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와 맞물린 경성조차장(수색역)의 건립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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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5]

겉시늉으로만 남겨놓은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 묘비석(1940년)’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와 맞물린 경성조차장(수색역)의 건립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경의중앙선 화전역(花田驛, 2023.11.21일에 ‘한국항공대역’으로 개칭)에 내려 지하통로를 따라 항공대 운동장 방향으로 올라가면, 이곳에서 남동쪽 수백 미터 남짓한 지점에 ‘화전동공동묘지(경기도 고양특례시 덕양구 화전동 633-9번지 일대)’가 나타난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지난 2019년 11월에 고양시에서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성한 ‘기림의 길’이 죽 이어진다.

이 길의 끝에서 약간 휘어진 언덕길로 올라서면 이름 모를 무덤들 사이에 제법 큼직한 비석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 전면에 이르기를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가 소화 15년(1940년) 3월에 세운 것이라는 표시가 남아 있다. 이를테면, 이 비석은 일제가 수색역(水色驛) 일대에 대규모 경성조차장(1939년 5월 13일 기공)을 새로 조성할 때에 그 공사구역 안에 포함된 묘역들 가운데 기한 내에 이장(移葬)하지 못한 무연고묘지를 일괄처리하면서 만든 합장묘비인 것이다.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의 비문 풀이

하지만 비석 뒷면에 용지매수 대상지 여섯 곳의 지번은 그럭저럭 표시되어 있으나 이것과는 달리 정작 몇 기의 무연고무덤이 처리된 것인지를 나타내는 자리는 아예 공란(空欄)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묘비조차도 얼마나 형식적으로 만든 것인지가 여지없이 잘 드러난다. 그저 연고도 없는 조선인의 불쌍한 혼령을 위한 묘비를 세워주었다는 사실만 생색을 낼 따름이지 이 묘비석에는 아무런 알맹이도 담겨있지 않고, 더구나 그들의 선의와 진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 단지 성의 표시를 가장한 — 겉치레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느닷없이 경성조차장의 신설문제가 표면에 불거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조차장(操車場, Classification yard)은 화차 및 객차 등의 철도차량을 한 열차에서 분리 또는 이동시켜 행선지별로 분류하고 이를 새로운 열차편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인공적인 언덕을 만들어 열차가 중력에 의해 스스로 굴러가면서 분류위치로 이동하는 시설을 갖추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형태를 가리켜 ‘험프식 조차장(坂阜式 操車場; hump yard)’이라고 한다.

일찍이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날로 폭증하는 철도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평양역과 용산역에 대규모 조차장의 신설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특히 경성 쪽에서는 서빙고역(西氷庫驛) 구내 약 1만 평의 기지와 한강(漢江) 공유수면 매립예정지 약 8만 평을 확보하여 이곳에다 처리용량 2천 량(輛)에 달하는 조차장을 세우는 계획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송력(輸送力)을 대폭 증가시켜 대륙침략을 용이하게 뒷받침하도록 새로이 경성, 평양, 대구, 부산, 원산 등 5개소에 거대한 조차장을 신설할 방침을 세우고 이 가운데 경성조차장의 건립 후보지로 경의선 수색역(京義線 水色驛)을 선정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1937년 6월이었다. 새로 짓는 경성조차장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타바다역(田端驛)과 이케부쿠로역(池袋驛)을 훨씬 능가하는 최신 설비를 갖출 예정이며, 이 과정에서 경성역(京城驛)과 용산역(龍山驛)에 체류하는 객화차(客貨車)는 전부 이곳으로 집중시키는 대신에 경성과 용산 두 곳은 여객역으로 삼아 그 기능을 최대한 원활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조선철도상황 제30회(1939년 12월)』에 정리되어 있는 ‘조차장 신설 현황’이다. 여기에는 경부선 및 경의선의 복선공사와 연계하여 각 지역의 조차장 건설이 추진되는 가운데 “경성조차장이 전년도에 이어 계속하여 용지를 매수하고 토공공사가 시행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가 경성조차장의 설치를 서둘러야 했던 시대적 배경 요인으로는 이 당시 무엇보다도 경부선 복선공사(1936년 7월 7일 착공), 경의선 복선공사(1938년 7월 착공), 중앙선 신설공사(1936년 11월 3일 착공)가 잇달아 진행중이거나 예정 상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여기에다 압록강 제2철교 부설공사(1936년 12월 9일 기공)와 안봉선(安奉線, 만주 안동~봉천) 복선부설과 연계하여 이른바 ‘선만일여(鮮滿一如)’의 기치 아래 조선과 만주를 잇는 대동맥(大動脈)으로서 국제간선철로(國際幹線鐵路)의 위상에 걸맞은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일이 매우 긴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조선신문』 1937년 11월 25일자에 수록된 「약진선철(躍進鮮鐵)에 박차(拍車), 수색(水色)에 대조차장 건설(大操車場 建設)」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조선국철(朝鮮國鐵)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군사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일만일여(日滿一如)의 추요사명(樞要使命)을 담당하여 인사(人事)의 왕래착(往來著)이 증가하여 왔으며, 우선 금회(今回)의 일지사변(日支事變) 때문에 국철 본연의 사명 위에 일층(一層) 중대성(重大性)을 더해오는 동시에 저 12년 계획안(十二年 計劃案)의 완성기(完成期)도 3년 후에 다가오는데 다시 작년에는 의회(議會)의 협찬(協贊)을 얻어 중앙선(中央線)의 신설(新設)에 이어서 경부 경의선(京釜 京義線)의 복선공사(複線工事) 등 역시 철도국(鐵道局)도 작년 이래 글자 그대로 전종사원(全從事員)을 동원(動員)하여 어지럽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명년도(明年度)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동국(同局)의 현안(懸案)으로 되던 경의선 수색 부근(京義線 水色 附近)의 대조차장 건설(大操車場 建設)에 취현(取懸)하는 것으로 되었다. 즉 이 조차장 건설계획은 소화 15년도(1940년도)까지 완성하고 총공비(總工費) 7백여만 원(圓)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예정지는 평양, 대전, 대구, 부산, 경성의 5개소이며, 이 가운데 가장 속급(速急)을 요하는 곳으로 경성 즉, 수색 부근에 2백여 만 원을 던져 조차장의 건설이 명년도부터 착수될 것이다. 이 수색조차장은 경의, 경부선을 주안(主眼)으로 하여 장래는 경원선(京元線)도 필수적으로 함유(含有)하는 것인데, 완성(完成)하는 그날에는 북지 북만(北支 北滿)으로 흘러가는 대량화물(大量貨物)의 조차(操車)에 획기(劃期)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따라 1939년 5월 13일에는 경성조차장 건설을 위한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전체 45만 평에 달하는 구역을 4공구(工區)로 나눠 진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일보』 1939년 3월 24일자에 게재된 「철도관계 대공사(鐵道關係 大工事), 최근 1개월간 낙찰 거액(落札 巨額)」 제하의 기사를 보면, “경의선 경성조차장 제3공구는 123만 원에 하자마구미(間組)”, 그리고 “경의선 수색조차장 제4공구는 93만 원에 야마모토구미(山本組)”가 각각 낙찰을 받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하자마구미는 1889년 4월에 하자마 타케마(間猛馬, 1858~1927)가 일본 후쿠오카현 모지(門司)에서 창업하여 주로 철도부설공사를 기반으로 하여 사세를 확장한 토목건축 청부업체이다. 중앙정보사(中央情報社)에서 펴낸 『대경성사진첩(大京城寫眞帖)』(1937), 18쪽에는 ‘하자마구미 조선지점(間組 朝鮮支店)’에 대해 두 장의 사진자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소개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본사(本社)는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미나미쵸(東京市 赤坂區 靑山南町). 자본금 2백만 원(圓). 창업(創業) 명치 22년(1889년). 소화 6년(1931년) 4월에 주식 조직으로 변경했고, 사장 오타니 키요시(社長 小谷淸) 씨, 부사장 마에노 사다키(副社長 前野定喜) 씨, 조선지점장 상무취체역 쿠스메 쇼스케(楠目省介) 씨의 진용(陣容). 오사카(大阪), 시모노세키(下關), 대련(大連)에도 지점이 있다. 경성지점(京城支店)의 대표적 공사로서는 압록강 및 한강교량공사, 조선수전주식회사 및 장진강수전주식회사의 제공사(諸工事),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체신국 보험과, 경성상공장려관 등 유수(有數)한 것을 다수 남기고 있다. (한강통 11, 전화 용산 ④0440번)

이 회사의 토목건축사업은 크게 ‘철도건설 및 개량공사’, ‘수력(水力) 및 화력발전(火力發電) 공사’, ‘도로공사’, ‘교량공사’, ‘수리 염전(水利 鹽田) 기타 공사’, ‘건축공사’ 등의 영역에 두루 걸쳐 있었다. 그리고 한강철교, 제1한강교, 압록강철교, 압록강 제2철교, 금강산전철수력발전소, 조선수전(朝鮮水電) 제1 및 제2발전소, 장진강수력전기, 대정수리조합 저수지, 대아리저수지, 조선빌딩(반도호텔), 전매국 소래염전, 압록강 수풍댐 등의 축조 및 건설공사는 모두 이 업체에 의해 이뤄진 것들이다.

경성조차장의 건설공사는 1940년 10월까지 기반조성이 완료되고 다시 해를 넘겨 1941년 가을을 목표로 하여 주요한 시설물의 공사까지 대략 마무리될 예정이었는데, 『매일신보』 1940년 2월 9일자에 수록된 「경성(京城)과 평양(平壤)의 조차장 공사진척(操車場 工事進捗)」 제하의 기사는 이 당시의 공사진척상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병참기지(兵站基地) 반도산업의 확립추진과 동아경제블럭의 강화진전에 반(伴)하여 조선중계물자수송(朝鮮中繼物資輸送)의 격증(激增)으로 철도국(鐵道局)에서는 화차선(貨車線)의 원활한 완벽을 기하고자 경성(京城) 45만 평, 300만 원, 평양(平壤) 30만 평, 207만 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여 작(昨) 14년(1939년) 조조(早早)부터 2대 조차장 건설에 착공하고 있는바 착공 이래 순조(順調)의 공정(工程)을 계속하여 2월 1일 현재의 출래고(出來高)는 경성 7할, 평양 8할가량의 진척을 시(示)하여 모두 금추(今秋) 10월까지에는 토공공사(土工工事)의 완성을 보게 될 예정으로 계속하여 주요 건조물(建造物) 건축에 착수하여 16년(1941년) 추(秋)까지에는 준성(竣成)코자 공(工)을 급(急)히 하고 있다. 차(此) 준공시는 월간(月間) 3천 수백 량의 조차능력(操車能力)을 발휘할 것이므로 물자수송의 조정상(調整上) 획기적 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대망(待望)된다.

이와는 별도로 경의선 복선공사의 진행에 따라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경성과 평양 사이의 29개소에 달하는 정거장을 순차적으로 이전 또는 개축하는 공사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며, 이 목록에는 수색역(水色驛)과 일산역(一山驛)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경성조차장이 건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수색역의 역사를 전면 개축하는 공사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0년 10월 3일자에 수록된 「신축(新築) 수색역(水色驛), 29일 낙성식(落成式) 성대(盛大)」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수색(水色)] 대륙(大陸)루트의 대간선(大幹線)이며 서부경성(西部京城)의 입문(入門)인 수색(水色)은 신축(新築)한 역사(驛舍)를 거(去) 5월 6일[6월 6일의 착오] 오전 2시경에 원인불명(原因不明)으로 소실(燒失)한 이래 일반승객(一般乘客)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철도업무 수행상 다대(多大)한 지장(支障)이 있었으나 아오키 역장(靑木驛長) 이하 각 역계원(各驛係員)은 힘써 인고단련(忍苦鍛鍊)하며 근무에 충실하여 개축역사(改築驛舍)는 착착 진행되어 거(去) 9월 29일 오후 1시반 군관민(軍官民) 다수 참렬하(參列下)에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5년 3월 2일자에는 경부선 및 경의선 복선공사 준공식에서 아베 총독이 설파한 고사(告辭)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만주사변을 거쳐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성전(聖戰)을 완수하고 이른바 ‘대동아건설’을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대륙수송의 대동맥으로서 조선철도가 지니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한편, 경성조차장(수색역)의 전체적인 배치상황에 대한 자료가 궁금하여 찾아봤더니, 철도박물관(의왕)의 전시유물인 「수색조차장배선실시약도(水色操車場配線實施略圖; 1945년 8월 15일 현재)」가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조차장 전체의 규모에 대해 “궤도연장(軌道延長) 약 130킬로미터, 분기기 부설(分岐器 敷設) 400조(組), 교형가설(橋桁架設) 20연(連)”이라는 설명과 함께 방사선 형태로 깔린 각 선로들의 명칭과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현재 수색역과 화전역의 중간지점이자 마포 상암동과 고양 덕은동의 경계구역 언저리에는 통칭 ‘고양 덕은동 쌍굴’이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옛 경성조차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의 하나이다. 상부터널의 남쪽 입구와 하부터널 쪽 통문 옆에는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묘비석’과 마찬가지로 지난 2019년 12월에 고양시장 명의로 제작한 안내판이 각각 부착되어 있다.

이 쌍굴은 그 길이가 각각 상부터널(직선)이 100미터, 하부터널(곡선)이 200미터 남짓이고, 지하에서 선로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어 있는데, 위의 조차장 약도에도 ‘수도교차(隧道交叉; 터널교차)’라는 표시와 더불어 그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하부터널은 ‘능화신호소(陵花信號所)’를 거쳐 평양 방향(하행선)의 경의본선(京義本線)으로 합류하는 선로이며, 상부터널은 하행선 도착선로 쪽으로 연결되는 철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제의 패망을 5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던 1945년 3월 1일은 총독부 교통국 직원집회소에서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의 준공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 가운데 경부선은 9년가량의 긴 공사기간을 거쳐 1944년 12월 28일에 대구(大邱)와 지천(枝川, 경북 칠곡군) 사이의 최종구간에 대한 연결식(連結式)이 거행되었고, 경의선은 이보다 며칠 앞서 12월 23일에 순안(順安, 평남 평원군)에서 궤조(軌條, 레일)를 연결하는 것으로 6년이 훨씬 넘는 복선부설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대저(大抵) 조선에 있어서의 철도(鐵道)가 조선 내 중요물자(重要物資)의 증산에 이바지하는 외(外)에 반도총후상(半島銃後上) 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대륙수송(大陸輸送)의 대동맥(大動脈)으로서 대동아건설(大東亞建設)의 추축(樞軸)인 사명을 갖고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특히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부하(負荷)한 책임은 더욱 가중하여 이의 완수여하(完遂如何)는 직접 아국(我國, 일본) 전력소장(戰力消長)에 영향하는 바 참으로 지대하다. …… 생각건대 본 공사의 완성은 대륙교통경로(大陸交通經路)에 획기적 진전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국가비상(國家非常)한 요청인 전력증강(戰力增强)에 응하여 금후(今後)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요물자의 수송에 절대한 위력을 발휘하여 성전완수(聖戰完遂) 대동아건설에 기여하는 바 적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하략)

이 말은 경부 경의 양간선(兩幹線) 복선공사 준공식장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설파한 고사(告辭, 기념사)의 한 토막이다. 그야말로 대륙으로 이어지는 철도망과 관련 기반시설을 신속히 확충하여 수송력의 극대화를 꾀하려는 그네들의 속내가 ‘성전완수(聖戰完遂)’, 바로 이 한마디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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