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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효창원 수난사는 왜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나? – 효창공원, 결국 애국선열묘역으로 남다

2018년 11월 26일 4511

식민지 비망록 41  이순우 책임연구원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쏟아지던 소나기도 그치고 요란하던 전차와 자동차 소리도 잠시 적막으로 변하던 순간 김구(金九) 민주의원 총리와 함께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백정기(白貞基, 1896~1934)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였다.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각각 안겨 운구된 이들 유해는 역전 광장에 모여든 추모 인파를 헤치고 두 대의 봉영차에 나뉘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져 그곳에 안치되었다.   이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원래 계획은 6월 30일에 장의를 실시하려 했으나 여러 날 폭우가 내려 교통이 두절되면서 삼의사의 유가족과 각 지방 대표자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묘역 조성을 위한 산역(山役)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일정이 연기되었다고 알려진다.   이날 아침 10시에 태고사를 출발한 장의행렬은 안국동 네거리, 종각, 남대문, 서울역, 연병정(남영동), 용산경찰서 앞을 거쳐 금정(錦町, 효창동)에 이르렀고, 효창원에 도착한 것이 낮 12시40분이었다. 특히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인데다 1918년에서 1924년 사이에 살았던 집터인 ‘효창동 118번지’가 행로 도중에 인접한 까닭에 남다른 감회를 자아냈다. 이어서 오후 1시에 식이

김병상 신부님, 인천 하늘의 붉은 독수리 신부님

2018년 11월 26일 2543

임헌영 소장 이 글은 올 12월에 출간 예정인 ‘김병상 신부님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 신부님은 지금 병상에 계신데 하루속히 쾌차하시길 빈다.   작년(2017년) 봄 어디선가 가톨릭 인천교구 사제였던 고 최분도(Benedict Zweber, 1932-2001) 신부의 평전인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에 대한 안내 기사를 보며 울컥 하며 홀연히 저 어두웠던 1970년대의 후반기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통치가 정면 공격을 당하면서 한참 휘청거렸던 시기에 나는 모종의 인연으로 이재문 선생과 자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제1차 인혁당사건(1964)에 연루되었던 까닭에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을 위한 검거(1974) 조짐이 보이자 발 빠르게 잠수를 타고 대구를 벗어나 서울에 머물렀다. 만약 그가 체포당했다면 박정희 정권 최대의 사법살인사건인 역사적인 1975년 4월 9일의 8열사가 9열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희생에 가장 가슴 치며 크게 통곡한 이는 아마 가족 말고는 이재문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선생은 매년 이날을 맞아 추모의 예를 올리곤 했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쨌든 이재문 선생은 서울에서 마술사 같은 변장으로 피신하면서도 민주투쟁을 그치지 않았고, 이와 정비례해서 수사당국은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 못지않은 투사인 부인 김재원 여사가 어린 남매들을 데리고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인천 최분도 신부의 성당이었다. 신부님은 김재원 여사의 정황을 익히 알고서 스스로 보호해주고자 그 가족을 성당에 기거토록 했기에 감시는 으레 따를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 소송, 원고 승소 최종확정 판결

2018년 11월 26일 1830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에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하며 원고들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피고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소송의 원고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의 오사카 제철소, 가마이시 제철소, 야하타 제철소에 동원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이다. 2005년 2월 28일, 원고들은 서울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하며 원고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했지만 1심과 항소심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모두 기각당했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던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바 있다. 이후 5년이 넘게 대법원 심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최근 검찰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박근혜와 대법원장 양승태가 ‘재판거래’를 하며 이 사건의 판결을 지연시키고, 결론을 뒤집으려 했던 것이 드러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번 판결은 국내에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3건 중 첫 번째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로 나머지 2건의 항소심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재판거래’로 인해 심리가 지연되면서 2018년 11월 현재, 3건의 ‘신일철주금’ 소송 원고 12명 중 10명이 사망했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박정희 합성사진 관련 명예훼손 피고 방자경 형사재판 방청기

2018년 11월 26일 2562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10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 301호 법정 문이 열렸다. 긴장된 마음으로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자경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분이죠?” 그러면서 자기가 쓴 것이라며 책 2권을 내밀었다. 임헌영 소장님께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고 어이도 없었지만, 이 소송이 시작된 2016년부터 재판 때마다 매번 봐온 사이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었다. 별말 없이 책을 받아서 옆에 놓을 때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방자경 씨를 고소했던 2016년, 경찰조사를 받던 방자경 씨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전화로 사과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수년간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각종 태극기 집회에서 연구소를 종북, 간첩, 빨갱이로 비방하고 박정희 합성사진을 조작한 범죄자로 낙인찍은 사람이 고작 ‘사과 전화’ 한 통으로 끝내겠다니. 그런 방식의 사과는 받을 수 없었다. 연구소는 거부의 뜻을 명확히 전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방자경 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정절차도 있었지만 방자경 씨는 그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민사재판 때부터 방자경 씨 옆에 항상 함께 있던 그 사람, 서석구 변호사가 보이지 않았다. 동년배의 여성 한 명만 동석해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고 방자경 씨가 피고석으로 나갔다. 사실 필자는 이 재판부에 불만이 많았다.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피고측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재판부의 태도에 패소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피고가 나오지 않으면 기다려주고 선고를 연기해서 방어권을 최대한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 청소년도 할 수 있어요!

2018년 11월 26일 1255

이지윤 근현대사기념관 도슨트 3기, 중산고 1학년   나의 꿈은 우리 역사를 알리고 지키는 것이다. 그 꿈에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청소년도슨트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8년 무더운 여름 청소년도슨트가 되기 위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첫 번째 날은 개인 사정으로 수업에 참석하지 못해서 아주 아쉬웠다. 두 번째 날은 어느 중학교 선생님께서 3.1운동부터 촛불혁명까지의 우리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학교 수업에서 듣던 내용도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있었다. 세 번째 날에는 도슨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네 번째 날에는 아직 개관 전이었던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견학해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는 근현대사기념관의 도슨트가 되기 위해 전시물들을 숙지하고 직접 원고를 써서 해설을 해보았다.   나는 광복 후부터 4.19혁명까지의 파트를 맡게 되었고 조금 긴장도 되었지만 조장으로써 조원들과 함께 해설을 무사히 끝마쳤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알고 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데 작은 역할을 한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다. 그리고 최인담 학예사께서 엄청나게 칭찬해주셔서 자신감이 생겼다. 3주간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2018년 8월 15일부터 정기적인 청소년도슨트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총 4번의 정기해설을 하였고 야외해설과 광복 후 또는 6.25전쟁 이후 에 대해 설명했다. 광복 후의 파트만 3번을 하였는데 다음번에는 독립군

기억과 망각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기록과 꾸준한 관심이다 – 콜라보라시옹 전시회 관람기

2018년 11월 26일 1528

정용진 광주지부 회원   5·18민중항쟁의 도시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2018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국립기록보존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이 열리고 있다. ‘콜라보라시옹’ 관람을 위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들어서며, 문득 재작년에 아들(정재찬)과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당시는 서울시민청 시민갤러리에서 ‘콜라보라시옹’ 첫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때다.   둘째 아들 재찬이에게 콜라보(콜라보레이션)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재찬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대답한다. 아빠… 그거 무슨 말인지 생각났어, 콜라보는 가수들이 팀을 만들어 서로 도와주는거야. 맞지?… TV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났나 보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흔히 콜라보라고 하는 것은 국악과 양악의 만남, 미술가와 무용가의 만남 등 제각기 다른 장르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뤄 새로움을 추구하고 결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전시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콜라보라시옹, 즉 나치부역자들을 고발하는 전시회다. 전시 제목의 ‘콜라보라시옹’은 오늘날 협업 또는 공동작업이라는 좋은 의미로 널리 쓰이지만, 나치 독일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대독협력’을 뜻하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들어선 비시정부의 페탱 원수가 독·불 사이의 국가간 협력이란 뜻으로 사용한 이래, 독일점령기의 나치 부역행위를 일컫는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   이 전시는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 비시 파리 베를린, ‘공공의 적’, ‘경찰 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동해바다 독도수호의 작은 불씨가 되고자 강치상을 세우다 – 강치상을 기증한 청심국제중고등학교 학생들

2018년 11월 26일 1892

인터뷰 – 자료실 김슬기 10월 2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한켠에서는 독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강치상을 기증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심국제중고등학교 동아리 해밀의 학생들이었다. 11월 11일 일요일에 박물관에서 이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기숙사에 사는지라 집에 올라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일 텐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 찾아와 주었다. 이 자리에는 강치상을 제작한 김성래 작가도 함께하였다. “독도에 사는 강치를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영속성을 알리고, 국력을 키우는 작은 불씨가 되고 싶어 강치상을 제작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 : 동아리 이름이 해밀이라고 했는데요. 어떤 뜻으로 지어졌나요? 답 : (한재원) 해밀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도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사회적인 이슈들을 저희만의 해석과 시선으로 해결해서 갠 하늘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동아리 이름을 이렇게 짓게 되었어요. 2016년에 여기 있는 소윤이, 선배님(태영), 그리고 저를 포함한 7명이 창단 멤버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문 : 해밀은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요? 답 : (문소윤) 지구촌 불평등 국가 아이들을 위해 전래동화 번역을 하고요. 방학 때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 매년 겨울에는 요양원 김장봉사를 해요. 또 저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가평 내의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주 목요일에 바이올린, 영어 등으로 재능기부도 하고, 놀이로 강치를 알리고, 강치벽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한재원) 가장 주요한 활동은 독도를 알리는 활동인데요. 독도에 가서 강치를 보고 배지 같은

기증자료

2018년 11월 26일 1142

심정섭 지도위원 제7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1점 보내와 10월 4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고창, 보성, 구례 등에서 발행된 토지소유권보존등기신청서, 벌채허가서, 곡물판매대금 증서 등이다. • 10월 16일 네이버 오디오클립 <아빠 한국사여행 떠나요> 구독자 일동, 청소년 어린이책작가회의 회원 일동, 3.1운동 100주년 시민박물관 프로젝트 참가자 일동이 어린이 도서 200권을 기증했다. • 10월 18일 오세명 씨가 <대한협회회보> 등 도서 17권을 기증했다. • 10월 24일 박기서(경기부천지부) 회원이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전 육군 소위를 처단한 정의봉, 안중근 의사 어록, 김구 조형물 총 3점을 기증했다. • 10월 26일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에서 원폭피해자 곽귀훈 씨의 자료를 기증했다. 군복무 시절 사진과 기록 영상물 등 총 9점(복제본)인데 1944년 징병 1기로 강제동원되어 서부 제2부대에서 찍은 초년병 시절 사진과 군대수첩,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재증명서 등이다. 최미경(충남지부) 최장원(서울서부지부) 회원, 의병대장 최구현 선생의 자료 기증 • 10월 15일, 독립유공자의 후손 최미경, 최장원 회원이 소장하고 있던 증조부 故 최구현 의병장의 유품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최구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에 울분, 1906년 충남 당진소난지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의병대장이다. 기증 자료는 교지, 성적표(합격증), 화살 등 총 15점이다. 최구현 선생은 호가 유곡, 본관이 경주로 1866년 면천군 매염리(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여 1887년 과거(무과)에 급제 후 훈련원

110년 만에 고향 구미에서 처음 열린 왕산 허위 선생 추모식

2018년 11월 26일 1353

12월 1일 창립 예정인 연구소 구미지회(준)는 10월 21일 구미시 임은동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옆 묘소에서 허위 선생(1855~1908)의 장손인 허경성 선생(92)을 비롯해 회원과 구미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 11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이번 추모식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110년 만에 구미시민들이 마련한 첫 추모제다. 대구에서 맏손자 허경성(92세) 선생 내외와 서울에서 후손 허벽(84세) 선생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운강 이강년 의병장에 이어 경성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순국한 허위 선생 가문은 10여 명이 항일투쟁에 참여해 안중근,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일송 김동삼 가문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5대 항일 가문으로 꼽힌다. 그동안 구미시는 역대 시장이 앞장서서 1천억 원이 넘는 혈세를 들여가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추모제와 탄신제는 지냈지만 허위 선생의 추모제는 지내지 않았다. 이것이 연구소 구미지회(준) 회원들이 추모식을 발 벗고 준비한 이유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추모식이 열리기 전, 기념관을 찾아 허위선생 유족에게 감사의 말씀과 함께 세계 여러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왕산 유족 가운데 고향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분을 위한 주택 대책을 마련해 보라고 즉석에서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이날 추모식은 전병택 회원의 사회로 박도 회원(역사 저술가)이 허위와 허형식 장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구미 시민 김형숙 님이 이육사의 시 <광야>를 낭독했다. 박찬문 회원은 추모식 경과보고를 했고 장호철 회원은 허위 선생 행장을 소개했다. 장기태 회원의 눈물어린 추도사로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서울시는 1966년 왕산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2018 연구소 수련회 개최

2018년 11월 26일 841

10월 13·14 양일간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마곡사 인근의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연구소 수련회를 개최하였다.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로 인해 수련회가 늦춰지게 되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50여 명의 회원들과 상근자가 참가한 가운데 결의와 우의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였다. 저녁식사 후 연수원 앞마당에서 진행된 공식 행사에서 먼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정섭 공주시장 등이 축사를 하였다. ‘올해의 모범지부’ 영예는 부천시민역사강좌, 강화도 평화기행 등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를 활발히 진행한 부천지부에 돌아갔다. 이어서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광주지부)의 지도하에 8, 90년대 애창되었던 민중가요를 참석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창하였다. 정준찬·최수련 부부 명창이 진행하는 우리가락 한마당에서 신명나는 판소리 가락에 어깨춤이 저절로 춰졌고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등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혹한(?)의 날씨로 인해 식당으로 들어가 뒤풀이 행사를 진행하였다. 늦은 시간까지 많은 회원들이 술과 다과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숙소를 나와 전날 마곡사를 안내해준 지수걸 공주대 교수(연구소이사)를 따라 동학농민군의 숨결이 배인 공산성과 우금치 전적비를 답사했다. 지수걸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로 새로운 역사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적지를 보는 시야를 한결 더 넓힐 수 있었다.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