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봄날은 간다 – 대구 갑부 서병조의 친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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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공원 관앵어회 초대

1934년 4월 20일, 봄을 맞은 일본 도쿄의 신주쿠공원은 벚꽃으로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주쿠공원은 벚꽃 명소다. 양복과 기모노로 한껏 갖춰 입은 사람들이 공원을 가득 메웠다. 주인공은 벚꽃이 아니었다. 일본 천황과 황후를 비롯해 황족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고위 관료들과 외국인들도 제법 보였다. 일본 각지에서 초대받아 온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22년에 열린 신주쿠공원 관앵어회.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이날 신주쿠공원에서는 관앵어회(觀櫻御會)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었다. 우리말로는 벚꽃놀이다. 관앵어회는 가을에 열리는 관국어회(觀菊御會)와 함께 일본 궁중의 공식행사였다. 일제는 천황이 국민들과 함께 국화와 벚꽃을 감상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국화와 벚꽃은 일본 황실을 상징한다. 이 행사를 통해 황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국민들에게 평화롭고 풍요로운 일본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했다.

벚꽃을 감상하는 사람들 틈에 식민지 조선에서 온 중년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실업가 서병조(徐丙朝, 1886~1952)였다.

작년 추석에는 관국어회에 초대받는 광영을 입었습니다. 올해 다시 관앵어회에 초대되는 광영을 입으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번에는 제 처와 함께 지존의 용안을 뵈었으니 진실로 감격하였으며, 일대의 광영입니다.

일본 황실이 여는 관국어회와 관앵어회,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별히 초대 받은 인사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본 황실 무늬가 금박된 초대장을 받았다. 특히 조선에서 민간인이 초대된 것은 1929년부터였고, 한 번에 한두 명만 참가할 수 있었다. 1934년 관앵어회에 초대된 조선인은 중추원 참의인 서병조와 박영철(朴榮喆)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일본 황실이 주최하는 행사에 연달아 초대받은 서병조의 ‘광영’은 그동안 서병조가 걸어온 길의 결실이었다. 햇살 아래 눈부신 벚꽃처럼 서병조의 인생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봄날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금수저 서병조

서병조는 대구에서 첫손에 꼽히는 부호 서상돈(徐相敦, 1850~1913)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였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심취했고 일본어에 능통했다. 18세 되던 1904년에는 사립 계정일어학교를 세우고, 일본어 교사 노릇을 했다. 이듬해에는 일본 교토에 유학했다. 1909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대구잠업전습소 경영을 맡으면서 대구 경제계에 입문한다.

서병조

아버지 서상돈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보부상으로 시작하여 낙동강 뱃길을 무대로 대상인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안동, 군의, 김천, 칠곡, 달성 등지에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이기도 했다. 특히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이자 민족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어 일본에 진 국채를 갚자’란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언론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IMF 구제금융위기 때 주목받았던 금모으기의 원조였던 셈이다. 오늘날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서상돈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대구 계산동의 서상돈 고택(古宅)이 근대문화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서상돈에 대한 후한 평가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서상돈이 부를 축적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 중 하나가 외획(外劃)제도(국고의 채권자, 경비지출이 필요한 지방관청, 국고에 선납한 상인에게 지방 각 군의 조세를 국고에 수납하지 않고 직접 현지에서 지출하는 재정운영방식)였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금융기관이나 국고제도가 정비되지 못한 조선 정부는 서울과 지방 간 자금의 융통을 위해 외획을 시행했다. 조선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내장원에서 외획을 운영할 때, 서상돈은 경상남북도 검세관 및 시찰 등으로 활동했다. 예를 들면, 재정이 어려운 탁지부가 내장원에 돈을 빌렸다. 탁지부는 그 돈을 갚는 방법으로 지방의 결호전(結戶錢)을 내장원이 외획하도록 했다. 그러면 탁지부 소속 검세관이 내장원의 외획전 수취와 무역을 대행하게 된다. 검세관은 지방 결호전에서 돈을 거둬들이고, 그 돈을 가지고 쌀을 사들여 서울로 보내기도 하고 되팔아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관여한 검세관, 시찰, 차인, 여각주인 등은 미곡을 비롯한 각종 상품무역의 주역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들을 조세청부업자로 생각해서 손쉽게 부를 축적한다고 보았다. 외획제도를 통한 각종 각종 상품무역으로 서상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서상돈은 일본인들과의 협력 내지 결탁으로 자산을 늘여 나갔다.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 되었다. 메가타는 화폐정리사업 과정에서 신화(新貨) 30만원을 대구에 배정했는데, 대구이사청은 이 돈을 이와세(岩瀨靜)와 같은 일본인 유력자와 대구농공은행 대주주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어 배당했다. 2년 거치 무이자 상환에 ‘무엇에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서상돈과 이와세는 이 돈을 가지고 탁지부가 불하한 묘포용지 2만여 평을 매수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 서상돈의 미심쩍은 재산 축적 방식이 그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1913년 서상돈이 사망했다. 서병조의 나이 27세였다. 1915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구전기주식회사 감사역에 취임했다. 대구전기주식회사는 1911년에 서상돈을 비롯한 대구 지역 유지 20명이 출자해 만든 회사였다. 또 그해에 경상농공은행 이사가 되었다. 1918년 경상농공은행이 조선식산은행에 흡수되자 서상돈은 조선식산은행 상담역에 취임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명성과 재산, 그리고 일본인 기업가 및 식민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서병조의 기업활동에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서병조는 1919년 계림농림주식회사 이사, 1920년 대동무역주식회사 감사, 1924년 조양무진주식회사 사장, 1927년 대구은행주식회사 이사, 1931년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이사, 1932년 대구제사주식회사, 1938년 경북무진주식회사 사장 등 활발한 기업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194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을보면,그는조선식산은행주식 6,900주를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나 기업·은행을 제외하면 개인으로는 둘째가는 대주주였고 6598주를 가진 조선총독을 능가한 것이다. 대구 경북지역에 산재한 자신의 토지를 관리할 목적으로 1938년에는 구일부동산회사를 설립했다. 자신이 대표이사를 맡고 아들(정호, 정식)을 사장으로 내세웠다. 서상돈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서병조를 거쳐 그 아들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자제단 활동으로 식민당국의 신임을 얻다

최근 탄핵당한 대통령과 재벌들의 뒷거래에서 보듯 정경유착은 큰 사회문제이면서 돈 있는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해가는 가장 쉬운 통로였다. 서병조의 세상도 그러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버지의 후광을 배경으로 경제계에 등장한 서병조는 각종 사회경제적 활동을 해 나가는 한편,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길을 찾았다. 이미 대구 경제계에 등장할 무렵부터 꾸준히 각종 공직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력하였다. 대구부협의회 회원을 시작으로 경상북도 도평의회원, 대구부도시계획위원회 위원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24년에는 선망의 자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 대구・경북을 넘어 전국적인 자산가이자 유력한 인물로 인정받은 것이다.

대구자제단 조직. 『매일신보』 1919.4.9.

특히 일제 식민통치 당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자제단’ 활동이었다. 3・1운동은 식민통치 10년 만에 터져 나온 전민족적 분노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이에 반대하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파들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조선독립이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더구나 만세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감시하고 주동자를 밀고할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자제단이 그것이다. 만세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1919년 4월 6일 대구자제단이 만들어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자제단이 출현하는데, 아마 대구자제단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때 돋보이는 활약을 한 인물이 박중양, 정재학, 정해붕, 서병조, 장상철, 이병학 등이다. 박중양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친일파이며, 나머지 인사들도 모두 대구의 유력한 지주 자본가들이자 중추원 참의에까지 오르는 친일파들이다. 이때 서병조는 대구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정재학, 이병학과 함께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댔다. 특히 인근 성주군에까지 출장가서 자제단을 조직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자제단 활동은 서병조가 자신의 친일성을 드러내 보인 사건이었다.

서병조는 국민협회와 동민회 같은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식민지배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때 나타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친일파 육성이었고, 그들에게 던져진 미끼 중 하나가 참정권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도 자치권이나 참정권을 줄 것처럼 선전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이런 술수에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대표적 단체가 국민협회와 동민회였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국민협회는 일본과 조선의 병합으로 태어난 새로운 일본 건설이란 의미의 ‘신일본주의’를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였다. 즉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여기에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의식의 내면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만주사변 이후 참정권운동은 국민권리에 앞서 국민의무를 요구하는 것으로 진화한다.

▲ 경성일보사는 1935년 주요사업의 하나로 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들의 공적을 ‘조선을 육성한 사람들’이란 제목하에 연재하였다. 그 37번째로 ‘대구녹화운동의 주인공’ 서병조와 ‘상공도시 대구 건설에 大童’ 장직상을 소개하고 있다. 『경성일보』 1935.11.26.

1935년은 일제의 식민지배 25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기념하여 식민통치에 공적이 많은 인사들에게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수여했다. 서병조는 표창장과 은배(銀杯) 1세트를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표창을 받은 인물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거기에 실린 서병조의 인물평 중 한 대목이다.

대구민단 창립 당시부터 일한병합 이래 시정방침의 철저한 선전에 노력하여 내선융화를 조장하려는 당국의 방침을 도와 조선통치에 진력한 공적이 진실로 대단하다.(<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대구민단은 일본인거류민단을 말한다. 19세기 말부터 대구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1906년에 대구일본인거류민단을 결성했다. 을사늑약 후 일제의 경제침탈이 본격화할 무렵이었고, 대구 지역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은 이들은 박중양 같은 친일관료와 손잡고 대구를 일본인사회, 곧 식민도시로 재편해 갔다. 그 과정에서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신사가 만들어졌다. 서병조에 대한 인물평에서 보듯 그의 친일협력은 이미 대구민단 창립 때부터였으니 그 뿌리가 깊다. 아버지 서상돈이 일본인들과 더불어 경제적 이권을 챙기던 때였고, 서병조 자신도 일본 유학을 다녀와 경제계에 진출하던 때였다. 이렇듯 강제병합 전부터 시작된 서병조의 친일협력의 역사는 길고 깊었으며, 그 협력과 공적은 평생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 갔던 것이다.

식민지인 서병조, 황국신민을 꿈꾸다
1940년 일제는 침략전쟁에 한창이었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는데 혈안이었다. 그들에게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일본을 위해 노동하고 일본의 군대에 복종할 청년들이 필요했다. 일제는 이른바 황국신민을 만들어 내려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그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했다. 조선의 성과 이름을 일본인과 같이 바꾸도록 강요했다. 창씨개명에 앞장 선 사람도 있었고, 할 수 없이 따라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명망가들을 내세워 창씨개명을 독려했다. 1940년 7월 27일 서병조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창씨개명을 했다. 대봉병조(大峰丙朝). 서병조의 새 이름이다. 일제는 이 사실을 신문에 실어 널리 알렸다.

대구 교남학교 전경. 『경성일보』 1940.11.2

일본 이름을 얻은 그해, 서병조는 자신이 인수한 학교에 황국신민을 다짐하는 또 하나의 새 이름을 지었다. 1940년 가을, 서병조는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인수했다. 교남학교는 1921년 대구 서성로에 있던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면서 교남학원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을사늑약 후 세워진 우현서루는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는 이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다. 강제병합 후 폐쇄된 채 남아있던 우현서루 건물에서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이 민족교육기관 교남학원을 열었다. 이상화가 교사로 활동했고, 이육사가 공부했다. 교남학교는 1935년 무렵부터 경영난을 겪었고, 1940년 서병조가 경영권을 인수한 것이다. 이때 이름이 대륜학교(大倫學校)로 바뀌었다.

지역 유지이자 자산가로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폐교 위기에 처한 교육기관을 인수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인수한 학교를 어떻게 운영해 가는가에 있다. 교남학교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교남학교를 인수한 서병조가 만든 교육재단의 이름이 대봉교육재단이었다. 바로 자신의 창씨명을 딴 것이다. 대봉교육재단은 1949년에 지금의 대륜교육재단으로 바뀌었다. 대륜학교란 이름은 또 어떠한가.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대륜학교를 소개했다.

교남학교는 2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반도 동포의 열렬한 황민의식(皇民意識)과 일반적 민의(民意) 향상을 위한 황민육성기관으로서 새롭게 출발한다. … 교명은 대륜학교이다. 대륜은 충효(忠孝)인데, 국민도덕(國民道德)의 중핵이다. 교육칙어에 “지극한 충과 효로써”라고 말씀하신 것을 봉체하여 본교 교육의 대방침이라고 했다.(경성일보1940년11월2일)

1940년은 일본이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벌인 해였다. 황기는 일본 천황이 처음 즉위한 해를 말한다. 또한 교육칙어 발포 50년이 되는 해였다. 1890년 메이지천황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발표했다. 교육칙어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한 것으로, 국민의 충과 효가 ‘국체의 정화’이자 ‘교육의 근원’임을 규정했다. 서병조는 대륜학교의 출발에도 황기 2,600년과 교육칙어 발포 50년을 맞아 황국청년을 길러내는 새로운 기구의 탄생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대륜’이란 이름에는 이 교육칙어를 받든다는 뜻이 담겼다. 이렇게 해서 민족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교남학교는 대륜학교란 이름아래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할 황국신민 육성기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서병조는 당대 최고의 친일파들과 함께 각종 전쟁 지원과 독려 활동에 참여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보호관찰심사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유도연합회 등 갖가지 단체에 몸담았으며 거기다 중추원 참의 직함은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 서병조가 참여한 단체와 공직을 합하면 60여 개나 될 정도였다. 그만큼 정력적으로 일본의 승리를 원했고,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다.

중추원 참의 서병조의 발언에서도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1938년 중추원 회의에서 ‘내선일체 정신을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 실천 구현하기 위한 방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각 가정마다 모두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받드는 가미다나(神棚)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참배하게 하여 일본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황도정신을 이해하게 하자.
‘국민정신 진작에 관한 조서’와 ‘황국신민의 서사’를 액자로 만들어 국기와 함께 배치하고 아침저녁으로 봉독 제창하게 하자.
농촌 각 마을마다 신사를 건립 참배하여 경신숭조(敬神崇祖) 사상을 함양하게 하자.

해방 후 천수 누렸으나 2009년 친일파로 지목되고 재산도 환수당해

서병조가 바라던 일본의 승리는 오지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서병조에게 다가온 운명은 어떠했을까. 해방 공간에서도 서병조의 위세는 여전했다. 1945년 10월 대구에서는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역 유지들은 설립준비위원회를 꾸리기도 하고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9월에는 종합대학재단 조성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서병조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학 설립에 서병조의 재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구문리과대학이 세워졌다. 물론 대륜학교 이사장 직책도 계속 수행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였다. 그해 3월 서병조는 대구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서병조에게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이 기회를 부끄러운 역사, 두고두고 후회할 역사로 기록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의 갖은 방해로 반민특위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서병조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2월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서병조의 인생은 그렇게 아무런 티끌도 없이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이 남았다. 비록 오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2009년 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서병조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 이름이 올랐다. 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서병조가 남긴 재산(1필지, 1억 3천만원 상당)을 친일반민족행위의 결과를 얻은 것으로 판단하고 국고 귀속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서병조의 화려한 봄날은 갔다.

 ※ 김일수, <근대 한국의 자본가>(계명대학교 출판부, 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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