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식민지 관료의 민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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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군수 이원국의 고등관 5등 승서장. 이원국은 1912년 5월 군수로 임명되어 충청남도 비인군수로 부임했다가 1914년 2월 28일 군 통폐합 조치에 따라 비인군이 서천군에 흡수되면서 퇴직하였는데 이때 승서하였다. 이원국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30cm X 2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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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호의 조선총독부 판임관견습 임명장. 월봉 15원을 지급했다. 6급 주사 이하의 관리를 판임관이라고 한다. 30cm X 21cm.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총독부 관리임용에 관한 문서이다.

먼저 이원국의 승서장은 191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 군수 정7위 이원국을 고등관 5등으로 승서陞敍(벼슬을 올려줌)한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의 직인이 찍혀 있다. 반면에 1917년 12월 15일자 박준호의 판임관견습 임명장으로 보이는 문서에는 월봉 15원을 지급한다는 내용과 함께 직인 없이 ‘조선총독부’ 기관명만 명시되어 있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임명기관이 다르다. 이는 주임문관奏任文官 이상의 진퇴는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이를 일왕에 상주上奏하고, 판임문관判任文官 이하는 조선총독이 전행專行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관제 칙령 제354호)

조선총독부 관리는 크게 고등관과 판임관(1~4등)으로 구분된다. 고등관은 임명의 형식에 따라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1·2등), 주임관奏任官(3~9등)으로 구분된다. 주임관 아래에는 하급관료인 판임관이 있다. 판임관 이상을 관리라 통칭했다. 정규직제 외의 보조인력으로 고원雇員, 용인庸人, 촉탁囑託 등을 두었다. 고원은 공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관리의 신분을 얻지 못한 준공무원이고, 용인은 국가에 고용되어 있는 하급종사자거나 일용노동자다. 촉탁은 임시직으로 보수는 관리의 대우를 받는 자부터 고원의 대우를 받는 자까지 다양하다.

총독부의 관리임용정책은 기본적으로 민족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식민통치기구의 조선인 임용은 소수에 그쳤으며 말단 직위에 임용된 경우라도 신분·보수·진급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전체 고등관 관료 중 조선인의 비율은 20% 내외이고 그 중 절반은 군수를 비롯한 지방직이었다. 고등관 중에서도 핵심인 총독부 본부 관료의 4%정도만 조선인이었으며 식민지 기간 동안 단 2명의 조선인이 학무국장(차관급)에 기용됐다. 중앙정책의 대민집행관으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관철시키고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책임졌던 군수는 대부분 조선인으로 충원되었다.

식민지 관료제도에서 민족차별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임금賃金이다. 식민지 조선의 봉급체계는 일본의 봉급체계를 그대로 들여왔으나 조선인 관리는 이 봉급령의 적용을 받지 않고 조선인만을 위한 봉급령이 적용되었다. 조선인 관리에 대해서는 고등관의 경우 일본에 비해 1등급 정도 낮은 연봉이 책정되었고, 조선인이 30~40%를 차지했던 하급관료(판임관)는 본봉의 차이가 더욱 커 거의 2배 차이가 났다. 특히 조선의 일본인 관리에게 실시한 가봉제도加俸制度는 조선인 관리와의 임금격차를 더욱 벌여놓았다. 식민지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료는 평균 본봉의 60%를 가봉으로 받았고, 이와 함께 함경도·평안도와 같은 국경지대나 울릉도·제주도 등 벽지 근무자는 본봉의 5~10%를 추가로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관리의 총임금 격차는 3배 가까이 벌어졌다. 한편 일제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독립열망을 잠재우고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봉급규정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인 봉급체계로 흡수했지만 ‘조선어 장려수당’ 등을 신설해 일본인 관리 우대는 지속되었다.

이렇듯 민족 차별은 있었지만 조선인이 고등관에 등용되는 것 자체가 특권을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이들은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중추기능을 맡아 일제에 충성을 다하면서 식민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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