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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영상] 독립운동가가 꿈꾼 나라

2015년 8월 14일 663

  일제강점 36년 학계가 추산하는 독립운동 참여자는 40만명 이름도 모르는 독립운동가와 무고하게 죽어간 이 땅의 백성들이 꿈꾼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독립운동가 꿈꾼 나라  <!– style="TEXT-ALIGN: left"   ※ Orgin link: http://youtu.be/V4mhzj4m47M    

강원 출신 친일파 124명…해방 후에도 기득권 지켜

2015년 8월 14일 1396

【강릉=뉴시스】김경목 기자 = 강원도 출신의 친일파는 몇 명이고 누구였을까? 14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강원 출신 124명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조사돼 등재됐기 때문에 현재의 경기도 이천 출신 2명과 경상북도 울진 출신 1명이 강원 출신으로 분류돼 총 127명을 고발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강릉이 13명으로 가장 많고 춘천 12명, 철원 10명, 통천(북강원도) 6명, 홍천·원주 5명, 양양 4명, 고성·삼척·영월 3명, 평강(북강원도) 2명, 평창·정선·양구·횡성 1명 등이다. 직업군별로는 경찰이 40명으로 가장 많고 관료 31명, 중추원(조선총독 자문기구) 참의 13명, 예술가 8명, 판사 7명, 종교인 4명, 군인 3명, 교육자 2명, 일본군위안소운영자 1명 등이다. 해방 후 이들은 자신의 경력을 이용해 경찰국장, 국회의원, 고위직 관료, 고위직 군인, 변호사, 종교계 대표, 대학 부총장, 교수, 기업인 등을 지내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민족주의 진영은 친일 잔재 청산에 이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한 강원지역 친일파는 친일인명사전에만 16명으로 조사됐다. 또 해방 후 남과 북의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무공훈장, 건국훈장 애족장, 국기훈장 제1급 등 훈장을 받은 친일파도 5명이나 됐다. 이 중 국기훈장 제1급은 무용가로 명성을 떨친 월북 예술인 최승희가 받은 북한 정부의 훈장이다. 강원 출신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강원도지사를 지낸 이범익도 대표적인 친일파다. 광복회 등은 2013년 이범익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단죄문을 춘천시 소양로 비석군에 설치했다.

안중근 의사 작사·작곡한 ‘옥중가’, 국내에 첫 소개

2015년 8월 14일 841

노동은 교수, 항일노래 100여개 새로 발굴…’항일음악 350곡’에 담아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 콩둔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셔라 왜놈들 죽여라.”(옥중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직접 작사·작곡한 이 ‘옥중가’를 부르며 울분을 달랬다. 안 의사의 여동생인 안익근이 6촌 동생 곽희종에게 가르쳐 중국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 노래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에 소개된다.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는 13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가와 항일가, 혁명가 등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한 내용의 ‘항일노래’를 모아 언론에 공개했다. 이 노래에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 외에 민족시인 김여제가 지은 ‘흥사단 단가’,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에 발표된 ‘독립군가’도 포함됐다. 불교계 학교에서 학업에 매진하고 독립 의지를 다지고자 부른 학도가 중 가장 처음 나온 ‘학도권면가’를 비롯해 부자(父子) 작곡가 이두산·정호가 작곡·작사한 노래도 이번에 처음으로 발표된다. ▲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 노 교수는 이 곡들을 비롯해 새로 발굴한 항일노래 100여개를 올해 발간될 항일노래집 ‘항일음악 350곡’에 담았다. 노 교수와 역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작업한 ‘항일음악 350곡’은 동학혁명 시기 노래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노래를 연대별로 정리한 최초의 항일 노래집이다. 우리 항일 노래들은 1910년 이전에는 미국 찬송가, 1910년대에는 일본 창가와 군가의 영향을

가짜 솎아내고 숨은 애국자 찾아내야 ‘역사 바로잡기’

2015년 8월 14일 622

<2015-08-14> 한국일보 ☞기사원문: 가짜 솎아내고 숨은 애국자 찾아내야 ‘역사 바로잡기’  

KBS 차기 이사회, ‘화력 강한’ 보수 후보 대거 투입

2015년 8월 14일 1327

방통위 여당 추천 위원 7명 확정…이사회 순항에는 물음표 3차례 연기됐던 KBS 이사회 후보 명단이 공개됐다. KBS 안팎에서 부적격이라고 비판받은 인사가 고스란히 포함됐다. 특히 여당 추천 몫으로 포함된 인사들은 방송·언론보다는 ‘이념’ 논쟁에 치열했던 보수 논객들이 다수 포함돼 차기 KBS 이사회가 순항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성준)는 13일 전체회의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추천할 KBS 이사 후보 11명 명단을 확정했다. 야권 추천 방통위 상임위원은 그동안 이사 3연임 및 방송 독립성·자율성 침해 이사 선임에 반대하며 3차례 회의를 무산시켰으나 “책임 있는 공직자로서 더 이상 이사 선임을 미루기 힘들었다”며 이사 선임 표결에 참석했다. 여당 추천 몫 이사에는 △이인호 현 이사장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김경민 한양대 정외과 교수 △이원일 변호사 △조우석 문화평론가 △차기환 변호사(전 방문진 이사 연임) △변석찬 전 KBS라디오 센터장 등이 이사로 추천됐다. KBS 여당 추천 몫의 이사 후보들은 현재 9기 이사회보다 보수색채가 뚜렷해졌다. 극우·보수계열 활동도 활발해 앞으로 이사회 운영에 난항이 예상된다.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해 9월 KBS 이사회에 입성한 후 타천으로 이사 후보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오가며 러시아·핀란드 대사를 역임했던 역사학자다. 진보-보수에서 객관적이라고 평가받던 이인호 이사장은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로 돌변했다. ▲ (첫번째줄 왼쪽부터)강규형, 김경민, 변석찬, 조우석, (두번째줄 왼쪽부터)이인호, 이원일, 차기환 KBS 신임 이사 후보.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해 이사 임명

[이만열 특별기고] 해방 70년, 감격과 반성 그리고 모색

2015년 8월 14일 673

초등학교 1학년 때 맞은 해방, 아직도 기억이 뚜렷하다. 어른들을 따라 간 신사(神社) 마당에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골 어르신들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 채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홍명희의 표현처럼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 높직한 곳에 자리한 신사가 불탔다. 화염에 싸인 신사를 보며 일제로부터의 자유가 현실화됨을 실감하는 듯했다. 심훈이 읊었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바로 ‘그날’을 어린 시절 경험했다. 나는 아직도 감격과 눈물 없이는 그날을 회상하지 못한다. 주일학교에 가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신사 마당에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딱 거기까지였다. 만세를 부른 지 얼마 안되어 이웃 동네의 구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아무개 아버지는 빨갱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서북청년단이라면서 총으로 촌맹들을 겁박하는 장면도 보았다. 이어서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우리 마을까지 온 것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분단과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고 막내 자형은 납북되었으며 종형 두 사람은 전사했다. 민족사의 비극이 가족사에도 비애를 안겨주었다. 해방은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의미하는 광복이 아니었다. 명실공히 광복은 몇 가지를 더 충족시켜야 했다.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여 정부를 세우고, 친일파와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며,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했다. 이런 과제들은 분리된

영화 의 배후인물 ‘약산 김원봉’은 누구인가?

2015년 8월 14일 2684

[임기상의 역사산책 118] 친일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반민특위 ▲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사진=영화 ‘암살’ 스틸컷) 이 사진은 영화 <암살>의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자 암살작전을 뒤에서 지휘했던 ‘약산 김원봉’이 빈잔에 고량주를 부으면서 백범 김구에게 말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그리고는 그들의 이름을 한명씩 거론하면서 슬퍼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백범 김구는 잘 알고 있지만 약산에 대해서는 생소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북에서는 지도자 김일성 수상에게 반기를 든 ‘반동’이었으니. 이렇게 해서 약산은 해방 후 70년 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라” ▲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해방될 때까지 총과 폭탄을 놓지 않았다. (KBS 다큐영상 캡처)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9일 일단의 조선청년들이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민 반씨 집에 모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청년 13명은 밤이 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이들 모두 3.1운동 당시 조선민족이 맨손으로 일제에 맞서다 총칼로 진압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한다는 입장에 공감했다. 단체 이름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자를 따서 ‘의열단’으로 명명했다.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맏형격인 ‘의백'(醫伯)으로 김원봉을 선출했다. 이들 13명 가운데 해방이 될 때까지 변절하거나 투쟁에서 탈락한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또 다른 위안부 ‘포로감시원’…그들은 왜 전범이 되었나

2015년 8월 13일 2481

부산 백산기념관에서 광복70주년 특별전…한국인 전범 148명 중 129명 차지 ▲1943년 7월, 부산에서 촬영한 노구치부대의 교육생들. 뉴스1 윤소희 기자 News1 광복7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인 전범자 문제를 전시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전범이 된 조선청년들’ 특별전이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생활한 것에 대해 아직도 ‘전범’이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은 시종일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관계자는 “강제동원 피해 중 대표적인 미해결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억류자, 시베리아 억류자 등과 함께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를 부산시민에게 처음으로 알리는 이번 전시회가 피해자들의 해원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문화통치에 이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일본은 유례없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했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로부터 4년 후, 구미열강으로부터의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매일신보에는 포로수용소 감시원 모집 광고가 실렸다. ‘모집! 포로감시원. 거듭되는 반도청년의 영광, 군속으로 수천명 채용’ 대상은 20~25세 민간인으로 표면상은 지원이었으나 행정관리와 순사를 동원해 강제로 모집했다. 지원이란 이름표를 단 징용이었다. ▲ 동남아시아 지역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전범은 1950년 이후 차례로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됐다. 사진은 1951년, 이송 직전 아우트램 형무소에서 촬영된 전범들의 모습이다. 뉴스1

안중근 의사 작사·작곡한 ‘옥중가’ 국내 첫 공개

2015년 8월 13일 1159

ㆍ노동은 명예교수, 항일 노래 100여곡 새롭게 발굴 ㆍ연말 ‘항일 음악 350곡’ 노래집에 담아 발간하기로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해외에 널려있는 백두산하에 나의 일가 동포 형제 저곳 있건만/ 나는 소식 몰라서 답답하구나.”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사·작곡한 ‘옥중가’의 일부다. 안 의사는 이 노래를 이듬해 3월 형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부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이 노래는 안 의사의 여동생 익근씨, 그를 통해 노래를 배운 6촌 동생 곽희종씨를 통해 비밀리에 전수되다 해방 이후 중국에서 널리 불렸다. 하지만 한국에선 100년이 지나도록 소개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에 갇혔을 때 울분을 달래기 위해 손수 작사·작곡해 부른 ‘옥중가’ 악보. | 연합뉴스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69)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옥중가’를 포함해 독립가와 항일가, 혁명가 등 일제 식민지에 저항한 내용의 ‘항일 노래’ 100여곡을 새롭게 발굴해 발표했다. 노 교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노래들을 ‘항일 음악 350곡’ 노래집에 담아 올해 말 발간할 예정이다. 한국근대음악사를 전공한 노 교수가 1980년대부터 중국 옌볜·선양 등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어린 곳들을 오가며 수많은 자료들을 뒤져 얻어낸 결과물이다. 안 의사의 ‘옥중가’도 연구차 중국 선양을 방문한 노 교수가 현지 신문에 실린 것을 발견해 채록한 것이다. ‘항일음악 350곡’은 동학혁명 시기부터 해방기까지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2015년 8월 13일 760

<2015-08-13> 한국일보 ☞기사원문: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