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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왜 법률기술자가 되었나
ll“(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인 판사가 항일운동 재판을 했다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유신시절) 당시에는 위헌이 아닌 긴급조치에 따라 재판한 법관이 불법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ll 2010년 10월 해괴한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김종필 부장판사가 장본인이다. 김 판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판사 유영(柳瑛·1892~1950)의 손자가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유영은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가 수십 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까닭에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유영은 의열단 사건 관련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는 22년 동안 독립운동가 77명(사건 7건)에게 유죄판결을 했다. 유영이 유죄를 선고한 피고인 가운데 25명은 대한민국 수립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판사는 검사가 공소제기한 적용 법령과 공소 사실을 기초로 유무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하는 역할만을 한다”며 “판사가 항일운동에 관련된 사안에 대한 재판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렇듯 조선총독부 판사의 반민족행위를 적극 옹호했던 김 판사는 올해 초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발탁됐다. 박근혜 정권의 속성을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후배법관의 양심을 걷어찬 대법관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며 법치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이게 일반상식이다. 그를 위해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한편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면 차관급 예우를 해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법원에는 영혼 없는 법률기술자로 전락한 법관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광주 ‘백일로’ 유래는 친일파 장교 김백일”
‘백일로’ 지명, 친일인사 김백일 유래… 육군, 친일파를 안중근과 동일시 ▲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념관 소재지가 친일인사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한 광주 서구 백일로(화정4동)를 포함해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백일산 등이 간도특설대 장교 김백일의 이름을 딴 것”이라며 그 동안 조사한 자료를 공개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소재지인 광주 서구 ‘백일로’의 유래가 친일인사의 이름인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되고 있다.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한 광주 서구 백일로(화정4동)를 포함해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백일산 등이 간도특설대 장교 김백일의 이름을 딴 것”이라며 그 동안 조사한 자료를 공개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김백일이 친일인사로 분류됐음에도 여전히 군과 국가보훈처는 그를 우상화하고 있어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항일 독립군 토벌을 위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 창설된 특수부대로 1945년 일제 패망까지 백선엽, 김백일 등 150여 명의 조선인이 이곳에 복무했다. ▲ ‘거제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한 김백일 동상 철거 시민대책위’가 2013년 10월 24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있는 김백일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동상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동상 머리 부분에 일장기를 두르는 모습. ⓒ 거제타임즈 시민모임이 수집한 자료와 국방부 답변 등에 따르면 광주 서구 화정동의 ‘백일’이란 지명은 1950년대 이 지역에 만들어진 백일사격장을 유래로
광주 서구 ‘백일’은 친일 흔적? ‘발칵’
▲ 광주 서구 화정4동 백일지구가 일제 강점기 독립군 토벌대로 활동한 김백일 장군(맨 위)의 이름에서 유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친일인사의 이름인 것도 모른 채 ‘백일’ 은 도로명, 초등학교 등 각종 행정·시설명으로 쓰여왔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위에서 두 번째)이 이전한 곳의 주소도 백일로. 친일인사 이름 위에 항일시설물이 세워진 꼴이다. 지금이라도 곳곳에 퍼져있는 친일 흔적을 청산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제때 독립군 토벌 김백일 장군 기념 ‘백일사격장’서 유래 -초등학교·도로명·어린이공원·상가명 등 곳곳에 ‘백일’ 박혀 -학생독립운동회관도 ‘백일로’ “친일파 이름 위 항일시설물” 광주 서구 화정 4동 백일지구의 ‘백일’이 일제 강점기 독립군 토벌대의 주축인물이었던 친일인사의 이름에서 유례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초등학교, 어린이공원, 도로명, 일반 상점 이름에까지 ‘백일’이란 명칭이 쓰이고 있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이전한 주소도 ‘백일로’여서 파장이 예상된다. 24일 광주시에 따르면, 화정 4동 백일지구는 90~92년에 택지개발이 이뤄졌다. 백일지구의 ‘백일’은 택지개발 전 이곳에 위치해 있던 백일사격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부터 ‘백일’은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됐다. ▶백일초 교가 가사에도 등장 1992년 개교한 백일초등학교가 대표적이다. 백일초 교가 가서에도 ‘백일’은 등장한다. 백일초등학교 앞에 있는 어린이공원도 ‘백일 어린이 공원’이고, 인근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세탁소나 학원 등에도 ‘백일’이 들어가 있다. 주민들은 광주시청소년수련관 인근에 있는 산을 ‘백일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일대 도로명 주소도 백일로. 동구 황금동 시대를 마감하고 화정동으로 이전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의 신청사 부지가 있는 곳 주소도 백일로
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 함세웅 신부 초청강연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에서는 11월 28일(금) 오후 7시 부천시청 3층 소통마당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함세웅 신부를 초청하여 ‘역사정의와 한국사회’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한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시부는 “굴절된 한국근현대사를 바로잡고, 잊혀져가는 자랑스런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역사를 되새기며 아울러 친일반민족행위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강연회를 마련했다”며 부천시민들의 많은 참석을 당부했다. 함세웅 신부 강사약력▲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2014-11-24>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 함세웅 신부 초청강연
두 남자의 키스를 그리워한 시민… 왜 그랬을까?
[독일, 스페인 답사기①] 베를린, 그 서글픈 이야기 지난 11월 13일부터 21일까지 독일과 스페인 답사에 나섰다. DMZ 보존 실태, 도시 재생, 지역개발 성공 사례 견학이 목적이었다. 이 기사는 동행한 18명의 안전행정부 직원을 비롯한 지자체 공무원과의 토론 또는 대화를 토대로 작성했다. 도움을 준 윤광희, 이근행, 심창우, 이재연, 최숙자, 박광근, 문상규, 김규식, 양경종, 이재훈, 김선익, 고미경, 이상심, 김대성, 이유섭, 조광래, 김세학님께 감사드린다. – 기자말 ▲ 독일 베를린 장벽 114개의 벽화 중 하나. 오른쪽이 호네커, 왼쪽이 브레즈네프다. ⓒ 신광태 남자끼리 어쩌면 저렇게 리얼하게 키스할 수 있나. 114점의 베를린 장벽 벽화 중 유독 관심 깊게 본 그림이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당시 동독의 최고 권력자 호네커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다. 1989년 통일 독일(아래 통독) 전 이 그림이 그려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 벽화는 45.1km 규모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그려졌다. 두 남자의 키스, 의미가 뭘까? “의미가 뭘까요?” 이 그림은 뭘 말하는 것일까. 다음날까지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통독에 불만을 느끼던 동독 출신 사람의 표현이겠죠.”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의 말이 정답인 듯했다. 통일은 독일 국민 모두의 축제였다는 선입견. 나는 너무 어려운 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이 벽화는 실제 사건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란다. 1979년
김정한 선생은 30년대 저항문학과 70년대 민족문학 연결 고리
▲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②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와 백지연 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13일 서울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74년 자실 결성 무렵 사료들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신경림 ‘농무’ 황석영 ‘객지’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80년대 ‘딴따라’ 문화 만나면서 문학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겼어요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 백지연(이하 백) 1977년 해직교수들이 모여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1978년 발족한 해직교수협의회 이야기와 교육지표 사건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염무웅(이하 염) 유신체제하에서 처음 해직된 교수는 김병걸, 백낙청 두 분이었습니다. 1974년 말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때문이었지요. 교수와 문인들의 정치참여가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ㆍ조봉암에 위기감 느낀 이승만 “평화통일 주장은 범죄야” 간첩몰이로 진보당 일망타진 ■ 화근이 된 조봉암의 216만표 일명 ‘조봉암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진보당 사건의 상류에는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 집권 시나리오가 보인다.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친이승만계의 원내 의석은 크게 감소되었다.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보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한다. 온갖 정치폭력과 위법이 난무한 ‘부산정치파동’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노리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 기립표결로 국회에서 가결된다. 6·25전란 중의 피란 수도 부산에서 자행된 이 위헌적인 직선제 개헌 덕분에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1952년 8월5일) 이때 조봉암은 79만여표를 얻는 데 불과한 군소 후보였다. 이승만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의 ‘3선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른바 ‘3선개헌’을 감행한다. 의결정족수 미달의 개헌안을 ‘4사5입’이란 우격다짐으로 ‘가결’ 처리하고(1954년 11월19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1956년 5월15일) 당시의 제1야당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절세의 구호를 내걸고 선전했으나, 신익희 후보의 불의의 별세로 좌절하고 말았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504만여표로 당선되었는데,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를 넘는 216만여표를 얻어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이런 결과를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적신호로 분석한 당시 여권에서는 조봉암을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이화장에서 끝난 이승만, 종로에서 끊어진 성곽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6) 이화장·창신동 ▲ 낙산 성곽 : 혜화문~동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대통령을 만들고, 떠나보낸 곳 <이화장(梨花莊)> 이제 다시 <비우당>을 거쳐 다시 낙산 정상에 위치한 공원으로 올라간다. 이 공원을 거쳐 약 300미터 쯤 성안으로 들어가면 이승만의 마지막 별장 <이화장(梨花莊)>이 보인다. 혜화문 근처의 <돈암장>과는 또 다른 별장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거처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호텔(1945. 10. 16 귀국) → 돈암장(1945. 10월말~1947. 8. 25) → 마포장(1947. 8. 25~1947. 10. 18) → 이화장(1947. 10.18~1948. 8. 22) →경무대(1948. 8. 22~1960. 4. 28) → 이화장(1960. 4. 28~1960. 5. 29) → 하와이 망명 이화장이 위치한 곳은 이화동이며, 이 일대는 본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梨花亭)이 있어서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처럼 모두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이다. ▲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 되어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과 4월혁명으로 경무대를 떠나고 미국으로 되돌아 갈기 직전 머물렀던 별장. [사진-유영호] 이화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은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의 불법을 통해 12년 장기집권을 하였지만 결국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이곳 이화장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앞서 가본 <돈암장>에서는 이승만이 <돈암장>에 들어오기 이전의 미국생활에 대하여
왕산 허위의 죽음… 웃고 있는 한 사람
[박도 실록소설 ‘들꽃’ (14)]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① <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철쭉꽃으로,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장소제공; 강원도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 ⓒ 박도 만장(輓章)이 십리를 잇다 왕산 허위가 경성감옥에서 감옥 개설 제1호로 교수형을 당하자 뜻있는 백성들은 피울음을 울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 고향 구미 임은동에서 치른 허위의 장례에는 만사(輓詞, 고인을 추모하여 지은 글)와 제문(祭文)이 장례기간 동안 이어졌고,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輓章)이 십 리를 이었다. 하지만 구미 임은동 바로 이웃 마을 칠곡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사는 전 국무총리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張承遠)은 비탄에 빠지기는커녕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까닭은 왕산 허위에게 경상도 관찰사 벼슬자리 값으로 갚기로 한 20만 원을 통째로 떼어먹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장승원은 집안 대대로 영남 제1의 만석꾼 갑부였다. 그는 늘 돈은 많았지만 벼슬이 없는 것을 자탄하다가 이웃 고을 왕산 허위가 고종 임금의 신임을 얻어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비서원승 등 고관에 오르는 것을 보고 20만 원을 고액권으로 바꿔 보스턴 가죽 가방에 넣고 한양(서울)으로 올라갔다. 그는 왕산 집 문을 두드렸다. 인동
[세월호 특집다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세월호 특집 다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Origin link: http://docucow.com/29 다큐창작소에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세월호 특집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전개과정과 구조활동의 문제점, 수사과정의 의혹, 침몰의 진짜 원인, 검찰 수사결과의 문제점, 정부-여당-정치인-극우단체들의 행태, 진실 추구의 필요성 등을 담았습니다. 본 영상이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밑거름이 되어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유가족들의 한을 풀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성/연출: 김상규 ㅣ조 연 출: 최아람 ㅣ 내레이션: 정훈석 제작: 다큐창작소,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