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탁통치 반대는 애국이고 찬성은 매국이라는 주장이 합당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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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신탁통치 반대는 애국이고 찬성은 매국이라는 주장이 합당한가요?

답 :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겨 져 있습니다.

1946년 초 우리 사회는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찬·반탁’ 갈등의 격랑에 휘말렸다. 이 갈등은 당대의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석한 카이로회담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적당한 절차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 결정되었다. 이어 열린 테헤란회담에 참석한 소련의 스탈린은 처음에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나중에는 신탁통치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까지도 미․영․중․소 4개국은 신탁통치안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국내진공 등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시점에 우리의 국제적 지위는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임시정부의 수립이야말로 시급한 문제였다.

해방된 지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려 조선독립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에는 우리 민족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조선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합국 사이의 유일한 국제적 협약이기도 했다.

원래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되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결정은 미국이 애초에 의도한 신탁통치안과 달랐다. 원래 미국이 구상한 안은 미․영․중․소 4개의 탁치국이 집행위원회를 구성해 통치권을 행사하고 조선인은 행정관·상담역 등의 역할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모스크바 결정에 따르면 조선인이 장차 구성될 조선임시정부를 통해 통치권을 행사할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신탁통치는 조선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4개국 협정에 의해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선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사실 관계를 정반대로 보도하면서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인 조선 임시정부 구성은 언급하지 않은 채 신탁통치 문제만 부각시켰다. 동아일보의 의도적인(?) 오보 이후 국내 정국의 주요 의제는 ‘찬·반탁’ 문제로 뒤덮였다.

해방 당시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는 새로운 국가를 누가 어떻게 건설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식민지배에 앞장서거나 협력했던 세력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따라서 해방 당시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 우파세력보다는 민족해방운동의 맥을 이어온 좌파세력이 해방정국을 주도하게 됐다.

하지만 ‘찬·반탁’ 갈등이 격화하면서 친일세력은 반탁투쟁에 적극 가담하여 국면을 전환시키려고 했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찬탁’은 즉시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니 매국이고 신탁통치를 기획한 소련에 동조하여 ‘찬탁’을 주장하는 좌익은 매국노인 반면에, ‘반탁’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니 애국이고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미국을 지지하며 ‘반탁’투쟁에 나선 우익은 애국자라는 기상천외한 등식을 만들어냈다. 동아일보의 오보로 촉발된 ‘찬·반탁’ 갈등은 민족해방운동의 맥을 이어온 좌파세력을 매국노로,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반탁세력 중에는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세력과 이승만세력도 있었다. 이승만의 반탁은 분단을 지향한 반탁인 반면에 김구의 반탁은 통일국가 수립을 지향한 반탁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반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을 핵심으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했다. 따라서 ‘찬탁’세력이 아니라 모스크바 결정 지지세력이라고 불러야 객관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혼미를 거듭하면서, ‘모스크바 결정에 의해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노선은 좌파 뿐 아니라 중도우파의 지지까지 얻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신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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