고향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현호경은 포함하지 못했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는 현호경이 “해방 후 귀국하여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12월 결성된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에 가입하여 지도부로 활동하였다. 남로당의 ‘3·1 사건 대책 위원회’의 조사부장을 담당하였다. 남로당 목포시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9년 암살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위 현호진 가족의 사례처럼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 건너가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 포상 신청에서도 그런 사례를 더 찾아볼 수 있다.
김상구(1891~?)는 일본 오사카에서 이마후쿠조선노동조합,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오사카지회의 핵심 위치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1926년 6월에는 극렬 친일단체인 상애회 쪽과 폭력 충돌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4월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아 복역했다. 특히 1929년 2월 신간회 오사카지회장에 옥중 당선되기도 했다.
박태을(1905~?)은 일본 도쿄에서 활동했다. 도쿄조선노동조합,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1929년 일본 경시청에 검거된 박태을은 1931년 3월 도쿄지방재판소, 1932년 8월 도쿄공소원에서 재판을 받은 끝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 받아 복역했다. 1934년 4월 아키타형무소에서 출감한 뒤 1935년 11월에는 이운수, 김두용, 김천해와 함께 ‘조선신문사’를 창립했다. 조선신문사는 한글신문인 『조선신문』을 간행했다. 1936년 다시 일본 경시청에 체포된 박태을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약명부』에 의하면 1945년 현재 박태을은 일본 도쿄시 나카노구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데는 연구소가 2021년에 펴낸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에 큰 도움을 받았다.
4. 윤석원이 제주경찰서에 체포된 것은 1932년 5월 4일이었다. 경찰 조사를 거쳐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에 넘겨졌고, 검사는 5월 23일에 윤석원을 기소 처분하며 예심을 청구했다. 예심종결결정이 나온 것은 1932년 11월 30일이었다. 예심결과는 윤석원을 재판에 회부하라는 것이었고, 윤석원은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이튿날 풀려났다.
윤석원이 체포되어 풀려날 때까지 걸린 기간은 396일이었다. 윤석원은 이 기간에 대한 형사보상을 청구했다. 1933년 7월 20일 윤석원의 청구는 당연히 기각됐다.
윤석원의 혐의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약탈해 식민지로 삼고 농민을 압박하고 착취하므로 조선인이 결속해 혁명적으로 투쟁할 것 등 과격한 좌익운동방법이 기록된 원고를 전달받아, 이를 옮겨 써서 잡지에 게재해 사회에 발표하려고 협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경찰과 검찰 조사, 예심을 거쳐 1심 재판 때까지 그대로 인정됐다. 그렇지만 2심 재판부는 부탁을 받아 일부를 옮겨 적다가 그만두고 돌려보냈다는 윤석원의 진술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원고를 옮겨적었다는 증거물의 필적이 윤석원의 것과 다르다는 점, 예심 조사에서 원고를 옮겨 적었다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눈앞에 증거물이 있으며, 함께 조사한 피의자들의 진술이 상충되는 것을 예심에서 1심 판결 단계까지 모두 무시한 것이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복역한 윤석원의 경력에다가 일제 형사 당국이 ‘제주 혁우동맹’이란 비밀결사를 처벌하려는 목표에 몰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일제 재판부는 윤석원의 형사보상청구를 왜 기각한 것일까. 396일 동안 죄가 없는 사람을 가둬뒀다면 그 기간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재판부는 이렇게 밝혔다. 경찰, 검사, 예심을 거치는 동안 윤석원이 「도항노동자와 동아통항조합」이란 원고를 썼다고 인정하며 구속 상태에 있었고, 1심 재판에서도 그러했으므로 그것은 윤석원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형사보상법 제4조를 들었다. 윤석원이 재판을 그르칠 목적으로 고의로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5. 친일 흠결이 있는 독립운동가는 포상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연구소는 59명을 조사해 그 중 13명의 친일 행적을 확인, 포상 신청에서 제외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활동 : 강영수, 김판권, 김부득, 정순화, 박준오, 윤주응
– 대화숙 활동 : 김석준, 정경인
– 면협의회원 : 신광희
– 조선식량영단 : 조주현(조운)
– 조선임전보국단 : 선태섭
–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포교계 제출, 『綠旗』 기고 글 : 정경옥
– 생활필수품소매상조합 이사 : 박영진
그런데 위 사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미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사실을 서훈 심사와 재평가 작업에 참고해달라고 국가보훈부에 알렸다.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일람』(1940.1) 중 光州支部 소속 인물을 확인함

[별첨 2. 포상 신청 인물과 공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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