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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논란에 휩싸인 유관순 영정 제작
◆ 친일논란에 휩싸인 유관순 영정 제작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한 천안시.그런데 최근 이곳이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새로 제작되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맡은 화가 때문이다. ▲장우성 화백그런데 화가는 다름 아닌 지난 86년 유관순열사의 영정을 그렸던 장우성 화백. 장화백의 친일 논란은 이미 지난 1992년부터 학계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일부 미술계 인사들과 민족 단체들은 “항일운동의 국민적 상징인 유열사의 영정을 친일 경력이 문제되는 화백에게 두 번이나 의뢰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영정 제작의 중단과 함께 새로운 작가 선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화백은 친일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나섰는데… 천안시는 현재 영정 제작을 중단하고 민족단체의 친일자료와 더불어 장화백의 반증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유관순 영정제작을 둘러싼 친일 논란의 실태와 논란이 불거지게 된 이유를 진단해 본다. □ 방영일시 : 3월 18일(목) 저녁 7시 30분□ 연출 : 이기홍, 박형노, 곽한범, 곽철웅 / 진행: 박성준 아나운서 □ 작가 : 김영리, 김지은 / 자료조사원 : 박은정, 정연숙http://daejeon.kbs.co.kr/program/pro_tv04.htm ▲유관순 열사 영정 ©윤평호 기자
“친일인명사전, 정작 필요한 공공도서관에는 없다”
[집중인터뷰] 창립 2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1년 3월 1일 (화) 오후 7시 30분■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 연 :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정관용> 시사자키 3부 시작합니다. 오늘 3부는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과의 인터뷰로 꾸미겠습니다. 오늘 3.1절이에요. 이런 날이 되면 역사인식,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다룬 기사들이 많이 눈에 띄지요.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이런 특별한 날에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새기고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 간 꾸준히 활동해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오늘 하실 말씀이 참 많을 것 같은데요, 친일이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 이것이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20년의 성과라고 말씀하시는 임헌영 소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임헌영> 예, 안녕하세요.▶정관용> 벌서 20년이 되었네요?▷임헌영> 예, 세월이 참 빠릅니다. 우리가 늙는 것은 생각 안하고 20주년 되는 것만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정관용> 축하드립니다.▷임헌영> 고맙습니다.▶정관용> 초등학생들한테 3.1절이 어떤 날이냐고 물어봤더니요, 3.1절을 광복절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꽤 있다고 그러고요, 어떤 친구는 안중근 의사가 누군가를 치료해준 날이다.▷임헌영> 상당히 기발한 상상력이, 만화적입니다. 참 역사의식이라는 게 그렇지요, 미국에서 보면 독립선언서를 읽어주고 이게 무슨 문구냐고 물었더니 공산당 선언이라고 나왔다는 그런 여론조사도 나왔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역사를 얼마나 안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 거지요?▶정관용> 글쎄 말입니다.
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故 윤기섭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장년층의 교육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 이 글은 선생의 외손자인 정철승 변호사가 하늘에 계시는 조부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철승 변호사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고문변호사 겸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마흔 일곱번째 편지 – 2011년 3월 1일 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할아버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이 영하 17도까지 내려가서 10년 만에 닥친 한파니 뭐니 하며 아우성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100년 전인 1911년 망국을 통곡하시며 동지들과 함께 만주 땅 서간도 유하현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셨던 그 암담했던 시절의 겨울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초봄의 훈기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윤기섭 선생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의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며 독립군이자 장래 조국의 동량이 될 젊은이들의 교육에 혼신을 다 바치셨습니다. 어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당시의 할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草)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항상 할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할아버지는 1887년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시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 보성학교를 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하셨던 엘리트 지식인이셨습니다. 당시의 애국적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독립운동가가 유랑극단 배우로 살아간 사연
친일인명사전 편찬 온힘 조문기 이사장 친일 반민족행위에 관한 한 ‘잔재’는 커녕 ‘본체(本體)’조차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며 아예 ‘친일잔재 청산’이란 용어 자체를 거부하는 항일 독립투사가 있다. 일제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45년 7월 약관의 나이에 거물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부민관 집회에 폭탄을 투척했던 그는 친일파, 또는 그 후예였던 역대 정권이 ‘단상’에서 주는 상을 받기 위해 ‘단하’에 조아리고 있을 수는 없다며 3·1절이나 8·15행사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생존한 수백명 독립투사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친일인명 사전’ 편찬에 강한 집념을 불태우면서 ‘내가 죽으면 관에 사전을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겨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78)을 경기 수원시 천천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최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경향신문의 ‘잊혀져가는 독립유공자들’ 시리즈를 통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됐듯이 조문기의 10평 남짓한 서민아파트는 신산스러운 그의 삶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다만 팔순을 눈앞에 둔 노령임에도 형형한 눈매와 의기(義氣)가 넘쳐 흐르는 강건한 몸가짐, 벽장 가득이 꽂혀 있는 항일·친일관련 서적과 자료집은 그 곤궁함을 무엇으로 버텨왔는지 짐작케 했다. 친일인사 보기싫어 정부행사 불참 조문기는 “최근 친일인명사전 예산삭감 파동과 누더기가 된 채로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에도 눈을 부라리는 수구언론들의 모습이야말로 친일잔재가 아닌 친일본체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전국 곳곳에 거물급 친일파들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면서 최근 밀양에 있는 박춘금의
서구에 대한 열등감 식민모국과 동일시로 극복하려했던 이광수
서구에 대한 열등감 식민모국과 동일시로 극복하려했던 이광수 “새로 지은 양복에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나서니 저도 제법 양식 신사가 된 양하여, 마음이 흐뭇하더이다…. 그러나 노상에서 眞字(진자) 양인을 만나매, 나는 지금껏 가지었던 프라이드가 어느덧 스러지고 등골에 찬 땀이 흘러 不知不覺(부지불각)에 푹 고개를 숙이었나이다.” 1915년 이광수는 중국 상해에서 ‘진짜 양인’을 만난 열패감을 토로하고 있다. 이광수의 천재의식은 유명한 사실이다. “호텔 體鏡(체경)에 비치인 내 얼굴의 아름다움에 잠시 황홀”할 정도의 나르시시즘을 간직하고 “누구에게든지 내 재능을 자랑하고 싶고, 남이 나를 칭찬해주지 않으면 불쾌”한 천재이자 “세상이 네게 무슨 권위냐. 세상을 다스릴 자가 네가 아니냐”고 자신만만했던 이광수에게 “별 짓”을 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다름아닌 진짜 양인이었다. 그 열등감은 “조선 민족으로는 생존의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으니까 권리도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졌고 “세 놈도 한 데 뭉칠 수 없는 현재의 조선 민족은 생존할 능력도 권리도 없는 무리”라는 자조로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이광수에게 ‘민족개조’는 당연한 과제이자 목표로 제시된다. 그러나 1944년 이광수는 “아시아 십억은 영미의 식민지 토인이라는 운명 아래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십억은 점점 선조의 문화도 정신도 잃고 미·영인의 변소를 소제하고, 찌꺼기를 얻어먹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격렬한 반서구 의식을 보여준다. “양인의 머리터럭에서는 기름이 도는데 내 것은 이렇게 거칠거칠해”라고 할 정도로 정신적, 신체적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이광수가 ‘귀축영미’ 타도를 외치게 된
사주팔자 판치는 ‘3·1운동 성지’… 탑골공원 주변 무허가 점집 난립, 부끄러운 자화상
3·1운동의 성지인 서울 종로 탑골공원 주변에 무허가 점집이 난립하고 있다. 관할구청은 이들을 노점상으로 보고 전기 사용을 허가하는 등 점집 운영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발원지로 평가받는 곳이다. 그러나 27일 찾아간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방향 거리 주변엔 토정비결, 사주팔자, 운세 등을 보는 포장마차형 점집 10여곳이 50m 정도 늘어서 빗속에서도 성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던 지난 25일에는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자리 잡은 점집 17곳이 손님에게 점을 봐주고 있었다. 특히 점집 12곳은 일정한 규격과 모양의 천막을 사용하며 1∼12번까지 일련번호도 붙여 놓았다. 지난해 종로구가 ‘걷고 싶은 종로거리 만들기 사업’을 실시하며 노점상을 단속한 이후 점집들이 자체적으로 붙인 번호다. 젊은 연인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손님이 점집을 찾았다. 여자친구와 점을 본 대학생 김모(23)씨는 “탑골공원 주변에 올 때마다 재미 삼아 점을 본다”면서 “공원 근처에 나란히 줄지어 있어 허가받은 곳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점집 주인들은 간이 책상 위에 전기난로를 켜 놓고 형광등까지 사용했다. 이들은 종로2가 대로변에 설치된 전선에 지름 3㎝ 정도의 간이 배전선을 연결해 전기를 끌어 썼다. 비에 젖은 채로 바닥에 깔린 전선은 행인들이 밟고 지나가 안전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전기는 2008년 종로 노점상연합회의 요구로 구가 마련해 준 것이다. 노점상들이 하나 둘 빠진 자리에 파고든 점집이 전선까지 물려받았다. 종로구는 팔짱만 낀
“日 교과서 검정 ‘독도’보다 ‘역사’에 관심둬야”
“일본 교과서검정 ‘독도’보다 ‘역사’에 관심둬야”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이신철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위원장은 2일 오후 6시30분께부터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변호사회관 10층에서 열린 ‘전후보상 공개 포럼’ 행사에서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되고 그 안에 담긴 독도 관련 기술이 다시 한 번 크게 문제가 될 경우 일본의 역사 왜곡을 막으려는 (전후보상 운동 등) 한일 양국의 시민운동이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1.3.2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chungwon@yna.co.kr 한국 시민단체 관계자 지적..양국 시민단체 타격 우려(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3∼4월에 이뤄질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를 앞두고 한국의 시민단체 관계자가 독도 문제가 과열될 경우 한일 양국의 시민운동에 오히려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신철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위원장은 2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변호사회관 10층에서 열린 ‘전후보상 공개 포럼’ 행사에서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되고 그 안에 담긴 독도 관련 기술이 다시 한 번 크게 문제가 될 경우 일본의 역사왜곡을 막으려는 (전후보상 운동 등) 한일 양국의 시민운동이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일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 교수이기도 한 이 위원장은 행사 후 연합뉴스 기자에게 “일본 교과서 검정 문제의 본질은 일본이 이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설명을 제외하거나 전쟁을 미화하는 등 역사를
진정한 봄을 기다리며
진정한 봄을 기다리며 ▲표명렬 회원 ©민족문제연구소 ‘참 군인’하면 주저 없이 떠오르는 자랑스런 한 후배가 있다. 우리는 1965년 파월 맹호부대의 같은 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9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는 동안 두코 전투 등에서 참으로 용감히 잘 싸웠고 아무리 어려운 전투상황일지라도 전장 윤리를 준수하려 노력하며 부하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감싸던 참 멋있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베트콩을 고문해서라도 무기를 찾아내라’고 독촉하는 대대장을 향해 “아무리 전장이지만, 무고한 사람을 어떻게 고문한단 말이야! 이 ○○야!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시원스레 욕설을 퍼부었던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동해안 어느 사단장의 전속부관을 하고 있을 때, 그 지역의 군수께서 사단장 면회를 왔다. 부관 실을 들어서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사단장님 계신가”라 했다. 쳐다보고 있던 전속부관이 벌떡 일어나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군수가 위관장교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을 몰라!” 하며 주먹을 휘둘러 혼을 내주었다. 얼마 전 ‘친일 진상 규명 법’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암흑의 일제시대 민족수탈과 고자질 등 대표적 악역의 행동책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면장을 부친으로 둔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이 이 법안 통과 여부의 열쇠를 쥐고서 본래의 입법취지와 완전 어긋나게 농단해 버렸다. 그의 집요한 계략이 주효하여 군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악랄하게 설치던 ‘장교와 하사관’을 친일분자 범위에서 삭제하고 중좌(중령) 이상 계급으로 수정함으로써 가장 심각하게 구체적 범죄를 저지른 부역자들의 작폐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되었다. 조국이 적의 침탈로
임종국과 김용균
임종국과 김용균, 그 같은 점과 다른 점 홍중조(논설주간) / [홍중조의 고금산책]누더기 된 친일규명법 임종국(林鍾國·1929 ~ 1989)의 유고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민족은 2000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정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일제잔재, 민족 가치관 학살 이토록 민족정기를 염원하는 그의 지론은 식민지 잔재 청산은 물론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파행은 끊이지를 않는다는 경구이기도 하다. 임종국, 그는 이 땅에 민족정기를 심어주기 위해 ‘친일문제 연구가’ 또는 ‘재야 사학자’로 우뚝 선 인물이었다. 그가 줄곧 기록해온 작업은 친일자체를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보다 더 큰 차원에서 민족자존의 지평을 열기위해 진실을 가린 휘장을 걷어내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고통스런 몸짓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늘날 친일진상규명의 단초를 제공한 이가 바로 임종국이라 하겠다. 그나마 민족정기의 햇살을 밝히는 기록의 선구자였기에 뒤틀린 현대사를 올곧게 조명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그의 삶의 궤적은 위대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창녕에서 출생했다. 당대의 지식인이요 천도교 간부였던 아버지 임문호를 따라 상경했다. 그런데 한 기록(용마반세기 회지)에는 마산상고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광복이후 정치적 견해 등 밝혀 3·1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광복 뒤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김창준(1890~1959) 목사의 육필 회고록이 출간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일 기독교사회주의자인 김 목사의 증언이 담긴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를 출간했다고 밝혔다. ▶김목사가 아내 김창숙 여사에게 보낸 편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생을 감내해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난다. 김 목사는 기독교계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 김 목사는 3·1운동 당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평안도 지역에 이를 배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 때문에 수감된 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으로 건너간 뒤 북한에 남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 때문에 1919~1921년 수감기간 동안 옥중에서 보낸 29통의 각종 편지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과 식모살이를 하면서 옥중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아내 김창숙에 대한 미안함 등이 묻어나 있다. 또 3·1운동 기념사를 위해 1946년 2월에 작성한 46장 분량의 원고 ‘기미운동 후 금일까지의 경위’에는 광복 이후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글 가운데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특히 이 원고에는 3·1운동 뒤 연행된 총독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