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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 반민특위 사건 (上)
ㆍ친일파 청산 ‘반민특위’… 끈질기게 방해하는 이승만… 의원 테러 모의까지 ■ 남한 정부의 수립과 일제잔재 청산 문제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 앞에 다가온 가장 절실한 과제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었다. 그러기에 ‘민족정기’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단’이란 외침이 각계에서 분출되었다. 실제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숙청법 문제가 거론되었고, 미군정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법의원은 1947년 7월2일 친일파 숙청법(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통과시킨 바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의 인준 거부로 그 시행을 보지 못한 채 남한 정부의 출범을 맞게 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따라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에서의 임시(단일)정부 수립 등 현안 해결에 실패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간다. 그에 따라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14일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 안을 통과시킨다. 당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즉, 그런 결정은 전후처리 문제에 대한 관여를 금지한 유엔헌장 107조 및 내정 불간섭을 명시한 위 헌장 제7조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와(1948년 1월8일) 입북을 시도하였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소련군 당국이 이에 반대한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선거’를 한다는 결의를 이끌어낸 다음,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소위 ‘5·10 선거’)에 이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방해와 저항을 무릅쓴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에 친일파 처단 입법의 근거조항을 마련해 놓았다. 즉 헌법 제101조에는 ‘단기 4278년(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간도특설대 분석…“은폐된 역사 진실을 밝혀야 했다”
▲제8회 임종국상 학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효순(61) 씨 [짬] 임종국상 학술상 받은 언론인 김효순 “오래 기자로 살아왔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도 학자나 연구자 행세를 한 적이 전혀 없는데 학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해서 얼떨떨하다.” 제8회 임종국상 학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효순(61)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4일 김 대표가 올 2월 발간한 책 <간도 특설대>에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세력을 말살하려 한 조선인 ‘친일 토벌부대’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공로를 인정해 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회는 김 대표의 책이 “탐사 보도의 수준을 넘어서는 조사·분석을 통해 간도특설대의 설립배경부터 출신자들이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실증적으로 규명해, 그 반민족적 반인도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밝혔다. 임종국상은 친일 문제 연구에 투신한 임종국(1929∼1989) 선생의 뜻을 기려 2005년 제정됐다.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선생의 뜻을 계승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들을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두 분야로 나눠 선정해 매년 수여한다. ‘독립군 토벌’ 조선인 간도특설대 한국사회 주역으로 등장하기까지 학계가 못한 연구 발로 뛰며 실증 중·일 현지 인터뷰와 자료 발굴 백선엽의 창씨명·헌병복무도 밝혀내 1930년대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서 활동한 이 특설부대는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간도특설대 복무자들은 자신들이 ‘비적’, ‘공비’를 토벌했을 뿐이라고 변명해왔다. 김 대표는 이 부대가 사실은 항일무장세력의 소탕, 섬멸을 위한 관동군의 앞잡이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다양한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 년을 울어주리라
▲ 한국전쟁유족회 창립 54주년 기념식이 지난 20일 저녁 신촌 다래헌에서 50여 명의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이하 ‘한국전쟁유족회’) 창립 54주년 기념식이 지난 20일 저녁 신촌 다래헌에서 50여 명의 전국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60년 10월 20일 유족회를 결성한 이래 54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이날 기념행사에는 이이화 금정굴재단 이사장과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사묵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김영승 통일광장 이사 등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인 김성실 어머니(세월호가족대책위 대외협력위원장)와 이우근 아버지가 참석하여 동변상련의 심정으로 행사를 함께했다. 그리고 1960년 전국유족회 결성에 앞장섰던 김하종 현 경주유족회 상임고문, 당시 사정위 국장이었던 고 이원식 선생의 아들 이광달 고문, 당시 회장이었던 고 노현섭 선생의 아들 노치웅 님, 당시 사정위원이었던 고 이삼근 선생의 아들 이용욱 님이 참석하여 54년 간의 숨죽인 역사를 증언했다. 행사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영령들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되어 추모 노래, 유족회의 역사를 담은 영상물 상영과 활동 경과보고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내빈에 대한 감사패 전달과 축사, 전국에서 온 유족들의 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다짐하는 결의사항 낭독 등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과 미군 등에 의한 민간인 피학살자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1960년 결성된 전국유족회가 이듬해 5.16쿠데타정권의 혹독한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진실규명 활동 역시 중단되었다. 이후 세기가 바뀌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4년
일본, 태평양전쟁 조선인 유골 발굴 사실상 거절
일본 후생성서 공식 답변…”문제 해결 의지 없다는 것” 비판 ▶ 일본 야스쿠니 신사/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사망자 유해 발굴 사업에서 조선인 전사자 유족의 참여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태평양전쟁 당시 징병·징용돼 목숨을 잃은 조선인 유골과 관련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일본 정부가 사실상 조선인 유골을 발굴할 의지가 없다는 뜻을 처음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26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에 따르면 일본 후생노동성은 지난 8월 “(일본 정부의) 발굴 과정에서 한반도 출신임이 확인되면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고 있다”며 “외국인은 해당 정부가 실시하는 (유골 발굴·귀환) 사업에 참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앞서 보추협과 일본 시민단체인 ‘NPO 법인 전몰자 추도와 평화의회’, ‘재한군인군속재판지원회’는 지난 6월 일본 민주당의 ‘미래를 향해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 연맹’을 통해 유해 발굴 사업에 한국 유족을 참여시키고 모든 유해에 DNA 검사를 할 것을 골자로 하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일본 정부는 DNA 감정에 대해서도 “자료를 통해 유족으로 추정할 수 있고, 그 유족이 DNA 감정을 희망한다면 한국 정부와 협의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보추협은 그러나 DNA 감정은 신원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조건으로 유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정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두고서 징병·징용 문제 해결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은 것이 아니냐는
2년째 개관 못한 520억원짜리 역사기념관, 왜?
차일피일 미뤄진 공사, 완공 후엔 누수… 연내 개관도 불투명 ▲ 부산 남구에 건립된 일제강제동원역사기념관. ⓒ 정민규 ▲ 기념관의 상층부에 구멍이 생기며 지반이 내려앉은 모습. ⓒ 정민규 부산 남구에 일제강제동원 역사기념관을 짓겠다며 축포를 쏘아 올렸을 때가 2011년 8월이었다. 일제 당시 이루어진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려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목표에서 였다. 계획대로라면 2012년 말 역사기념관은 개관했어야 했다. 하지만 연거푸 미뤄지더니 2년이 흐르도록 역사기념관은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15일 오전 찾은 역사기념관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전체 면적만 1만2000㎡. 지하에 4개 층이 있고, 지상으로는 3개 층이 있다. 층간이 높아 실제는 그 이상으로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장 개관해도 될 만큼 멀쩡해보이는 건물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미뤄지던 건물 공사가 끝난 건 지난 5월이지만 역사관에는 계속해서 문제가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배수와 누수였다. 새어나온 빗물 때문에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은 군데군데 얼룩이 번져있었다. 산을 깎아 만들어 비탈과 맞닿은 건물 옥상 부분은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땅바닥의 보도블럭이 틀어져 있었고 흡사 싱크홀을 보는 것 같은 구멍도 생겨있었다. 원활한 배수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인지 건물 틈에 물이 고여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건물 내부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모래자루와 벽돌로 임시 물가림막을 만들어 놓은 곳도 보였다. 이날도 현장에는 보강 공사를 하기 위한 발걸음이 분주했다. 보수 공사를 맡은 업체 관계자는 “9월에 보수 공사가 끝났어야 했는데 아직
일본, 태평양전쟁 조선인 유골 발굴 사실상 거절
일본 후생성서 공식 답변…”문제 해결 의지 없다는 것” 비판 ▶ 일본 야스쿠니 신사/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사망자 유해 발굴 사업에서 조선인 전사자 유족의 참여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태평양전쟁 당시 징병·징용돼 목숨을 잃은 조선인 유골과 관련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일본 정부가 사실상 조선인 유골을 발굴할 의지가 없다는 뜻을 처음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26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에 따르면 일본 후생노동성은 지난 8월 “(일본 정부의) 발굴 과정에서 한반도 출신임이 확인되면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고 있다”며 “외국인은 해당 정부가 실시하는 (유골 발굴·귀환) 사업에 참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앞서 보추협과 일본 시민단체인 ‘NPO 법인 전몰자 추도와 평화의회’, ‘재한군인군속재판지원회’는 지난 6월 일본 민주당의 ‘미래를 향해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 연맹’을 통해 유해 발굴 사업에 한국 유족을 참여시키고 모든 유해에 DNA 검사를 할 것을 골자로 하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일본 정부는 DNA 감정에 대해서도 “자료를 통해 유족으로 추정할 수 있고, 그 유족이 DNA 감정을 희망한다면 한국 정부와 협의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보추협은 그러나 DNA 감정은 신원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조건으로 유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정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두고서 징병·징용 문제 해결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은 것이 아니냐는
“친일 화가가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하루빨리 교체해야”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장우성 작품 문화부 교체 거부에 시민단체 서명운동·거리전시회 나서 “국민 정서에 반할 뿐 아니라 선현에 대한 지독한 모독” ▲26일 충남 아산시 현충사 앞에서 ‘친일 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는 가운데 시민들이 서명에 참여하고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친일 화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거듭 나왔다. 시민사회단체는 정부에서 표준영정을 교체할 때까지 서명운동과 거리 전시회 등에 나서기로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는 26일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을 친일 경력이 명백한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사용한다면 이는 국민 정서에 반할 뿐만 아니라 반교육적인 처사이며 궁극적으로는 선현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열린 날은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5년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현충사 안 본전과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은 월전 장우성(1912~2005)이 1953년에 그렸고 정부는 1973년 표준영정으로 지정했다. 표준영정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여러 영정 가운데 국가가 특정한 영정을 지정한 것이며, 동상·지폐·우표 등을 제작하는 데 기본이 될 뿐 아니라 교과서에도 쓰인다.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의 영정 또한 옛 오백원권 지폐 도안 등에 쓰였다. 장우성은 1943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22회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에서 당시 조선인 수상자로는 처음으로 답사를 했다. 이튿날 <매일신보>에는
‘안중근 이토암살’ 105년 전 LA헤럴드 1면 톱…최초 보도는 AP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이 26일로 105주년을 맞는 가운데 당시 미국의 유력 신문이 저격 당일 1면 톱으로 보도한 사실이 확인됐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1909년 10월26일 ‘이토 백작 암살’이라는 통단제목의 장문기사를 이토의 사진과 함께 프런트면에 실었다. 지금까지 ‘이토 암살’ 뉴스는 미국 신문 중 뉴욕타임스가 가장 빨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LA헤럴드 역시 같은 날 1면에 대서특필해 눈길을 끌고 있다. LA헤럴드는 당시 16면이 발행된 대형 매체로 한 부당 2센트에 판매됐다. 2014.10.24. <사진=CDNC DB> robin@newsis.com 2014-10-25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이 26일로 105주년을 맞는 가운데 당시 미국의 유력 신문이 저격 당일 1면 톱으로 보도한 사실이 확인됐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1909년 10월26일 ‘이토 백작 암살’이라는 제목의 장문기사를 이토의 사진과 함께 프런트면에 실었다. 지금까지 ‘이토 암살’ 뉴스는 미국 신문 중 뉴욕타임스가 가장 빨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LA헤럴드 역시 같은 날 속보가 나간 것은 물론, 1면에 대서특필해 눈길을 끌고 있다. <뉴시스 2014년 3월5일 송고기사 참조> 특히 이 기사는 송고시점이 10월25일이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10월26일 오전 9시께였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결과가 보도되는 ‘예언 특종’이 돼버린 셈이다. LA헤럴드는 당시 16면이 발행된 대형 매체로 한 부당 2센트에 판매됐다. 이 기사는 본래 AP통신이 작성한 것으로 당시 AP의 일본주재기자는 이토 암살 소식을 오후 3시께 송고했다고 밝혔다. 이
‘궤변’ 이인호, 2008년 유인촌 사과 잊었나
[분석] 대한민국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 KBS 이사장 역사발언 ▲ “김구 건국공로자로 볼 수 없다” 지난 22일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이인호 KBS이사장의 김구 선생에 대한 역사발언이 커다란 후폭풍을 낳고 있다. ⓒ 채널A화면갈무리 지난 9월 KBS 이사장에 취임할 당시부터 ‘내 조부가 친일파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는 역사관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이인호씨가 지난 22일 KBS를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 자리에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의 정체성에 대한 역사발언을 해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당, 시민단체,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문제의 발언은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최 의원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인물이라고 주장한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이 이사장은 향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김구 선생 관련 발언을 내놓았다. 이 이사장은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까지 하시면서 독립운동가로서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1948년 대한민국 (단독)독립에는 반대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서 김구 선생님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역사왜곡①] 김구 선생은 정부가 인정한 ‘제1의 건국공로자’ ▲ 이인호 KBS 이사장 “역사관 편협하지 않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한국방송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이인호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이 자신을 둘러싼 편향적인 역사관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유성호 위 발언은 김구 선생에게 ‘건국 최고 훈장’을 수여한 대한민국 정부의 의사결정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어서 후폭풍이
혼돈의 시대, 단풍잎의 대한민국
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2014년 대한민국 가을은 “혼돈”이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사람의 인심이 그렇다. 이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수많은 복합적 요인들이 작동하겠지만, 그래서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면 가장 큰 원인으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의식과 제도는 함께 가야 하는 쌍두마차이다. 쌍두마차를 이끌어야 하는 두 말이 서로 같은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면 그 마차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쌍두마차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과 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 모든 국민은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통해 민주주의의 단맛을 보았다. 아니 그 단맛을 보기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 이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과 50년 이상 저항하며 투쟁해 왔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현재의 헌법을 얻어내었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그 10년의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의 달콤한 참맛을 보아 버렸다. 그 10년 동안 국민은 대통령의 잘못을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었고, 그 풍자를 대통령은 당연한 듯 지켜보며 웃었고, 그 즐기는 대통령을 보며 국민 또한 즐거울 수 있었다. 권위의 상실이 아닌 권위주의의 상실을 통해 우리 국민은 여유로워졌고, 일상생활 속에서 공기를 숨 쉬듯 민주주의를,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언론과 양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