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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4부 ‘나는 고백한다’

2015년 8월 15일 1738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4부 나는 고백한다<2015.8.14> ※관련영상 ☞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2부 ‘뿌리깊은 친일’ ☞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1부 ‘친일후손 1177′ 지난 8개월 동안 뉴스타파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파 1,006명의 후손 찾기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후손으로 확인된 1,177명을 대상으로 그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친일 후손들이 친일 문제와 선대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가감없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친일파 후손 1,177명의 학력과 직업, 거주지를 확인해 그들의 삶의 모습과 인생의 궤적을 파악하려 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친일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고,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단초를 찾아 역사적 화해를 시도하고자 했다. 뉴스타파는 1,177명 가운데 모두 350명과 접촉했다. 이메일과 전화, 사무실과 자택 방문을 통해서다. 이 가운데 이메일에 대해 답변을 보내 온 사람이 20 여명, 전화 연락에 응한 사람이 10여 명, 만남에 응한 사람은 10여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만남 자체를 회피했고, 일부는 친일 청산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본인이나 선대의 친일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제 강점기 하동군수를 지낸 이향녕, 일제의 선전활동에 동원된 ‘국경의 밤’의 시인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음성군수를 지낸 이준식의 손자 이윤 등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

2015년 8월 15일 668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 <2015.08.13>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곧 혼돈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친일파는 이런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조사관 정철용은 출근하자마자 괴한들의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정철용의 팔을 꺾고 무기와 신분증을 빼앗았으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정철용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쳤다. 정철용은 뒷마당으로 끌려 갔는데, 뒷마당엔 다른 반민특위 동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2015년 7월31일. 훗날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불리는 이 날의 사건을 떠올리다 김정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이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있기 전, 이 박사(이승만)가 우리 집에 은밀히 찾아왔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과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마지막 협상. 이 날의 아버지의 표정을 김정륙은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지는 ‘역청산’의 과정도. 친일파에게 독재자는 구원이었고 반대로 민주주의는 공포였다. 친일파가 독립운동 세력을 역청산하는 과정, 친독재파로 변신하는 과정, 그들이 만들어놓은 반역적 질서에 순응해 승승장구한 친일파의 후예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친일-친독재의 반.역.사를 조명한다. 구성·연출: 김도성 kdspd@hani.co.kr <2015-08-13> 한겨레TV ☞기사원문: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 – 1부 ☞기사원문: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 – 2부  

[8.03] 정미년~한일합방까지 재조친일파와 재야친일파

2015년 8월 14일 790

8월 3일 보이는 라디오 ‘박한용의 백년전쟁’ 다시보기 <제1세대 친일파:매국형 친일파>   <2015-08-03> 국민TV ☞기사원문: 정미년~한일합방까지 재조친일파와 재야친일파

분단으로 귀결된 ‘가능성의 역사’

2015년 8월 14일 641

잠깐독서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생각정원·1만6000원 70년 전인 1945년 8월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3년 뒤인 1948년 8월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한달 뒤인 9월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한반도에 들어선 두 정부는 극단적인 대결과 기나긴 체제 경쟁에 돌입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은 도대체 어쩌다가 기나긴 분단으로 귀결됐던 것인가? 한국 근대사 연구자인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해방 뒤 3년이란 기간을 ‘가능성의 역사’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해방 뒤 3년이란 무대에 7명의 민족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올린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꾸려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여운형, 한국 최고의 공산주의자로 꼽혔던 박헌영, 국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거두였던 송진우,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꼽혔던 김일성,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업고 급부상한 이승만,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중도우파를 대표했던 김규식 등이다. 한반도의 정치 지형이 지금처럼 굳어진 데에는, 불현듯 찾아온 해방 공간에서 이들이 숙고를 거듭하며 내린 선택들이 있었다. 물론 해방 뒤 3년이 가능성으로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을 피할 수 없었고,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본격화하는 전초기지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들의 선택은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등을 통한 국제적인 주체들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은이는 “해방 뒤 3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미·소가 만든 세계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영상] 독립운동가가 꿈꾼 나라

2015년 8월 14일 681

  일제강점 36년 학계가 추산하는 독립운동 참여자는 40만명 이름도 모르는 독립운동가와 무고하게 죽어간 이 땅의 백성들이 꿈꾼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독립운동가 꿈꾼 나라  <!– style="TEXT-ALIGN: left"   ※ Orgin link: http://youtu.be/V4mhzj4m47M    

강원 출신 친일파 124명…해방 후에도 기득권 지켜

2015년 8월 14일 1448

【강릉=뉴시스】김경목 기자 = 강원도 출신의 친일파는 몇 명이고 누구였을까? 14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강원 출신 124명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조사돼 등재됐기 때문에 현재의 경기도 이천 출신 2명과 경상북도 울진 출신 1명이 강원 출신으로 분류돼 총 127명을 고발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강릉이 13명으로 가장 많고 춘천 12명, 철원 10명, 통천(북강원도) 6명, 홍천·원주 5명, 양양 4명, 고성·삼척·영월 3명, 평강(북강원도) 2명, 평창·정선·양구·횡성 1명 등이다. 직업군별로는 경찰이 40명으로 가장 많고 관료 31명, 중추원(조선총독 자문기구) 참의 13명, 예술가 8명, 판사 7명, 종교인 4명, 군인 3명, 교육자 2명, 일본군위안소운영자 1명 등이다. 해방 후 이들은 자신의 경력을 이용해 경찰국장, 국회의원, 고위직 관료, 고위직 군인, 변호사, 종교계 대표, 대학 부총장, 교수, 기업인 등을 지내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민족주의 진영은 친일 잔재 청산에 이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한 강원지역 친일파는 친일인명사전에만 16명으로 조사됐다. 또 해방 후 남과 북의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무공훈장, 건국훈장 애족장, 국기훈장 제1급 등 훈장을 받은 친일파도 5명이나 됐다. 이 중 국기훈장 제1급은 무용가로 명성을 떨친 월북 예술인 최승희가 받은 북한 정부의 훈장이다. 강원 출신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강원도지사를 지낸 이범익도 대표적인 친일파다. 광복회 등은 2013년 이범익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단죄문을 춘천시 소양로 비석군에 설치했다.

안중근 의사 작사·작곡한 ‘옥중가’, 국내에 첫 소개

2015년 8월 14일 855

노동은 교수, 항일노래 100여개 새로 발굴…’항일음악 350곡’에 담아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 콩둔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셔라 왜놈들 죽여라.”(옥중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직접 작사·작곡한 이 ‘옥중가’를 부르며 울분을 달랬다. 안 의사의 여동생인 안익근이 6촌 동생 곽희종에게 가르쳐 중국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 노래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에 소개된다.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는 13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가와 항일가, 혁명가 등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한 내용의 ‘항일노래’를 모아 언론에 공개했다. 이 노래에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 외에 민족시인 김여제가 지은 ‘흥사단 단가’,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에 발표된 ‘독립군가’도 포함됐다. 불교계 학교에서 학업에 매진하고 독립 의지를 다지고자 부른 학도가 중 가장 처음 나온 ‘학도권면가’를 비롯해 부자(父子) 작곡가 이두산·정호가 작곡·작사한 노래도 이번에 처음으로 발표된다. ▲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 노 교수는 이 곡들을 비롯해 새로 발굴한 항일노래 100여개를 올해 발간될 항일노래집 ‘항일음악 350곡’에 담았다. 노 교수와 역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작업한 ‘항일음악 350곡’은 동학혁명 시기 노래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노래를 연대별로 정리한 최초의 항일 노래집이다. 우리 항일 노래들은 1910년 이전에는 미국 찬송가, 1910년대에는 일본 창가와 군가의 영향을

가짜 솎아내고 숨은 애국자 찾아내야 ‘역사 바로잡기’

2015년 8월 14일 632

<2015-08-14> 한국일보 ☞기사원문: 가짜 솎아내고 숨은 애국자 찾아내야 ‘역사 바로잡기’  

KBS 차기 이사회, ‘화력 강한’ 보수 후보 대거 투입

2015년 8월 14일 1342

방통위 여당 추천 위원 7명 확정…이사회 순항에는 물음표 3차례 연기됐던 KBS 이사회 후보 명단이 공개됐다. KBS 안팎에서 부적격이라고 비판받은 인사가 고스란히 포함됐다. 특히 여당 추천 몫으로 포함된 인사들은 방송·언론보다는 ‘이념’ 논쟁에 치열했던 보수 논객들이 다수 포함돼 차기 KBS 이사회가 순항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성준)는 13일 전체회의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추천할 KBS 이사 후보 11명 명단을 확정했다. 야권 추천 방통위 상임위원은 그동안 이사 3연임 및 방송 독립성·자율성 침해 이사 선임에 반대하며 3차례 회의를 무산시켰으나 “책임 있는 공직자로서 더 이상 이사 선임을 미루기 힘들었다”며 이사 선임 표결에 참석했다. 여당 추천 몫 이사에는 △이인호 현 이사장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김경민 한양대 정외과 교수 △이원일 변호사 △조우석 문화평론가 △차기환 변호사(전 방문진 이사 연임) △변석찬 전 KBS라디오 센터장 등이 이사로 추천됐다. KBS 여당 추천 몫의 이사 후보들은 현재 9기 이사회보다 보수색채가 뚜렷해졌다. 극우·보수계열 활동도 활발해 앞으로 이사회 운영에 난항이 예상된다.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해 9월 KBS 이사회에 입성한 후 타천으로 이사 후보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오가며 러시아·핀란드 대사를 역임했던 역사학자다. 진보-보수에서 객관적이라고 평가받던 이인호 이사장은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로 돌변했다. ▲ (첫번째줄 왼쪽부터)강규형, 김경민, 변석찬, 조우석, (두번째줄 왼쪽부터)이인호, 이원일, 차기환 KBS 신임 이사 후보.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해 이사 임명

[이만열 특별기고] 해방 70년, 감격과 반성 그리고 모색

2015년 8월 14일 684

초등학교 1학년 때 맞은 해방, 아직도 기억이 뚜렷하다. 어른들을 따라 간 신사(神社) 마당에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골 어르신들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 채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홍명희의 표현처럼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 높직한 곳에 자리한 신사가 불탔다. 화염에 싸인 신사를 보며 일제로부터의 자유가 현실화됨을 실감하는 듯했다. 심훈이 읊었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바로 ‘그날’을 어린 시절 경험했다. 나는 아직도 감격과 눈물 없이는 그날을 회상하지 못한다. 주일학교에 가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신사 마당에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딱 거기까지였다. 만세를 부른 지 얼마 안되어 이웃 동네의 구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아무개 아버지는 빨갱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서북청년단이라면서 총으로 촌맹들을 겁박하는 장면도 보았다. 이어서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우리 마을까지 온 것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분단과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고 막내 자형은 납북되었으며 종형 두 사람은 전사했다. 민족사의 비극이 가족사에도 비애를 안겨주었다. 해방은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의미하는 광복이 아니었다. 명실공히 광복은 몇 가지를 더 충족시켜야 했다.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여 정부를 세우고, 친일파와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며,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했다. 이런 과제들은 분리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