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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이적죄 총살형’ 독립운동가 최능진, 64년 만에 무죄

2015년 8월 27일 2153

이승만의 정적으로 한국전쟁 때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한 독립운동가 고 최능진 선생이 64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승만과 친일파 졸개들의 죄상이 또 드러났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었고 늦어도 너무 늦어진 명예회복이지만, 고인을 기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 최능진 선생은 연구소 지도위원인 최만립 전 KOC부위원장의 선친입니다.) ▲ 독립운동가 故 최능진 선생, 재심서 무죄 (서울=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공산당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했던 독립운동가 고(故) 최능진 선생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을 마친 최 선생의 아들 최만립씨가 법원을 나서고 있다. 법원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생명 빼앗긴 고인 안타까워”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과거 이승만 정권하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독립운동가 최능진 선생이 6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최창영 부장판사)는 27일 국방경비법상 이적 혐의로 기소된 최능진 선생의 재심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검찰단에 당시 재판 기록을 촉탁했지만, 모두 남아있지 않다”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 중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자료는 재심 대상 판결문이 유일하지만, 여기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피고인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즉시 정전·평화통일 운동’은 김일성 등에게 전쟁을 중지하고 민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취지를 제의함으로써 민족상잔의 비극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준식 칼럼] ‘친일’이 ‘애국’이라는 한국사교과서가 온다

2015년 8월 26일 2175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박근혜정권의 역사 쿠데타 ①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 설마 했다. 아무리 막나가는 박근혜정권이라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제도(국정제)로 발행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망동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돌아가는 낌새를 보면 역시 박근혜정권이다. 유신체제의 적통답다. 기어이 박정희 정권이 그랬듯이 역사교육을 정권의 입맛대로 통제하기 위해 국정제를 밀어붙이겠단다. 최근 정부여당의 고위 책임자들이 국정제로의 회귀를 시사하는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급기야는 올 9월 안에 국정화를 강행하겠다는 방침이 이미 정부여당 안에서 결정되었다는 보도마저 나오고 있다. 정말 그렇다면 교과서 발행 제도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최소한의 여론 수렴 과정도 없이 비밀리에 그것도 졸속으로 강행하는 것 자체가 정부여당 스스로도 국정교과서로의 전환을 공개적으로 추진할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국정제로의 회귀는 명분도 실익도 없는, 그야말로 정권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역사를 뜯어고치려는 역사쿠데타일 뿐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오후 청와대에서 황우여 교육부장관 겸 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제공 : 뉴시스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 논란 배후는…’청와대’ 국정제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국정제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계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교과서 발행제도이다. 그런데도 박근혜정권은 국정제를 강행하려고 한다. 일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악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국정제 강행의 배후는 따로 있다. 2013년에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라는 비난을 받은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고

“기록에 없는 여성독립운동가, 남자들과 동등한 애국자들”

2015년 8월 26일 2278

왜 지금일까. 왜 이제야일까. 여성가족부는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8월 12~23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했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전시하고 있다. 8월에는 매주 토요일에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들, 누가 어떻게 싸웠나’ ‘대한의 여성, 구국을 위해 의열투쟁에 나서다’ 등 개별적 운동을 조명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오는 11월에 270여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인명사전도 발간한다. 방송에서도 여성독립투사를 다룬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100여년 전부터 조국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던졌는데 왜 새삼 그들의 존재를 궁금해할까. 물론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된 것은 올해가 광복 70주년이기도 하지만 최근 영화 <암살>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배우 전지현이 맡은 ‘안윤옥’이란 독립투사가 매력적으로 보인 덕도 크다. 한국근대여성사 연구학자이자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인 신영숙씨를 만나 나라를 위해 힘썼지만 역사의 뒤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봤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발족돼 그동안 묻혀 있던 항일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한편 그들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인지요.“우선 여성독립운동가를 전공한 학자가 드물어 연구자료도 드물고 각종 기록은 더더욱 부족합니다. 우선 생존한 독립운동가 분들이 드물고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그렇듯 후손들조차 잘 드러나지 않아 기본 사료나 고증이 어렵습니다. 지인들조차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고…. 대부분 남성독립운동가들의 기록 속에서 그분들의 어머니, 아내, 딸들도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테니 그 자료를 찾는데, 논에서 이삭 줍듯

[해방 70년 특별기획] 누가 애국지사를 욕보이는가?

2015년 8월 24일 3607

[해방 70년 특별기획] 목격자들 해방70년 특별기획: 누가 애국지사를 욕보이는가? <2015.8.24>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걸려있는 집이 있다. 약산 김원봉의 막내 동생인 김학봉 (86살)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선 ‘잊혀진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그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일제강점기 현상금이 가장 높았을 정도로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해방 후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 잡혀 갖은 수모를 겪었고, 1948년 월북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김원봉의 9형제 중 4명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을 당했고, 나머지 형제들도 고문당하는 등 가문이 멸문하다시피 했다. ▲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1932년 생) 할머니. 약산의 유일한 생존 혈육인 김학봉 할머니는 지난 2005년 국가보훈처에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의 월북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약산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차정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차정은 해방 후 50년이 되던 해인 지난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는다. 그녀의 항일 독립 운동이 뒤늦게나마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박차정 의사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지 않다. 해방 7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 <목격자들> 제작진은 국립 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서 친일파 김홍량의 묘를 발견했다. 김홍량은 1977년 애국계몽활동을 한 경력이 인정돼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 당시 전투기 제작비 10만 원(현재 약 10억 원)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사실이 드러나는

안옥윤은 왜 가와구치 처단에 나서나?

2015년 8월 23일 962

[프레시안 books] <민들레의 비상> ㅣㅣ[책구매 바로가기]ㅣㅣ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필자) 영화 <암살>을 보면 눈물 나는 장면이 몇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안옥윤(전지현 분)이 간도 참변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영화 속 허구 인물인 가와구치를 암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간도 참변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가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이 사건을 피해자인 안옥윤은 담담하게 회고한다. 그런데 여성 한국 광복군이었던 지복영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 둘레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 그저 농사나 짓고 살아가던 죄 없는 교포들이 무참하게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총 맞아 죽고 칼 맞아 죽고 불타서 죽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천 명이 학살을 당했다. 이러고 보니 일반 교포들은 물론이요 남북 만주에 흩어져서 제각기 활동하던 군사 단체들은 모두 속속 북쪽에 있는 밀산(密山)으로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노서아(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60~70쪽) 최근에 <암살>을 본 탓인지 이 부분에서 유독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로 국한하면 안옥윤이 독립군이 되고 가와구치를 암살해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생긴 것이지만, 당시 조선인들의 삶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들이 만주를 떠나야 했던 사연, 신흥무관학교도 문을 닫아야 했던 사연이 이 짧은 문단에 포함되어 있다. 그토록

[이만열칼럼] 광복70년, 감사를 새로운 성찰로

2015년 8월 23일 770

광복 70주년을 맞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놀랍다. 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광복 직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지만, ‘폭풍 성장’에 힘입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현재 경제규모가 세계 제13위 국가로 성장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에 비해 3만1000배 증가했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같은 기간 420배 늘었다. 1956년 2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무려 2만 3천배 정도로 늘어나 전 세계 수출 총액의 3.1%이며, 세계 6위 수준이란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그것만으로도 광복 70년은 감격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놀라운 성장과 발전은 감사할 분들을 더욱 떠오르게 한다. 이 같은 감격과 감사는 독립을 전제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떳떳이 존재할 수 있을까. 헌신한 분께 감사하고, 희생자를 위로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이 여운형이 언급한 “조선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며 우리 동포가 과거 35년 동안 유혈의 투쟁을 계속하여 온 혁명으로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는 말이다. 이승만 또한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만약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라 한다면 이는 연합국의 도움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매우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하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3·1독립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독립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었음을

[논쟁으로 읽는 70년](20)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

2015년 8월 23일 4529

ㆍ창비의 비판·문지의 지성, 70년대 암흑기 한국 사회를 이끌다 ▲ 민족주의·민중주의 추구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자유주의·시민주의 정신 김현의 ‘문학과지성’ ▲ 앞서거니뒤서거니 창간돼 신군부 세력에 폐간될 때까지 권위주의·유신체제에 맞선 70년대 한국 지성사의 ‘등불’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사회를 이끌어온 주체의 하나로 ‘공론장’(public sphere)을 주목했다. 공론장이란 공적 토론이 이뤄지는 공간을 뜻한다. 공론장에서 제기되고 토론되는 담론은, 한편으로 국가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론 시민을 계몽시킨다. 서구사회든 우리 사회든 이 공론장을 주도해온 것은 신문과 방송, 그리고 잡지였다. 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인터넷 공간이 새로운 공론장의 중심을 이뤄왔지만, 1990년대 이전에는 잡지가 신문과 방송 못지않은 담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잡지는 월간과 계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사상계’, ‘신동아’, ‘말’ 등이 대표적인 월간지였다면, ‘창작과비평’(이하 창비)과 ‘문학과지성’(이하 문지) 등이 대표적인 계간지였다. 종이 매체에서 일간지, 월간지, 계간지는 인간의 삶의 리듬에 각각 대응한다. 특히 계절마다 나오는 계간지는 사회구조와 시대의 흐름을 고민하고 성찰하기에 적합한 매체다. 최근 삶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계절에 따른 대응이 낡은 방식이 돼버린 감이 있지만, 논쟁으로 광복 70년을 돌아보는 이 기획에서 계간지의 기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는 창비와 문지의 시대였다. ▲ 김윤수씨(왼쪽)와 백낙청씨가 1988년 2월 ‘창작과비평’이 강제폐간된 지 8년 만에 복간되자 현판식을 갖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김현(작고), 김치수(작고), 김병익, 김주연씨(왼쪽부터)가 1970년 ‘문학과지성’ 창간호 발간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경향신문

아관파천 발생한 비극의 현장 답사하다

2015년 8월 23일 812

수원박물관, 광복70년 기념 서대문형무소 등 독립유적지 답사 ▲ 참가자들은 덕수궁,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장소인 중명전(사진),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한 경교장과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장의 역사가 담겨 있는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을 답사하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겼다. [수원=광교신문] 수원박물관은 광복70주년을 기념해 지난 22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하는 문화유적답사를 가졌다고 밝혔다. 박물관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가족단위로 1일 40명씩 모두 80명이 참여했다. 이날 ‘자주독립을 위한 도전, 대한제국’을 주제로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해설과 함께 서울 ‘정동’ 지역을 답사했다. 이 지역은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시위 아래 아관파천이라는 비극이 발생하고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한제국의 선포를 통해 자주독립의 의지가 표출된 곳이다. 참가자들은 덕수궁,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장소인 중명전,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한 경교장과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장의 역사가 담겨 있는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을 답사하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겼다. 수원박물관은 지난 3월부터 매달 넷째주 토요일에 가족과 함께하는 고품격 현장 인문학답사를 추진하고 있다. 다음 달에는 ‘공부의 신 율곡 이이를 찾아서’를 주제로 황희선생유적지(방촌영당, 반구정)와 율곡선생유적지(자운서원, 율곡선생묘)를 답사할 예정이다. 참가자는 9월초부터 선착순으로 40명을 모집한다. <2015.08.23> 광교신문 ☞기사원문: 아관파천 발생한 비극의 현장 답사하다

광복 70년, 감사를 새로운 성찰로

2015년 8월 23일 589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광복 70주년을 맞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놀랍다. 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광복 직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지만, ‘폭풍 성장’에 힘입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현재 경제규모가 세계 제13위 국가로 성장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에 비해 3만1000배 증가했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같은 기간 420배 늘었다. 1956년 2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무려 2만 3천배 정도로 늘어나 전 세계 수출 총액의 3.1%이며, 세계 6위 수준이란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그것만으로도 광복 70년은 감격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놀라운 성장과 발전은 감사할 분들을 더욱 떠오르게 한다. 이 같은 감격과 감사는 독립을 전제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떳떳이 존재할 수 있을까. 헌신한 분께 감사하고, 희생자를 위로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이 여운형이 언급한 “조선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며 우리 동포가 과거 35년 동안 유혈의 투쟁을 계속하여 온 혁명으로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는 말이다. 이승만 또한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만약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라 한다면 이는 연합국의 도움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매우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하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3·1독립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독립운동의 결과로

“러일전쟁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2015년 8월 21일 2350

[임기상의 역사산책 120] 아베 총리가 왜곡한 ‘러일전쟁’을 재조명한다 ▲ 청일간 시모노세키 회담 모습을 담은 니시키에(판화그림)과 시모노세키 조약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담화에서 미화한 러일전쟁의 출발은 바로 ‘시모노세키’ 회담이다.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힘을 겨룬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 회담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한반도에 대한 오래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 회담에서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열도를 전리품으로 챙기고, 2억 냥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한반도 전체는 물론,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든 것이다. 이 회담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희희낙낙하며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먼저 청나라 곳곳에서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항쟁은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수립,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서구열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협박했다. 세 나라에 대항할 힘이 없던 일본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토해냈다. 이른바 ‘1895년의 3국 간섭’이다. ▲ 러시아가 만주벌판에 깔아놓은 동청철도를 달리고 있는 열차. 철도는 만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두 나라가 쾌재를 불렀다. 바로 청나라와 조선이었다.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