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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광복절 앞두고 ‘천황폐하’…박근령, 망언 잔치 (8.5)

2015년 8월 6일 551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가 일본 영상매체 ‘니코니코’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관련 각종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박근령 씨는 과거사와 관련해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발언하고, 일왕을 “천황폐하”라고 지칭했습니다. 한일 간의 민감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친일파의 딸 대통령에 이어 친일파 아들이 대권 주자라니

2015년 8월 6일 845

[김종철 칼럼]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오는 8월15일은 광복(光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은 길고도 긴 세월이다. 그 기간에 겨레는 ‘광복’이라는 문자의 뜻 그대로 빛을 되찾고 살았는가?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70년 동안, 1960년의 4월혁명 이후 한 해 남짓,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빼면 60년 가까운 세월의 대부분은 독재와 쿠데타,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민중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진정한 독립과 자주였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되는 현재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미군정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친나치행위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비호하고 중용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나 그 후손이 득세해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 2013년 3월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장 입구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 초상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는 2005년에 나온 <나의 삶 나의 아버지>(동아일보사 펴냄)라는 책에 실린 글(‘아버지의 딸로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부모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강인국은 방응모, 염석진은 노덕술? ‘암살’은 진행형

2015년 8월 6일 4110

허구로 창조해냈지만 실제에 근접한 ‘암살’ 속 인물은?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쇼박스 관련사진보기 해방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3일 7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의 흥행 열기가 뜨겁다. 무엇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완의 역사를 완성한다. 역사가 못한 일을 영화가 대신하는 셈이다. 물론 허구적으로 창조한 인물을 중심으로 빚어낸 이야기지만, <암살>은 일제 치하에 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실존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인물 하나하나에 다양한 사람이 투영돼 있어 더욱 흥미를 끈다. 실존했던 사람들을 압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등장인물은 어떤 사람을 투영해 놓은 것일까? 김구나 김원봉 등 실존했던 인물 외에 영화의 중심인물을 보면 개연성이 있는 인물이 여럿 떠오른다. 당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모습이 다양하게 담겼기에 창작된 이야기임에도 허구로만 보기 어렵다.  다양한 친일파 역사를 하나의 인물로 압축해 놓은 강인국 가장 먼저 친일파 강인국은 광산채굴권을 얻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묘사된다. 비행기 10대를 헌납하고 작위를 기대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와 비슷한 모습의 일제 강점기 대표적 광산 재벌은 방응모와 최창학이었다. 방응모는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었고 이후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는 1933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  영화 <암살>의 친일파 강인국 ⓒ 쇼박스 관련사진보기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위원장 성대경)가 내놓은 ‘3차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는 방응모 <조선일보> 전 사장은 일제의 지배와 침략을 찬양한 잡지 <조광>을 발행하는 등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일본 A급전범 조카와 결혼?

2015년 8월 6일 5421

[오마이팩트] 영산 신씨 ‘시게미쓰’로 창씨개명… 일본 외상 관련설은 ‘수수께끼’ ▲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이 7월 28일 오후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신격호 회장이 일본 A급 전범 조카와 결혼했다?’ 롯데그룹 경영권 다툼을 계기로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의 복잡한 가족사가 입방아에 올랐다. ‘시게미쓰(重光)’란 일본 성이 화근이었다. 일제시대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개명한 신격호(94) 총괄회장의 일본인 아내 시게미쓰 하츠코의 외삼촌이 바로 2차 대전 종전 당시 일본 외무상이었던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라는 설이 다시 불거진 것이다(관련기사: 누가 하든 ‘시게미쓰’인 롯데, 소프트뱅크 손정의에게 배워라). 때마침 국내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시게미쓰 마모루가 미주리호 함상에서 의족을 짚고 나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시게미쓰 마모루와 신격호 처가 관련설은 극대화됐다. 그는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홍코우 공원 폭탄 투척 당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책 <신격호의 비밀> “신격호 아내 외삼촌이 일본 A급 전범” 언론인 정순태씨는 지난 1998년 <신격호의 비밀>이란 책에서 시게미쓰 하츠코의 외삼촌이 시게미쓰 마모루고, 유력 가문인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롯데를 키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신 회장이 ‘시게미쓰’란 성을 쓴 것도 이 때문이란 것이다.  이에 롯데그룹은 지난달 31일 ‘때늦은’ 반론 자료를 냈다. 하츠코씨의 결혼 전 성은 ‘다케모리’로, 결혼 후 남편 신격호의 일본 성을 따랐을 뿐,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집안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롯데그룹 홍보담당자는 4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도 “하츠코씨 쪽에 직접

“일왕을 천황폐하라니…박근령이 창피”

2015년 8월 6일 667

ㆍ박씨·일본 인터넷 대담 내용 공개… 시민 분노 확산 ㆍ“친일 넘어 숭일” “일 언론들 난리 부끄러워 죽겠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61·사진)가 일본 인터넷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의 역대 총리와 천황 폐하가 거듭 사과를 했는데도 자꾸 갈등을 빚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주장한 내용 등이 공개되면서 각계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은 5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박씨의 발언은 친일을 넘어 노골적인 숭일로 들린다”면서 “일본 안에서도 시민들이 나서 자국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해외 시민들과 연대를 시도하고 있는 마당에 박씨가 찬물을 끼얹은 셈”이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박씨의 발언은 상식적으로 이해가능한 수준도 안된다”면서 “연구소 차원에서 공식 논평을 낼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도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한 누리꾼은 트위터에 “박씨가 한 말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이 한 말 중에 가장 치욕적인 말”이라며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고 적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는 한 누리꾼은 “일본이 박씨 때문에 뉴스마다 난리”라면서 “창피해서 못살겠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썼다. 거친 욕설을 동반한 격한 반응들도 줄을 이었다. ▲ 수요시위… 박근령 사죄 요구 피켓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5일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1190차 정기 수요시위 참가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근령씨에게 친일 망언 사죄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앞서 박씨는 지난 4일 오후 방송된 일본 동영상 사이트

“신사참배는 내정간섭? 박근령씨, 제 정신 아니다”

2015년 8월 6일 665

[인터뷰]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 “친일파 DNA, 측근 권력비리보다 더한 역사 팔아먹기”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박근령씨가 일본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제기는 “내정간섭”이라고 한 것에 대해 “역사적 정신적 질환을 보이고 있다”며 발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동생인 박근령씨의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입장도 밝혔다. 박 실장은 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전범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에 대한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이라며 선조의 참배와 같다는 것은 반인도적 범죄를 일으킨 히틀러에 대해 조상이라고 참배한 것과 같다.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반대해 소송하고 있는 한국인과 대만인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 동생 박근령씨는 4일 밤 방송된 일본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일본 과거 역사 사죄 요구에 대해 “바람 피운 남편의 나쁜 소문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후퇴시키는 일이다. 한국의 국익에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일본 주요 정치인들의 야수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내정간섭이다. 혈손이 어떻게 부모를 자신의 선조를 참배하지 않겠느냐. 신사에 참배해서 전쟁을 일으킨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헌법도 아니고 군국주의 시대도 아니다”며 “친일과 국교 정상화 뒤의 친일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한용 실장은 “명백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한국인과 대만인들이 소송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친일파’ 박근령이 존경하는 ‘다카기 마사오’ 는 누구인가?

2015년 8월 5일 6285

[임기상의 역사산책 116] 조국을 버리고 왜군 장교로 들어간 조선 청년의 초상 ▲ 만주군 예비소위 다카기 마사오(조선이름은 ‘박정희). 일본 육사 졸업 후 2달간의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소조(상사) 복장을 입은 모습이다. 1939년 3월 31일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만주신문>에 희한한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7면에서 ‘혈서 군관 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 합격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 1939년 3월 31일 만주국 <만주신문>에 실린 기사. 청년 박정희가 일본과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썼다며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을 읽고 감동한 일본 관동군 수뇌부는 연령이 초과해 만주군관학교에 응시할 수 없는 이 조선 청년에게 응시자격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한 박정희는 1940년 4월에 이른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3가지였다.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거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해 이름을 더럽히는 길이었다. 권력지향적인 초등학교 교사 박정희는 출세를 위해 일제의 주구가 되는 길을

“왜 이 전쟁에 못 배우고 없는 집 자식들만 투입되나?”

2015년 8월 5일 1175

[임기상의 역사산책 115] 통역장교 리영희가 겪은 6.25 전쟁의 속살 ▲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에 있는 경판고. 이곳에 보관된 19종 269점의 경판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 (사진=문화재청) 1951년 겨울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국군 제11사단 9연대의 임시 연대본부가 숙영하기 위해 설악산 신흥사 경내에 주둔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부대원들 사이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빛바랜 군복을 헐겁게 입은 한 청년 장교가 천천히 경내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큰 사찰은 처음 보았다. 22살의 이 청년장교는 이 연대의 통역장교로 미군 고문관과 함께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추위에 언 몸을 녹이려고 불을 피우고 있는 병사들 무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이글거리고 있는 불속을 무심코 바라보다 깜짝놀랐다. “장작이나 나뭇가지를 태우는 줄 알았더니 귀중해 보이는 목판들이 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는 곧바로 연대장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연대장도 심각하게 알아듣고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불을 끄고 경판들을 한 조각까지 빠짐없이 꺼내 원위치에 갖다놓아라.” 병사들은 일단 물을 부어 불을 끈 다음 타다 만 조각까지 본당의 왼쪽에 있는 판고에 차근차근 도로 꽂아놓았다. 이렇게 해서 19종 269점의 귀중한 경판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 이 젊은 장교는 전쟁이 끝난 후 언론계와 학계의 중진이 되어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 리영희 한양대 교수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김재춘 교육차관 “국정교과서, 독재 국가서 사용”

2015년 8월 5일 672

[발굴] 김무성의 미국발 ‘국정제’ 발언 속 김 차관 과거 논문 눈길 ▲ 지난 6월 30일 ‘직선 교육감제 폐지’를 위한 새누리당 토론회에 참석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윤근혁 “좌파 세력이 준동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미국 LA에서 한 말이다. ‘좌파 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들겠다는 얘기였다. 김재춘 차관 “국정교과서, 후진국에서 사용되는 제도” 이로부터 4일 뒤인 지난 4일 오후 황우여 교육부장관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필요하면 국정화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김 대표를 거들고 나섰다. 김 대표의 미국 LA발 ‘국정교과서’ 발언을 통해 정부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물꼬를 트고 나서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UCLA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자격증을 받은 김재춘 현 교육부차관(전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교육비서관)이 과거 직접 쓴 국정교과서 관련 논문이 눈길을 끌고 있다. 김 차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2009년 6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정책연구인 <교과서 검정체제 개선방안 연구> 논문을 대표 집필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국가가 개발하는 국정교과서보다는 민간인이 개발하는 검·인정 교과서가 교과서 개발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더 많이 지닐 것으로 간주된다”면서 “국정교과서는 독재 국가나 후진국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차관은 “이에 반하여 검·인정 교과서는 이른바 선진국(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제도”라고 덧붙였다. ▲ 김재춘 교육부차관이

[논쟁으로 읽는 70년](19) 청년문화 논쟁

2015년 8월 5일 3236

ㆍ‘통·블·생’ 청년문화, 저항정신 잃고 한때 ‘생활문화’에 그쳐 ▲ 최인호·이장희·양희은 등 1970년대판 ‘아이돌’ 등장 청년들 통기타·청바지 열풍 ▲ “청년들 만나서 밤 새워 보라” 최인호, 상향식 청년문화 선언 한완상, 분단·유교 영향 아래 ‘대항문화’로서 성립에 회의 ▲ 강압적 유신체제와 맞물려 삶에서의 의미 부여 못하고 생활양식으로서 문화에 그쳐 광복 70년 동안 진행된 문화 논쟁 중 가장 큰 논란을 빚은 것은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 논쟁’이었다. 학술 영역에선 이보다 더 중요하고 생산적인 논쟁도 많았지만, 대중적 관심에서 청년문화 논쟁만큼 파장이 컸던 논쟁도 드물다. 논쟁의 출발점을 제공한 것은 1974년 3월29일자 동아일보 기획기사인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었다. 이 기사는 당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던 최인호,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서봉수, 이상룡 등 6명을 젊은 우상으로 선정했다. 이들의 대표자 격인 소설가 최인호는 1945년생이니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고, 코미디언 이상룡은 1944년생이니 서른 살이었다. 20대 청년들이 새로운 아이돌로 급부상했고, 이들의 활동과 문화를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논쟁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와 메시지다. 동아일보 기사는 곧바로 대학 안과 대학 밖의 서로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대학 밖에선 청년문화를 다각도로 다룬 기사들이 쏟아졌다. 6명의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기에 신문과 방송은 청년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보도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대학 안에서는 청년문화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이뤄졌다. “딴따라가 우리의 영웅이 될 순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대였음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