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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이리저리 떠도는 ‘반민특위’ 표석

2014년 12월 4일 721

울 명동은 백화점 본점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들의 역사도 어느 곳보다 오래됐을 정도로 상업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동시에 한국의 정치사회사에서도 의미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해방 뒤 친일부역의 ‘흑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의 중심지도 바로 명동이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설치한 기구로, 일제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거나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죽이거나 박해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실현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정의실현’보다는 ‘질서유지’를 우선시했던 미군정에 의해 친일부역자들이 다시금 권력을 쥔 현실에서 친일 청산은 쉽지 않았다. 친일부역자들의 경제적.물리적 힘에 기대어 1인 장기 독재를 꿈꾸던 이승만 입장에서도 반민특위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급기야 경찰을 동원해 완력으로 방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반민특위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강제 해산되어버렸다.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하던 이들이 거꾸로 친일부역자들에 의해 ‘역청산’되어 버린 쓰라린 역사…. 친일부역자들은 이후 반공주의자로 둔갑해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며 독재정권의 전위대이자 몸통 그 자체가 되니, 미완의 역사 청산이 남긴 후과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결말이다. 다행히 지난 역사를 모두가 잊고만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반민특위가 해산된 지 50년만인 1999년,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KB국민은행 명동영업부 빌딩 밑에 그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석을 세웠다. 그리고 최근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반민특위 표석이 원래 자리에서 지하주차장 입구로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2014년 12월 3일 805

ㆍ“특무대가 시켜 거짓말” 양명산 진술번복에도 대법 “사형” ■ 조봉암 ‘간첩 무죄’ 판결의 파장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배기호)가 조봉암의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일부)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봉암 피고인은 간첩행위를 한 일이 없으며, 간첩 박정호와는 만난 일도 없고, 정우갑과는 만난 일이 있지만 면담 내용이나 경위로 보아 유죄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 …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를 위반했거나 북한과 야합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사실은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진보당의 정강 정책도 국가변란이나 북한에 호응한 행위로 볼 수 없으며, 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국헌을 위배했다는 공소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1심 판결은 조 피고인이 양명산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점과 무기 불법 소지의 점만을 유죄로 인정하고, (양명산과 같이) 징역 5년에 처한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1심 판결 직후, 조·양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무죄 선고에 이은 보석 결정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반공청년 200여명 법원 난입, ‘용공판사 타도하라’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인정 않고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이 사건을 둘러싼 정권 측의 노림수에 비추어 볼 때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선고 3일 뒤에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958년 7월5일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자칭 반공청년 200여명이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법원 정문으로 난입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유해 발굴…’경찰에 의한 사살’ 추정

2014년 12월 3일 1101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 (서울=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다래헌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에서 박선주 발굴단장이 유해발굴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서울=뉴시스】오동현 기자 =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유해발굴 공동조사단(공동조사단)은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우리 경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됐다고 2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은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호평빌딩 다래헌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1차 유해 발굴 보고대회’를 열고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유해 발굴에 대한 지원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지만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국가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지지 않고 있다”며 “민간이 나서서 발굴 작업을 하는 것은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진실규명에 대한 법과 제도를 구비하기 위함”이라고 전했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포성 멎은 지 60년 넘었지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많다”며 “60년이 지난 사건을 조사하고 유해 발굴하는 것은 다시는 이 땅에 참혹한 전쟁이 없도록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박선주 발굴단장은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매장지에서 출토된 유해는 최소 39명”이라며 “매장지 안에서 발견된 카빈 탄피와 탄두는 당시 경찰이 주로 쓰는 것으로 근접 내지 확인 사살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유해발굴 참가했던 김나경(영남대 문화인류학과)씨는 “역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기까지 22년 걸렸다”며 “국사 교과서에는

서북청년단 재건, ‘이념적 광기의 시대’로의 퇴행

2014년 12월 2일 2591

서북청년단의 정치테러, 권력 비호로 가능 스스로 반공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던 선우휘가 쓴 ‘테러리스트’라는 소설이 있다. 해방정국과 분단정부 수립과정에서 “빨갱이를 치는”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필요악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던 한 우익청년단체의 회원들이 정작 분단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정권에 버림받아 “영락없이 룸펜”으로 전락해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짐승처럼 멱살을 부여잡고 뒤엉키는 모습을 그린 결론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소설에 나오는 몰락한 우익청년단체란 서북청년회(약칭 서청)를 가리킨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말 출범한 이래 이승만정권이 1948년 12월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이라는 어용단체를 꾸릴 때까지 2년 남짓 존재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테러집단이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 가운데 특히 혈기왕성한 청년층이 ‘반공’을 표방하면서 만든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말이 청년단체이지 하는 짓은 정치깡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을 비호하던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조차 나중에는 진저리를 칠 정도의 비인간적 테러집단이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 활동의 기본은 ‘빨갱이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벌인 폭행, 암살, 그리고 집단학살이었다. 서북청년회의 백색테러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좌익에게만 테러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누구에게라도 좌익의 혐의를 씌워 테러를 자행했다. 그리고 테러의 끝은 암살과 집단학살이었다. 1948년에 일어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 바로 이승만정권의 하수인이던 서북청년회였다. 실제로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 출신이었다. 서북청년회의 암살 명단에 오른 것은 정치지도자만이 아니었다. ‘좌익편’이라는 이유로 현직검사가 암살되기도 했다. 그런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국가가 책임져야

2014년 12월 2일 503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 (서울=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다래헌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에서 박선주 발굴단장이 유해발굴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도연 기자 =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배·보상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으로 이뤄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2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를 열어 “정부와 사회는 유족과 시민이 진주에서 지난 3월 발굴한 유해에 대해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조사단은 “진주 발굴 조사 결과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인 39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이 지역에서 713명이 희생당했다는 조사가 있어 아직도 많은 유해가 묻혀 있다. 유해가 거의 삭은 것을 보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삭아 없어질 것”이라며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유족회 김광년 공동대표의장은 “앞으로 유해 발굴사업을 계속 추진해나가겠다”며 “유해를 한군데 모아 평화관 등을 만들어 후세에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 3월 경남 진주에서 진행한 민간차원의 첫 발굴작업에서 최소 3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버클과 탄두, 탄피, 옷핀, 단추 등 82점의 유품도 나왔다. 당시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버클과 와이셔츠 단추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희생자들은 당시 사회적 신분이 있는 민간인으로 추정되며 주로 경찰이 사용하던

남산, 치욕의 통감관저에서 공포의 중정까지

2014년 12월 2일 2193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0) 안기부 터·문학의집·남산한옥마을·한국의집 ▲ 예장동, 필동 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예장동, 필동일대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및 조선총독부 안중근기념관에서 일제 강점기는 조선신궁 참배를 위한 ‘동참로’라 불렸던 현재의 ‘소파로’를 따라 일제 강점기 일본의 본거지였던 중구 예장동방향으로 가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곳을 향해 걷다 보면 가는 길 왼쪽에 <한양공원>이라 새겨진 돌이 있다. 이것은 본래 남산3호 터널 북쪽에 있었으나 터널공사로 이리로 옮겨진 것이다. 1910년 일본이 남산일대를 공원화하면서 개장식 때 고종이 보낸 ‘漢陽公園(한양공원)’ 친필을 새겨 둔 것이다. 하지만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제는 한양공원을 1918년 폐쇄하였다. 한편 이 기념석 뒤편은 현재 모두 정으로 쪼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로 보아 아마도 공원개장의 후원자명단 같은 것이 적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 1910년 도성 안 남산일대는 일제에 의해 <한양공원>으로 개원되었다가 이후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1918년 폐쇄되었다. 사진 속 글씨는 고종 어필이다. [사진-유영호] 이렇게 한양공원 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숭의여자대학교와 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해 있다. 바로 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구 조선통감부)가 1926년 경복궁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있던 곳이다. 또 서울애니매이션센터 앞 버스정거장에는 바로 이곳이 1921년 의열단 김익상에 의해 조선총독부를 향하여 폭탄이 던져진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그런데 김익상은 정작 이곳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그 뒤 6개월 후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그곳에서

‘친일파 김백일’, 상무대에 강감찬·이순신·안중근 동상과 함께?

2014년 12월 2일 635

광주 시민사회 “체제 지켜낸 전쟁영웅이라도 친일행적 지울 수 없다”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1일 오전 광주 첨단 정부합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훈처에 ‘친일파 김백일’ 현충시설 지정 철회와 기념물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광주는 최근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이 학교·공원·도로 등에 사용된 것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거세다.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704명 명단에도 포함된 김찬규가 ‘호국영웅 김백일’로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인 것. 광주 서구에 학교·어린이공원·도로명·지구명 등 친일파 딴 이름 곳곳에 광주 서구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공원, 도로명 등에까지 ‘백일’이란 명칭이 쓰이고 있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이전한 주소도 ‘백일로’다. 게다가 서구 화정4동 백일지구는 90~92년에 택지개발이 이뤄졌다. 광주시에 따르면, 백일지구의 ‘백일’은 택지개발 전 이곳에 위치해 있던 백일사격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백일’이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 토벌부대 주축인물이었던 친일파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김백일 장군은 만주 일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된 독립군 토벌부대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김백일 장군의 친일행적 등을 살펴 보면,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패망·해산할 때까지 간도지역 등에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모두 108차례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이른다. 당시 그의 본명은 ‘김찬규’였다. 그는 해방 뒤 월남하면서 “세상이 다 붉은 색으로 물들어도 나 혼자만은 반공에 입각해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김백일로 개명했다. 이처럼 친일파의 이름 사용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남산에 박혀있는 치명적인 친일의 흔적

2014년 12월 1일 2860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9) 남소문·조선신궁 ▲ 남산 성곽을 따라가는 남소문~숭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남산 성곽(남소문 ~ 숭례문 구간) ‘존재하였다는 사실’조차 잊혀진 <남소문> 옛 타워호텔 입구에서 창충단로를 따라 한남동 방향으로 약 200미터 남짓 언덕길을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외로운 표석이 하나 있다. 이것이 <남소문>표석이다. 흔히 사람들은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광희문은 남소문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광희문이 이곳 남소문보다 약 60년 먼저 태조 5년(1396)에 건설되었지만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하지는 않고 그저 수구문, 시구문이라 속칭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조 1년(1457) 이곳 남산 아래 진짜 남소문이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남소문은 수레가 다닐 수 없어 실용성이 떨어지고, 또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를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건설된 지 12년 만에 예종 1년(1469) 폐쇄하게 된다. 그 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숙종 때에는 붕당정치가 심화되었던 관계로 정권 획득을 위해 남인(南人)들이 문을 개통하자고 한데 반하여 서인(西人)들은 이를 반대하였던 것도 이채롭다. 이처럼 남소문은 비록 폐쇄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경강(京江)> 남소문 터에서 다시 성곽 길을 따라 남산을 힘겹게 올랐다. 남산에서 성곽의

천안출신 독립운동가 이동녕 일생 무대 오른다

2014년 11월 30일 665

천안시립무용단, 12월 4·5일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서 ‘100년의 꿈’ 2회 공연 – 애국충절의 고장 천안시민 자긍심 고취·독립운동가의 독립의지와 민족애 재조명 –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친 천안출신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무용작품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천안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천안시립무용단(상임안무자 김종덕)은 제11회 정기공연으로 12월 4일∼5일 저녁 8시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석오 이동녕선생의 일생을 통해 애국지사의 고장 천안을 새롭게 조명하는 석오 이동녕 ‘100년의 꿈’을 공연한다. 이번 작품은 항일무장투쟁의 전사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 하고도 두 해가 되는 해로 천안 목천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 백범 김구선생이 존경했던 인물이며,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이동녕 선생의 초상화가 발견될 만큼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던 분이다. 일제 침략에 맞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치며 임시정부의 결집에 노력했고, ‘산류천석(山溜穿石/산에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을 신념으로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할 것을 독려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특히 이번 작품공연으로 이동녕 선생을 통해 애국지사의 고장인 천안을 새롭게 조명하고 한국창작춤의 동시대성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종덕 상임안무자는 “천안시립무용단은 시민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단체로 시민의 눈높이게 맞는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시민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2015년은 광복 70주년으로 나라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공감하는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며,

아이들 울음도 그치게 한 말, “일본순사 온다”

2014년 11월 29일 1658

[박도 실록소설 ‘들꽃’ (16)]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③  <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국화, 사군자의 하나로 절개, 지조를 상징한다. ⓒ 박도 황현의 절명시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전라도 구례 고을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삼천리 금수강산은 경술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단박에 그 빛을 잃었다. 경북 선산군 구미 임은동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 앞은 낙동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하여 바람이 부는 날에는 은빛갈대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아이들은 사시사철 낙동강 모래톱에서 뛰어놀기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하지만 정미년(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폐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왕산 허위가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했다. 그 이후 일본 헌병이나 경찰들은 걸핏하면 동네에 나타나 의병대장 왕산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구미 임은동은 웃음소리를 잃은 적막강산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