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인혁당 사건 관련 자료
한승헌 변호사
1975년 4월 9일 새벽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번 호에는 사법 살인 당한 피고인 중 한 분인 여정남의 항소심 변호를 맡았고 3월 21일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인혁당 피고인들과 같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4월 9일 구치소 호송차에서 관련자 가족과 지인들이 오열하는 광경을 직접 목도했던 한승헌 변호사가 인혁당 1차, 2차 사건을 정리한 칼럼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 : 인혁당 사건(상, 중)」(『경향신문』 2015.4.19·4.26)을 전재한다. ―편집자주
인혁당 사건(상)
학생운동에 붉은 색칠, 1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두 번 있었다. 1964년에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에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1974년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통상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면, 여덟 분의 억울한 형사(刑死)를 빚어낸 후자를 가리킨다.
먼저 1차 인혁당 사건부터 살펴본다. 당년 44세의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쓰러뜨린 뒤, 민정 복귀의 공약을 어기고 군복만 벗은 채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무단통치와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국민 각계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중에서도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격렬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아울러 당시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박 정권은 학생들을 대거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 기각당하자 한밤중에 무장 군인들이 법원과 영장 담당 판사의 집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 특히 대학가의 항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르자 정부는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산당 내지 불순세력이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며 학생운동에 ‘적화’의 색칠을 하고 나선다.
수사검사들의 기소 거부와 사표 파동
마침내 중앙정보부(중정)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도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에 따라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지하조직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수배 중이라고 했는데, 그들에겐 정당 발기인 모임, 강령 규약 채택, 북괴 중앙당에의 창당 보고 및 지령에 의한 학생조직 강화 등의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이 사건은 그해 8월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하여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등 네 검사가 총동원되어 전력을 다하여 수사했으나,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이에 놀란 검찰 상부와 중정 측이 당황한 나머지 수사 검사들에게 어떻게든지 기소하도록 온갖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자 중정 차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의 명령에 따라 서울지검은 구속 만기가 되는 날의 당직 검사 명의로 그 사건을 기소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세 검사는 사표를 냈다. 법무장관은 국회에 불려나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려고 기소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이러한 불기소 항명파동은 용기 있는 검사들이 당시 중정의 막강한 위세에 검사직을 걸고 맞섬으로써 검찰의 위상을 지켜내고자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뇌와 중정의 밀착으로 사건이 변칙 기소됨으로써 검찰의 권력 예속성을 실증한 치욕적 일면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의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한 수사 검사들의 소신과 용기를 잠시 ‘다시 보기’ 해본다. 그들은 수사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검사장과 검찰총장에 이어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권모 법무부 차관은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 요?”라고 다그쳤다. 그 뒤 검사장은 “당신들은 기소를 하든지, 옷을 벗고 나가든지 택일하라”는 말도 했다. 그래도 검사들이 굽히지 않자 검사장은 구속 만기일 전에 무조건 기소하라는 엄명과 함께 끝내 기소를 못하겠다면 공소장이라도 작성해달라고 사정했다. 검사들(부장검사 포함 4인 중 3인)은 이것마저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이용훈, 「사필귀정의 신념으로」, <한겨레> 2005.10.5).
김형욱의 강공에 당직 검사 이름으로 기소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은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 단 한 명이라도 기소해야 한다’는 말로 검찰을 압박했다. 검찰 상층부에서는 서울지검 차장검사의 이름으로 기소하도록 지시했으나, 그(여운상 차장검사) 또한 이를 거부했다. 당황한 검찰 내부에서는 구속 만기 날 서울지검 당직 담당 A검사로 하여금 중정의 사건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서 공소장을 작성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소하게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A검사는 얼마 후 중정 5국 부국장으로 기용되었다.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는 사표 수리의 형식으로 면직되었다(나도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 재임 중이어서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와 감동을 체험했다).
그런데 김형욱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표를 내던져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의 정의감과 용기를 나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은 살아 있는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었다.”(김형욱, 『김형욱 회고록』 제2부, 1985)
이것이 김형욱의 사건 당시 생각이었는지, 20년 후 회고록을 쓸 때의 생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수사 검사의 한 사람이었던 장원찬은 이런 비화도 술회했다. “기록 보따리를 들고 검사장실에 들어갔다. 그때 공안검사 중 한 명은 화장실에 간다며 들어오지도 않았다. 검사장은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고, 역정도 냈다. 세 사람은 사표를 제출했다. 화장실에 가느라 사표를 내지 못했던 검사는 상대적 공로(?)를 인정받았다.”(<한국일보> 2003.5.9)
재조사 후 14명 공소 취소, 12명은 죄명 바뀌어
이 사건을 둘러싼 물의는 기소 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기소된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정에서 나체로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했다는 사실과 이에 따르는 사건 조작설이 퍼짐에 따라 수사당국의 입장이 크게 몰리는 국면으로 빠져들어갔다. 할 수 없이 검찰은 서울고검의 한옥신 검사로 하여금 고문 및 허위진술 강요 등에 관한 재조사를 하게 한 후, 피고인 26명 중 14명은 공소를 취소하고 석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당초의 반국가단체구성죄(국가보안법 위반)를 철회하고 추가 구속자 1명과 함께 (13명에 대해)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죄(반공법 위반)로 공소장을 변경하여 법정형을 낮추었다(『해방 20년사』, 희망출판사, 1965).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1965년 1월 20일 열렸다. 도예종은 징역 3년, 양춘우는 징역 2년, 나머지는 무죄였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달랐다. 그해 6월 29일 선고된 2심 판결은 도예종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전원 유죄로 뒤집힌 판결이었다. 같은 해 9월 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중정과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대결(?)은 그 과정이나 결말에 있어서 피차 절반의 승리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수사 검사들의 유례없는 소신 싸움은 이 나라 검찰사에 빛나는 자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10년 후에 재현된 ‘인혁당 재건위’ 올무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는 1972년 헌정을 중단하고 국회도 아닌 비상국무회의와 국민투표라는 헌법 밖의 수법을 써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영구 집권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반유신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흉기로 대통령 긴급조치를 연발하였으니, 1974년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그때 이철, 유인태, 이강철 등과 지면이 있는 경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여정남을 민청학련 사건 그룹에 ‘배치’하여 인혁당 재건위와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그런 구도 속에서 중정은 “인혁당 재건위가 북괴의 조종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한다. 즉 중정부장 신직수가 4월 25일 수사 결과 발표에서 민청학련을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가 그 배후세력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난번의 ‘긴급조치 4호 사건’에서 살핀 바와 같다. 10년 전에 사건을 조작했다가 수사 검사들의 기소 거부 파동을 겪으면서 호되게 쓴맛을 본 중정은 다시금 예전의 그 사람들을 검거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확대판을 ‘재건’한다. 중정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주동의 국가변란기도사건’의 추가 발표에서 “서도원, 도예종 등은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군 검찰은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송치된 21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 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긴급조치 4호를 적용했기 때문에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이 되어,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서 공소 제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 1차 인혁당 사건 때와 달랐다.
적법한 물증 없고,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만
군법회의 심리에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적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일부 피고인들의 자백이 있을 뿐이었는데, 이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짙었다. 요컨대, ‘재건위’ 관련자들의 활동이 국가변란을 기도했거나 민청학련의 배후로서 작용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거기에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 자체가 실재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오직 학생들의 유인물에 들어간 발표 명의에 불과했음은 지난번 ‘민청학련’ 부분에서 살핀 바와 같다.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와 부합하는 교도관의 증언도 나왔다. 군 검찰의 조사에서 ‘중정에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이런 반국가사범이라는 혐의를 쓰고 군사법정에 서게 된 비운의 피고인들은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모두 21명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접목시킨 여정남 역시 ‘인혁당 재건위’와 운명을 같이할 징후가 보였다.(<경향신문> 2015.4.19)
인혁당 사건(중)
공판조서 조작 항의한 변호사도 연행
인혁당 사건은 수사~재판의 전 과정이 위법·불법 시리즈의 연속이었다. 중정에서의 온갖 고문에 의한 진술 조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다 군 검찰 조사에도 중정 직원이 동석하거나 중정으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이 가해져 피의자는 검찰관이 중정의 의견서를 보며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면회(접견)도 일절 금지되었고,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되었다. 법정에서의 자유롭고 충분한 진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 ‘아니요’ 식의 답변만 허용되었다. 한 피고인이 자신의 진술서는 중정에서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하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직도 충분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말한 검찰관도 있었다. 검찰관이 신청하는 증인은 모두 채택되어,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모르게 수명(受命) 법무사가 비밀리에 증인 신문을 했다. 반면, 변호인이 신청하는 증인은 채택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한 대목도 공판조서에는 시인한 것으로 허위기재가 되어 있었고, 이를 항의한 변호인들(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이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4> 202쪽 이하,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7).
74년 사건, 10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의 악연
여기서 잠시 제1차 인혁당 사건(64년 사건)과 제2차 인혁당 사건(74년 사건)의 유사성, 연관성, 그리고 차이점을 살피는 일도 사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그 상황적 배경이 거의 같다. 두 사건 모두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격렬해졌을 때 그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이 내세워졌다. 그리고 학생 시위가 북괴 내지 공산세력의 사주로 국가전복이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삼았다고 했으며, 두 사건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사건 수사의 지휘부를 이루고 있었다. 즉 64년 사건 때 중정 차장이었던 신직수와 인혁당 사건 담당 중정 요원이었던 이용택이 74년 사건 때는 각 중앙정보부장과 중정 6국장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이런 줄기찬 악연에서 두 사건을 조망해보는 안목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 때 공안부 검사들의 불기소 항명으로 고역을 치르며 체면을 구긴 두 사람이 ‘10년 만의 보복’을 한 것이라는 잠재 심리 분석이었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6).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 수사를 맡기고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한 것도 64년 사건의 ‘학습효과’에서 나온 지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보다 주목할 만한 차이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에 비해 74년 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또는 지명도가 덜한) 인물들을 추가시켜 그만큼 사회적 관심을 덜 끌겠다는 의도가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74년 사건이 발표된 뒤 몇 달 동안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 점에 대해서 기독교(개신교) 일각에서 반성하는 움직임이 늦게나마 머리를 들었다.
1심, 사형 7명 등 역시 ‘정찰제 판결’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그해(1975년) 7월 2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을 선고했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은 사형(여정남은 이 사건이 아닌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종대 등 8명은 무기징역, 이창복 등 6명은 징역 20년이었다. 검찰관의 구형량과 똑같은 ‘정찰제’ 판결이었다. 이보다 이틀 뒤(7월 23일)에 선고된 민청학련 32명 그룹에 대한 판결 형량은 이 연재 지난번 치에서 알려 드린 바와 같다.
군법회의 판결은 소위 설치장관의 확인조치를 거치게 되어 있어서, 앞서의 민청학련 그룹의 사형수들은 국방부 장관의 확인조치에서 7명 중 5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여정남과 이현배는 ‘원판결대로 확인’이 되었다.(그런데 이현배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여정남만 계속 사형수로 남아 불안을 키웠다)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는 위의 두 사건을 병합 심리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여정남의 변호인이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1심의 법정 변론이 문제가 되어 구속당했기 때문에 내가 대타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여정남의 수난, 인혁당 사건의 축소판
여정남의 항소이유서에 의하면, 그가 당한 수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고인들이 겪은 불법과 야만의 축소판이었다. “긴급조치 하인데 법이 무슨 필요냐? 정보부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어느 정도는 시인해야지, 안 그러면 재판 도중이라도 끌어내다 박살낸다”는 협박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혼미해진 가운데 부르는 대로 받아써야 했던 정황을 폭로하기도 했다. 시기의 선후가 맞지 않는 말을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기에, 조작을 해도 좀 똑똑히 하라고 했더니, 수사관이 ‘네 말이 맞다, 피의사실과 다르게 불렀군, 내가 잘못 불렀다’라며 틀린 것을 자인(?)하더라는 희극의 한 장면도 있었다. (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실제 진술과 다르게,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로 조서가 작성된 것을 알면서도 강제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이름을 쓰고 무인(拇印. 손도장)을 찍어야 했던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대구의 여정남이 서울에 올라와 이철, 유인태를 사주했다고 하는 시나리오도 유인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변명의 여지를 잃고 말았다.
처음엔 민청학련을 인혁당 배후로 설정하려다
즉, 중정 수사관들은 소위 인혁당의 배후조종과 관련하여, “처음엔 ‘내가 여정남에게 모든 것을 지령했다’고 쓰라고 하기에 ‘이분은 선배인데 어떻게 내가 지시를 합니까?’ 했더니 ‘인마, 선배 좋아하지 마. 너희 서울대 애들은 지방대 애들을 우습게 알잖아?’라며 막무가내로 (그렇게 쓰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면서 거꾸로 내가 여정남으로부터 모든 지시와 지령을 받았다고 바꿔 쓰라고 윽박질렀다. ‘그 사람이 나이는 많지만, 서울의 학생운동 사정에 어두운데 내가 무슨 지시를 받는단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이 새끼야 잔말 말아. 그래도 선배잖아!’ 이렇게 해서 소위 인혁당과의 관계가 생긴 것이다.”(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 사건>-『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2』, 2006).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에게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든가,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는 것도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나 다른 피고인이 시인했으니 너도 시인해야 한다느니, 그렇게 부인하면 정보부로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검찰관이 불러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실토를 했다.(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라는 ‘가설’은 이렇게 해서 발표되었던 것이다.
사실심리도 봉쇄한 2심 재판의 허울과 위법
두 사건을 병합한 항소심은 피고인의 진술과 변호인의 반대신문, 증거신청이나 이의신청도 봉쇄, 묵살한 채 일사천리의 속도전으로 시종했다. 그리고 판결도 김종대, 전재권 두 피고인이 무기에서 20년 징역으로 감형된 것 외에는 모두 1심 그대로였다. 2심에서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고 폭주할 때 모두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문에 보면 ‘살피건대 일건 기록과 원심에서 적법하게 조사한 증거들을 모두어 보니 원심이 판시한 각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들은 이를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달리 원심이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거나 그 사실 인정 과정에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잘못을 찾아볼 수 없음으로 논지 모두 이유 없다’는 기계적인 부동문자 몇 줄의 나열로 ‘묻지마’ 유죄를 포장해 놓고 있다. 오죽하면 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가 불문곡직하고 상고기각으로 끝장날 때에도, 유일하게 원심 파기 환송 의견(이른바 소수의견)을 낸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이런 지적을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사실심리를 하지 아니하고 재판을 한 절차상의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
대법원 사형 확정 직후의 울부짖음과 나
이 사건이 상고심에 걸려 있는 동안, 유신헌법에 대한 난데없는 국민투표가 강행된 후 정부가 말하는 ‘일부 공산주의자 내지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구속집행정지(미결수) 또는 형집행정지(기결수)로 석방되었다. 그것이 2월 17일이었는데, 한 달쯤 뒤인 3월 21일, 나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내가 변호하던 여정남을 포함한 인혁당 피고인들과 같은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 공판날이 하필이면 4월 8일, 바로 인혁당 사건의 상고심 판결이 예정된 날이었다. 서울 서소문동에 있는 법원 건물 앞마당에서 인혁당 사건의 가족과 친지, 각계 인사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성하다시피 절규하고 통곡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나는 구치소 호송차 안에서 수갑을 찬 채 바라보아야만 했다. 사형수들에 대한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음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오전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인혁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피고인 38명 중 2명을 제외한 36명에 대한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등 8인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던 것이다. 선고에 단 10분도 채 안 걸렸다. 법정 내에는 ‘전부 조작이다’라는 절규가 튀어나왔고, 북받쳐 오르는 비통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울부짖음으로 넘쳐났다.
이 판결을 놓고 사법부의 변질을 논하는 견해도 나왔다. 즉, 한 사학자는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던) 10년 전의 사법부와 유신체제의 사법부는 크게 달랐다. 1960년대 후반에 조금씩 권력에 종속되던 사법부는 1971년 사법부 파동을 거치며 독립성이 아주 약해졌다’며, 당시 법관의 임명 보직권을 대통령이 갖고, 그해 3월 대법원 판사 15명 중 9명이 재임명에서 탈락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서중석,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과 박정희 유신체제>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백서 1권』, 4·9평화통일재단, 2015).(<경향신문> 2015.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