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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아주경제][강효백의 신경세유표-48] 한국 검사∙일본 검사∙조선총독부 검사

2021년 3월 12일 2718

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은 일본 본토 검사보다 훨씬 컸다 1940~1941년 조선인 판검사의 수가 0인 까닭 조선인 판검사 모두 창씨개명, 일본인으로 귀화 ◆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지난 한 달여간 필자는 열람 가능한 유엔 회원국 193개국의 검찰 제도와 조선총독부 사법제도를 살펴봤다. 그 결과 우리 검찰과 같은 수사권과 수사종결권, 기소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기소재량권, 자기들 치부는 은폐하거나 대충 넘어갈 수 있게끔 검사만이 공소 제기할 수 있는 기소독점권까지 싹쓸이하듯 장악하고 있는 나라를 찾지 못했다. 일본도 70여년 전에 철거한 제왕적 검찰 구조(1)*를 가진 국가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일본은 형사소송법상 경찰은 1차적 수사 기관이고, 검찰은 2차적 보충적 수사기관이며,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규정되어 있음에도 양자는 상하 수직관계가 아닌 협력 수평 관계다. 경찰은 대부분의 형사 사건을 도맡아 수사하고, 검사는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기 전까지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일본은 패전 후 수사는 경찰이 하고, 검사는 법률전문가로서 경찰의 수사권 남용을 통제하며 기소와 공소유지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검·경 간 권한 분산을 했다. ◆조선총독부 사법체계의 꽃은 검사국 식민지 조선의 사법체계는 판검사를 비롯한 사법관리 모두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총독의 지휘하에 있었다.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4호인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에 따르면 총독부재판소는 총독부 직속으로 총독의 감독을 받았으며 법원의 행정사무에 대한 감독권도 총독에게 있었다. 그리고 법원은 고등법원 → 복심법원

[인천일보][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2021년 3월 11일 2911

일제 발악에 총알받이로 죽거나 굶어 죽거나 장윤만(1917-1963)씨는 일제강점기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에서 강제동원 되어 7월12일 일본군 경성사단사령부 군부(인부)로 소속됐다. 그리고 경북에서 같이 징발된 6000여명의 조선인 군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그 지옥의 ‘오키나와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 최전선에 끌려갔다. 그는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아카도(阿嘉島)에 주재했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부대 제103중대에 배속되었고, 1945년 봄엔 자마미도(座間味島)로 이동했다. 그는 방어진지와 방공호구축, 굴파기, 탄약·식량·어뢰정·폭뢰 등의 운반과 설치 작업에 동원됐다.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업을 강요당해, 많은 조선인 동료들이 옆에서 죽어 나갔다. 장씨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보트인 ‘신요’를 아카도와 자마미도의 해안가 굴에 숨기거나, 굴에서 꺼내 출동을 지원하는 작업도 하게 됐다. 야간에 굴에서 보트를 꺼내는 특공보트 지원 작업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총탄을 맞고 죽었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인 인부들을 20~25명씩 길이 5m의 작은 땅굴 속에 가두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 숨도 쉬기 어려운 지하 땅굴 속에서 물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기도 했다. 풀이라도 뜯어 먹으려고 굴을 기어 나왔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들에게 발각돼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장윤만씨가 있던 오키나와는 일본 측이 ‘옥쇄(玉碎)’라 미화하는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일제의 잔혹성과 인권 유린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살아있으면서 미군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는 식의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시키며, 원주민과 조선인들에게도 집단자살을 강요했다. “미군이 점령하면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믿은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줄

[충청신문] 김영권 충남도의원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 해야”

2021년 3월 11일 800

민족문제연구소 등과 간담… 사업진행 방안 논의 [충청신문=내포] 홍석원 기자 =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아산1·더불어민주당)이 도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조례 제정 이후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김 의원은 지난 9일 도의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등과 간담회를 갖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근거가 마련된 만큼 실무적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 의원은 11대 도의회 입문 이래 친일 작가가 그린 지역 위인의 표준영정 지정 철회 요구를 시작으로 ‘친일 잔재 청산 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해 왔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지자체 주관 사업이나 행사 등에서 친일 상징물을 설치하거나 게시하는 행위를 제한한 ‘충청남도 친일 관련 상징물의 공공사용 제한 조례’가 제정됐다. 특히 김 의원이 1년여 간 연구모임과 의정토론회 등 의정활동을 통해 발의한 ‘충청남도 친일 잔재 조사 및 연구 활동 지원 조례’가 지난해 말 제정됨에 따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연구 활동 추진 근거를 갖춘 상황이다. 김 의원은 “도내 친일잔재 청산은 지금이 가장 적기”라며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시작으로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집행부에서 적극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충남도 이길주 과장은 “관련 규정이 마련된 만큼 관련계획을 조속히 마련해 실질적인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홍석원 기자 / 001hong@dailycc.net <2021-03-10> 충청신문 ☞기사원문: “김영권 충남도의원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 해야” ※관련기사  ☞뉴스충청인: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 “충남도

[경향신문] 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2021년 3월 10일 1183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거나, 남편과 자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이 있었다. 국가는 이들의 헌신을 평가해 남편 뿐만 아니라 아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몇몇 부부가 함께 안장돼 있다. 그러나 서울현충원의 홈페이지와 묘비에는 오직 남편의 공훈만 적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이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공훈을 기리고 되새기는 작업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달과 이달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독립유공자 묘역을 살펴보고,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 등재 현황과 비교했다. 그 결과, 부부가 함께 안장된 경우 아내의 공훈 기록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와 묘비에서 누락돼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묘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홈페이지에서 추모할 수 있는 사이버참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검색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공훈록 보기’ 코너가 있다. 그런데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김학규-오광심’, ‘오광선-정정산(정현숙)’, ‘신건식-오건해’, ‘신송식-오희영’, ‘이회영-이은숙’ 부부의 경우 남편은 공훈록에 공훈이 등재돼있지만, 아내는 등재돼 있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도 아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묘비도 마찬가지다. 통상 묘비의 뒷면과 측면에 안장된 사람의 이력을 기재한다. 현충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묘비를 보고 독립운동가의 이력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의 묘비 중에는 이력 기재가 빠진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내의 묘비는 상당수가 빠져있었다. 묘역

[KBS] [친일잔재 청산 기획]③ 왜곡과 미화로..숨겨진 부역의 조각들

2021년 3월 10일 754

[KBS 전주] [앵커]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획보도, 세 번째 순서입니다. 친일인사의 부끄러운 행적을 사실대로 밝히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데요. 여전히 그들을 미화하거나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적지 않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안승길 기자입니다. [리포트] 일등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고, 조선 최초 항공사와 해방 후 첫 민간항공사를 세운 신용욱. 일본군에 비행기를 납품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두 차례나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고향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고창군 블로그에는 찬양 일색의 글이 실렸는데, 이번 친일잔재 보고서에 역사 왜곡 사례로 지적되자 해당 글은 삭제됐습니다. 명실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일제의 기세가 치솟던 1942년, 채만식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은 글입니다. 해방 후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한 참회에도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 보고서는 지난해 군산시가 블로그에 실은 채만식 관련 글은 역사 왜곡과 축소 사례로 지적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도서관, 또 다른 친일 작가인 서정주의 호를 딴 고창의 미당시문학관 등의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군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이 자료를 받은지 얼마 안 되서요. 구체적 논의는 아직 안 된 상태인데. 포럼이나 워크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려 노력하고 있었고요.”] 보고서에 미처 실리지 않은 친일인사도 적지 않습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로 제헌의회 국회의원까지 지낸 배헌 선생. 윤치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친일단체

[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1~15편

2021년 3월 10일 2218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우원식 국회의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심산 김창숙 손녀 김 주) ☞ 10편 : 광복군아리랑(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장병화) ☞ 9편 : 앞으로행진곡(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정남기) ☞ 5편 : 격검가(동암 차리석 아들 차영조) ☞ 4편 : 압록강행진곡(광복군 김영관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석주 이상룡 증손자 이항증) ☞ 2편 : 안중근옥중가(함세웅신부) ☞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오마이뉴스]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 추천합니다

2021년 3월 10일 2102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발간한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 ‘한 시대 다른 삶’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 두 권의 책에 등장하는 스무 명의 인물 중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이름이 무려 네 명이나 된다. 명색이 20년 넘게 아이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현직 교사로서 면구하기 짝이 없다. 학교에서도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쳐왔고, ‘현대사 전문가’라는 상찬까지 들으며 십수 년 동안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도 수강생들도 그런 나를 현대사와 관련된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줄로 안다.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가령, 신석구와 한형석. 신석구 선생은 3.1 운동 당시 기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시고, 한형석 선생은 1940년대 광복군 선전대에서 활약한 항일 음악가다. 해방 후 친일 청산 노력이 물거품 되면서 지금껏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친일파들이야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가의 생애는커녕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내가 과연 한국사 교사 맞나 반성하게 된다. 솔직히 일독을 권유받았을 때, 마치 감수자라도 되는 양 스스로 거들먹거렸다. 수업 교재나 교양 도서로서 어디 하자는 없는지 찾아 훈수를 두려는 거만한 태도로 책을 폈다.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그래서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거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두툼한 세 권의 <친일인명사전>보다 불과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이 친일 청산이

민족사랑 2021년 02월호

2021년 2월 24일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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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2021년 3월 1일 4370

[앵커]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인천일보][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2021년 3월 4일 1939

탈출하다 붙잡힌 동포는 숨이 붙은 채 땅에 묻혔다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제는 1944~1945년 조선인 군속(인부, 군부) 1만여명을 오키나와에 급히 배치했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의 조선인 군속 포로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라고 표기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대에서는 1945년 3월 탈주 또는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13명의 조선인을 처형했다. 처형 지휘자인 오노다 조장은 “1926년식 권총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죽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같은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천일보는 3월4일자 지면부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김용덕)과 함께 오키나와에 ‘강제동원’ 되었던 경북 상주 출신 장윤만(1917~1963)씨의 수기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와 함께 김영선, 이인신, 이공석씨 등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 북해도 탄광 감금생활, 남태평양 미래도의 조선인 살해 및 식인사건 전모, 남태평양 밀리환초의 조선인 반란사건 등도 잇달아 7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지원도 받을 예정이다. 장윤만씨는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군 공성면에서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1년 동안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동원됐다. 1945년 6월8일 미군에 체포됐고, 오키나와 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집으로 귀환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감금·학대·살육의 현장을 몰래 메모해 왔다. 그리고 귀향 후 병석에서 친동생인 장재달(당시 중학생)씨에게 자신이 두루마리에 적어온 수기를 일기와 3.4조 형식으로 정서하도록 했고, 1948년 2월 완성했다. 이 수기집은 딸 장현자(70·전 반도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