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반민특위 설립 70주년 기념 특별기획 – 반민특위의 좌절과 부활’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 개설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이 기획하고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하는 2018년 하반기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가 9월 12일부터 11월 28일까지 총 10주 동안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덕성여자대학교 대강의동 104호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강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반민특위의 좌절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개설되었다. 서울평생교육포털을 통해 사전에 강좌를 신청한 수강생은 30여 명이었으나, 현장에서 추가 접수가 이어져 세 차례의 강좌가 진행되는 동안 매 회 실 수강 인원은 30명을 웃돌았다. 강의는 전체 10강을 1, 2부로 나누어 1부에서 친일파 청산의 좌절과 그 영향을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고, 2부에서 친일청산운동의 전개와 의의를 중심으로 현재 역사정의를 실천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첫 번째 강좌는 김민철 책임연구원(경희대 후마니타스 대학 교수)이 ‘해방공간의 친일파 인식’을 주제로 진행했다. 두 번째 강좌는 〈반민특위 연구〉를 저술한 이강수 국가기록원 수집기획팀장이 반민특위의 활동과 해체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반민특위가 피의자를 조사하기 위해 관계기관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침수, 분명치 않음, 군법상 등 이유로 자료를 내지 않은 정황을 소개하며 정부 차원에서의 자료제출을 거부했던 실례를 언급했다. 세 번째 강좌는 2013년 EBS에서 반민특위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의 제작이 중단된 데 사표를 제출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진혁 PD가 맡았다. 반민특위의 좌절이 현재 사회의 역사정의를 어떻게 지연시켰는지 본인의 경험에 비춰 생생한 강연을 진행했다. 이후 강좌는 박수현 연구실장이 ‘독재정권과 친일세력의 구조화’를, 이용창
왜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학을 규탄하는가
특집 | 친일문학과 항일문학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이 글은 2018년 8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학술회의에서 격려사로 발표된 글이다. 1. 피천득의 친일파 비판 피천득은 수필 <춘원>에서 이렇게 썼다. “그(춘원)는 산을 좋아하였다. 여생을 산에서 보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세상 떠난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서 아무개 같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 줄 수가 없어요. 일제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랬어요. 작가는 인격이나 인품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또 문학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물건은 다 버려도 자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인품이 좋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피천득의 말. 정정호 엮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샘터, 2014, 253-254) 여기서 서 아무개는 미당이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산문을 썼던 피천득이 왜 이런 가혹한 발언이나 글을 썼을까. 지금까지 친일문학인에 대하여 이처럼 혹독하게 비판한 문학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친일문학의 본질을 피천득은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만세도 못 불렀던 민족 1945년 8월 10일 밤, 중국 섬서성 주석(陕西省 主席)이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이었던 쭈샤오저우(祝紹周)의 시안(西安) 저택에서 만찬을 끝낸 백범은 객실에서 수박을 먹으며 담화하던중 전화소리가 울렸다. 주석은 놀라듯 전화실로 급히
북일수교를 전망하며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김민철 책임연구원 4·27 판문점선언 이후 한반도에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동안 38선을 경계로 한층 고조되었던 군사적·정치적 갈등을 진정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동북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변화의 바람이다. 현란할 정도로 전개되고 있는 남, 북, 미, 중 간의 외교전의 흐름을 볼 때, 이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양상을 띠게 될 것 같다. 물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서 평화체제가 확립될 때까지는 숱한 우여곡절과 일시적 후퇴도 겪게 될 것이지만, 한번 시작된 흐름은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머지않아 북과 일본도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이 추진될 것이다. 다가올 북일수교를 전망할 때 수교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002년 북과 일본은 이른바 평양선언에서 이 문제에 대한 큰 해결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평양선언문 2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 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했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측에 대하여 국교 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 인식 밑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발기인에 참여합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상봉역 부근에 위치한 오래된 학교인 중화초등학교 6학년 5반 담임교사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에 근현대사 역사를 배우는데요, 아이들이 일제강점기 역사에 매우 관심을 가지기에 나름 깊이 있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저 또한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시간을 엄청 늘려가며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요. 제가 후원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며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더니, 아이들도 후원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아직 신규 교사라서요, 혹시나 학부모님들이 싫어하실까, 제가 독자적으로 아이들에게 모금을 해도 될까 걱정되었지만, 학부모님들께 가정통신문을 보내 자유롭게 모금하려 한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이름과 금액을 적지 않고 교실 뒤쪽의 모금함에 자유롭게 후원하였습니다. 혹시 돈이 필요해서 다시 가져가고 싶은 친구는 모금함에서 넣은 금액을 꺼내가도 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100원짜리를 넣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며칠 동안 계속 돈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왜 돈을 계속 가져 오냐고 물으니, “엄마가 좋은 일 하는 것 같다고 돈 더 내래요.” “삼촌도 참여하고 싶다고 대신 모금해 달래요.” “지난번 위안부 영상을 보고 돈을 더 내고 싶어졌어요.” “과자 안 사먹고 기부할래요.” 등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것은 평생동안 잘 변하지 않지요. 그렇기에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현장에서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생각되고 학생들도 싫어하는 과목입니다. 살아있는 역사를 배우면 참 재미있는 과목인데 말이지요. 역사박물관에서 여러 교육활동들을 많이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연말에 아이들과
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허은 여사 건국훈장 추서
정부는 의병장 허위 선생의 후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1907∼1997)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허 여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군복을 만들어 배급하고 군정서 회의 때 식사를 조달하는 등 공적을 세워 서훈을 받게 됐다. 당시 이상룡 선생은 경학사,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 항일 투쟁 단체를 조직·운영하는데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상룡 선생의 집은 항상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로 쓰였다. 따라서 의식주 해결 등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에 허은 여사의 공은 남달랐다. 광복 후 독립투쟁의 후유증이 남아 위로 4남 1여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고, 아들과 외동딸을 고아원에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생활고를 이겨가며 자녀와 손자·손녀들을 돌보며 임청각을 지켰다. 말년에는 독립운동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1995년 초간, 2010년 개정판 발간)라는 수기를 출판해 독립투쟁 때 의식주에 대한 생활사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 수기는 〈서간도 시종기〉 〈장강일기〉와 더불어 여성의 시각에서 독립운동의 뒷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해 독립운동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허은 여사 아들인 이항증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은 “여성들의 의식주 해결 덕에 독립운동이 가능했다”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는 올해 광복절부터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개선한 결과 177명 중 여성이 65명(36.7%)에
반쪽짜리 우리 땅, 용산에 가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용산 답사기
내게 용산은 무척 친근한 동네다. 이웃 동네인 동작구에 살고 있는 탓에, 도심으로 나갈 때면 늘 거쳐 가야만 하는 동네인 까닭이다. 주말이면 영화 보러, 쇼핑 하러 자주 들르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용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그저 놀고, 먹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관 기념으로 용산 답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용산에 뭐가 남아있긴 할까’ 내심 의구심만 들었다. 그래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에 9월 1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1·2차 답사에 동행했다. 두 차례에 걸친 답사는 모두 토요일 오후에 진행됐다. 황금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하고 용산에 모였다. 답사의 진행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려 애쓰지 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답사란 원래 여러 번에 걸쳐서 천천히 기억하는 과정이고, 한 번 왔을 때 공간에 대한 인상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마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답사에 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상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물러간 용산을 차지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병식을 통해 위용을 자랑했던 연병장은 미군기지로 옷만 바꿔 입었다. 그래서일까. 이순우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비가 흩뿌리는 주말 오후 가슴 벅차고 감동이 넘치는 뮤지컬을 보았다. 사실 배우로 나오는 지창욱을 좋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신났던 나는 그곳에서 내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나라의 독립만 이뤄진다면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은 독립운동가 팔도를 만났고, 밀정 동규와 죽은 군인들도 깨워서 독립을 이루겠다는 나팔을 만나게 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오프닝 곡은 지금도 입속에 맴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군무와 장면마다 표현되는 색조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무대는 순간순간을 집중하게 만든다. 독립은 가난하고 무학의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이완용의 대사에 분노했고, 독립을 위해 신분, 재산, 목숨까지 바쳤던 선조들은 동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훗날 그들을 기억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으며, 다음날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처연한 모습과 동지의 죽음을 알면서 다음은 내 차례라며 격려하고 안아주는 장면에서는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1910년 그때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나라 잃은 백성의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했을 선조들은 힘 있는 나라를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을 꿈꾸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관람 내내 내가 팔도가 되기도 하고, 나팔이 되었다가, 반전 포인트 밀정 동규는 안타까움이고, 끝까지 친구로 남았던 팔도의 의리의리한 의리는 먹먹함으로 남는다. 젊음을 대한독립을 위해 바칠 수 있다니 나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