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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ㆍ윤이상, 무대서 되살아난다
안중근ㆍ윤이상, 무대서 되살아난다(아시아투데이, 09.10.15)
오키나와 주민의 힘!-서울신문(07.10.04)
오키나와 주민의 힘! |도쿄 박홍기특파원|역사왜곡에 대한 일본 국내 반발에 일본 정부가 일단 한발 물러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빚어진 주민 집단자살과 관련,‘일본군에 의한 강제’ 부분을 삭제했던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의에 이은 정치권의 반발에 움찔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단 삭제된 내용을 복원하는 쪽으로 검토에 나섰다.3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민주·공산·사민·국민신당 등 야 4당은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자살’에 관한 정부의 역사왜곡을 시정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결의안에는 지난 3월 문부과학성의 고교 역사교과서 검정에서 지워진 ‘(집단자살에는) 일본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내용의 복원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그러나 정부와 자민당은 교과서 검정에는 문제가 없으며 이에 대해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오타 아키히로 대표는 “군의 개입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도 “검정제도는 견지해야 하며 다만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집단자살에 대한 조사·연구기관 설치를 제의했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은 지난 1일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 수정할 것인지, 관계자의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문부성에 대응을 지시했었다.현재 문부성은 현행 검정 제도의 틀 안에서 교과서 발행사 측에서 ‘정정 신청’을 해오면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또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자살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기술할 방침으로 전해졌다.일본 정부는 지난 1981년 교과서 검정 때도 일본군에 의한 주민살해에 대한 내용을 삭제했다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다음 기회에 주민들의
[취재일기] 오키나와 `일본의 이중 잣대`-‘중앙'(07.10.04)
[취재일기] 오키나와 `일본의 이중 잣대` [중앙일보] #1. 2005년 4월 7일 일본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상은 마주 앉은 반기문 한국 외교부 장관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았다. 당시 후소샤의 중학교 역사.공민교과서의 독도 관련 부분이 검정 결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는 다케시마(竹島)”란 표현으로 기술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군위안부’ 표기는 모든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마치무라 외상은 반 장관의 추궁에 “일본의 교과서 검정 과정은 한국과 다르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개별적 기술에 대해선 정부가 삭제나 수정을 요구하거나 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맞섰다.며칠 후 일본을 찾은 한국 국회의원단에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수정이) 안 되게 돼 있는 시스템”이라고 잘라 말했다. 나아가 일 외무성 홈페이지에 ‘일본 교과서 검정제도’란 코너를 마련해 친절하게도 영어.한글.중국어 번역판까지 붙여 놨다. 전문가들로 이뤄진 교과서 검정 조사심의회가 내린 판단에 정치는 개입할 수 없다는 게 큰 골자였다. 결국 한국의 수정 요구는 한 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2. 2007년 10월 1일. 일본 정부의 대변인 마치무라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장에 섰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주민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했다는 내용이 고교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삭제된 데 대해 지난달 29일 오키나와 현민 11만 명이 항의대회를 열어 분노를 폭발한 직후였다. 그는 “오키나와 현민의 입장을 헤아려 수정할 수 있을지 관계자의 연구와 노력, 지혜가 있을 수 있다”며 “(수정)검토를 문부과학성에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부과학상도 “오키나와 현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니 뭔가 대응 방안
“‘독도’ 지명 토박이말로 바꾸자”
“‘독도’ 지명 토박이말로 바꾸자”< NGO들 >(연합뉴스, 09.10.13)
베를린 박물관에 등장한 ‘동해’
<카메라뉴스> 베를린 박물관에 등장한 ‘동해’(연합뉴스, 09.10.15)
日야당, ‘오키나와 역사 바로잡기 결의안’ 제출 방침-연합뉴스(07.10.03)
日야당, ‘오키나와 역사 바로잡기 결의안’ 제출 방침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일본의 민주.공산.사민.국민신당 등 야 4당은 2일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沖繩) 주민들의 ‘집단자결’에 관한 정부의 역사왜곡을 시정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결의안은 지난 3월 문부과학성의 고교 역사교과서 검정에서 삭제된 “일본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내용의 복원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게될 것으로 예상된다.정부와 자민당은 교과서 검정에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교과서 검정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지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결의안이 제출될 경우 대응이 주목된다.그러나 연립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공명당의 오타 아키히로(太田昭宏) 대표는 “군의 개입은 부정할 수 없다. 검정제도는 견지해야 하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며 집단자결에 관한 조사.연구기관의 설치를 제의했다.일본 정부는 지난달 28일 오키나와에서 1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역사왜곡 규탄대회가 열린 점을 중시, 검정제도의 틀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대응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문부과학성은 교과서 발행사가 ‘정정 신청’을 해올 경우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오키나와의 비참한 역사인 집단자결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을 명시하는 내용의 기술을 허용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한편 오키나와의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지사는 3일 문부과학성을 방문, 도카이 기사부로(渡海紀三郞) 대신에게 역사왜곡 수정을 요구하는 오키나와 현민 결의안을 전달했다. 도카이 문부과학상은 이에 대해 교과서 회사의 요구가 있을 경우 “진지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07.10.04)
<위안부 수요집회 美 LA에서도 시작>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익상 특파원 =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일 시위’가 미국에서도 시작됐다.‘위안부 결의안(HR121)연대’는 3일 낮 12시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내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제 781차 수요 시위를 갖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공식 사죄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적절한 보상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수요 시위는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지난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돼 16년, 5천467일째 계속되고 있으며 이날로 781차를 맞았다.이날 행사에는 HR121 연대를 이끌고 있는 이종화 로욜라메리마운트대 교수 등 연대 회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회원, 필리핀 및 대만, 중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는 대표자, 국제앰네스티 등 50여명이 참가했으며 성노예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이막달 할머니, 심달련 할머니도 참석했다.참석자들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강제 동원한 데 대해 일본 정부가 사죄할 것을 촉구하는 모임이 이미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오늘 마침내 미국에서도 시작됐다”며 “위안부 결의안이 미 연방 하원을 통과한 후에도 사죄를 미루고 있는 일본 정부에 대해 다시 한번 사죄와 배상을 촉구한다”고 밝혔다.이번 시위는 4일부터 6일까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각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위안부 관련 국제학술대회를 앞두고 마련됐으며 참석자들은 이 학술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이용수 할머니는 “이번이 5번째 미국 방문인데 그동안 결의안 통과를 달성했다”며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성폭력 문제도 결국은 위안부
‘웬수’는 알고 있다
‘웬수’는 알고 있다(한겨레신문, 09.10.14)
연극으로 다시 만나는 안중근ㆍ윤이상
연극으로 다시 만나는 안중근ㆍ윤이상(연합뉴스, 09.10.13)
3대 걸친 항일투쟁, 그리고 사형·투옥·고문-오마이뉴스(07.10.01)
3대 걸친 항일투쟁, 그리고 사형·투옥·고문 [발굴] 함경도 산포수 출신 의병장 ‘차도선’과 그 후예들 ▲ 건국공로훈장단 장부에 21호 기입된 차도선의 건국공로훈장증. ⓒ 조호진 건국공로훈장 ‘나는 홍범도, 뛰는 차도선’홍범도 의병장과 함께 의병을 모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항일무장투쟁으로 일본군을 격퇴하며 친일파 처단에 나섰던 함경도 산포수 출신의 의병장 차도선(車道善). 3대에 걸친 항일투쟁 투신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된 아들과 손자들이 사형·무기징역 등의 옥고를 치르면서 집안은 풍비박산난다.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이지만 차도선 가문의 의병투쟁과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위 독립운동가들의 상해임시정부 활동과 달리 항일무장투쟁에 목숨건 민중들은 사진을 찍거나 기록을 통해 자신들의 항일투쟁을 역사에 남길 겨를이 없었다. 그건 호사스런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민중의 무장투쟁이 역사에 사라졌듯이 차도선의 의병투쟁 또한 주목받지 못했다.무엇보다 아들과 손자들의 중국 공산당 혁명과 해방 후 북한 재건사업 참여, 항미원조(抗米援朝; 6·25전쟁 당시 미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지원하던 중국의 외교정책) 참전 그리고, 중국 거주 등은 냉전적 사고에 갇힌 남한의 역사학계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아울러 3대에 걸친 전면 항일투쟁에 따른 필연적 가난과 후대들의 힘겨운 삶은 가문의 독립투쟁을 호소할 겨를조차 없앴다.윤보선 정부는 차도선 의병장에게 1962년 3월 1일 내각수반 송요찬 명의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직계 가족 모두가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 훈장은 전달되지 못했고, 보훈처가 보관했던 훈장은 2003년 6월 19일 손녀 차월겸(63)에 전달됐다. 정부는 지난 95년 중국 길림성 무송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